EU와 러시아 사이에서 관망중인 시민혁명

벨라루스 사태의 내부적 실체

2020-10-30     엘렌 리샤르 | 국제전문가

“이것은 지정학적 혁명이 아닌, 민주적 혁명이다.” 지난 8월 9일 벨라루스 대선에서 공식적으로는 80%에 달하는 득표율을 기록하며 연임에 성공한 알렉산드로 루카셴코 대통령에 맞서 승리를 주장했던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가, 8월 25일 유럽의회 화상회의에서 남긴 말이다. 벨라루스의 상황이 우크라이나와는 다르다는 얘기다. 벨라루스의 이웃 국가이기도 한 우크라이나는 2014년 당시 반정부 시위, 폭력 진압, 러시아 및 서방 국가들의 개입 등이 뒤섞이면서 이후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과 내전으로 이어진 바 있다.

구소련 지역에는 또 하나의 기억이 남아 있다. 2018년 아르메니아의 대통령이 국민의 평화시위 끝에 마침내 축출된 것이다. 아르메니아 혁명은 러시아 정부에 또 다른 길을 제시했다. 당시 전체 인구의 1/5이 거리에 운집했으며 그동안 아르메니아의 경제는 거의 총체적인 마비 상태를 겪었다. 러시아 정부는 우선 세르즈 사르키샨 전 아르메니아 대통령을 쫓아낸 민중의 물결에 대해 신중한 관찰자의 태도를 보였다. 이후 자국의원 대표단을 아르메니아로 급파해 야권의 대표 인사가 총리로 취임되기 전에 미리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했다.(1) 

신임 총리로 선출된 니콜 파시니안은 과거 야권 의원으로서 유라시아경제연합(EAEU) 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이후 러시아와 아르메니아를 연결하는 주요 경제 및 군사 협정들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표명하며 러시아를 안심시키는 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루카셴코는 진퇴양난, 독일·프랑스는 야당 후보 지지 

오늘날 벨라루스의 시위는 여러 측면에서 2년 전 아르메니아의 혁명을 떠오르게 한다. 우선 아르메니아와 마찬가지로 벨라루스의 시위대 역시 지정학적 관계의 재구성이 아닌 국가원수의 축출에 주된 목표를 두고 있다. 물론 인구수 대비 시위 참여 비율이 아르메니아에 견줄 정도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역사상 유례없는 규모를 기록한 벨라루스의 시위대는 국가의 무자비한 진압에도 평화시위를 유지해왔다. 또한 유럽 국가들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요소들에 대해서도 경계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티하놉스카야의 주도로 구성된 ‘조정위원회’는 지난 8월 19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재정 지원안을 거절하기도 했다. 유럽연합은 벨라루스 측에 “억압의 피해자들”과 “독립 언론 및 시민사회”를 돕기 위한 지원금을 지급하겠다고 제안한 상태였다.

그런데 벨라루스 사태에 대한 유럽의 두 강대국 프랑스와 독일의 반응은 이전의 경우와 달리 비교적 조심스러운 모습이다. 2019년 여름, 러시아와의 “건설적 대화”를 약속한 바 있는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티하놉스카야를 합법적인 망명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2) 과거 베네수엘라의 야권 지도자인 후안 과이도를 임시 대통령으로 인정했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가 중재자 역할을 할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유럽의 외교장관들 역시 강경 진압의 책임자들에 대해 최소한의 제재를 하기로 합의하는 데 그쳤는데, 이는 2010년의 부정선거 논란 당시 강력한 제재를 가했던 것과는 차이가 크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의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가 독극물에 중독돼 독일로 이송되고 이후 해당 독극물이 군용 신경작용제였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독일과 프랑스 정부의 입장도 폴란드와 발트 국가들의 입장에 가까워졌다. 특히 이 국가들은 루카셴코 대통령을 포함한 30여 명의 입국을 금지하고 티하놉스카야의 당선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등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 정부도 현재 루카셴코 대통령에 대해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지는 않다. 러시아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의 참관 하에 재투표를 실시하자는 제안(프랑스의 제안)은 반대한 채 개헌이 추진되도록 루카셴코 대통령을 압박하고 있다. 새로이 투표를 치르기 전에 러시아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새 후임자를 찾아내려는 의도다.

러시아는 루카셴코 대통령의 입지 약화로부터 단기적인 이점들을 얻는 것에 만족하는 눈치다. 실제로 러시아 총리가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를 방문한 데 이어 9월 14일에는 루카셴코 대통령이 직접 러시아 소치를 찾아 회담을 갖기도 했다. 양국의 논의는 매우 섬세하게 이뤄졌다. 벨라루스는 2014년 우크라이나 사태 이래로 자국의 군사교리를 조심스레 발전시켜왔는데, 돈바스 지역 분쟁의 경우처럼 혹시나 있을지 모를 러시아의 불안정에 대비하고자 서방을 향해 개방적인 제스처를 확대하는 식이었다. 

이에 유럽연합은 2016년 벨라루스에 대해 대부분의 제재를 취하했으며, 지원 프로그램을 재개했다.(3) 나아가 지난 2월에는 루카셴코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회담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는 루카셴코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1994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러시아, 군사적 요충지에 강온양면책

그러나 벨라루스의 이런 불충(不忠)은 러시아의 화를 돋우는 결과를 낳았다. 러시아로서는 자국 경제가 서방의 제재와 유가 폭락으로 타격을 입고 있는 만큼 ‘같은 값으로 더 많은 이득’을 보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했다. 결국 벨라루스에 대한 러시아의 경제 지원금은 2013년 당시 GDP 대비 17%에서 현재 10%까지 축소됐다.(4) 또한 러시아 정부는 2019년 처음으로 벨라루스의 부채 재융자 요청을 거절했으며, 같은 해 석유 부문의 세제 개편을 단행해 벨라루스에 제공해온 기존의 특혜마저 폐지했다. 이 과정에서 벨라루스는 연간 3~4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그럼에도 지난해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가한 러시아 재무부 장관은 “국가연합조약에 따른 양국 간 통합을 위한 대책들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손실분에 대한 보상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지금까지 지지부진하게 추진돼온 정치·세제·통화 등을 아우르는 양국 간 통합안과 관련해 러시아가 구체적인 진전을 지원의 조건으로 내건 것은 조약이 체결된 1999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에 양국 정부는 현재의 상황에 맞춰 양국 간 통합내용이나 논의결과에 대해 조금씩 의견을 조절했다. 마침내 9월 14일 정상회담 끝에 15억 달러의 차관이 약속됐다. 러시아는 차관에 대해 그 어떤 정치적 보상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믿기 어려운 말이다.

그럼에도 여러 변수가 존재하기에 루카셴코 대통령이 큰 소란 없이 물러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우선 러시아로서는 벨라루스가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의 최전선에 위치한 벨라루스는 러시아의 방위 전략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로 손꼽힌다. 1992년 집단안보조약기구(CSTO)를 창설한 러시아는 폴란드 및 발트 국가들이 나토에 가입하고, 미국이 폴란드와 루마니아에 미사일 방어기지를 구축하자 벨라루스와 다수의 추가적인 군사협정을 맺었다. 이에 보다 강력한 군사협력 관계를 이룬 러시아와 벨라루스는 2017년 자파트(‘서부’) 훈련을 비롯한 대규모 합동훈련을 실시해왔다. 또한 벨라루스 내에는 러시아 군사기지 두 곳이 건설됐으며, 그 중 한차비치(벨라루스 공화국의 브레스트주에 있는 도시)에 위치한 기지에는 러시아의 미사일 탐지 시스템도 설치됐다.(5)

한편 미국이 현재 4,500명을 순환배치 중인 폴란드 내 미군 병력을 증원(독일 주둔 미군 중 1,000명을 폴란드로 이동 배치할 예정)하기로 결정하면서 벨라루스의 완충지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특히 벨라루스와의 국경 지대에서부터 모스크바까지의 거리가 약 500km에 불과한 만큼 벨라루스의 중요성은 크다. 결국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8월 27일 러시아의 국영방송 <로시야24>를 통해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벨라루스의 상황이 통제를 벗어나거나 (…) 일정한 선을 넘어서는 극단적 부분들, 예를 들어 차량·주택·은행 등에 대한 방화 및 관공서 탈취 등이 나타난다면 집단안보조약을 비롯한 관련 협정들에 따라 러시아 병력을 개입시킬 수 있다.”

국가의 ‘안정’이 위협받는 경우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내용은 2010년 추가된 것으로, 다소 모호한 용어들을 사용한 덕분에 러시아에 상당한 재량의 여지를 안겨주기도 했다. 물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 당시에도 다른 강대국들과 마찬가지로 자국의 근본적인 이해관계에 위협이 가해진다고 여겨질 때 망설임 없이 국제법을 위반할 것임을 보여준 바 있다.

 

친러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는 EU   

또 하나의 불안 요소는 벨라루스 야권이 난관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아르메니아의 경우 파시니안 총리가 혁명대의 얼굴(동시에 러시아와의 대화 상대)역할을 했던 반면, 벨라루스의 야권은 이렇다 할 지도자를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또한 러시아는 벨라루스의 야권이 현 정권에 맞서 승리할 것인지 확신할 수 없기에 조정위원회도 신뢰하지 않는다. 게다가 현재 조정위원회의 임원 7명 중 6명은 수감 중이거나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 반러 성향 국가들에 망명해 있다. 또한 대선 기간 동안 야권 내에서도 안보문제에 대한 여러 입장이 상충했다. 

일례로 러시아의 대형 금융사 가스프롬뱅크가 지분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벨라루스 내 은행의 은행장 출신으로 러시아 정부와 가장 가까울 것으로 여겨졌던 대선 후보 빅토르 바바리코가 “언젠가는 벨라루스가 중립국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러시아로서는 매우 언짢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벨라루스가 러시아와 나토 사이의 장벽 역할을 해주기를 원하는 것이지,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이 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이런 전략적 선택에 대해 티하놉스카야를 비롯한 다른 야권 인사들은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무엇보다 야권 세력이 더 궁지에 몰린다면 유럽연합 쪽으로 더 기울게 될 수도 있다. 실제로 러시아의 지원이 축소된 현재, 조정위원회의 지도부 소속인 파벨 라투슈코 전 장관은 유럽연합으로부터 정권 교체에 성공할 경우 “30~40억 달러(러시아의 지원금액 대비 2배 이상에 달하는 금액) 규모의 지원을 약속받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같은 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루카셴코 대통령의 당선을 불인정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결국 러시아 정부로서는 힘을 잃은 기존 정권에도, 뿔뿔이 흩어진 데다 러시아에 대한 충성 여부도 확인할 수 없는 야권에도 쉽게 손을 들어줄 수 없는 상황이다. 일반적인 추측과는 달리 러시아의 입장도 그다지 편안하다고 볼 수는 없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나 아르메니아의 선례와는 달리 양쪽 시나리오를 모두 검토하고 있는 듯하다. 러시아 정부가 벨라루스와의 통합에 장기적인 목표를 두고 있는 한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벨라루스 국민의 민심을 잃을 위험이 있다. 아직까지는 러시아에 대한 적대적 성격은 없는 시위 물결에 괜한 반러시아 감정을 부추기는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 ‘혁명’은 그저 민주적이지 않은, 지정학적 혁명이 되고 말 것이다. 

 

 

글·엘렌 리샤르 Hélène Richard
국제전문가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번역위원


(1) <르몽드>, 2018년 5월 7일.
(2) Jean de Gliniasty, ‘Un tournant dans la diplomatie française? 프랑스 외교의 전환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12월호.
(3) Loulia Shukan, ‘Minsk se rebiffe contre le grand frère russe et EU, EU와 러시아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벨라루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7년 6월호.
(4) ‘Using Good Times to Build Resilience’, Presentation by Jacques Miniqne, IMF Mission Chief for Belarus, 2018년 11월 6일. www.imf.org
(5) Loulia Shukan, ‘La Biélorussie après la crise ukrainienne : une prudente neutralité entre la Russie et l'Union européenne?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의 벨라루스 : 러시아와 유럽연합 사이의 신중한 중립?’, <Etudes de l'Institut de recherche stratégique de l'école militaire (INSERM)>, 50호,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