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라루스 청년들이 시위 최전선에 뛰어든 이유

루카셴코 대통령 재선 논란

2020-10-30     로익 라미레즈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대통령직을 사퇴하라”는 거리 시위대의 압박을 받는 벨라루스 대통령이 러시아의 개헌 요구를 받아들였다. 몇 주 전 시위대는 머릿수만으로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우크라이나의 전례를 따라 모든 개입을 거부했었다.

 

2020년 8월 중순. TV에서는 시위 장면이 끊임없이 나왔다. “시위는 곧 끝날 것이다.” 벨라루스 남부 브라힌의 한 술집에서 스타스(1)는 TV 화면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30대의 그는 TV 뉴스에 등을 돌리고 앉은 친구들과 보드카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유례없는 규모의 항의시위 물결이 온 나라를 휩쓴 지 5일째다. 스타스의 예상과는 달리, 수도 민스크의 대학교들을 중심으로 한 항의시위가 9월 중순까지 계속됐다. 수도와 다른 대도시에서도 수십만 명이 행진에 참여했다.

지난 8월 9일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재선과 뒤이은 항의 시위들에 국제언론들의 이목도 집중됐다. 1994년부터 벨라루스를 집권해온 루카셴코 대통령은 부정으로 얼룩진 이번 선거에서 80.23%를 득표하며 여섯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이로써 그는 주요 경쟁자였던 후보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도 제쳤다. 티하놉스카야는 지난 5월 ‘사회질서 교란’ 혐의로 체포된 남편을 대신해 예고 없이 대선후보로 나선 인물이다. 다른 두 명의 야권후보 발레리 체프칼로와 빅토르 바바리코 진영에서도 부인인 베로니카 체프칼로와 선거운동 책임자 마리아 콜레스니코바가 티하놉스카야 후보를 지지했다. 발레리 체프칼로는 러시아로 도피했고 빅토르 바바리코는 체포된 상태였다.

선거 이후 수도에서는 밤마다 항의하는 청년들과 경찰들의 충돌이 벌어졌다. 3일 동안 인터넷 연결이 차단되기도 했다. 수천 명이 체포되고 경찰서에서 폭행을 당했다는 증언이 수없이 나오면서 대통령에 대한 거부감도 커졌다. 2010년 대선 이후 체포 건수가 수백 건으로 줄었고, 반대파는 선거 몇 달 후 법정에서 은밀히 처리됐다. 이곳 작은 마을에서도 당국의 긴장 상태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어둠이 내리면 경찰 몇 명이 마을광장에서 순찰을 시작하고, 경찰차는 대로변에 세운 채 마을을 주시한다. 인구 3,000명의 작은 촌락에는 과한 조치다. 이곳이 우크라이나 국경 근처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약 100km 떨어진 고멜에서 벌어진 시위가 이곳까지 퍼질 게 두려운 걸까?

건설 노동자로 일하는 스타스는 루카셴코를 대통령으로만 알고 있다. “티하놉스카야를 찍긴 했지만 시위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벨라루스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다. ‘마이단’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스타스는 말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2013~2014년 겨울 혁명을 예로 들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마이단’ 혁명으로 인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정권에서 물러났고, 내전이 발발했다.(2) 정부가 조장하는 공포는 국민이 실제로 지닌 두려움과 함께 커지는 법이다. 스타스의 친구들이 차례로 대선 투표 당시 자신의 선택에 대해 말했다. 티하놉스카야를 선택한 이들이 여럿이었고, 기권했다는 친구들도 있었다. 한 친구가 “난 루카셴코를 찍었다”라고 고백하자 다른 친구들이 놀랐다. “아 그래? 그 사람을 찍었다고?”, “어, 당연하지.” 다른 설명이나 논쟁 없이 술잔은 비었고, 다시 별 볼일 없는 대화가 시작됐다.

 

“나라는 바뀌었는데, 대통령은 그대로”

대통령에 대한 투표 데이터는 분석이 복잡하다. 부정선거로 부풀려지기도 했고, 몇몇 야당 인사들은 과장되게 낮은 수치를 주장했기 때문이다(이들은 선거운동 동안, 루카셴코가 3% 득표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학자이자 국립 동양 언어문화연구소(INALCO) 조교수인 브뤼노 드브레스키는 이렇게 설명했다. “사회학자들은 대통령의 득표율을 60% 정도로 추정했었다. 물론, 야당의 지지 기반이 탄탄한 수도에서는 훨씬 낮은 수치가 나왔다.” 연구자인 스티븐 화이트와 옐레나 코로스텔레바에 따르면 루카셴코를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대부분 60세 이상이고, 평균 학력이 상당히 낮으며 농촌에 산다.”(3) 

반대로 야당 유권자들은 상대적으로 “젊고, 민간 부문의 노동자이며, 교육수준이 높고, 대도시 거주자들이다.” 지리적으로도 단절된 세대 간의 대립인 셈이다. 친정부 성향의 정치학자 알렉세이 제르만트는 “대통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공무원, 정부를 위해 일했던 사람들과 노동자 계급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루카셴코에게 우호적이었던 계층들의 지지가 약해지고 있다. 900개 투표소(투표자의 1/4에 해당) 벽에 게시된 결과를 바탕으로 한 수기개표,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투표율과 부재자 투표율을 수정한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티하놉스카야는 45%, 루카셴코는 43%를 득표했다.(4) 다른 예측들도 이보다 더 앞선 수치를 내보였는데, 모든 예측에서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발표한 결과보다 두 후보 간 투표결과가 훨씬 아슬아슬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고멜의 한 학교에서 프랑스어 교사로 일하는 50대의 빅토르는 “맞다. 난 과거에 루카센코에게 투표했지만 이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부에 대한 나쁜 이야기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직장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숨이 막힌다. 루카셴코가 해온 것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라가 바뀌었는데 대통령은 그대로다.” 

공장이나 농장에 깜짝 방문했을 때, 무능력한 간부나 방임적이라고 평가받는 장관을 손짓 한 번으로 해고하고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던 루카셴코 대통령은 보호를 위해 가족을 통제하는 엄격한 아버지의 이미지를 키워왔다. 이 이미지는 오랫동안 벨라루스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결국 국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선거운동 기간 동안 여성은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다고 한 말이나, 경쟁자들에 대한 모욕과 위협들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되돌아왔고, 시위에서는 조롱거리가 됐다. 

최근 몇 년 동안의 경제침체도 대통령에 대한 이런 불만의 증가와 무관하지 않다. 1994년 80%라는 엄청난 득표율로 당선된 루카셴코는 당시 비판을 받던 대규모 민영화를 중단했다. 그가 추진한 국가주도의 경제발전은 일부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다른 구소비에트 연방 국가들에서는 기업들이 문을 닫고, 불균형이 심화되는 동안 벨라루스의 경제는 1996년부터 성장하며 회복했고, 트랙터나 공작기계 생산 같은 첨단분야 산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벨라루스의 농업 분야 또한 집단농장에 대한 대규모 공공 투자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 벨라루스 전체 수출 농산품의 90%가 러시아로 향하는데 이 중 집단농장에서 생산한 농산품이 80%를 차지했다.(5) 2000년대, 러시아는 벨라루스에 특가로 가스와 원유를 공급하고, 벨라루스는 특가로 수입한 원유를 가공해 러시아에 재수출 할 수 있었다. 그 덕택에 벨라루스는 원유가격 상승으로 인한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원유시세 하락으로 지원금도 자연스레 줄었고, 벨라루스의 행운도 줄었다. 2000년대 초반 벨라루스의 연간 성장률은 평균 7.2%였으나, 금융위기 이후 국내 총생산은 1.6%밖에 증가하지 못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6개월 이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부과하는 약 460루블(225유로)의 ‘실업자 벌금’에 저항하던 2017년 시위들은 현재 위기의 전조증상으로 보인다. 선거운동 기간 체포된 후보들, 부정선거의 규모, 인터넷 연결 재개 뒤 SNS에서 확산한 부상자들의 이미지들까지, 국민이 분노할 이유는 더욱 많아졌다.

 

지도자를 거부하는 붉은색과 흰색 깃발

그러나 일단 지금의 항의시위는 구체적인 정치·경제 계획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전체적으로 시위대는 정치사범 석방, 새로운 선거 시행 같은 단순한 요구들과 루카셴코 대통령 퇴진이라는 주된 요구를 위해 모인다. 플래카드에서 해외로 망명한 야당 후보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의 모습은 찾기 어렵다. 티하놉스카야는 8월 중순 리투아니아에서 조정위원회를 조직하고, 새로운 선거 시행을 위한 권력이양을 목표로 벨라루스와 대화하려 노력하지만 벨라루스 현지 시위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파업노동자 대표, 러시아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는 것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통 기독교 정당의 공동 대표 등 7명의 조정위원회 간부 임원 중 9월 중순 현재,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만이 당국의 조치를 면해 국내에서 활동 중이다. 다른 이들은 해외로 도피했거나 수감자 신세가 됐다.

시위대의 행렬에는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첫 번째 국기인 흰색과 빨간색이 섞인 깃발만이 지도자 거부에 대한 만장일치의 상징처럼 흔들린다. 1918년 주권을 회복했다가 1991년에 독립을 되찾았던 공화국의 깃발이다. 다른 모든 깃발이나 메시지는 분열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다. 몇 안 되던 유럽연합 깃발도 빠르게 거둬 들여졌고, 러시아에 적대적인 슬로건 또한 시위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이 붉은색과 흰색 국기가 1941년부터 나치와 협력했던 벨라루스 민족주의자들의 깃발로 사용됐다고 주장한다. 시위를 폄하하고,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려는 목적이다. 

하지만 벨라루스에서 루카셴코가 언급했던 민족주의자들의 수는 아주 적었고, 그 어떤 정치적 전통도 남기지 않았다. 발트 3국,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의 다른 옛 제정 러시아 국가들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이들 국가에서는 19세기 초부터 정당, 학교, 대학교, 문화센터를 기반으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반러시아, 반소비에트 연합 무력투쟁을 키웠으며 간혹 나치와 협력하기도 했다.(6) 동독 전선 뒤에서 소비에트 연방을 지지하던 것으로 더 잘 알려진 벨라루스에서는 전혀 발생하지 않았던 일이다.(7) 이런 맥락에서 깃발의 붉은색과 흰색은 민족주의의 부활이라기보다는 1996년 국민투표를 통해 소비에트 공화국 시절의 붉은색과 초록색 국기를 제정한 대통령을 거부하는 의미가 더 크다.

8월 11일 무렵, 자동차 공장 마즈, 중장비 제조업체 벨라즈, 대형트럭 제조업체 MZKT 등 벨라루스 주요 국영 기업에서 파업이 벌어지자 루카셴코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일터에서는 시위 의지가 꺾이고 있었고, 8월 17일 민스크에 위치한 아틀란트 공장에서 벌어진 파업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파업을 지지하려고 온 한 여성이 공장 앞에 모인 약 30명에게 물었다. “여기서 직업을 가진 사람이 있나요?” 단 한 사람만이 손을 들었다. 나머지는 연대하러 온 대학생들과 퇴직자, 불특정 시민들이었다. 손을 든 노동자가 답했다. “노동자는 나 혼자일 겁니다. 동료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헌법 개정 꼼수를 노리는 루카셴코   

1999년 대통령령 29호가 비준된 이후 고용계약은 대부분 1~5년 기간제 계약으로 바뀌었다. 벨라루스에 얼마 없던 호전적 노조들을 약화시킨 자유주의 개혁이었다. 2018년 벨라루스 노조 연맹에서 160만 건의 노동계약서를 조사한 결과 벨라루스 노동자 가운데 30%가 1년짜리 기간제 계약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8) 국영기업 노동자들은 해고를 겁내고, 일부 파업 주도자들의 체포로 부담을 느끼며, 대규모 민영화에 두려움을 느낀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대규모 민영화 때문에 일자리와 공장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겁을 줬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거운동 기간 대통령의 경쟁 후보였던 전 은행가 빅토르 바바리코와, 첨단 기술파크 창립자 발레리 체프칼로는 벨라루스를 ‘현대화’하겠다는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9) 벨라루스에서는 임금노동자의 40%가 공직과 국영기업 등 공공부문에서 일하고 있고, 국가 지분이 50% 이상인 기업들이 벨라루스 연간 생산량과 전체 고용의 30%를 책임지고 있다.(10) 

그럼에도 2000년대부터 급부상한 최첨단 IT 산업 분야가 논쟁의 최전선에 있다. 연구자 이울리아 슈캉은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언급했듯이 “최첨단 분야가 ‘시장 사회주의’의 지배적 모델과는 약간 모순되게, 상당한 세제 혜택을 받았다”라면서 “지배적 모델과의 이런 차이는 정부로 하여금 오랜 시간 동안,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민간 기업들에 대비할 수 있게 해줬지만, 결국 정부에 불리한 상황으로 돌아왔다”라고 강조했다. 민스크의 애플리케이션 개발 기업에서 일하는 류드밀라는 항의시위 초창기부터 경영진을 포함한 직원들이 기울인 노력에 대해 이야기 했다. “시위가 시작된 후 직원들은 집회 참가 다음날 결근이나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직원들이 신고되지 않은 시위에 참가했다가 붙잡힐 경우 부과되는 벌금을 비공식적으로 내주기로 약속했었다.”

반대로 정부 지지자들이 벌이는 지루한 집회는 대부분 국가 자원(버스들, 헬리콥터들)의 투입으로 이뤄진다. 명확한 이념을 내세우지 않은 채, 과도하게 대통령 중심적인 정권에는 기댈 만한 지지 활동의 기반이 없다. 여전히 군대와 경찰의 충성심을 토대로 권력의 고삐를 쥐고있는 것이다. 하지만 루카셴코 대통령은 ‘정당성 문제’라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그는 새로운 선거 시행의 선행조건이라며, 대통령의 특권을 줄이고 정부와 국회의 특권을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헌법개혁을 제안했다. 이 제안에 야권은 분열된 입장을 보였고, 루카셴코는 시간을 벌 수 있게 됐다. 

이것은 권력 유지를 위한 속임수일까, 근본적인 정치쇄신을 알리는 해결책일까? 위기의 해결방법은 대부분 러시아가 쥐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억압과 세력 약화, 또는 분열을 극복하는 시위대의 능력에 달렸다. 

 

 

글·로익 라미레즈 Loïc Ramirez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번역위원


(1) 가명을 사용했음.
(2) 다음 기사 참조. Laurent Geslin & Sébastien Gobert, ‘Veillée d’armes au Donbass 돈바스, 폭풍 전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12월호.
(3) Cf. Stephen White, Elena Korosteleva, 『Postcommunist Belarus』, Lanham, Rowman and Littlefield publishers, 2005.
(4) ‘Un président en papier 종이 대통령’, Novaïa Gazeta, 모스크바, 2020년 8월 13일, 온라인 플랫폼 Zubr(러시아)가 제공한 결과 데이터에 기반 함. 
(5) Ronan Hervouet, 『Le goût des tyrans. Une ethnographie politique du quotidien en Biélorussie 폭군의 맛. 벨라루스의 일상적 정치 민족지학』, Le Bord de l’eau, Lormont, 2020.
(6) Cf. Martin Dean, Collaboration in the Holocaust : Crimes of the Local Police in Bielorussia and Ukraine, New York : St Martin’s Press, 2000.
(7) Cf. Masha Cerovic, 『Les enfants de Staline 스탈린의 아이들』, Seuil, Paris, 2018. 
(8) Tyt.by (뉴스 사이트), 민스크, 2018년 7월 6일.
(9) Belrynok.by, (경제 뉴스 사이트), 민스크, 2020년 5월 21일. 
(10) 출처 Belstat,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