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 파워가 사라진 프랑스 문화원

2020-10-30     파스칼 코라자 | 기자

문화외교란 무엇인가? 프랑스는 1870년 프로이센과 벌인 보불전쟁에서 패배해 국제무대에서 고립되자, 잃어버린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당시 ‘문화적 위광’이라 불리던 ‘문화외교’를 도입했다. 같은 맥락에서 프랑스는 식민국이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프랑스 문화에 동조하기를 바랐다. 그에 따라 1883년 알리앙스 프랑세즈가 창설됐다. 비영리 협회 알리앙스 프랑세즈의 특징은 대표위원회 위원의 절반을 현지인으로 선출한다는 점이다. 현재 40여 개 국가에 112개 프랑스어 교육기관 네트워크를 구축한 ‘라 미시옹 라이크(La Mission laïque)’는 1902년 설립됐다. 

5년 후 그르노블 대학의 이탈리아 문학 교수 쥘리앵 뤼쉐르는 이탈리아 피렌체에 앵스티튀 프랑세 드 플로랑스(Institut français de Florence)를 설립했다. 모두 민간 주도로 프랑스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시작됐고, 실행 주체는 국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영국이 1934년 영국문화원(British Council)을, 독일이 1951년 독일문화원(Goethe Institut)을, 스페인이 1991년 세르반테스 문화원(Instituto Cervantes)을 발족한 것에 비해 프랑스는 선구적으로 문화외교를 추진한 셈이다.

프랑스의 세계화 정책은 외무부의 선견지명이 있는 참여와 함께 여러 협회를 바탕으로 유지됐고, 1945년 문화관계국이 들어서면서 공식화됐다. 이 정책은 시작부터 지정학적 이해와 국가문화에 기반한 가치에 집중했고, 굴곡진 역사를 거쳤다. 최근의 변화는 2010년 여러 관련 기구를 통합해 앵스티튀 프랑세(Institut français)를 만든 것이다. 독일 주재 프랑스 대사관 전 사무국장은 “이웃 나라들처럼 창구를 단일화한 것은 좋은 발상”이라고 전했다. 앵스티튀 프랑세 발족 전에는 정부 부처 간 소통을 가로막던 장벽 때문에 여러 부처가 한 건의 행사를 중복 지원하는 일이 흔했다.(1) 일례로 행사를 주최하는 단체가 대사관의 문화국, 문화원, 음악 전담 사무국에 각각 보조금을 신청해 3개 부처의 지원을 받기도 했다. 행정의 합리화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2000년대에는 ‘재정 운용과 공공정책 총괄개혁 정책에 관한 법률(RGPP)’이 도입돼 해외 외교망, 특히 문화 부문이 축소됐다. 공공예산과 민간자본이 공존하는 이 특수한 경제구조에서 정부 지출이 줄면 모든 기관의 재정이 줄줄이 타격을 받는다. 후원 기관은 투자가치가 낮으면 등을 돌린다. 원어민 교사 수가 감소하면 어학 수업을 듣는 학생 수도 줄어든다. 주된 수입원이 어학 수업료인 문화원에는 민감한 사안이다.

 

‘쓸데없고 무의미한’ 행정

방송인 베르나르 피보는 2001년 <프랑스2>에서 방영한 토크 쇼 <Bouillon de culture 문화 격동>의 종방을 2회 앞두고 ‘프랑스는 여전히 자국 언어와 문화를 전파할 저력이 있나’라는 민감한 주제를 끄집어냈다. 바르셀로나에 있는 프랑스 문화원의 필리프 를리케 원장은 방송 준비차 스페인에 도착한 피보를 처음 만났을 때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방송에서는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또 다른 방송 출연자인 외무부 해외 문화원 인사 총괄 부서장 브뤼노 들레는 “방송에서 공개적인 비난을 한다면 파면 조치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방송인 베르나르 피보는 당시 앵스티튀 프랑세 베를린 지부 원장으로 있던 베르나르 장통의 증언을 확보했다. 장통 전 원장은 “외무부 고위 관리들로부터 받은 굴욕을 생각하면 지긋지긋하다”라면서 “대다수 동료와 달리 나는 교직으로 복귀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리낄 것이 없다”라고 강조했다. 해외 문화원에 파견된 교육 공무원들은 두 번의 임기가 끝나면 본직으로 복귀했다. 고전문학 교수자격을 소유한 파트리스 마르탱은 앵스티튀 프랑세 크라쿠프 지부 원장 임기가 끝난 후 사르셀(일드프랑스 발두아즈 주에 있는 도시) 소재 대학에 임용됐다. “외무부 사람들은 제가 너무 진취적이어서 공무원에는 맞지 않는다고 했어요.”

이 방송에 출연한 사회당 의원 이브 도주는 외무위원회의 요청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2) 이 보고서는 현지에서 적용되는 직무상 제약에 관한 규정에는 때때로 침묵의 계율(부정행위 은폐 등)이 적용되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는 심각한 문제다. 별은 꺼졌고, 이 나라는 더는 ‘위풍’을 떨치지 못한다. 전문화가 필요하다. ‘무용하고 무의미한’ 지역 행정이 진취성의 숨통을 조여서는 안 된다. 이브 도주는 “문화에 획일주의나 정치적 올바름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관리·감독을 줄이고 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외교, 문화, 국가교육 부처가 함께 참여하는 논의의 장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그리고 문화원과 어학기관의 경영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사이 2000년대 전반에 걸쳐 조직축소 조치가 이어졌다. 수많은 영사관이 문을 닫았고, 갈 곳이 없어진 영사들은 낙하산을 타고 문화원장직을 차지했다. 독일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8개의 문화원이 들어섰지만, 그중 절반이 문을 닫았다. 이탈리아에서는 제노바(2005)에 이어 토리노(2009) 문화원도 운영을 중단했다. 그 뒤를 이어 세비야, 포르투, 리스본, 비엔나, 암스테르담 등지의 문화원이 문을 닫았다.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지에 문화원이 새로 개설됐으나 더 이상 구체적인 정책이 없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브 도주 의원이 주재한 의회위원회의 보고서 중 심의에서 발의로 이어진 ‘도주 보고서(2001)’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독일문화원이나 영국문화원처럼 문화 외교망이 중앙부처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외무부 장관을 역임한 베르나르 쿠슈네르는 “외무고시에 합격했거나 국립행정학교(ENA) 출신 관료라고 해서 문화전문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지역 행정관에게 일임된 ‘소프트파워’

그 결과 앵스티튀 프랑세가 생겨났다.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자비에 다르코는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고했다. “우리는 브랜드를 통일했고(알리앙스 프랑세즈처럼 앵스티튀 프랑세도 브랜드다), IF시네마(Ifcinéma), 퀼튀르테크(Culturethéque) 등의 플랫폼도 일원화했습니다. 그런데 공관원의 법적 자격을 통일해야 하는 단계에서 걸림돌을 만났습니다. 계약직 신분이던 직원들을 정규 공무원으로 임명해야 했으니까요. 로랑 파비위스는 제게 골치 아픈 일을 하게 될 거라고 했죠. 그렇게 모든 게 중단됐습니다.” 

2013년 말 로랑 파비위스 신임 외무장관이 결과는 ‘긍정적’이라고 평가했지만(3) 실험은 중도에 막을 내렸다. 베르나르 쿠슈네르는 “문제없이 잘 굴러가기 때문에 관둬야 한다”라고 한탄했다. 외무부는 ‘국가 속 국가’이며, 보수주의의 극치다. 개혁을 싫어하는 이 기술관료 집단은 관행을 고수했다. 이른바 다른 장관이 부임해 기존 정책을 폐지하기를 그저 기다리는 것이었다. 자비에 다르코는 “새로운 시도가 수고스러웠을 뿐 아니라, 수하의 직원들이 다른 행정부 소속 공무원으로 채워지는 결과(즉, 직권이 축소되는 결과)를 대사들이 원치 않았습니다”라고 설명했다.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외무부 사무처장을 역임한 피에르 셀랄은 “일원화 정책의 철회는 국제 활동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다”라고 평가했다. 국회의원들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사르코지 대통령 당시 외교 안보수석이었던 장 다비드 르비트는 이 주장을 강력히 지지했고, 사르코지 대통령에게도 이를 보고했다.

공관원의 법적 자격을 통일했다면 높은 급여를 받는 엘리트 공무원과 현지 고용 직원(대체로 최저임금 지급) 간의 임금 격차가 좁아졌을 것이다. 이브 도주 의원은 “인력착취 행위이고 수치스러운 일이다”라며 분개했다. 뱅상 들라예와 레미 페로 상원의원은 2019년 9월 18일 보고서에서 2018년 중 재외공관 ‘외교활동’으로 지급된 임금총액이 2008년 대비 20% 증가했다고 밝혔다. 같은 기간 인력은 약 10% 감소했는데, 감소한 인원은 주로 현지 채용 인력에 속했다. 공관원 수는 줄었는데 임금총액이 증가하는 역설의 원인은 해외거주 수당에 있다. 해외거주 수당은 과세대상에서 제외된다. 상원 의회 보고서는 이에 따른 세금손실액이 연간 1억5,000만 달러로 추산되는데, 공관원의 법적 자격을 통일했을 경우 발생할 비용의 3배에 달한다. 2013년 말, 로랑 파비위스는 개혁을 중단하고자 “5,000만 달러에 달하는 예산 지출은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해명한 바 있다.

요즘은 대사 휘하의 문화참사관(대다수가 ENA 출신)이 문화 관련 예산을 총괄한다. 이처럼 사업예산은 대사관 제3인자의 수중에 있고, 문화원장 손에는 일상적인 업무를 위해 불과 몇천 유로가 쥐어진다. 문화원의 자율성이 없다면 지역의 여건과 특성을 고려하는 세련된 문화정책도 있을 수 없다. 2000년대에 토리노 문화원장을 맡았던 필리프 아르디는 이렇게 회상했다. “토리노는 가톨릭 국가의 개신교 도시입니다. 나폴리와는 또 다른 문화 프로그램 기획이 필요했지요.” 문화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에는 현지 역사와 그 역사에 서려 있는 정서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

프랑스는 파비위스의 방식대로 대사의 권한을 사수하기 위해 ‘소프트 파워(Soft power, 연성 권력)’를 이른바 ‘지역 행정관’에게 일임한 것이다.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 베르트랑 바디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국제관계는 지역 행정이 아닙니다. 행여 그렇다면 참으로 심각한 문제겠지요. 그런데 모든 것이 공무원의 재량에 맡겨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상 두 가지 분파가 있습니다. 이른바 단면적 ‘중앙 집권적’ 사고에 충실한 분파와 ‘외부’ 주체를 동원하고 참여시켜 현지인들에게 프랑스라는 국가 이면에 극도로 다양한 사회가 혼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파죠.”

중앙집권주의의 결과는 무엇일까? “오늘날 권력을 지닌 동력은 경제입니다. 문화가 아니죠.” 2014~2018년까지 알리앙스 프랑세즈 재단(Alliance Française Foundation)의 회장을 역임한 제롬 클레망의 분석이다. 각국 대통령 국빈 방문에 이제는 연예인이 아닌 재계 인사가 동행한다.(4) 2008년의 금융위기는 문화의 역학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문화는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시장에 통합돼야 한다. 더구나 당초 관광과 산업교류를 담당하던 외무부의 ‘세계화, 개발, 파트너십 총국’이 2015년부터 언어와 문화 진흥까지 관장하면서 명칭을 ‘문화외교 및 문화 선도 총국’으로 바꿨다.

2009년 재외공관 활동에 배정된 예산은 5,300만 유로에 달했으나 2016년에는 3,000만 유로로 줄었다. 지난 20년에 걸쳐 총예산은 30% 감소했다. 반면 2006~2016년 사이에 중국 공자학당은 100개 처에서 510개 처로 증가했다. 또한 러시아 푸시킨 인스티튜트(Pushkin Institute)는 2017년에 온라인 강좌를 시작했으며, 2007년에 발족한 터키의 유누스 엠레 터키 문화원(Yunus Emre Enstitüsü)은 현재 45개 처로 확대됐다.

지역행정을 펼치는 프랑스 문화원, 일명 ‘벙커(해외 문화원 건물을 지칭)’는 구인여부도 도통 알기 어렵다. 첨부 파일은 이메일로만 전달할 수 있으며, 모든 문의 사항은 온라인 창구 ‘컴(com)’을 통해서만 대응한다(대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소프트 파워’를 과거지사로 치부해야 할까? 의견을 구할 곳도 없는 상황이다. 

 

 

글·파스칼 코라자 Pascal Corazza
기자, 『Voyage en italique 고대 이탈리아로의 여행』, (Transboréal, 2012년)의 저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기사에 실린 발언은 모두 문화외교에 관련 서적을 집필 중인 저자의 인터뷰 100여 건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2) ‘Rapport d’information déposé par la commission des affaires étrangères sur les centres culturels français à l’étranger, présenté par M. Yves Dauge 해외 프랑스 문화원에 관한 정보 보고서, 외무위원회 제출’, 이브 도주 발표”, 프랑스 국회, 2001년 2월 7일.
(3) ‘L’expérimentation de l’Institut français ne sera pas étendue Institut français 앵스티튀 프랑세 실험은 연장되지 않을 것’, <르몽드> 및 <AFP 통신>, 2013년 10월 23일.
(4) Jean-Michel Djian, ‘La diplomatie culturelle de la France à vau-l’eau 악화일로에 놓인 프랑스의 문화외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4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