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의 횡포

2020-11-30     에블린 피에예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보건 위기관리는 자신과 타인, 특히 ‘가장 취약한 사람’을 보호할 의무에 근거한다. 정부는 이타심을 촉구하고, 이런 의무를 무시할 경우 불이익을 주겠다고 경고한다. 이 같은 책임의 강요는 선량한 독려인가, 아니면 시민의 개념을 다시 정의하고자 하는 시도인가?

 

성경말씀과 보험회사 카피를 동시에 연상시키는 이 말은 명백한 진리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발적인 양식에 호소하는 메시지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왜?’라는 무례한 질문을 던지기 어려울 정도다. 서로를 보호하자는 말에, 누가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남은 문제는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다. 이런저런 조치에 대한 논쟁은 있을 수 있지만 기본 명제는 자명하다. 그런데 명백한 진리가 대개 그렇듯, 이런 명령은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 가치의 집합체로 구축되고 인간의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율성을 부정하는 ‘케어’ 철학

보건위기 대처 과정에서 정부가 채택한 어휘나 관행이 마르틴 오브리가 근래에 주창한 ‘케어(Care) 철학’의 전면적인 등장에 기여한 사실은 명백하다.(1) ‘케어’라는 개념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롱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은 ‘정부의 의료·사회 정책 방향 제시’를 담당하는 기관을 ‘CARE’(Comité Analyse Recherche et Expertise 분석·연구·전문가위원회)로 명명했다. 올리비에 베랑 보건부 장관은 주간지 <주르날 뒤 디망쉬(Journal du dimanche)>(2020년 5월 16일자)에서 ‘아주 현대적인 개념’이 적용된 기관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영어 단어인 ‘Care’는 프랑스어로 해석하면 ‘돌봄(Soin)’뿐만 아니라 ‘염려(Sollicitude)’를 뜻한다. 영어권 소설 애호가들이라면 등장인물들이 헤어질 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주고받는 ‘Take care(잘 가)’라는 인사말에 익숙할 것이다. ‘케어’는 미국의 두 페미니스트, 철학자 캐롤 길리건과 정치학자 조안 트론토가 최초로 정립한 개념으로, ‘돌봄’ 직종과 해당 직종 노동자들에 대한 재평가를 넘어, 훨씬 근본적으로 정치에 윤리적 화두를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자율성, 공정성, 형평성 같은 기존의 주요가치 대신 ‘취약성’을 윤리의 핵심으로 삼는 것이다.(2)

사회당 출신 전 장관과 지난 대선 때 브누아 아몽 후보 선거 캠프의 일원이었던 한 철학가가 최근 공동집필한 저서에서 명확하게 강조하듯, ‘케어’ 사상의 목표는 “우리는 계몽주의 시대 이후 근대사회의 가치로 여겨진 자율성과 독립성의 신화로 연명하고 있다”(3)라는 확신에 근거한다. 주의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는 주장이다. 윤리를 가장해 ‘케어’라는 단어를 다분히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주 교묘한 속임수다.

여기서 주장하는 ‘자율성’은 ‘이성의 자율성’과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둘은 명백히 다르다. 후자는 편견으로부터 이성을 해방시키려는 오랜 노력 끝에 구축한 가치로, 사고의 자유와 판단력의 토대를 통해 시민의 사회적 지위에 근거를 부여한다. 반면, ‘케어’ 사상에서 말하는 ‘자율성’은 ‘취약성 인류학’을 앞세워 계몽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가 일궈낸 가치, 이성의 자율성을 부정하고 있다.

‘케어’ 사상(4)의 특징을 나타내는 ‘취약한(Vulnérable)’이라는 형용사는 팬데믹 상황에서 강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덕분에 ‘노인’ 같은 직설적인 단어 사용을 피할 수는 있지만, ‘취약한’도 그리 사려 깊은 표현은 아니다. 라루스(Larousse) 프랑스어 사전을 찾아보면 ‘취약하다’의 뜻은 ‘상처나 충격을 받기 쉬운, 병에 걸리기 쉬운, 적이 공격할 때 쉬운 표적이 되는’이다. 다시 말해, ‘취약한’ 상태는 약자의 위치에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강자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필요성을 내포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을 염려해 돌보는 행위, 친절의 대상이 된다면 모를까. 

언제부터인가, ‘친절’이라는 단어가 유행한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아차렸을 것이다. 르 로베르(Le Robert) 사전은 친절을 2018년 주제어로 선정하기도 했다. 친절이 장려되지 않는 분야는 없다. 기업경영도 그중 하나다. 2011년 프랑스 텔레콤과 홍콩상하이은행(HSBC)을 포함한 228개의 프랑스 기업이 월간지 <심리학 매거진>의 주도로 ‘직장 내 친절 호소문’을 채택했다(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다).

교육학에서도,(5)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의 트위터에서도, 음악 축제(6)에서도, 정치 연설에서도 끊임없이 친절이 거론된다. 마크롱 대통령 또한 공공연하게 친절을 주창한다. “나에겐 삶의 신조가 하나 있다. 여성에게도, 남성에게도, 조직에도 해당하는 신조다. 바로 친절이다”(<France 2>, 2016년 4월 10일). 온갖 성명문에서도 친절이 등장한다. 샤를 미셸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도 연두교서(State of the Union Conference)(2020년 5월 8일)에서 ‘존엄과 친절이 살아있는 사회’에 대한 염원을 표명했다.

친절은 긍정적인 개념이긴 하나, 실상 생각보다 순수한 개념은 아니다. 라루스 사전에 의하면, 친절이란 “타인에게 이해와 관용을 발휘하는 마음씨”다. 이런 정의는 친절을 베푸는 사람을 받는 사람보다 우월한 위치에 놓는다. 친절 자체는 좋은 것이나, 친절의 가치 제고와 역할은 몇몇 문제를 제기한다. ‘케어’, 취약성과 함께 개념적 3요소를 구성하며, 이데올로기를 위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3요소를 연구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인 파비엔 브뤼제르는 이에 상반되지만 타당한 지적을 내놨다. “프랑스의 경우 사회적 유대는 대립을 근간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 이런 시각이 프랑스에서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프랑스가 세속국가이자 무신론자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국가이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프랑스에서는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숙고가 어렵다”, 왜냐하면 “프랑스에서는 정치가 대립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 분야에도 친절을 함양해야 한다.”(7) 

올리비에 베랑 보건부 장관이 앞서 언급한 인터뷰에서 교묘하게 지적한 “핵심적인 정치적 과제”가 바로 이것이다. 친절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사회 계약의 방향 전환을 꾀하는 욕구의 은밀한 표출이다. 친절은 사회 계약에서 ‘추상적인’ 평등과 ‘냉정한’ 보편주의를 배제해 실질적인 불평등에 대한 인식을 기반으로 하는 상호관계를 추구한다. 민주주의의 ‘민감한 내용’(8)이 바로 여기에 담겨있다. 개별적인 취약성은 보상적 기능을 가진 친절의 이름으로 정책에 반영될 것이다.

새롭고 진실되며 물질적인 친절은 다름을 기준으로 해 정의될 것이고 가장 취약한 집단과 나머지 집단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불균형을 통합하는 보상과정이 실행될 것이다. 그런데 권리의 평등만으로 진정한 평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다면 이처럼 차별화된 새로운 권리는 어떤 규범을 토대로 해야 할까? 어떤 이들을 친절의 정치적 대상으로 선택해야 할까? 무엇에 근거해 어떤 시민이 (모든 의미에서) 평가절하 됐는지 가려내고 이를 보상할 것인가? 친절의 보편화만으로 대우의 다양성의 원칙을 정당화하기 충분할까?

 

“가장 취약한 우리 국민들”

마크롱이 대통령 후보 시절 “나는 언제나 친절을 함양했다. 행복이 전염되길 바라는 은밀한 희망은 내 몸에 새겨져 있다.”(릴, 2017년 1월 14일)라고 말했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 친절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악의는 선의보다 훨씬 더 보편적이다”(9)라고 상기시키는 프레데리크 보름스 국립 윤리위원회 위원의 발언은 놀랍지 않다. 

프레데리크는 ‘동시에(en même temps 마크롱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자주 사용해 화제가 된 표현. 대립을 뛰어넘는 통합의 의미로 찬사를, 마크롱의 불명확한 정치적 정체성을 대변한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는 표현-역주)’를 주창하는 체제 하에서 가장 저명한 철학자 중 한 명으로 부상 중이다. 취약한 이들을 대상으로 (때로는 일관성 없는) 친절을 보편화시키기 위해서는 감정이 아니라 의식의 영역에 속한 다른 개념의 힘을 빌어야 한다. 바로 책임감이다. 책임감은 시민 정신이 더해진 친절이다.

‘케어’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제자인 독일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제목부터 에른스트 블로흐의 저서 『희망의 원칙』과 대비되는 자신의 주요 저서 『책임의 원칙』(1979)에서 책임감의 영역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마르크스주의의 유토피아’를 비판하는 이 평론은 오늘날 인류의 자멸을 막기 위해 싸울 필요를 역설하며 “행복의 예언보다 불행의 예언에 더 귀 기울이고”, “두려움을 제1의 의무로 삼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두려움은 생명의 취약성에 대한 필연적인 인식으로 생명을 보존하는 수단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각자가 두려움과 함께 ‘책임’을 내면화해야 한다. 

『책임의 원칙』의 역자는 “책임감이 있다는 것은 자신보다 더 취약하고 더 위협받는 이들에게 ‘볼모로 잡히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라고  설명한다. 요나스에 의하면 “책임은 타인에 대한 의무적인 배려로, 타인의 취약성이 위협받을 때 ‘걱정’하는 것이다.” 책임이라는 의무는 반드시 지켜야 할 계율로 강요해야 한다. 하지만 보름스가 지적하듯이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기적인 안목을 가진) 현행 민주주의는 장기적으로 적절한 정부의 형태가 아니다.” 

책임감 있는 방식으로 모두에게 책임을 강요하기 위해서는 ’친절한 폭군’(10)과 같은 정부가 차라리 나을 것이다. 요나스가 종종 비유하듯 아이에게 책임감을 강조하는 폭군 같은 부모처럼 말이다. 이를 충분히 이해한 마크롱은 자신이 내린 결정들을 발표할 때 “우리 아이들”, “가장 취약한 우리 국민들”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이런 정치형이상학적 고찰은 많은 생태학적 우려(자연 보호)에 맞닥뜨렸고 생태계 보존 단체와 ‘최약자’를 보호하는 많은 기관의 이론적 틀을 설정했다. 뿐만 아니라 ‘사전주의 원칙’(중대하거나 복구할 수 없는 피해의 위험이 있는 경우 과학적 불확실성을 이유로 환경 손상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역주)의 필요성 인정과 관련 규칙을 정한 국제적인 규범과 법적 개념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전주의 원칙’은 2005년 프랑스 헌법에 삽입됐다. 이런 고찰들은 소련 붕괴이후 국제기구들이 갖기 시작한 관심사들과도 일치한다.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이 참여하는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 개발 보고서(Human Development Report)는 1994년부터 사람의 안전을 중심으로 정책을 수정했으며 두려움보다 정책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중심사상을 확립했다.

유엔 산하 ‘개입과 국가주권에 관한 국제위원회(ICISS)’의 2001년 보고서는 ‘보호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됐다. ‘보호책임’은 이후 2005년 ‘유엔총회 정상회의 최종 문건’에 채택됐다. 그 결과 국민을 보호할 국가의 의무에 대한 재정의가 이뤄졌고, 국가가 국민 보호에 ‘명백하게 실패’한 경우 ‘국제 사회’가 개입할 권한이 부여됐다. ‘보호책임’은 2011년 2월 리비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간인 보호를 위해 유엔이 리비아에 군사 개입을 승인할 때 최초로 적용됐다.(11)

취약한 이들을 보호하는 의무에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은 이처럼 근본적으로 신중한 사실주의나 단순한 ‘인류애’보다 정치의 영역에 속하는 시도다. 시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수립되고 있는 지금 감성, 죄의식, 더 나아가 이타주의의 관대함이 요지를 가리게 하면 안 된다. 사회는 유기적인 집합체로 선의 실현은 강제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정치적 결정은 최악의 예상에 대비하기 때문에 정당성을 가진다. 이제 해방은 비판정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본적인 취약성과 보편적인 상호관계를 인정함으로써 가능해졌다. 

이는 붕괴론(Collapsology)이나 ‘공동(Common)’을 지지하는 이들의 발언에 담긴 핵심개념이기도 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2020년 신년사에서, 연금개혁은 “책임의 원칙에 근거한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해고위기에 처한 베튄의 브리지스톤 타이어 공장 노동자들의 상황은 원칙이나 의무의 문제가 아니다. 정부는 해고의 가혹함을 ‘규탄’했으나, ‘친절’을 강요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2019년 65만 건을 기록한 산업재해에 대해, 정부는 “마음이 아프다”라고 하겠지만 그게 전부다. ‘케어’의 한계는 이것이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Liberté, égalité… care 자유, 평등... 케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0년 9월호. 
(2) Sandra Laugier, 기사 ‘Care’, <Encyclopaedia Universalis>.
(3) Najat Vallaud-Belkacem & Sandra Laugier, 『La Société des vulnérables. Leçons féministes d’une crise 취약한 자들의 사회. 위기에서 얻은 페미니즘의 교훈』, Gallimard, Tracts 전단지 총서, Paris, 2020.
(4) Joan Tronto, 『Un monde vulnérable. Pour une politique du care 취약한 세계. 케어 정책을 위해』, La Découverte, Textes à l’appui – Philosophie pratique 참고서적-실용 철학 총서, Paris, 2009. 
(5) Clothilde Dozier & Samuel Dumoulin, ‘La “bienveillance”, cache-misère de la sélection sociale à l’école 격려중심교육’이 만든 과잉친절학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9월호.
(6) Flora Santo, ’Paris : Manifesto XXI organise son festival sous le signe de la bienveillance et de l’amour 파리 : 마니페스토 XXI가 친절과 사랑의 축제를 개최하다‘, <Trax>, 2020년 9월 2일, www.traxmag.com
(7) Philippe Douroux, ’Fabienne Brugère: “Il faut construire de la bienveillance non seulement dans la morale, mais aussi en politique” 파비엔 브뤼제르 : “윤리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친절을 함양해야 한다”‘, <Libération>, Paris, 2016년 8월 5일. Cf. Fabienne Brugère, 『L’Éthique du care 케어의 윤리학』,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출판사, <Que sais-je ?> 총서, Paris, 2017.
(8) Fabienne Brugère, ‘Pour une théorie générale du care 케어의 일반 이론을 위해’, <La Vie des idées>, 2009년 5월 8일, https://laviedesidees.fr
(9) Frédéric Worms, 『Sidération et résistance. Face à l’événement (2015-2020) 쇼크와 저항. 2015-2020 사건 연대기』, Desclée de Brouwer, Paris, 2020.
(10) Hans Jonas, 『Le Principe responsabilité 책임의 원칙』, Flammarion, Champs Essais 평론 총서, Paris, 2013.
(11) Anne-Cécile Robert, ‘Origines et vicissitudes du “droit d’ingérence” “내정간섭권”의 기원과 변천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1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