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조각 난 팔레스타인의 혁명적 유토피아

검은 9월단의 두 얼굴

2020-11-30     알랭 그레쉬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전 편집인

1967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아랍 세계는 대대적인 정치적 변화를 겪었다. 이 혼돈의 시기에 수많은 팔레스타인 조직들이 등장해,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군사적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오늘날 팔레스타인 저항군은 요르단을 거점으로 삼고 요르단 왕정까지 전복시키려 하지만, 서구의 지원을 업은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이들을 유혈진압하고 있다.

 

1970년 요르단 수도 암만. ‘승리의 그날까지 혁명을!’ ‘모든 권력을 저항군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암만이 있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는 곳곳에 이런 슬로건과 함께, 1967년 10월 9일 볼리비아에서 CIA에게 암살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포스터 ‘영웅적 게릴라’가 붙어 있었다. 머리에 케피예(keffiyeh)를 쓴 무장활동가들이 주요 교차로를 통제했고, 기관총을 치켜든 활동가들은 픽업트럭을 타고 도시의 골목골목을 누비며 총격을 가했다.

팔레스타인대학생총연합(GUPS)의 회의에는 외국에서 온 수백 명의 좌파운동가들이 있었는데, 일부는 요르단에 불법입국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피델 카스트로와 마오쩌둥을 이야기했고, 프란츠 파농과 호치민을 연구했으며, 보응우옌잡이 베트남 독립전쟁에 관해 쓴 글을 읽었다. 그해 늦여름 7개의 언덕으로 이뤄진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분위기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직전 페트로그라드의 모습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 정부에!’ 슬로건을 연상시켰다. 팔레스타인 좌파조직의 수장 나예프 하와트메의 눈에 요르단에는 ‘2개의 정부’가 있었고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없애야 할 존재였다. 러시아에서 볼셰비키의 눈에 비친 온건파 망명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처럼 말이다.

아바나, 알제, 하노이, 그리고 암만까지 제3세계 국가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연달아 일어났고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 유토피아의 주인은 1968년 봄부터 반정부 투쟁을 이어온 서구의 대학생 및 노동자 출신의 청년들이 될 것이었다. 영화감독 장-뤽 고다르는 ‘팔레스타인 민족이 승리하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을 전쟁’을 현장에서 촬영했으며, 작가 장 주네는 팔레스타인 병사들을 향한 사랑을 노래했다. 

“아시아에서 아메리카까지 온통 혁명의 분위기다! 마치 조명탄처럼, 은행에서 은행으로, 오페라에서 오페라로, 감옥에서 법원으로 번지는 불길, 그 장엄함과 위대함을 원망할 뿐이다.”(1)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조부모를 잃은 작가 아니아 프랑코스는 부르짖었다. “낯선 이국땅에서 죽는 것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아우레스 산맥이 파괴될 때 내가 알제리인인 것처럼 느꼈듯, 지금 나는 팔레스타인인인 것처럼 느낀다.”(2)

 

‘이스라엘 군 역사상 가장 우울한 페이지’

이 혁명의 불씨는 1967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뒤 충격에 휩싸여있던 아랍 세계로 전해졌다. 집권당을 향한 국민들의 분노를 일깨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 아랍권에서 혁명적 민족주의와 반제국주의를 주도하던 가말 압델 나세르의 이집트와, 바트주의 정당이 이끄는 동맹국 시리아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1968년 내내 나세르 대통령과 그의 내각은, 전쟁패배에 책임이 있는 공무원들에게 이집트 법원이 베푼 관용을 규탄하고 민주적 자유의 확대를 요구하는 대학생 및 노동자 시위에 시달렸다. 이 시위는 ‘나세르 사회주의’의 한계를 규탄하는 시위로까지 번졌다. 이라크에서는 바트주의 정당이 정권을 장악했고, 리비아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 군주제가 폐지됐으며, 남예멘은 무력투쟁 끝에 독립을 쟁취했다. 

이처럼 불안정한 시기에 팔레스타인 게릴라 단체들이 속속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군주제가 약화된 틈을 타 인구의 절반이 팔레스타인인 요르단 땅에 정착했다. 이들은 무장투쟁과 함께 이스라엘과 그 동맹국인 미국에 대한 복수를 전면에 내세웠다. ‘양키의 제국주의’에 맞서 아프리카,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민족들의 연합을 도모한, 1966년 1월 아바나에서 개최된 3대륙 회의에 뿌리를 둔 단체들이었다.(3)

어떤 조직들일까?(4) 가장 대표적인 파타(Fatah)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던 야세르 아라파트가 설립한 조직으로, 1965년 1월 1일에 이스라엘에 대한 첫 군사 공격을 감행하면서 팔레스타인인 스스로에 의한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주장했다.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과 팔레스타인 해방인민민주전선(PDFLP)은, 기독교인이자 팔레스타인인이었던 주르지 하바시가 1948년 베이루트에서 창설한 아랍민족주의 운동에서 파생됐다.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입장과 비슷하게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의 전제조건으로 아랍 세계의 단합을 오랫동안 주장했지만,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전향하고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과 파타를 ‘프티 부르주아(Petit-bourgeois, 소시민 계급)’라고 조롱했다. 그 밖에도 무수한 작은 단체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아랍 국가의 한 정부로부터 자금을 조달받았는데, 사이카(Saika)는 시리아로부터, 아랍해방전선은 이라크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1964년 아랍 리그가 창설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관료주의로 인해 신용을 잃고 빈껍데기로 전락했다. 1969년 2월부터는 아라파트가 의장직에 오르면서 파타와 아라파트가 PLO를 이끌고 있다. PLO 산하의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들은 개별활동에 집중하고, PLO는 연합체로서의 틀만 유지하고 있었다. 이 조직들은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와 휴전을 골자로 하는 1967년 11월 22일 UN 안보리의 결의 242호에 반대하며, 단순히 1967년 6월 5일 이전으로 돌아가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또한 ‘팔레스타인 전체를 해방’시키기 위한 방법은 무장투쟁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혁명적인 비전으로 인해 이들은 아랍 국가들 자금을 지원받는 요르단 정부, 이집트 정부와 갈등을 빚었다. 이들의 전략을 반영하듯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는 게릴라 활동이 가파른 증가세를 보였다. 1967년에는 97건에 불과했으나 1968년에는 916건, 1969년에는 2,432건, 1970년에는 1,887건을 기록했다(1971년에는 45건으로 대폭 감소).(5)

1968년 3월 20일 카라메 전투는 팔레스타인 게릴라 활동에 정점을 찍었다. 이 날 파타의 병사들은 자신의 요르단 내 근거지들 중 한 곳을 무너뜨리려는 이스라엘 군의 공격에 극렬하게 맞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명의 군인과 수많은 장갑차를 잃었다. 이스라엘 당국은 이 패배를 덮으려 했지만 <하아레츠>는 1968년 3월 29일자 신문에서 ‘이스라엘 군 역사상 가장 우울한 페이지’라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전투의 상징적 의미였다. 사상 최초로 아랍 게릴라가 이스라엘 군에 대항한 것이다. 저항군 대부분은 자원입대한 아랍 및 서구의 팔레스타인 난민촌 출신의 청년 수천 명이었다. 이들의 성과는 팔레스타인 조직들을 감동시켰고, 파타는 요르단 강 서안지구에 조만간 ‘자유구역을 설치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네트워크가 굳건한 후세인 vs. 고립된 팔레스타인

그러나 중동은 동남아시아가 아니었고, 팔레스타인은 남베트남이 아니었으며, 요르단은 북베트남이 아니었고, 또 그렇게 될 가능성도 없었다. 후세인 국왕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도 소통하고 있었고, 미국과도 굳건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CIA와도 연결고리가 있었다.(6) 그런 그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 만한 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좌시할 리 없었다. 반면 팔레스타인은, 주로 전쟁이 벌어졌던 이집트를 비롯해 그 어떤 국가에도 전략적 우군이 없었다.

1970년 6월, 미국은 UN 안보리의 결의 242호에 기초한 협상 계획을 제안했다. 요르단과 이집트가 수용 의사를 밝혔고, 이스라엘은 한 번의 거절 후 동의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들은 팔레스타인인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팔레스타인인을 ‘난민’으로 규정하는 프로젝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 측의 언론은 일제히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을 비난했다. 이에 협상파기를 막고자 아라파트가 이끄는 사절단이 나세르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 

나세르 대통령의 말을 요약하면, 자신도 로저스 플랜(Rogers plan,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이름에서 따옴)에 찬성하지 않지만 이집트군을 재정비하려면 우선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었다(이스라엘도 그로부터 몇 주 뒤에 이 계획을 비난했다). 나세르 대통령은 이집트가 팔레스타인을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사절단을 안심시키면서, 팔레스타인도 이집트에 대한 신뢰를 증명해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해방’시키기는 어려우니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국가를 세우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아라파트의 사절단은 이집트 대통령의 설명을 듣고 만족스러워했지만, 이미 요르단은 멈출 수 없는 악순환의 소용돌이에 빠진 상태였다.

1968년 7월부터 PFLP는 서구권의 항공기들을 상대로 일련의 활동을 개시했다. 주목적은 이스라엘에 감금돼 있는 팔레스타인 포로들의 석방이었다. 1969년 8월 비행기 납치 사건은 체 게바라를 우상으로 삼은 25세의 여성 활동가 레일라 카흐레드의 주도로 이뤄졌다. 1970년 9월 6일에는 PFLP가 공중납치한 민간 여객기 4대 중 3대가 ’혁명 공항’이라고 불리는 한 요르단 공항의 활주로에 착륙했다. PFLP는 보잉 747을 포함한 여객기 3대를 모두 폭파시켜 버렸고 이 폭파 장면은 전 세계로 방영됐다. 이 사건은 팔레스타인의 입장에서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500여 명의 팔레스타인 포로들을 해방시킨 쾌거였지만, 요르단 당국이 ‘질서의 재정비’를 명분으로 팔레스타인 조직들을 공격하는 결정적인 구실을 마련했다.  

1970년 9월 15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든든한 지원을 등에 업은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군부에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들이 점령하고 있는 4개 구역으로 진군할 것을 명령하고 밤낮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사실 요르단 정부군의 상당수는 팔레스타인 출신이었지만, 팔레스타인 측의 기대와는 달리 군에서 이탈하는 병사의 수는 극히 적었다. 이와 관련해 <르몽드>의 특파원인 에릭 룰로는 다음과 같이 썼다. “후세인 국왕은 정부군의 대부분을 트란스요르단 출신의 병사들로 채웠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단체의 조직원들은 무신론자이고 신을 적대시하며 극좌파 유대인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교육함으로써 그들을 불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대학생총연합(GUPS)의 회의에는 젊은 이스라엘인,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들도 참여하지 않았던가?”(7) 그러나 이스라엘과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던 후세인 국왕은 오히려 이 ‘유대인의 존재’를 들어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들에 대한 공격을 합리화시켰다.

 

팔레스타인의 패배, ‘검은 9월단’의 탄생

그러나 이라크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요르단에 주둔하는 이라크군의 수는 1967년 이후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리아는 호시탐탐 공격의 기회를 노렸지만, 이스라엘과 미국의 위협에 그리고 당시 시리아의 국방부 장관이었던 하페즈 알-아사드가 공중 엄호의 제공을 거부하면서 번번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요르단의 공식 기록상 이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가 3천 명이 넘어갔을 무렵(팔레스타인이 발표한 수치로는 이보다 3배 더 많았다),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을 구한 것은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중재였다. 그해 9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됐고, 그 협정에는 팔레스타인의 군사적 패배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측에 유리한 조항들이 포함됐다. 그러나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다음 날인 9월 28일에 심장 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1971년 여름, 요르단 내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들의 ‘소탕 작업’에 돌입한 후세인 국왕을 가로막을 것은 없었다.

팔레스타인의 패배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저항군들은 젊고 열정이 넘쳤으나, 젊은 만큼 교육과 경험이 부족했다. 그들의 자유분방한 언행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비롯해 일부에 거부감을 일으켰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고, PFLP 같은 조직들의 힘에 경도돼 있었다. 외교적 및 정치적 경험이 부족해 지역 간의 역학관계를 파악하지 못했으며, 아랍 민족들의 연대감을 과대평가했다. 결정적으로, 단순한 슬로건을 초월해 베트남과 알제리와 차별화되는 자신만의 정치적·군사적 전략 수립에 실패했다.

팔레스타인 저항세력 자체가 와해될 수 있었던 이 뼈아픈 패배 속에서, 1971년 11월 28일 와스피 알탈 요르단 총리를 암살한 새로운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 ‘검은 9월단’의 탄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검은 9월단은 1972년 9월 뮌헨 올림픽에서 테러를 벌여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사망시킨 조직이다. 그 후 팔레스타인 저항군은 레바논을 거점으로 삼고 군사적 노하우를 전수하며 반정부 운동과 결탁했다. 이들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후세인 요르단 국왕과 대치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으며, 이로써 PLO는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유일한 단체’라는 명성을 점차적으로 얻었다. PLO는 나아가 서유럽을 넘어 ‘사회주의 진영’에까지 외교적 동맹관계를 넓히고, 민간인 대상 테러에 반대하며 196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큰 호응을 이끌어낸 유토피아 담론까지 포기했다. 그리고 1973년 10월 전쟁 이후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가자 지구에 팔레스타인 정부와 국가를 수립하겠다는 목표로 한층 온건한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현실적인’ 노선에도 불구하고, 1970년 전 세계 청년들을 가슴 뛰게 했던 혁명적 유토피아를 넘어서는 구체적인 성과는, 오늘날 점령지와 난민캠프에서 버티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여전히 요원하다. 

 

 

글·알랭 그레쉬 Alain Gresh
온라인 신문 <Orient XXI>의 편집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전 편집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갈등, 이슬람과 서양문화의 융합 가능성 등을 전문적으로 집필하고 있다.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번역위원


(1) Hélène Aldeguer, Alain Gresh, 『Un chant d’amour. Israël-Palestine, une histoire française 사랑의 노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프랑스의 역사』, La Découverte, Paris, 2017.
(2) Ania Francos, 『Les Palestiniens 팔레스타인인들』, Julliard, Paris, 1968.
(3) Edouard Bailby, ‘L’Amérique latine a choisi l’escalade révolutionnaire localisée 라틴 아메리카는 현지에 적합한 점진적 혁명을 선택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66년 2월호. 
(4) 팔레스타인인들의 역사에 관해서는 다음 두 권의 책을 참조할 것. John K. Cooley, 『Green March, Black September』, Frank Cass, London, 1973년. / Nadine Picaudou, 『팔레스타인인들, 한 세기의 역사』, Complexe, Bruxelles, 2003.  
(5) Alain Gresh, 『OLP, Histoire et stratégies PLO, 역사와 전략』, Spag-Papyrus, 1983.
(6) ‘CIA Paid Millions to Jordan's King Hussein’, <The Washington Post>, 1977. 2. 18.
(7) Eric Rouleau, 『Dans les coulisses du Proche-Orient. Mémoires d’un journaliste-diplomate(1952~2012) 중동의 길목에서, 한 기자 겸 외교관의 기억(1952~2012)』, Fayard, Paris,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