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문 광장’ 민주주의 연금술사들
“이것은 위기가 아니라 사기다!”라고 6월 19일 마드리드의 ‘분노한 사람들’은 외쳤다. 천막촌은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서 철수했지만, 새로운 형태의 투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12일 일요일, (푸에르타 델) 솔 천막촌을 철거하고, 시위 해산 축제를 연다. 현장에는 상설 안내소만 남겨두고 모두 철수한다. 지구 단위로 투쟁을 지속하며, 공공장소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연다. 물론 솔 광장 시민총회도 꾸준히 개최한다. 이상이 지금까지 도출된 합의안이다.” 지난 6월 7일 화요일 밤 9시. 시위대 2천여 명의 귀가 일제히 마드리드의 명소, ‘푸에르타 델 솔’(태양의 문) 광장 시민총회 진행자에게 쏠렸다. 이틀 계속 내린 비로 회의가 연기되는 바람에, 이번에는 방수포로 대형 천막 하나를 둘러쳤다. 천막 한가운데 회의진행자 그룹이 자리했다. 예상대로 진행자가 제시한 첫 번째 합의안은 단번에 만장일치를 얻어내지 못했다. 다시 한번 돌아가며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발언 기회는 찬반에 따라 각각 3회로 제한했다. <<원문 보기>>
천막 시위대 해산에 반대하는 이들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이들은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구체적인 대책이 미비한 점을 반대 이유로 꼽았다. 푸에르타 델 솔 시위대 해산이 타 지역 천막 시위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이번에는 해산 찬성자들이 발언할 차례였다. 찬성자들은 이제 시민운동이 어느 정도 조직력을 갖추었으니, 굳이 천막촌을 유지하며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찬반이 팽팽히 맞서면서 결국 합의점 도출에 실패했다. 또다시 의견 발의 시간이 반복됐다. 해산 반대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민총회는 모든 사항을 결정할 때 전원합의를 원칙으로 했다.
해산하느냐 마느냐, 시민총회
회의진행자 뒤쪽으로 회의진행 도우미들이 각각의 의견을 종합해 새로운 단일안을 도출하느라 분주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회의록을 작성했다. 총회는 4시간이나 지속됐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겼다. 시위대 사이에 조금씩 긴장감이 고조됐다. “자, 모두 힘을 내자. 이제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 회의가 지체되는 만큼 더 나은 개선안이 마련될 것이다.” 회의진행조가 시위대의 사기를 북돋았다. 비로소 새로운 협의안이 도출됐다. “지금까지 의견에 한 가지 사항을 추가했다. 천막 노숙시위를 계속하기를 원하는 분들을 모아 이동조를 결성하는 것이다. 때에 따라 지구별 집회 등에 참석해 시민운동을 지원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일순 침묵이 흘렀다. 거수 표결에서는 단 한 명의 반대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침내 합의에 도달했다!” 회의진행자가 외치자, 반대의 목소리 대신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팽팽한 찬반 토론… 합의 뒤엔 환호
스페인에서 이처럼 참여정치에 대한 욕구가 폭발하기까지의 과정은 자못 독특하다. 대량실업(유럽연합 통계기관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16~25살의 44.2%가 실업 상태이다) 사태와 사회보장 축소, 의료 및 교육 부문 긴축재정, 고용 불안 증가, 대출상환 불능에 따른 주택 압류(사실상 공적 자금을 수혈받아 구제된 은행들이 주도) 등의 상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시민들이 소셜 네트워크 등을 통해 5월 15일 시위 개최를 촉구한 것이 단초가 됐다. 정당, 노조, 정치단체 등으로부터 독립성을 내세운 이 투쟁은 예상치 못한 큰 호응을 얻었다. 스페인 50여 개 도시에 수천 명의 시민이 집결했다. 시민들은 “이제는 진짜 민주주의를”(Democracia Real Ya)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여기에는 부정부패로까지 치닫는 정경유착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1) 집회 내내 가장 많이 들려온 구호 중 하나도 “그들은 우리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한다”였다.
실업과 긴축, 참여정치로 대폭발
시민들의 높은 참여와 튀니지·이집트 등지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에 한껏 고무된 200여 명의 시민들은 본 시위와는 별도로, 돌아오는 일요일인 5월 22일 지방 선거일까지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 텐트를 치고 노숙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경찰의 강경진압(시위 말미에 경찰과 시위대 간에 격렬한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이 이어지고, 시민들이 ‘반체제’ 인사로 몰려 정치범으로 기소되는 일이 속출했다. 하지만 시위 열기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거세졌다. 이틀 만에 푸른색 천막이 온 광장을 뒤덮었다. 카를로스 3세 기마상에 확성기가 달리고, 주변에 발전기가 설치됐다. 뚝딱뚝딱 널빤지 몇 개를 잇자 금세 ‘조리실’이 생겼다. 처음에는 기증받은 물품(현금 기증은 사양했다)을 쌓아둘 요량이었지만, 이내 단체 식당으로 탈바꿈했다. 식수는 5리터짜리 빈 병을 들고 가 인근 소방서에서 담아왔다. 사무용품에서 건축자재, 의약품, 식사, 의류까지 뭐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게시판에 적거나, 관련 웹사이트에 게시했다. 한 기업이 간이 화장실 설비 3채를 빌려줬다. 인근 주민들은 시위대에게 욕실을 개방했다. 마드리드 중심부의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 작은 마을 하나가 형성됐다.
아랍에서 얻은 영감, 탄압을 뚫다
줄줄이 놓인 안내 데스크 중 한 곳에서 31살의 실직자 보르야가 이제 막 배낭을 메고 도착한 젊은이 3명에게 천막촌 운영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진행위원회가 있다. 천막촌 운영이나 15M(5월 15일) 시위 개최, 식당 운영, 법률 자문, 시민총회 준비, 필요물품 관리 등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위원회와는 별도로 워킹그룹도 있다. 정치·경제·환경·보건·교육·문화·이민 등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분야에 대해 함께 토론을 진행하고, 합의 원칙하에 해결책을 모색하는 모임이다. 운영위원회나 워킹그룹에는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데, 보통은 오후 무렵 각 지역 광장이나 시가지에서 집회를 연다. 한편 우리가 일부러 비워둔 광장 공터에서는 매일 시민총회가 열린다. 거기서 모든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일단 처음 며칠은 집회에 직접 참관해 찬찬히 둘러보면서 익숙해지는 시간을 갖는 게 좋다.”
무관심 계층의 대대적 참여
푸에르타 델 솔 광장과 인근 지역에서는 4주 동안 카페테라스, 대형 프랜차이즈 매장, 타파스 바(Tapas Bar·간단한 안주에 맥주나 와인, 음료를 마실 수 있는 곳) 할 것 없이, 집회 참가자와 관광객들이 함께 어우러져 지내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불과 100여m만 벗어나면 ‘스페인 혁명’(금세 언론은 시위 물결에 이 이름을 갖다 붙였다)이 잠잠해지면서 곧바로 마드리드의 일상이 시작된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거나, 장을 보는 마드리드 시민의 일상적인 모습이 펼쳐지는 것이다.
카를로스는 시위 참가자를 대상으로 법률 자문을 해주는 변호사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정치 참여 활동이 어떠했는지 취재진에게 설명해주었다(인터뷰 내내 여러 운영위원회 사이의 소통을 위해 광장에 설치된 전화벨이 쉴 새 없이 울리는 통에 이야기는 드문드문 중단 됐다). 62살 법학박사인 그는 현재 변호사 겸 대학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프랑코 독재 타도 시위에 몇 번 참가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평생 정치 집회에 참여한 것도, 거리 위에 나선 것도 처음”이라고 했다. “시위 취지에 공감이 가서 참여하게 됐다. 정당으로부터의 독립성을 표방한 것이나, 부정부패·주권 포기 등의 현실에 반대하는 모습 등이 마음에 와닿았다. 요새 유럽 정부는 금융계나 재계의 하수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카를로스도 대다수 시위 참여자와 마찬가지로 얼마간 푸에르타 델 솔 광장에 머무른 뒤, 집으로 돌아가 휴식기를 갖고 직장에 복귀할 예정이다. 사실 그를 15M 시위대의 전형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대개는 고용 불안을 겪는 청년층이 시위대의 주축을 이룬다. 그럼에도 카를로스는 이번 시위 참가자들의 독특한 특징 하나를 잘 보여준다. 바로 기존 시민활동에 무관심했던 이들도 매우 적극적이면서 대대적인 방식으로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생·해커·운동가의 네트워크
하지만 이번 시위·집회가 모두 자생적으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수한 기존 단체들이 서로 결집한 것에 가깝다. 대표적인 예가 5월 15일 시위에 동참한 ‘미래가 없는 청년’(JuventudSINfuturo)이다. 이 단체는 대학생들로 구성됐지만 학교 문제를 넘어, 폭넓은 주제에 다가서고 있다. “집도 없고 일도 없고 연금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는 구호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인터넷 트래픽 및 다운로드와 관련한 규제안 도입에 반대하는 이들도 시위 물결에 동참했다. 서버 공격 등 ‘핵티비즘’(Hacker와 Activism의 합성어로, 정치사회적 목적을 위해 자신과 노선을 달리하는 정부나 기업, 단체 등의 웹사이트를 해킹하는 일체의 활동이나 주의) 활동에 더 익숙한 이들은 ‘Nolesvotes’(그들에게 투표하지 마세요) 운동을 전개하며, 사실상 15M 시위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처럼 시위에 동참한 조직들은 저마다 기존 체제에 대한 불신감을 고조시키거나, 수평적이면서도 분산된 형태의 정치참여, 심지어 핵티비즘처럼 현행법에 위배되는 정치 참여를 권장하고 있다. 한편 이름 있는 정치단체나 노조에 가입한 사람들, 혹은 이라크 반전운동이나 좀더 최근의 예로는 볼로냐 개혁(유럽 고등교육 개혁) 항의 운동 같은 다양한 시민활동에 참여한 전력이 있는 이들도 푸에르타 델 솔 천막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환경운동가, 시민 문화·교육 단체, 이민자 지원 단체, 여성인권운동가, 사회복지사 등 온갖 사회운동 출신의 개인들도 동참하고 있다.
푸에르타 델 솔 천막 시위의 경우, 기존 단체와 차별화를 표방하며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 결과 유사 직업 종사자들로 구성된 여러 소그룹들이 모여 협업한다. 한 예로 직업 언론인 그룹은 홍보 담당 위원회에 참여해, 대안매체 종사자나 혹은 단순히 이 일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과 어울려 일을 한다. 워킹그룹의 경우에도 전문가와 해당 주제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이 함께 일한다.
이들은 스페인을 바꿀 수 있을까
시민들이 광장을 점거한 지 4주가 흘렀다. 이제 시민들은 다시 사이버상의 시민운동으로 돌아가는 것은 패배라며 거부감을 나타낸다. 6월 12일 천막 시위대가 철수한 이후, 이제 이 운동의 성패는 계획했던 투쟁 활동을 얼마나 잘 이행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를테면 6월 19일 유로협정 반대 시위나 7월 23일로 예정된, 발렌시아에서 출발해 마드리드 합류를 목표로 하는 ‘분노한 사람들의 시민행진’, 각 도시 시청 앞 냄비시위(Caceroladas, 냄비와 프라이팬 등을 두드리는 시위) 등 각종 시위나 농성, 주택압류 저지 집회를 차질 없이 진행해야 한다.
좀더 장기적으로는 지구별 시민총회를 원활히 진행하고, 푸에르타 델 솔에서 시작된 투쟁을 꾸준히 이어가는 데 모든 희망이 걸려 있다. 또 유사한 시민운동이 일어났거나, 계속 이어지고 있는 스페인 20여 개 도시들(한 예로 바르셀로나에서는 긴축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지방정부 청사를 점거했다)이 유기적으로 연대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벌써부터 걸림돌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다. 경찰 진압은 강경일로로 치닫고 있고, 장기 목표를 위해 시민들을 오랜 시간 결집하는 일도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결과가 어떠하든, 최근 몇 주 동안 우리는 많은 시민들이 기존과는 다른 참신한 방식의 정치 참여에 새롭게 눈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잠에서 깨어나 광장을 점거하다.” 푸에르타 델 솔 시민운동은 국왕 카를로스 3세 동상에 이런 내용의 기념 문구를 내걸었다. 물론 푸에르타 델 솔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이 그랬듯, 누군가에게 허락을 구하지는 않았다.
글·라울 기옌 Raul Guillen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일간지 <엘 파이스>에 따르면, 지난 5월 22일 선거 출마자 가운데 100명 이상이 뇌물수수, 독직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그 가운데 50%가 민중당(PP·우파정당), 35%가 스페인노동사회당(PSOE·중도좌파) 소속이었다. 안드레우 만레사, ‘지중해의 한 섬, 주식회사로 변한 지방정부’, 2010년 6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