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지 않으리라, 모두의 공간을 되찾으리라

2011-07-11     막스 루소

“아니, 아니, 우린 움직이지 않으리라! 우리 삶이 이 광장 위에 있거늘, 우린 움직이지 않으리라! 움직이지 않으리라, 이것이 우리 세대!”- 스페인 대중 드라마 주제가에서 따온 노래 <분노한 자들>(인디그나노스).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한창인 체제 비판 운동을 일컫는 ‘아랍 거리’, 최근 미국서 다시 불붙은 ‘월스트리트’와 ‘메인 스트리트’ 간 신화적 갈등, 프랑스의 많은 시위 행렬을 가리키는 ‘거리의 힘’ 등 새롭게 사회적 불의에 맞서 모인 민중을 일컫는 거리의 은유적 표현이 국제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마찬가지로, 스페인 공동체 ‘데모크라시아 레알 야’(이제는 진짜 민주주의를)는 선언문을 통해 스스로를 ‘거리의 남자와 여자들’이라는 도시적 용어로 지칭하면서, 자신들은 똘똘 뭉친 소수의 정치·경제 엘리트 집단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체제의 희생양이며, 이런 체제를 거부한다고 밝혔다.

‘아캄파다 솔’(태양 광장 캠핑), ‘토마 라 플라사’(광장을 접수하라), 또는 ‘노 노스 바모스’(우리는 떠나지 않으리라)(1) 등으로 명명한 5월 15일의 스페인 사회운동은, 그렇다고 거리를 단순한 물리적 장소(집단행위를 위한 모임 지점)나 상징적 장소(피지배자의 공간으로서의 거리)로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제, 그 거리를 목표로 삼았다. 정치·경제적 문제를 이렇게 ‘도시화’하면 이들 문제를 곧 자신의 문제로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도시화’가 단순하지만 동시에 명백한 정치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다. 즉 일정한 공공장소에서 한 집단이 평화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현존하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저항 행위라는 사실을.

사회운동, ‘거리’를 목표로 삼다

사회운동과 도시 공간의 새로운 관계를 이해하려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역사적 힘이 긴장관계 속에서 어떻게 서양의 도시들을 만들어왔는지 짚어봐야 한다. 전자는 공공장소의 보편적이며 지속적인 점유를 필요로 하지만, 끊임없이 유동성을 추구하며 통행을 최대화하려는 속성을 지닌 후자의 위협을 받는다.

프랑스의 오스만 시대는 자유주의 정책을 옹호하던 당시 독재 체제의 전략을 반영해 수도를 훗날 “공간과 시간의 압축”(2)이라고 평가되는 방향으로 정비해 자본주의의 성장을 도모하고, 서양 도시화 역사의 한 획을 긋는 핵심적인 시기가 되었다. 19세기 중반, 조르주 외젠 오스만 남작은 “유동성(으로 작동하는) 기계”(3)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도시의 개념을 도입했고, 이 개념은 이후 널리 확산되었다. 오스만 남작은 20년에 걸쳐, 중세의 경제와 사회 중심지 구실을 했던 복잡하게 얽힌 좁은 길들을 없애고 넓은 대로를 뚫어, 주변국들과 철도로 연결되기 시작한 이 도시의 통행량 증가에 박차를 가한다. 나날이 지위가 상승한 대은행가들은 도시화의 재정을 뒷받침하며 이익을 챙기고, 파리 시민들은 투기 열기에 사로잡힌다. 집값은 사용 가치를 뛰어넘는다. ‘바리케이드의 시대’ 끝 무렵에는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는 반면, 부르주아들은 도시 중심가의 새 건물들과 상류층의 소비 장소로 구상된 넓은 대로를 점유한다. 유혈 진압된 1871년 파리코뮌은 부분적으로는 도시의 이런 진화 방향을 바꾸려다 실패한 반란으로 분석할 수도 있다.

이런 도시 개념이 처음부터 바로 확산된 것은 아니다. 유럽 도시의 골격 형성은 산업 성장을 전제로 한다. 산업자본은 거의 유동적이지 않은데다, 공장의 이윤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다. 산업자본을 형성하려면 결국 다수의 노동력이 제공하는 지속적인 서비스에 매달려야 하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산업도시를 건설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노동력들이 일련의 자극에 이끌려 그 안에 정착할 수 있는 일종의 ‘블랙홀’ 구실을 하도록 계획한다. 프랑스의 르 크뢰조나 스페인의 콜로니아 구엘 같은 컴퍼니 타운들이 바로 ‘유동성의 도시 계획’의 원형이다. 주거 개선, 공공설비 설치, 새로운 서비스 제공…. 이제 자신이 일하는 공장 가까이 자리잡은 노동자는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부랑 생활은 억압의 대상이 되는데, 이는 고용주와 공권력이 몹시 꺼리는, 통제 불가능하며 잠재적으로 ‘전염성이 있는’ 유동성의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중반, 자동차의 대중적 보급과 근대 도시 계획의 진화로 유동성이 증가한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외곽에 배치된) 주거지와 (시내에 위치한) 직장 사이를 쳇바퀴 도는, 관습적이며 통제하에 있는 유동성을 말한다. 이런 경향은 1950년대 들어 미국의 비트 세대나 프랑스의 상황주의자들처럼 부랑 생활을 찬미하고 ‘표류’하기를 선동하는 다양한 반문화운동의 지탄을 받게 된다.

자본주의가 밀어낸 민주주의 공간

1970년대부터 서구 자본주의는 세계적 규모의 통행 증가와 그 결과로 발생한 노동의 국제적 분할 아래 새로운 변동을 겪는다. 자본과 일자리가 지리적으로 분산됨에 따라 ‘블랙홀’ 같은 도시 개념은 낡은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대중매체는 한정적이고 관습적인 통행에 대한 반문화운동을 과장해, ‘나는 나 자신의 기업가’, 즉 사생활과 직장생활을 위해 공간적 장애물을 뛰어넘길 주저하지 않는 개인을 찬양한다. 이런 새로운 인간형은 나날이 글로벌 수준이 되어가는 통행의 범위와 빈도를 급속히 늘려야 하는 현 체제의 지상명령이다. 최대한의 이익 창출을 위해 고안된 통행 기계로서의 신자본주의 도시는 더 이상 지리적 한계나 서민층의 생활 조건 향상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파리는 세계화 깊숙이 몸을 들여놓은 기업들의 본사를 유치하기 위해, 산업지대였던 라데팡스를 다시 한번 대대적으로 재개발하고, 다국적기업 유치의 전초기지로 삼는다. 라데팡스로의 유입이 최대화되도록 설계된 이 사업이야말로 통행 증가를 위해 구상된 도시 계획과 맥락이 닿는 것이다.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공공의, 그러나 비시민적인 장소’라는 담화에서 지적했듯이, 라데팡스 심장부에 위치한 광대한 광장에는 통행자가 한자리에 머물 만한 시설이 전혀 없다.(4) 한자리에 머물려면 라그랑드아르슈(신개선문) 계단의 용도를 바꾸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날씨 좋은 날, 그 계단에 앉아 점심을 먹는 직장인이나 관광객처럼 말이다. 광장뿐 아니라 공항, 기차역, 교통 요충지, 순환도로, 시내의 대로, 쇼핑몰 등 통행이 빈번한 공간은 ‘돈 버는 도시’의 징표이다. 이 새로운 도시 개념은 유럽 대도시뿐만 아니라, 국제 경쟁력 강화라는 구실 아래 중간 규모의 도시들에도 확산되기에 이른다.(5)

머무는 것이 죄가 돼버린 시대

그럴수록 상대적으로 통행 빈도가 낮은 도시 빈곤층은 도시 성장의 걸림돌이며, 공공질서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까지 인식된다. ‘블랙홀’에서 ‘메트로폴리탄’ 성격의 도시 간 연계망을 구축한 후기산업도시로 전환한 도시는 항구적인 거주민뿐만 아니라 관광객 같은 임시 체류자들을 더 많이 유치해 유동성에 속도를 높이려 한다. 이를테면 ‘펄사’(맥동 전파원, 펄스 전파를 방사하는 천체)처럼. 도시 공공장소의 개념 또한 완전히 달라진다. ‘범죄 예방 환경 설계’와 ‘범죄 기회 줄이기’라는 명분 아래, ‘부동의 적들’(거지, 성매매자, 노숙자 등)이 머물 만한 공공 벤치나 버스 정류장의 비바람막이 같은 시설들이 사라진다. 불법 노점상들은 경찰의 집요한 공격 대상이 된다. 프랑스에서 2003년 통과된 이른바 ‘국내 치안법’은 성매매자의 호객 행위, 건물 현관에 모여 있기, 스쾃(건물 무단 점유), 구걸 등을 범죄로 규정하고 이를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행위들은 공통적으로 도시 안의 공간적 부동성이라는 물리적·유형적 특성이 있다.

‘통행성 기계’와 같은 도시는 불평등하고 이원화되어 있다. 이는 최근 20년간 도심지 주택들과 상업용 건물들의 ‘고급화’만 봐도 알 수 있다. ‘주택 지구 상류화’ 현상은 ‘승리한 자’들이 독차지한 시내, 즉 도시 통행의 중심부에서 일어난다. 이런 현상은 그들에게 일·소비·취미생활로의 빠르고 다양한 출입로를 보장한다. 반면 ‘패한 자’들은 부동산 거품에 의해 점점 더 통행의 중심부에서 먼 곳으로 귀양 가고, 유동성은 속박으로, 아니 고통으로까지 이어진다.(6)

그렇다면 민주주의 생산지로서의 도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시장, 토론과 집단의 결정에 참여하는 장소인 그리스 아테네의 아고라를 기원으로 하는 공공장소는- 상징적, 그러나 특히 물리적 공간으로- 민주주의의 원활한 기능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이를 위하여 공공장소는 교환·분배·만남을 촉진하도록 고안되어야 한다. 이런 장소가 항상적인 이동 공간으로 변모된다는 것은 사회성- 특히 서민들의- 실현을 실질적으로 어렵게 만들고, 그리하여 고결한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각자의 이해를 모두 함께 고려하는 행동이 힘들어지게 된다.

‘통행성 기계’ 파괴, 제2의 러다이트

오늘날, 유동성 기계인 도시에 대한 비판은 새롭게 부각되는 주제이다. 무정부주의자들의 “일시적 자율지구”(7)로부터 영감을 받은 ‘리클레임 더 스트리트’(거리를 되찾자) 운동의 ‘거리 해방’에서, 좀더 제도화된 ‘느린 도시’ 운동의 조직망까지, 통행성 기계의 속도를 늦추려는 새로운 전술들은 각양각색이다. 공공장소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 그 공간을 집단적으로 새로운 실천을 교환하고 창조하는 장소로 만들어가면서, 5월 15일 캠핑자들은 신자유주의 도시 민중들의 체제 비판 운동을 한 단계 성숙시켰다. 정치권이 지난 30년간 부풀려오고, 소수의 은행들과 거대 그룹들의 배만 불려준 부동산 거품이 폭발하면서 경제위기의 타격을 정면으로 받은, 빌바오에서 말라가까지 ‘부동으로 결집한’ 젊은이들은 스페인 국경을 넘어, 특히 오늘날, 도시의 의미가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한 결정적 관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글·막스 루소 Max Rousseau

번역·김현정 hjdeblauwe@hanmail.net
파리3대학 통번역대학원 졸, 연극학과 박사과정(DEA) 수료.

<각주>
(1) Eva Botella-Ordinas, ’푸에르타 델 솔의 직접 민주주의’(La démocratie directe de la Puerta del Sol), www.laviedesidees.fr.
(2) David Harvey,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 Blackwell, Londres, 1989.
(3) Max Rousseau, ’La ville comme machine à mobilité. Capitalisme, urbanisme et gouvernement des corps’, <Métropoles>, n°3, 2008.
(4) Zygmunt Bauman, <Liquid Modernity>, Polity Press, Cambridge, 2000.
(5) Vincent Dumayrou, <Veut-on singapouriser la Flandre>, <Le Monde diplomatique>, avril, 2010.
(6) 가티앵 엘리, 알랑 포플라르, 폴 바니에, ‘귀농한 도시 빈민들, 더 끔찍한 가난에 갇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어판, 2010년 8월호.
(7) Hakim Bey, TAZ. <Zone autonome temporaire>, L’Eclat, Paris,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