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양심을 겁박하다

2011-07-11     도미니크 비달

독일군 점령하에 레지스탕스 운동이 벌어졌을 때 탄생한 ‘프랑스유대인기관대표위원회’(CRIF)가 항상 정부의 특정 대화 상대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00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캠프 데이비드 협상이 결렬된 후 급진화된 이 단체는 프랑스 정치에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런 태도 변화가 이제 는 한계에 이른 것일까?

“이 나라에는 지적이며 용감한 남성과 여성이 존재한다. 파리고등사범학교(ENS)의 학장인 모니크 캉토 스페르베르가 그 본보기라 할 수 있다. 그녀는 레지스탕스였고 강제 수용자였으며, 외교관 출신 스테판 에셀과 함께 1월 18일 열 예정이었던 파렴치한 학회 토론(‘토론’이란 용어에는 수많은 의미가 담길 수 있다)을 (용감하게) 취소했다. 또 우리가 긴급히 접촉한 고등교육부 장관 발레리 페크레스도 마찬가지이며,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클로드 코엔 타누지, 베르나르 앙리 레비, 알랭 핀키엘크라우트에게도 경의를 표한다’(후자의 두 사람은 현재 프랑스 안팎에서 신보수주의적 지식인으로 분류된다-역자)라며 주저 없이 반응했다.”(1) <<원문 보기>>

‘프랑스유대인기관대표위원회’(CRIF) 의장인 리샤르 프라스키에가 지난 1월 작성한 이 구절은 화약에 불을 지른 격이었다. 자신이 프랑스 유대인 전체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토론의 취소를 큰소리로 환영했을 뿐 아니라, 한 명의 여성 장관과 세 명의 유명 지식인을 자신과 연루시키면서 위풍당당하게 토론 중단 사건을 발표했던 것이다.

클로드 코엔 타누지를 제외한 세 명의 저명인사들은 그들이 토론 금지를 요구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심지어 이스라엘을 열렬히 지지하는 피에르 를루슈 정무차관조차 ‘역효과를 불러일으키는’ CRIF의 이런 방식을 ‘표현의 자유에 대한 구속’(2)이라며 개탄했다. 흔히 그렇듯 비판은 역으로 (표현의) 검열자들에게 향했다. 자유 옹호를 위해 모인 시민들은 윌름가(街)에서 150명 규모로 집회를 열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같은 시각에 팡테옹광장에서 1500명 규모로 ‘번개모임’을 열었다.

CRIF, 표현의 검열자 자처

이 사건은 단순한 소동을 넘어 CRIF의 과격화 현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발단은 세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20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3) 우선 미국의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협상이 결렬됨으로써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가 파탄나버린 것이 한 요인이다. 당시 이스라엘 노동당 출신 총리인 에후드 바라크는 자신의 ‘관대한 제안’을 거절한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의장에게 결렬 책임을 전가했다. 그 뒤 2차 인티파다 운동이 전개되자, 텔아비브는 2000년 9월 27일 리쿠르트당 당수 아리엘 샤론이 회교사원 광장을 도발적으로 방문한 사실을 ‘망각하고는’, 팔레스타인이 인티파다를 오랫동안 준비해왔다고 비난했다. 5년 동안 언론을 도배한 자살폭탄 공격(이스라엘인 600명 사망)의 공포로 인해 이스라엘군의 탄압(팔레스타인 5천 명 희생)은 일시적으로 가려진다. 결국 프랑스에서 반유대인 폭력행위가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2002년에 발생한 193건은 1년 전보다 6배 이상 늘어난 것이었다.(4)

새 의장인 로제 쿠키에르만이 CRIF를 우파 쪽으로 선회시킨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다. 2001년 앙리 아젠베르그의 후임으로 뽑힌 이 대은행가는 예전에 금융회사인 ‘에드먼드 드 로스차일드’와 ‘이스라엘 제너럴 뱅크’ 등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샤론 정부의 호전주의 정책을 옹호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프랑스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도한다.

피해자 이미지 과장해 정치권 압박

알랭 핀키엘크라우트는 “1985년 당시 의장이던 변호사 테오 클레인에 의해 시작된 CRIF 연례 만찬은 쿠키에르만의 지도 아래 일종의 저녁식사를 겸한 법정이 되었는데, 여기서 유대인 공동체는 프랑스 정부수반을 소환해 유대인이 하고 싶은 모든 말을 한다”라고 이야기한다. 알랭은 자신을 ‘부담스럽게 했던’ 이 행사를 ‘어느 정도 기묘한 의식’이라고 규정하면서, 유대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그들은 걸핏하면 앞장서서 공화국을 불평이 가득한 공동체로 모자이크하려 한다.”(5)

쿠키에르만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 이 법정을 이용하고, 그런 아이디어들을 곧바로 언론에 중계한다. 2001년 1월 만찬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증오’가 프랑스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인종적 위계와 가톨릭 신앙에 향수를 지닌 극우파’와 ‘반세계주의, 반자본주의, 반미주의, 반유대주의 운동의 경향을 띠는 극좌파’(6)를 통합하는 이른바 ‘갈-적-녹색 연합’을 제안하였다. 당시는 지식인들과 언론인들이 ‘반유대주의자’의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 소송의 시대였다. 처음에는 유대인 단체들과 지식인들 간에 거친 말다툼이 오가다가 나중에는 이것이 법정 소송으로 이어졌다. 다니엘 메르메, 다니엘 살르나브, 사미 나이르, 에드가 모랭 같은 지식인들이 유대인 단체의 표적이 된 것은 이들이 이스라엘 총리인 샤론의 중동 정책에 대한 지지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유대인 단체의 이런 시도는 무의미하게 끝났다. 아무런 혐의가 입증되지 못한 탓이다.(7)

그 어느 것도 심장병 전문의인 리샤르 프라스키에가 CRIF 의장에 당선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3년 뒤 그는 가볍게 재선되었다.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와 쇼아(Shoah·홀로코스트를 뜻하는 유대어) 기념재단의 주교회의 사이에서 연락을 담당한 그가 전임자의 일탈을 더욱 심화시킬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비록 그가 전임자의 자문위원이었다 해도.

비판론자들에 줄소송, 그러나 패소

프라스키에는 가자지구에 대한 ‘완벽 봉쇄작전’을 포함해 이스라엘 정부의 잇단 정책에 무조건 찬성했다. 이스라엘 기자들을 비롯한 지성인들이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이는데도, CRIF의 간행물과 사이트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는 또한 2차 인티파다 운동이 발발했을 때 “소년 모하메드 알두라의 죽음을 드라마화했다”고 비난하면서 예루살렘 주재 <프랑스 2> 특파원 샤를 앙데를랭을 공격했다.(8)

프라스키에는 심지어 피에르 앙드레 타기에프를 옹호하면서, 스테판 에셀을 ‘검은 짐승’이라고 비난하는 광적인 캠페인을 벌인다. 타기에프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에셀 같은 독사가 양심을 지니고 있는 척하면, 사람들이 그 머리를 으스러뜨리고 싶어하는 건 당연하다”(9)고 적고 있다. 그는 2009년부터 프랑스 공산당과 녹색당이 ‘메이드 인 이스라엘’이라는 라벨이 붙은 정착촌의 생산품을 보이콧하는 행사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두 당의  인사들을 연례 만찬에 초대하지 않고 있다. <르몽드>는 2010년 2월 3일, 이 만찬을 ‘공화국의 특성에 제한’을 가할 우려가 있는 일종의 ‘오스트라시즘’(도편추방)이라고 평가한다.

광기로 변해가는 증오와 배제

CRIF의 잘못된 버릇에 대해 오랫동안 신중한 태도를 취해온 언론이 점차 기탄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2009년 8월 8일 <마리안>에 게재된 편지에서, 장 다니엘은 “CRIF의 공동체적 일탈이 점차 빈번해지고 있으며, 동시에 기만적이고 은밀한 반유대주의를 자극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잡지의 편집진이 필명으로 사용하는 ‘프랑수아 다라’는 같은 호에서 “CRIF가 다른 유대인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비타협적인 이스라엘 우파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설명한다. <유대인 뉴스>도 2010년 1월 7일 “상당수의 집행위원회 위원들이 유대인 기관공동체를 본받아 점점 더 우파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현재 64개에 이르는 CRIF 회원단체들은 총회에서 매년 집행위원회의 3분의 1을 교체하고 있다. 집행위원회는 집행사무국을 선출하는데, 집행사무국에는 지난 두 번째 선거부터 좌파 위원이 단 한 명만 선출되었다. 2명의 집행위원회 부의장 중 한 사람인 메이에르 아비브는 극우청년조직인 베타르(Betar) 출신으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중요 정치자문관이자 친구이다. 그는 2009년 2월 네타냐후가 연립정부를 세울 수 있도록, 리쿠르트당과 다른 이스라엘 정당들 간의 협상을 주도했다.(10) 프랑스 지식인들을 ‘반유대주의자’로 낙인찍는 소송을 주도한 인물이자, 니콜라 사르코지가 2008년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그 자리에 초대받은 변호사 질윌리암 골드나델은 이듬해에 집행위원회에 입성한다. 그는 96표를 얻어 새 집행위원 중 1위를 차지했는데, 시온주의자인 동시에 친팔레스타인계인 사회당 변호사 파트리크 클뤼그만은 그보다 훨씬 못한 69표를 얻어 꼴등으로 입성한다.

프랑스 우파처럼 이스라엘 우파를 무조건 지지하는 모든 이들에게 몇 달 전부터 여러 가지 걱정거리가 생겼다. 그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둥들이 하나둘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현 이스라엘 정부가 법을 지키지 않는 탓에 점점 더 고립되어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2008~2009년 겨울 동안의 가자지구에 대한 위협적인 작전, 2010년 봄의 ‘평화 구호선단’에 대한 공격, 모든 평화협상의 중단, 이들 사건은 하나같이 이스라엘의 이미지에 먹칠을 했다. <BBC>가 최근 실시한 연례 앙케트를 보면, 설문에 답한 27개국의 조사 대상자 2만8천 명 중 49%는 이스라엘이 ‘전세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한 반면, 21%만이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응답자들은 파키스탄, 북한, 이란이 전세계에 가장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11) 1967년 전쟁 전으로 국경선을 되돌리고, 수도를 동예루살렘으로 삼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려는 거대한 물결이 일고 있는 와중에 이런 앙케트 결과가 나온 것은 CRIF 집행부에는 매우 난처한 일이다.

유대인 내부에서도 비판 목소리

아리엘 샤론이 “가장 야만적인 반유대주의”(12) 국가로 묘사한 프랑스에 대한 공포의 신화 역시 흔들리고 있다. ‘국가인권자문위원회’(CNCDH)의 통계는 매년 아랍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을 겨냥한 인종차별 건수와 반유대주의 폭력 건수를 비교했다. 그 결과, 이민자 출신 젊은이들이 반유대주의 폭력에 개입한 경우는 드물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데올로기의 범위 안에서 반유대주의는, 특히나 이슬람혐오증에 비하면 매우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이제는 CRIF의 획일성을 정면으로 문제 삼을 정도로, 유대인들 내부에서는 갈수록 다양한 의견들이 공개적으로 표명되고 있다. 우파에서도 많은 저명인사들이 이미 CRIF와 거리를 두었다. 상당수 사람들이 엘리자베스 레비, 에릭 제무르 또는 알랭 핀키엘크라우트를 본받아, 집단주의 반대 투쟁이라는 이름하에 CRIF에서 멀어져갔다. 좌파 시온주의자는 과거와 단절하면서 CRIF 앞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오래전부터 집행위원회 내부에는 소수의 좌파, 심지어 공산당이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의 평화주의 단체인 ‘제이스트리트’(JStreet)를 본받아, 2010년 4월 ‘이성에의 호소’를 시작한 ‘제이콜’(JCall)이 창설되었다(프랑스에서 약 8천 명 서명). 알랭 핀키엘크라우트와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지지하는 이 운동은 ‘평화의 구호선단’ 공격에 대한 공식성명에서 우선은 하마스를 비난했기 때문에 처음 몇 달간은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지만, 대담하게도 요르단 서안과 동예루살렘의 정착촌 개발을 비난하고, 가자지구의 봉쇄를 끝내라고 요구하고, 아랍혁명들을 우호적으로 환영하면서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벤알리와 무바라크를 무너뜨린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위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 투쟁한 것이다. 튀니지와 카이로의 새로운 과도정부는 자국민의 행복을 위해 전념하려는 것이지 전쟁을 하려는 게 아니다. 유대인이자 유럽 시민인 우리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되찾고 민주주의의 거대한 가족에 자랑스럽게 합류하기를 원하는 아랍 세계의 변화를 환영한다. 일탈의 우려가 없는 건 아니지만, 최악의 위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평화의 길을 그들과 함께 찾기 위해, 아랍 세계를 뒤흔드는 민주주의 운동에 이스라엘이 손을 내밀어야 할 순간이다”(13)라고 공식성명은 밝히고 있다.

이런 일들이 결코 프라스키에의 마음에 들 리 없다. CRIF의 집행사무국으로부터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은 프라스키에는 한편으로 이스라엘 정부 정책을 지지하고 예루살렘의 분리원칙을 거부하면서, ‘이성에의 호소’에 서명하는 것도 거부한다.(14)

젊은 무용수들은 다리를 180도 벌리는 연기가 가장 어렵고 때로는 가장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안다. 프라스키에가 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연기다. 프라스키에가 이끌고 있는 CRIF는 제2의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변했다. 과연 우파 인사들만이 이끌어가는 CRIF가 프랑스 유대주의 전체의 대변자가 될 수 있을까? 파리 사람 혹은 지방 사람, 동구 출신 유대인 혹은 지중해 연안 유대인, 세속인 혹은 종교인, 공화주의적 중립을 지지하는 사람 혹은 미국식 공동체 모델을 찬양하는 사람이 섞여 있듯이, 프랑스 ‘유대인 공동체’에는 획일적인 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CRIF의 지도부는 사회적·종교적·지리적·정치적 다원주의를 반영하지 않는다.

게다가 표현 때문에 혼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CRIF 내부의 ‘조직화된 유대인 공동체’는, 간략히 말해 ‘유대인 공동체’의 10분의 1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종교나 전통과는 무관하게 ‘혼합커플’로 살아가는 ‘유대인계’ 프랑스 사람들은, 만약 어머니가 유대인이 아니라면 유대교 교리에 따라 비유대계로 간주되어야 하기 때문에, 흔히 인용되는 유대인 수치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사회학자들은 신앙인이고 몇몇 관습에 충실하거나 비극적인 가족의 과거사에 의해 희미하게 묶인 모든 사람들을 유대인으로 간주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프랑스 극우와 묘한 경쟁관계

이런 술책은 훨씬 더 중요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다. CRIF의 영향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은 그들의 수단들(10여 명의 직원, 연간 예산 200만 유로, 그 중 4분의 1은 쇼아 기념재단으로부터 나옴)에서 비롯되기보다는, 정치적·미디어적 기존 질서가 CRIF에 부여해준 힘에서 나온다. 그런데 그 힘은 CRIF가 프랑스의 모든 유대인을 대변한다고 믿게 하는 능력에서 비롯된다.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은 종종 누가 더 이슬람을 혐오하는지를 두고 인민전선(FN)의 새 여성 총재와 경쟁하기도 한다. 2002년 4월 22일 쿠키에르만은 <아레츠>(Haareta)를 통해 르펜이 대통령 선거에서 얻은 표에 대해 축하의 말을 건넸다. 반면 프라스키에는 지난 3월 18일 <르몽드>에서 르펜의 딸을 경계하고 있다. 그는 특히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 투쟁 연맹’(Licra) 의장인 알랭 자쿠보위츠와 공동 작성한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민전선의 논법에서 유대인, 아랍인 또는 이민자가 예전에 차지했던 지위를 마침내 이슬람교도가 얻었다.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한다. 프랑스의 이슬람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1930년대 프랑스의 유대주의화를 비난했던 사람들과 똑같이 외국인을 혐오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프라스키에는 “마린 르펜이 인터뷰 도중 간간이 이슬람 진영을 ‘최고 야만적인 진영’이라고 규정했다 해서, 그녀가 고결한 진영에 속해 있다는 증명서를 우리가 수여하기라도 해야 하는가? 그건 상당히 곤란한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봄이 온 것은 아니다. CRIF 의장이 지난해 12월 이스라엘이 거창하게 환대한 극우파와 결탁하고 있다는 의심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 데는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불편하고 위험한 탈선을 멈추기로 하자면,  그의 몇 마디 말로는 충분치 않다.

글·도미니크 비달 Dominique Vidal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전 국제부문 편집장. 주요 저서로 <근동의 100가지 열쇠>(알랭 그레슈, 에마뉘엘 폴리, 도미니크 비달 공저·파야르·파리·2011)이 있다.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1) ‘파리고등사범학교(ENS)에서의 학회’, 파리, 2011년 1월 13일. 
(2) ‘누가 스테판 에셀의 목숨을 원하는가?’, <누벨옵세르바퇴르>, 2011년 1월 18일.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스테판 에셀과의 토론에 대한 ‘취소를 권고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누벨옵세르바퇴르>, 2011년 1월 18일. 
(3) ‘반유대주의 반대 투쟁이라는 이름으로’와 ‘해맑은 한 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2년 12월호 참조.
(4) 국가인권자문위원회 사이트의 ‘인종차별·반유대주의·외국인혐오증에 대한 반대 투쟁’에 대한 연간보고서 참조. 2010년의 마지막 보고서를 보면, 가자에서 대량학살이 벌어진 뒤 연속적으로 폭력행위가 증가하다가, 2010년에는 폭력행위가 상당히 줄어들고 있다. 반유대인 폭력행위는 131건(-24%), 인종차별주의 및 외국인 혐오 폭력행위는 165건(-25%) 발생했다.
(5) <유대공동체방송>(RCJ), 2005년 2월 13일.
(6) 2003년 1월 25일 CRIF의 만찬에서 로제 쿠키에르만의 담화. 
(7) 에스테르 방바사, ‘에드가 모랭, 이스라엘의 정의인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5년 10월 참조.
(8) ‘보이콧: 이스라엘과 그 친구들의 대반격’, 외교행랑, 2010년 2월 22일 참조.
(9) ‘피에르 앙드레 타기에프를 지지하기 위한 호소’, 2010년 11월 4일. 
(10) ‘네타냐후의 분신’, <예루살렘 포스트>, 프랑스판, 2009년 2월 10일.
(11) ‘부정적으로 비친 이스라엘, 조사 결과’, 유대전신기관, 뉴욕, 2011년 3월 7일, www.jta.org.
(12) <인터내셔널 라디오 프랑스>, 2004년 7월 19일.
(13) ‘두려워하지 말자’, 제이콜(JCall)의 공식성명, 2011년 2월 23일.
(14) ‘왜 나는 제이콜의 호소에 서명하지 않는가’, <르피가로>, 파리, 2010년 4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