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F, 극우로 변한 레지스탕스
1943년 프랑스 유대인 대표기구로 비밀스럽게 설립된 CRIF는 2차 세계대전 이전에 프랑스 유대인들을 분열시켜온 대립을 극복하면서 하나의 정치연합으로 탄생했다. 유대인 공동체 출신 레지스탕스들 대부분은 중부유럽에서 이민 온 유대인이다. 그들 중 일부는 공산주의를, 일부는 시오니즘을, 일부는 유대사회혁명주의(1)를 주장하는 등 다양한 파벌이 존재했다. 반유대주의 박해가 한창일 때 생겨난 CRIF는, 프랑스가 해방되자 유대인으로서 정치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초기, 공산주의자 등 다양한 구성
1944년 여름에 채택된 CRIF 헌장은, 집행위원회가 ‘프랑스 공권력에 의사표시를 하는 프랑스 유대인 공동체의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오랫동안 이 조직은 여러 단체들과 인물들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종교 학교들, 북아프리카가 식민지에서 벗어난 후 프랑스에 다수 넘어오게 된 마그레브 유대주의 공동체, 좌파 또는 우파 정치단체, 종교단체(그리스정교, 전통종교, 자유종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다원주의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도 다양한 관점을 표출했다. 초창기 조직 내부에 엄청나게 많았던 공산주의자들은 유대 국가 창설을 공공연하게 지지하는 데 반대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폴란드 문제가 표현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유대 민족주의 문제도 CRIF의 헌장 안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 후에 CRIF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전세계 이스라엘 동맹’이라는 단체가 CRIF의 국제적 활동을 크게 제한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모스크바의 친유대민족주의 노선에 동의해 1948년 5월 이스라엘 국가 창설을 축하했지만, 몇 달 뒤 소비에트 지도자가 아랍 국가들을 지지하기로 결정하자 스탈린의 노선을 따르게 되었다. 독일군 점령하에 가능했던 정치연합이 깨어지면서 CRIF는 약화되었다. 결국 회원들은 19세기부터 유대교 종무국이 존중해온 합의의 정치 전통을 따르게 되었다. ‘분리를 야기할 우려가 있는’ 모든 결정은 배제되었고, 이 때문에 예를 들어 CRIF는 알제리전쟁이 발발했을 때 130만 명의 유대계 프랑스인들이 살고 있는 영토에서 전쟁이 벌어지는데도 어떤 명백한 태도도 취할 수 없었다.
6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67년 5월과 6월에 전환점이 찾아왔다. 당시는 새로운 대량학살에 대한 공포가 프랑스 유대인 공동체 전체를 휩쓸고 있었다. 이스라엘에 어떤 특별한 애착도 보이지 않았던 레몽 아롱조차 만약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과의 군사적 충돌로 사라져버린다면, 더 이상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두렵다고 말했다.(2) 수천 명의 유대계 프랑스인들이 현대적 유대 공동체의 출현을 갈망하면서, 이스라엘을 지지하기 위해 결집했다.
비록 이스라엘이 전격적인 승리를 거두어 걱정할 필요는 없게 되었지만, 피에르 비달나케가 사용한 용어인 ‘광란의 날’(3)에도 CRIF는 그 어떤 역할도 수행하지 못했다. 그들의 단체를 변화시켜야 프랑스 유대주의를 변화시킬 새로운 역동성이 생겨나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CRIF는 “공권력과 충돌하지 않는 데 만족했고, 떠들썩한 총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온건한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했다.”(4) 1983년 의장에 선출된 변호사 테오 클레인이 CRIF의 행동 방식을 바꾸게 된다.
새 의장이 프랑수아 미테랑의 주변인물들이나 사회당과 절친했기 때문에, CRIF는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동시에 강제추방과 비시 정권의 책임 문제에 대한 정치적 토론, 사료 편찬에 대한 열띤 토론, 인민전선의 약진 덕분에 이 단체는 고급 좌담회에 자주 참석하게 된다. 여기에 클레인의 홍보 재능도 한몫한다. 그는 상원 로비에서 로랑 파비위스 총리가 참석한 CRIF의 최초 만찬행사를 1985년에 성사시키면서 단체를 공권력의 특정 대화 상대로 만들고, 정치계에 유대인의 견해를 독점적으로 전달할 권한을 암묵적으로 부여받았다.
CRIF는 경청받고 존중받고 인정받았지만, 1980년대 엘리제궁이 채택한 결정들, 특히 외교정책에 아무런 영향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CRIF는 1989년 여러 차례 항의에도 불구하고 아무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 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의 파리 방문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때 아랍권과 우호적 관계 유지
비록 외교정책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지만, 카르팡트라스의 유대인 무덤 훼손 사건이 벌어진 뒤, CRIF는 “‘기억의 의무’를 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1990년대 국내 문제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1990년 7월 13일의 독가스실 존재 부정에 대한 게소(Gayssot)법 제정, 인종차별적·반유대주의적 박해에 대한 국가기념일 제정, 독일군 점령하에 발생한 유대인 재산 강탈에 대한 마테올리 조사위원회 설립 등). CRIF는 전쟁 기간에 유대인 레지스탕스의 선도조직이었기 때문에, 그런 정책들을 논의할 자연스럽고 합법적인 파트너로 등장한 것이다. 인민전선(FN)을 막을 방패로 등장한 CRIF는 합의를 통해 입장을 결정하려는 태도를 취하는데, 이런 태도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분쟁에 대한 담화를 통해 더욱 강화됐다. 평화 프로세스의 열렬한 옹호자인 앙리 아젠베르그는 1995년 CRIF의 수장에 선출되자, 프랑스 주재 팔레스타인 대표단에 정치적 접근을 시도했다. 1995년부터 프랑스 주재 팔레스타인 총대표였던 레일라 샤이드는 CRIF의 전통 만찬의 초청대상자에 포함됐다. 그녀가 1997년 만찬 행사에서 열렬히 환영받자 언론들도 깜짝 놀랐다.(5) 1995년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암살되고, 리쿠르트당 당수인 베냐민 네타냐후가 선거에 승리했으나, CRIF는 내부 분열 상태에서도 이스라엘 야당인 노동당과 유사한 입장을 채택했다. 게다가 프랑스의 리쿠르트당 총재인 자크 쿠퍼는 그 자신이 ‘오슬로 평화 프로세스를 찬양하지 않는 사람들’(6)이라고 지칭한 리쿠르트당 지도자들을 나무랐다.
평화협상 결렬 뒤 극우화 치달아
평화를 위한 이런 참여행위는 CRIF가 근동에 외교 순회여행을 떠난 1999년에 절정을 이뤘다. 이 순회여행은 유대국가가 창설된 이래, 단체가 ‘이스라엘과의 연대감’을 갖기 위해 떠났던 전통적인 여행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아젠베르그는 그때 아라파트와 만났다. 이것이 네타냐후의 적대감을 자극했다. 그는 프랑스 대표단이 ‘근동의 평화와 민족들 사이의 우정’을 증진하기 위해 방문했음에도, 영접을 거부했다. 프랑스에 돌아온 CRIF 의장은 “유대인 공동체의 역할이 진화할 수 있다”며 “이스라엘이 어떤 정책을 펴든 무조건 지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아랍 세계, 그 지도자들, 언론 리더들과 많이 접촉해야 한다. 유대인 세계는 아랍 사회에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 국가 지도자들을 대신해줄 것 없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해외거주 유대인들의 성향을 알리고, 아랍 지도자들의 분석을 경청하는 것이 중요하다”(7)고 덧붙였다.
2000년 6월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이 결렬된 뒤, 곧바로 2차 인티파다 운동이 전개되고, CRIF의 수장에 로제 쿠키에르만이 선출되면서 이런 평화주의적 접근법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글·사뮈엘 질메일라크 Samuel Ghiles-Meilhac
주요 저서로 <프랑스유대인기관대표위원회(CRIF): 유대인 레지스탕스에서 로비 유혹까지, 1943년에서 현재까지>(로베르 라퐁·파리·2011)가 있다.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각주>
(1) ‘유대인사회혁명운동’인 ‘분트’(Bund)는 ‘러시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유대인 노동자 총동맹’의 이디시어(중부 및 동부유럽 출신 유대인이 사용하는 언어) 첫 글자다. 분트는 1897년 ‘빌라’(현재 리투아니아의 빌뉴스)라는 도시에서 창설되었다.
(2) <르피가로 리테레르>, 파리, 1967년 6월 12일.
(3) <르몽드>, 파리, 1967년 6월 13일.
(4) 이브 아즈후알·이브 드레, <미테랑, 이스라엘과 유대인>, 로베르 라퐁, 파리, 1990.
(5) ‘좌파와 우파,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CRIF의 연례 만찬행사에서 만나다’, <르몽드>, 1997년 1월 28일.
(6) 사뮈엘 질메일라크, <CRIF>, 위의 책.
(7) ‘리 아젠베르그에게 던지는 세 가지 질문’, <르몽드>, 1999년 5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