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노동자들, 혁명은 아직 ‘진행형’

2011-07-11     알랭 그레슈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축출로 혁명의 첫걸음을 내디뎠지만 아직은 전초전에 불과하다. 거리와 산업현장 할 것 없이 전국 곳곳에서 여전히 자유와 변혁을 염원하는 목소리가 높이 울려퍼지고 있다. 이번만은 빈곤층이 소외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유세프 샤인은 1958년 이집트 카이로 중앙역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명작 한 편(1)을 촬영했다. 머리가 조금 모자란 가련한 절름발이 청년 케나위의 아름다운 여인 하누나를 향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샤인도 카이로 중앙역의 그 흑백색 건물을 더는 알아보지 못하리라. 웅장한 람세스 2세 석상이 기자고원으로 이전한데다, 새롭게 단장하고 색칠한 건물 외관은 햇살 아래 반짝반짝 빛이 난다. 하지만 아무리 겉을 말끔하게 꾸미더라도 내부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다. 아직 공사가 한창인 역사 내부에는 여기저기 비계 구조물이 어지러이 널려 있다. 갈 길이 급한 승객들은 뜯어낸 건물 잔해 더미와 흙탕물 웅덩이 사이를 요리조리 피해가며, 안내 표지판 하나 없는 플랫폼을 찾느라 진땀을 뺀다. ‘대형 창고’라는 뜻을 지닌 마할라엘쿠브라시로 향하는 열차는 오후 1시 15분에 출발한다. 뿌연 유리창에 실내는 너저분한 객차로 승객들이 몰려든다. 이 열차에서 우등석은 꼬리 부분에 달린 객차 두 칸이다. 요금은 조금 비싸지만 자리 예약이 가능하고, 외부 기온이 40℃에 달하는 날에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온다.

퇴락한 ‘이집트 산업 본고장’

마할라엘쿠브라까지는 직선거리로 10km에 불과하지만, 2시간 넘게 달려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 가운데 한 곳인 나일강 삼각주 곡창지대를 지나는 데 이토록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열차는 도시화와 인구 증가 물결에 조금씩 잠식당하고 있는 지역들을 털털거리며 지나간다. 카이로·알렉산드리아 등 대도시가 심각한 인구 급증에 직면하자, 이 일대 여러 중소도시들이 인구를 상당 부분 흡수했다. 마할라(전체 지역 인구 200만 명 가운데 50만 명 차지)도 그런 중소도시 가운데 하나다. 19세기 초 실크를 독점 생산하던 마할라는 1817년 한 프랑스인이 들여온 우수한 품질의 면섬유가 각광받으면서 이집트 섬유 생산의 중심지가 됐다. 이후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해 유럽 내 미국 상품 수입이 중단되면서 이집트는 세계적인 면 수출국 반열에 오른다.

엘쿠브라역에서 미스르 방직공장까지 거리는 수백m에 불과하다. 하지만 비포장도로를 따라 노점상 수레와 인파 사이를 힘겹게 뚫고 지나가야 한다. 알록달록한 스카프를 머리에 둘러쓴 작업복 차림의 젊은 여공들이 제각각 버스와 기차, 단체택시, 인도에서 발명된 괴상한 모양의 오토바이 인력거 ‘톡톡’을 잡아타느라 도로가 온통 아수라장이다. 미스르 공장은 1일 3교대로 24시간 돌아가지만, 여성은 주간 근무만 하기 때문에 오후 4시면 일을 마치고 거리로 나온다.

‘이집트 산업의 본고장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자신감이 잔뜩 묻어나는 표지판 하나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미스르의 역사는 이집트 격동의 역사, 더 나아가 이집트 개발정책의 변천사와 궤를 같이한다. 이집트 최초로 국영은행을 설립한 탈라아트 하르브가 1927년 미스르를 창립했을 때, 시장에 나온 미스르의 주식을 사들인 것은 영국 투자자였다. 이집트는 형식적으로는 1922년 독립했지만, 여전히 실권은 영국이 쥐고 있었다. 1954~56년 영국이 이집트에서 철수하고 수에즈 전쟁으로 패권이 약화되는 비참한 처지에 이르면서, 미스르는 ‘이집트 소유’가 된다. 그러다 196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사회주의법’의 일환으로 국영화한다. 당시 이집트는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대대적인 산업화 작업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를테면 헬완에 강철공장을 세우거나, 나일강 수위를 조절하고 대규모 국가 건설 사업에 필요한 전력을 확보하기 위해 아스완댐을 건설했다.

1970년 안와르 사다트가 정권을 잡으면서 ‘인피타’(경제개방) 정책이 시작된다. 인피타 정책은 민간투자를 활성화하거나 국영기업을 청산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1990~2000년대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주도하에 개방정책이 더욱 탄력을 받는다. 하지만 미스르 공장을 비롯한 몇몇 국영기업은 끝까지 남아 승리의 저항을 이어간다. 흡사 만화 <아스테릭스>의 마을을 연상시키는 이들의 저항은 전 국민에게 깊은 감흥을 남긴다.

울타리가 쳐진 드넓은 미스르 부지 안에는 본사와 사무소, 공장뿐 아니라 간부 직원과 공장 노동자를 위한 기숙사, 전 직원이 이용할 수 있는 체육시설과 의료시설, 극장, 수영장 등이 있다. 공장 인근에는 식료품이며 가구, 의류 등을 싸게 살 수 있는 구판장이 있다. 건물 몇 동은 흡사 정부의 무관심이 낳은 산물인 양 버려진 상태로 남아 있다. 이를테면 구내식당은 더 이상 문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현장을 방문한 우리는 미스르 모델이 영국에서 들여온 온정주의적 자본주의인지, 아니면 정녕 나세리즘에서 비롯된 실질적 사회주의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민영화, 향수로만 남은 옛 영광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미스르 모델은 전 국민에게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 시민들은 최저소득 1만2천 파운드(2) 이상을 요구하는 것과 더불어, 2000년대 대부분 미심쩍은 조건으로 민영화된 공장들을 도로 국영화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공공부문 강화 요구는 과거에 이미 한 차례 반발에 부딪힌 적이 있다. 특히 미국이 반대했다. 지난 5월 21일 퇴임을 앞둔 마거릿 스코비 주이집트 미국대사는 “민영기업을 다시 국영화하는 것은 투자 저하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역사적으로도 민영화는 많은 나라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등 매우 건전하고 유용하며 이로운 정책이라는 점이 판명됐다”고 지적했다.(3)

이집트에 머문 다른 여러 서방 동료와 마찬가지로, 스코비도 대사직을 수행하는 3년 동안 눈뜬 장님이요 귀머거리였던 것일까? 이집트 언론은 스코비 대사도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매일같이 이집트 국민이 민영화에 얼마나 회의를 품고 있는지 보도해왔다. 이집트 법정 역시 대형 백화점 체인 오마르 에펜디의 민영부문 매각 조건에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계약 취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한편 길고 좁다란 대지로 지중해와 분리된 부룰루스 호수의 어부 3만 명은 정부가 수산 관련 기업에 무단으로 자신들의 터전을 제공한 것에 반발해 투쟁을 벌였다. 부호인 왈리드 빈 타랄 사우디아라비아 왕자는 1998년 이집트-수단 접경지대 농지 10만 파단(Faddan·이집트의 면적 단위)을 매입했다가, 결국 그 가운데 7만5천 파단을 이집트 국민에게 기증해야 했다. 말이 좋아 기증이지, 훔친 땅 일부를 돌려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잇삼 샤라프 이집트 총리는 사우디 왕자와의 계약을 “평화협상에 의한 아랍·외국인 투자 장려”라고 표현했다. 20% 세율 일괄 인상과 법인세 부과안을 포기한 이집트 정부와 최고군사위원회는 경제 부문에서 자유주의 정책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지난 6월 5일 동일한 거시경제 및 재정균형 정책을 실시한다는 조건으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30억 달러 차관을 제공받기로 협정을 맺은 것이다. IMF는 이미 지난해 4월 14일 한 보고서에서 이집트 정부가 2004년부터 실시하는 정책을 “건전한 거시경제 정책과 개혁”이라고 치켜세웠다.

2000년대 시행된 민영화의 부담은 순전히 임금노동자 몫으로 돌아갔다. 노동자는 수만 명씩 대량해고 사태에 직면하거나, 점차 혹독해지는 노동조건을 감수하는 처지로 전락했다.(4) 마할라 지역의 경우 섬유산업에 고용된 노동자 수가 22만5천 명에 달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 국영기업(미스르의 경우 2만3천 명)에 고용된 수는 2만5천 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100여 개 기업에 분산 고용돼 있고, 그 가운데 노동자가 1천 명을 넘는 기업이 32개에 이른다. 국영기업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하루 8시간이지만, 민영기업은 12시간에 육박한다. 휴가는 물론 상여금도 없고, 월급의 대부분은 수당이 차지한다. 더욱이 16살 이하 어린이는 제대로 된 임금을 못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여성 노동자들 “미래가 우리 손에”

마할라 서민 지역에는 공산당 산하 노동운동단체 ‘아파크 이슈티라키’(사회주의 지평)의 사무소가 있다. 이곳은 좌파 세력권에 속한 마할라시 지역 노조원들이 만나는 장소로 활용된다. 이 단체에는 여성 2명을 포함해 모두 12명이 일한다. 사무실에는 가말 압델 나세르와 그의 자유장교 동료 가운데 1명인 칼레드 모히에디네, 그리고 노동인권 변호사 나빌 엘 힐라리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팔레스타인 깃발 여러 개도 실내를 장식하고 있다. 벽면에는 ‘물가 상승에 경고등이 켜졌다. 임금인상 쟁취하여 먹을거리 마련하자’라는 글귀가 붙어 있다. 지금의 임금으로는 갈수록 먹고살기가 힘들어지는 물가 상승에 대한 근심이 담긴 구호다.

최근 몇 년간 당원 여러 명이 해고됐다. 파업에 가담하거나,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이집트노동조합연맹(FSE)을 대신할 개별 노조를 창설하려던 것이 원인이었다. 위드다드 디미르다시는 1984년부터 미스르에서 일하고 있다. 화려한 색상의 스카프를 머리에 두른 그녀는 남자들이 한 번씩 말을 가로막아도 의연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녀는 먼저 직장 생활과 집안일을 병행하며 노조 활동을 하는 여성 노동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고단한지 설명했다. 그녀는 2006년 기업 이윤에 따른 성과급을 쟁취하기 위해 처음 투쟁에 참여했다. “남자 직원들은 머뭇거렸지만, 우리 여성들은 거리로 직행했다. ‘남자들은 대체 어디 있는가? 우리 여자 노동자들은 여기 있는데!’라고 외치며 남자 노동자들을 자극했다. 그러자 남자 노동자도 여자들 뒤를 따라 거리시위에 동참했다. 이날 이후 모두의 이목이 마할라에 집중됐다. 다들 미래가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노동자는 혁명의 숨은 주역인가

과거 ‘노동자의 요새’로 불리던 프랑스 르노와 마찬가지로, 2000년대 후반 미스르도 ‘빛나는 미래’를 상징했다. 하지만 타흐리르 광장 시위 열기에 너무 도취된 나머지 국내외 언론은 노동자가 이집트 혁명의 기원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5) 디미르다시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4월 6일을 빼앗아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날, 그러니까 2008년 4월 6일, 여기서 물가 폭등에 대한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6) 하지만 지난 1월 25일 시위를 주도한 투쟁운동이 ‘4월 6일’이란 이름을 빼앗으면서 노동자로 이어지는 투쟁의 계보도 깨끗이 지워졌다.

45살의 노동자 모하메드 아타르는 투쟁운동이라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참가하다가, 결국 가공할 이집트 보안군의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보안군은 노조 선거는 물론, 직장 생활까지 방해했다(이런 행태는 모든 기업, 모든 시민의 일상에까지 확대됐다). “지금은 다른 지역도 우리를 따라하고 있지만 공장 앞 부지 점거나 천막 시위 등 갖가지 투쟁 방식을 처음 창안해낸 것은 바로 마할라였다. ‘카이로 고층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 전 사회 계층에게 시위를 촉구하는 방식이나 좌파 정당에서 무슬림형제단에 이르기까지 야권 세력 전체와 폭넓게 연대한 방식 등도 모두 우리 작품이다.” 2008년 4월 처음으로 무바라크 대통령의 초상화가 갈가리 찢긴 곳도 바로 마할라였다. 당시 정부는 투쟁 저지를 위해 마할라 전 지역의 인터넷 공급을 끊었다. 지난해 10월에는 전국적으로 인터넷을 차단하는 모의 훈련까지 했다. 오랑주의 자회사인 모비닐을 비롯한 모든 통신회사가 정부 훈련에 흔쾌히 협조했다.(7)

그렇다면 노동자는 진정 혁명의 숨은 주역인가? “이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왜 지금까지 리비아에서도 예멘에서도 바레인에서도 저항운동은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일까?” 카이로의 한 사무소에서 우리를 맞아준 무스타파 바시우니가 물었다. 사무실 안은 에어컨 바람으로 손발이 얼어붙을 정도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열띤 분위기가 감돌았다. 일간지 <알타흐리르> 창간 준비가 한창인 덕분이었다. 노무 전문가 바시우니는 “튀니지에서는 튀니지노동총동맹(UGTT)의 총파업 선언이 정권에 직격탄을 날렸다. 이집트에서는 교통이 중단되면서 나라 전체가 마비됐다. 최근에도 정치적 성격의 파업 사태가 늘어나고 있다. 한 예로 2009년 1월 ‘캐스트 리드’(Cast Lead) 작전 기간에 대이스라엘 수출 저지 파업에 동참한 수에즈의 한 비료공장이 이번에도 정치적 목적의 파업을 일으켰다”고 설명했다.(8) 그렇다면 이집트에는 타흐리르의 중산층이 사는 이집트와 나머지 계층이 사는 이집트, 이렇게 두 개의 이집트가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다. 세 개의 이집트가 존재한다”라고 프랑스 사법기록연구센터(CEDEJ)에서 일하는 젊은 연구원 알라아 에디네 아라파트가 대답했다.(9) 벌써 2년째 이집트 방방곡곡을 헤집고 다니는 그는 사태를 이렇게 분석했다. “먼저 카이로,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대도시가 있다. 이들은 주로 민주주의나 자유를 부르짖는다. 다음으로 나일강 삼각주 지역을 비롯해 중소도시와 농촌이 있다. 대개 실업·교육·물가 등의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반미·반이스라엘 정서가 팽배한 곳이다. 마지막으로 시나이반도, 이집트 일부 내륙 지역, 마스라·마트루 같은 ‘주변부’ 지역이 있다. 소외 지역의 지위나 중앙정부로부터 푸대접을 받는 지역민의 정체성 등과 관련한 문제에 관심이 많다.” 그렇다면 이집트 혁명 이후 상황은 달라졌을까? “민주화 혁명으로 첫 번째 부류가 겪는 문제를 만들어낸 주범들은 사라졌다. 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류를 괴롭히는 이들은 여전히 똑같은 문화와 똑같은 마인드로 남아 있다.”

부르주아는 투쟁 더 바라지 않아

젊은 변호사 30여 명이 카이로 대법원 층계에서 손팻말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타흐리르 광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까지 잘 들리도록 또박또박 경쾌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가말(무바라크의 아들)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법정에도 1천 명의 가말이 있다.” 사법계의 족벌주의를 꼬집는 말이다. 요즘 이집트에서는 하루는 부패한 기업 총수의 퇴진, 또 하루는 학장의 사퇴(지난 6월 초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카이로 예술 단과대학에서는 국가보안군의 개입 없이 학장을 선출했다) 등 단 하루도 시민들의 시위 구호가 들리지 않는 날이 없다. 구정권과의 결탁으로 난처해진 알아즈하르대학이나 콥트 교계의 고위 인사도 비난의 화살을 피해갈 수는 없다. 이집트 내륙 지역 나그하마디에서는 알루미늄 공장 노동자들이 자녀를 취직시켜주고 상여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지난 6월에는 수에즈운하회사 직원들이 과거 약속 이행과 무바라크가 임명한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며 또다시 파업에 돌입했다. 어제는 수백 명의 의사들이 의료 예산을 3.5%에서 15%로 인상하라며 농성을 벌였다. 내일은 운수 부문 노동자들이 해당 정부 부처를 점거할 예정이다. 이처럼 산발적인 형태로 벌어지는 크고 작은 투쟁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차곡차곡 쌓여왔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향후 선거 실시, 예배시설에 관한 법 개정, 국영 언론의 개편, 구정권 고위 공직자 재판, 경기 부양, 경찰 및 국가보안군 조직 개편, 수백 개에 달하는 시의회 해산 및 의원 선출, 민주주의 체제 아래 군부의 역할, 대학의 위상, 최저임금 채택, 고위 공직자 교체 여부, 노동조합에 관한 법률 등등.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줄줄이 나열돼 산적한 문제 앞에서 이집트를 통치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날 것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세워진 것이 아니다. 혁명도 마찬가지다. 개혁해야 할 문제가 많을수록 투쟁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정부의 오랜 탄압에 세력이 약화되고 분열된 좌파 세력과 노동계는 다시 한번 힘을 모아 투쟁에 나서야 한다.

산적한 과제, 좌파와 노동계의 남은 투쟁

타흐리르 광장과 연결된 카스르알아이니 거리 건물 3층에는 개별노조연맹(FSI) 사무소가 초라하게 자리하고 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마다 4~5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휴대전화 벨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댄다. 벽에는 멍키스패너를 꼭 거머쥔 주먹 하나가 그려진 포스터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활기 넘치는 퇴직자 가랄 슈크리가 사람들로 붐비는 사무실 구석에 작은 빈자리 하나를 찾아냈다. “나는 1979년에는 국영 통신회사 노조 대표로, 1987년에는 이사회 노조 대표로 선출됐다. 국영기업에 대한 법률을 근거로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퇴직을 앞둔 2006년 회사가 민영화됐다. 2800명에 달하던 직원이 700명으로 급감했다.” 그는 다른 퇴직자들과 함께 투쟁에 나섰다. 2004년부터 퇴직연금이 제자리걸음을 했지만 퇴직자의 이해를 대변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2008년 슈크리는 개별 노조를 창설했다. 1월 25일이 지나서야 정부의 정식 인가를 받은 이 단체의 전체 노조원은 20만 명에 달한다. 그는 다른 개별 노조를 모아 FSI를 창설했다. 여기에는 통신회사 노동자와 세무 공무원, 교원단체 등도 포함돼 있다. 그렇다면 FSI의 가장 큰 과제는 무엇일까? 바로 수백만 명에 달하는 민영기업 노동자를 결집하는 것이다. “신도시, 관세자유지역으로 진출할 것이다. 거기서 지역단체를 조직하고, 조직원을 양성하겠다. 10월 안에 노조결의대회도 열고 싶다. 현재 개별 노조들의 인증 절차를 밟고 있지만, 노동부가 지지하는데도 지방정부의 벽에 부딪혀 표류 중이다.”

그는 이틀 전 최저임금 인상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경영자들을 만났던 일을 떠올리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경영자들은 이집트를 스위스와 혼동하지 말라며 그를 몰아세웠다. 지금처럼 경기가 불안할 때는 자본 대비 투자 수익이 50%가 돼야 하는데, 그가 기업의 이윤을 침해하고 있다며 맹비난했다. 그러자 아메드 보라이 노동이민부 장관이 침착한 태도로 대답했다.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활달한 성품의 보라이 장관은 학위로 무장한 이집트의 얼마 안 되는 노동권 전문가 중 한 명이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고, 1년 동안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런 그가 경영자들에게 “최저임금 협상이 실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기나 하는가? 시민들이 다시 타흐리르 광장으로 뛰쳐나오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불태워버리고 말 것이다”라며 따끔하게 일침을 놓았다.

노동부 장관도 기본급이 전체 임금의 20%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수당이 차지하는 현행 임금제도를 손봐야 한다고 여겼다. “기본급과 수당의 비율을 서로 뒤집고, 1991년 폐지된 실업수당을 부활시키고, 노동자 간 임금 격차를 줄여야 한다.” 그는 국영기업(민영기업의 경우 노사정위원회가 최저임금을 결정한다) 노동자의 최저임금을 700파운드로 정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이 금액은 노조가 요구한 1200파운드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꿈꾸기를 멈추느니 죽음을”

지난 6월 중순 최고군사위원회는 정권을 잡은 다음날 내렸던 파업금지 결정을 실행에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이미 수많은 파업에 강경 진압으로 대응해왔지만, 매번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더욱이 이런 방법으로는 이집트가 처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현재 이집트가 겪는 문제들은 관광산업 침체나 리비아로 떠났던 노동자 50만 명이 고국으로 대거 돌아오는 현상 등과 맞물려 있다. 게다가 수십 년 전부터 지속된 자유주의 경제정책도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다. 상황이 이런데도 군부나 일부 이슬람주의자, 자유주의 세력이 원하는 것은 그저 사회적 안정뿐이다.

소설 <택시>(택시 안에서 카이로 시민들과 세상사에 대해 나눈 상상 속 대화를 담은 화제의 소설)(10)를 저술한 작가 칼레드 카미시는 지금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이집트에는 현재 두 개의 힘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더 효과적으로 혁명을 잠재우기 위해 혁명을 이용하는 군부세력과 진짜 혁명세력.” 물론 몇몇 사람은 과거 수많은 혁명이 여러 해에 걸쳐 진행됐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 혁명이란 ‘넵스키 대로처럼’ 직선으로 뻗어나가야 하는 것이라며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11) 이런 비관론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에서는 아직 희망이 죽지 않았다. 지난 5월 말 타흐리르 광장에 걸린 어느 펼침막 문구처럼, “꿈을 꾸기를 멈추느니, 죽고, 죽고, 또 죽는 편이 나으리라”.

글·알랭 그레슈 Alain Gresh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영화 <중앙역>(Bab El-Hadid).
(2) 1이집트파운드는 약 0.12유로. 하지만 이 수치만으로는 구매력을 측정할 수 없다. 1200파운드(약 140유로)는 4인 가구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최저소득으로 인식된다.
(3) <아흐람 온라인>, 2001년 5월 21일.
(4) 프랑수아 클레망, ‘신노동시장’, <이집트의 오늘>, 비옹탕 바테스티·프랑수아 브르통 엮음, 악트쉬드 출판사, 아를, 2011.
(5) 라파엘 켐프, ‘혁명 이후의 혁명, 이집트 노동자들 일어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3월. <마니에르 드 부아르>에도 인용. ‘아랍 각성에 대한 이해’, 제117호, 2011년 6~7월.
(6) 조엘 베냉, ‘굶주린 배를 움켜쥔 이집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5월. 이집트 노동자 계층 및 투쟁에 대해서는 연대센터(Solidarity Center)가 작성한 보고서 ‘The struggle for worker rights’(워싱턴, 2010년 2월)를 참조할 것.
(7) ‘Outrage over exoneration of Egypt telecom giants in communications shutdowns’, <아흐람 온라인>, 2011년 6월 1일.
(8) 튀니지 민주화운동에 관한 한 르포 기사(‘튀니지, 웬 굴욕인가?’, <리베라시옹>, 2011년 6월 11~12일)에서 크리스토프 아야드는 모나스티르에서 일어난 가자행 소형 함선에 대한 폭력적인 선박 검사 사건을 추적했다(2010년 5월 30일).
(9) 그는 <The Mubarak leadership and the future of democracy in Egypt>(팔그레이브 맥밀란 출판사·베이징스톡·2009)를 출간했다.
(10) 악트쉬드 출판사, 아를, 2010.
(11) 국제공화당연구소(매사추세츠주 세일럼시 소재)가 실시한 설문조사 ‘Egyptian Public Opinion Survey’(4월 14~27일)에 따르면, 응답자 중 89%가 경제 상황은 나쁘거나 혹은 매우 나쁘다고 느끼지만, 81%는 이집트가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