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찾아, 리비아로 간 내 친구
현재 리비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는 데 적절한 사례라 여겨지는 이야기를 하나 하고자 한다. 리비아 사태 발발 후, 인접국인 튀니지로 가족과 함께 피신한 한 사업가 친구의 이야기이다. 그는 오욕을 청산하기 위한 혁명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했다. 그는 병원을 수색해 부상당한 리비아 반군들을 가차없이 사살하는 카다피군 수하들을 피해 몰래 국경 밖으로 넘겨지는 부상자들의 치료비를 댔다. 하지만 그 걸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주변의 부상자들과 반군들에게서 느낀 투쟁의 매력은 그에게도 전달되었다. 친구는 그들이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행복해하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리비아 국민은 체제의 인질로 붙잡혀 세상과 조국, 심지어 자신으로부터도 단절되어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가끔 내게 전화해 전쟁 진행 상황을 전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그 때마다 그는 전쟁 종결과 해방이 지체될수록 무고한 피해자들만 늘고,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 길어질 뿐이라며 답답한 심정을 내비쳤다. 나는 응분의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되는 것이 세상의 섭리라며 그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리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몇 주 전, 다시 전화를 받았다. 그는 반군 부상자들처럼 ‘행복’을 찾기로 결심했다며, 리비아로 몰래 돌아가 전투에 참여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부상자 치료에 금전적 지원을 하는 것도 최전방 전투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100번 이상 자신을 설득해봤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신이 당신의 대리자로서 인간의 가슴에 남겨둔, 기적이라고 여겨야 할 ‘양심’이 그런 자위를 허락지 않았다. 남은 것은 현실과 맞닥뜨리는 것뿐이었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부상자들의 얼굴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천국과도 같은 행복을 맛보려면, 신성한 마음으로 총을 드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에게 하루만 생각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부탁을 한 것은 단지 그가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힘들었던 지난 몇 년 동안 나 자신보다 더 가까운 동반자였고, 그처럼 갑작스레 운명을 따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알프스의 거친 들판으로 빛을 찾아 떠났다. 대자연이 한 번도 그릇된 가르침을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던 나는 그 속에서 조언을 찾으려 했다. 대자연의 태연함 속에서, 그 준엄한 고요 속에서 기억 저편에 숨어 있던, 내가 늘 사랑한 칸트의 격언이 떠올랐다. 마치 깊숙이 간직해두느라 잊고 있던 부적과도 같은 그 말이.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는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의무! 이것이야말로 행복에 대한 파란만장한 이야기에서 빠진 부분이다. 마법의 호리병을 여는 주문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장중한 종교의식을 북돋우는 고대의 신탁이나 다름없다. 나는 대자연을 신봉한 철학자가 말했던, 대자연이 준 조언을 품고 돌아왔다. 물론 친구에게 좀더 설득력 있게 들리도록 조금 덧붙인 부분도 있었다. 의무를 완수하지 못한 채 얻는 행복이 초라하기 짝이 없듯이, 의무를 다하겠다고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는 것도 정도를 넘어서는 일이라 말해주었다. 그는 내 설명을 마음에 들어했다. 예언자들의 제왕 격이라 할 수 있는 플라톤의 논리를 몸소 실천하며 마주 앉아 대화하는 기쁨을 나누던 때처럼 말이다. 플라톤은 친구와 대화하는 것보다 더한 행복은 없다고 했다.
말로 그것을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신의 섭리로 지혜를 깨달은 사람들이 그렇듯, 자신의 생각을 말로 형상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그로서는 더더욱 이런 설명이 마음에 들었으리라. 긴 시간 동안 의무에 대해 논한 끝에 그는 다음날 ‘대탈출’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했다. 그는 ‘대탈출’이 전쟁에서 패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피신하는 그런 탈출이 아니라 했다. 그의 탈출은 피난지인 튀니지를 벗어나, 피난 속에서도 조국을 되찾으려는 탈출이라고 했다. 탈출. 이기심이라는 우물 속에서 자유라는 천국을 찾아가는 탈출이다. 비록 그가 말하는 자유가 의무를 다함을 의미하는 자유인지, 철학의 거장(1)이 말한 자유의 절정 형태인 죽음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치열한 전투라는 성역에 있더라도 연락을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벌써 몇 주째 소식이 없다. 나는 그가 어찌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의 선택을 축복한 나는 그에게 죄를 지은 것일까? 사실 나 자신에게 죄를 지었다고 봐야겠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것을 죄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만일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이 일로 인해 영혼을 잃을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는 자신을 속박했던 것을 잃거나, 의무라는, 인간의 가장 신성한 바람을 회피했다는 수치스러움 외에는 잃을 것이 없었다. 다른 이들이 되찾아준 해방 덕에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창피스러움 외에는 잃을 게 없었다. 사악한 괴물의 손아귀로부터 직접 조국을 되찾는 대신, 자신의 형제들로부터 그것을 선물받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가 산다는 수치스러움 외엔 잃을 것이 없었다. 만일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단지 조국이 해방되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해방에 일조했다는 사실 역시 중요하다. 조국의 영혼은 바로 그들을 해방시킨 사람들이지, 그냥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행복한 죽음을 맞는 사람들은 오로지 순교자들뿐인 것이다.
만일 내 친구의 일이 현재 리비아에서 벌어지는 다른 많은 일들 중 오직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더라도 내가 감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합당한 복수나 잃어버린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닌, 힘겨운 피신생활로부터 벗어나고자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이들이 바로 영웅이다. 폭정이라는 어둠 속에서는 모든 것이 피신의 운명에 처해진다. 가치도, 조국도,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도, 조국에 헌신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신념도, 히드라의 뱃속에 떨어진 수많은 것들 중 최초의 희생물인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인 진리도. 폭정이 먹어치우는 어둠 속으로 자연조차 사라져버리고, 그 뒤를 이어 하늘도 사라져버린다.
리비아 국민의 상상 속에서 이러한 불행은 이미 예견되었던 것이다. 목자(카다피를 뜻하지만, 예언 자체를 인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카다피라고 직접 칭하지는 않음)가 불행에 젖은 나라를 40년간 통치하고 나면 미래가 찾아오리라는 예언과 함께.
처음, 사람들은 이 예언을 가볍게 넘겼다. 하지만 악몽이 길어지자 이들은 기다렸다. 해방이 지체되면서 그들은 기도했다. 불행이 그들에게 닥칠 때도 그들은 용서했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렸던 끝이 찾아왔을 때, 그들은 희망을 잃어버렸다. 예언이 말한 마법의 기간을 넘어섰으나 독재자는 건재했고, 리비아 국민은 예언이 빗나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희망을 잃어갔다. 예언에 담긴 신의 뜻을 거스를 정도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압제라는 사실을 그들은 깨달아야만 했다. 예언 속의 목자가 고대의 신 수타이흐(2)의 선례를 따르지 않고, 예언대로 죽기 위해 잠자리에 들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세상이 무언가 이치대로 돌아가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고, 상황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 일어서게 되었다. 40여 년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간 동안 그들이 기만당했고, 안녕을 위한 구세주가 아닌 거짓 구세주와 거짓 예언에 희생되었음을 깨닫고 일어난 것이다. 40년간 그들을 갉아먹은 악성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무기를 든 것이다. 이는 죽음을 불사하는 외과수술이나 다름없다. 그들의 안녕을 위해, 그들 속에 깊숙이 박혀 있던 인생의 껍질을 제거하기 위해 피부와 살을 분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역사적인 대수술의 감행을 위해 메스를 들고 거리로 나온 그들을 보라.
위대한 역사, 바로 역사를 말해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루소가 그것을 두고 말했듯이. “폭정도, 전쟁도, 음모도 없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3)
글·이브라힘 알코니 Ibrahim Al-koni
소설가. 리비아 작가로 가장 저명한 아랍권 작가 중 한명이다. 대표 저서로 『황금먼지 Gold Dust』가 있다.
번역·김윤형 hibou98@naver.com
<각주>
(1) 임마누엘 칸트를 말한다.
(2) 이슬람시대 이전의 신적 존재로, 전설에 따르면 자신의 죽음을 정확히 예견했으며, 페르시아 제국의 멸망도 예언했다고 한다.
(3) 장자크 루소,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예술과 과학에 관한 이론』, 1750년.
‘신성한 프로파간다’는 없다
사담 후세인에서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까지, ‘새로운 히틀러’들이 교대로 등장했다. 현재 서구인들의 환상에 전면으로 등장한 인물은 무아마르 카다피다. 과연 누가 이 순수 악의 화신과 협상하거나 새로운 ‘뮌헨 협정’(히틀러에 대한 유화책)을 맺겠다고 나서겠는가?
현재 리비아에서는 ‘대량학살’이 자행되고 있고, 민간인에 대한 공중폭격이 가해지고 있으며, 집단적 방식으로 강간이 행해지고 있다(단순히 ‘하녀를 농락’하는 수준이 아니다)는 말이 들린다. 몇 주 동안 북대서양조약기국(NATO)의 군사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진실’들이 유포되었다. 카다피 정권이 저지른 온갖 만행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터내셔널 크라이시스 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이 펴낸 보고서(1)는 실제로 공중폭격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으며 현재 진행되는 일들이 “흔히 대량학살이라고 정의되는 바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견해를 담고 있다. 집단강간설에 대해서는 현지조사단에 의해 아직 확인된 바 없다.(2)
그렇다면 반군 병사들은 모두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용감한 기사들’일까? 지난 5월 유엔 인권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카다피군에 의해 ‘반인륜 범죄’와 ‘전쟁 범죄’가 자행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반군 역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국제앰네스티와 휴먼라이츠워치도 같은 의견이다. 이게 과연 놀랄 일일까? 베르나르 앙리 레비가 엘리제궁에 소개한 리비아 반군 과도국가위원회 의장 무스타파 압델 잘릴은 불가리아 간호사 고문 사건(3)의 책임자로, 압델 파타 유네스 및 이드리스 라가(현재 과도국가위원회 군사 책임자)와 함께 고문에 직접 연루돼 있다.(4)
유엔안보리가 “공격의 위험에 처한 민간인들을 보호한다”(5)는 명목으로- 유럽연합은 전쟁을 피해 몰려드는 난민들의 입국을 거절함으로써 안보리가 내세운 명목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결의안 1973호를 채택한 지 3개월이 지난 후, NATO는 결의안 문구에 구애받지 않고 국제적 동의도 없이 카다피 축출을 목표로 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NATO는 카다피가 떠나기 전에는 협상에 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모든 정치적 해결 가능성을 차단하고 전쟁을 장기화하고 있다. 작전상 ‘실수’가 발생하거나, 리비아의 내분을 초래하거나, 사태가 더욱 극단적으로 치닫게 될 위험을 무릅쓰고 있는 것이다. 그 대가는 리비아 민중이 치르게 될 것이다.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Making sense of Libya>, Bruxelles, 2011년 6월 6일.
(2) ‘Doubts arise over Libyan rape allegations’,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2011년 6월 21일자.
(3) 불가리아 간호사 5명과 팔레스타인 출신 의사 1명이 벵가지 아동병원에서 근무 중 1998년 어린이 426명에게 에이즈 감염 혈액을 고의로 수혈해 50명을 죽게 한 혐의로 총살형을 선고받았다. 그들은 8년간의 수형 끝에 2007년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4) ‘카다피에게 봉사했던 리비아 반군 지도자들’, L’Express.fr, 2011년 3월 29일. www.lexpress.fr.
(5) 세르주 알리미, ‘전쟁의 함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4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