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미국, 실리 앞에 과거를 덮다

2011-07-11     자비에 몽테아르

미국 정부의 베트남전 개입과 관련한 날조를 폭로하는 비밀 보고서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 1945년부터 1967년까지’가 대중에게 공개됐다. 한편 베트남 정부는 과거사를 청산했다. 더 나아가 지난해 여름 미국의 첫 군대가 상륙한 베트남 연안에서 양국의 합동 군사훈련이 전개됐다.

베트남 남쪽 깜라인만. 여기서는 ‘동해’라고 부르는 남중국해의 파도가 바람에 일렁인다. 철조망으로 빽빽이 에워싸인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따라가면 베트남전 때 미군 부대가 건설한 해·공군 기지가 나온다. 낡은 검문소에는 썰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검문소의 군인과 세관원은 빈둥거리며 시간을 죽인다. 군사 항구에 방문객은 불청객이다. 하기야 일반인이 여기에 무슨 일로 오겠는가? 몇 해 전부터 깜라인은 정체돼 있다.

‘호 아저씨’ 나라 방문한 ‘엉클 샘’ 군대

이런 상태도 곧 끝날 것이다. 지난해 10월 31일 응우옌떤중 총리는 깜라인항을 전세계 선박에 개방해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공표했다. 미국은 이를 이용할 예정이다. 이미 2003년부터 10여 개의 미국 전함이 과거의 적인 베트남 연안에 기항해왔다. 이번에는 무기나 군사장비 없이 공인된 초대를 받아, ‘엉클 샘’의 보이들이 ‘엉클 호’의 나라로 정말 돌아온 것이다. 5차례나 백악관 주인이 바뀌면서(1) 고되게 끌어간 전쟁의 세월이 이제 베트남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 같다. 1975년 사이공의 승리와 함께 종식된 분노와 공포의 20년은 잊힌 듯 보인다. 굴욕을 당한 거인의 증오심은 극에 달해, 종전 뒤 즉각 작은 난쟁이에 대한 국제 원조를 봉쇄하고 1994년까지 금수 조치를 선포하기까지 했다.

지난해 8월 미국과 베트남 간 첫 군사회담이 하노이에서 열렸다. 같은 달 베트남의 고위 관료들은 1965년 미군 GI가 처음 상륙한 다낭 앞바다에서 미 해군 11개 항공모함 중 하나이자 7함대 소속 주력함인 조지워싱턴호에 승선해 참관했다. 존매케인 구축함도 항구에 정박했다. 2008년 미 대선에서 여권의 버락 오바마에 대항할 후보이던 매케인의 이름은 베트남에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베트남전 당시 폭격기 조종사였던 그는 ‘전범’으로 베트남에서 5년6개월 동안 수감된 적이 있다. 그는 포로였던 당시 견뎌낸 고통의 후광을 입고 미국 여론의 영웅이 되었다. 이런 개인사 덕분에 복수심을 품은 보수주의자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1995년 7월 클린턴 전 대통령이 양국 관계 정상화를 선포하도록 도울 수 있었다. 베트남인들은 과거에 대한 원한 없이, 매케인의 이런 제2의 행보를 높이 평가한다. 호찌민 시내의 한 유명한 패스트푸드 식당 벽은 늘 그렇듯, 클린턴의 첫 베트남 방문 사진으로 장식돼 있다. 지금은 그의 아내인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지나온 과정을 자축한다. “우리는 과거의 적이 아니라 동반자이자 동료·친구로 서로를 다시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오바마 정부는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를 한 차원 더 높이 끌어올릴 준비가 돼 있다.”(2)

베트남의 처지에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은 무엇보다 경제 논리에 따른 것이다. 2001년 발효된 양국 무역협정 이래 교역량은 꾸준히 늘고 있다. 2000년 10억 달러 규모이던 것이 2010년에는 183억2400만 달러에 달했다. 베트남 주재 미 상공회의소 소장인 조슬린 트란은 2020년이면 이 수치가 35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내다본다.(3) 베트남의 대미 무역수지는 상당한 흑자 수준이다. 주로 섬유·신발·가구 위주인 대미 수출량은 지난해 140억7840만 달러에 달했다. 대외 수출액의 5분의 1 이상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 정부와의 밀접한 관계를 통해 국제교역 체계에 완전히 안착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2007년 1월 베트남은 세계무역기구(WTO)의 150번째 회원국이 되었다. 이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해마다 1천 달러씩 증가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소득수준으로 봤을 때 중진국 수준이다.

풍요로운 출발이지만 그 대가로 전쟁 당시 300만 명의 죽음, 폐허가 된 국토, 파괴된 가정에 대한 역사는 청산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과거사를 다시 쓰는 작업이 필요해진다. 베트남 역사가 위인 가드카르 윌콕스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1990년 이후 베트남 학자들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1954∼75년의 기간을 축소하고 1941∼45년의 비중을 늘리기 시작했다. 이 기간에 미국은 베트남과 협력관계였고, 전략정보실(CIA의 전신) 관계자 다수는 호찌민과 개인적 친분을 맺고 있었다. (중략) 역사학자들은 연구 분야도 확대했다. (중략) <1787년부터 1941년 사이 미국과 베트남>이라는 제목의 로버트 홉킨스 밀러의 자료집을 중심으로 팜잔은 토머스 제퍼슨 미 대통령(재위 1801~1809)이 베트남 남부 지역의 쌀농업에 관심을 기울인 점, 또 19세기 초 미국이 베트남에 여러 차례 탐험대를 보낸 점 등을 강조했다.”(4)

교역 급증… 베트남 중진국으로 도약

인구의 반이 26살 미만인 나라. 전쟁은 머나먼 옛일인 듯하고, 미국은 욕망을 부추긴다. ‘아메리칸드림’에 대한 판타지와 달러의 힘이 대단한 만큼 일에 대한 열의에 차 있고, 부는 손에 잡힐 듯하다. 1만3천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외국 대학에서 유학 중이다. 동남아시아에서는 기록적인 수치다. 베트남 남부는 역사적으로 외국인 투자에 유리하다. 지난해 10월 호찌민시 외곽에 입주한 대기업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 공장은 상징적인 가치가 있다. 전세계 인텔 지사 중 가장 큰 규모의 조립 및 테스트가 가능한 공장으로, 투자 규모만 10억 달러에 달한다. 2009년 9월 인텔의 홈페이지 블로그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우리는 다시 사이공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미국이 기본권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만큼, 우호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적개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난해 베트남에서는 공산당 노선에 반대하는 관점을 표명했다는 이유로 24명이 체포되고, 14명은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중 대다수가 기자와 블로거였다. 지난해 12월 10일 하노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베트남 주재 미국 대사 마이클 미카락은 부드럽게 평했다. “불행히도 나의 지난 3년 임기 동안 베트남 인권은 경제발전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반면 베트남 쪽은 동유럽 색깔 혁명에 미국 단체들이 개입한 사실을 생생히 기억하기 때문에 불신만 커졌다. 미 행정부는 ‘평화적 변화’ 시나리오를 추구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이는 베트남 정부에는 베트남 체제와 문화적 정체성을 없애버리려는 시도와 같은 말이었다.

고쳐 쓰는 양국 외교사

이런 마찰은 과거의 증오가 다소 미미하게 드러난 것뿐이다. 올해 양국은 전략적 파트너십을 체결하려고 한다. 그 맥락에서 민간 핵 협력 협정도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기술 이전 및 인프라 구축을 골자로 하는 이 협정은 미국 기업들에는 유망한 시장을 제공하고 있다. 베트남은 향후 20년 안에 총 1만6천MW 규모의 발전소를 13개 건설할 계획을 세워놓았다. 협정 내용은 우라늄 농축을 금지하지 않고 있다. 이는 이론적으로 군사 핵 프로그램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미국은 항상 다른 여러 국가들에 핵원료 농축 권리를 포기하도록 압박해왔다. 많은 논평가들은 베트남에 유리한 이 협정 내용을 2007년 인도와 미국 간 핵협정과 비교한다.(5) 그러나 뉴델리 정책연구센터 소장인 브라마 셸라네이(6)는 두 협정에 유사점이 별로 없다고 평가한다. “인도는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국이 아니기 때문에 미국 법의 시각에서 특별 조건이 필요했다. 따라서 당시 미국-인도 간 핵협정 체결은 의회로부터 특별 면제로 인정받아야 했다. NPT에 가입한 베트남의 경우 그런 요건이 필요 없었다. 게다가 인도는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이기 때문에 양국의 핵협정은 특별한 방식으로 체결돼야 했다.”

따라서 이들 국가와 미국이 가까워진 것은 핵협정의 성격이 아니라 그 목적 때문이다. 셸라네이는 “미국은 인도 및 베트남과 체결한 핵협정을 친밀한 협력관계를 세우기 위한 전략적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베트남은 민간 핵 프로그램을 막 도입하기 시작한 ‘핵 부상국’ 그룹 중에서 아마도 가장 유리한 협정을 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아랍에미리트와 비교해보자. 미국과 아랍에미리트가 2009년 체결한 협정은 특별히 해당국에서 우라늄 농축을 포기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 같은 협정인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가? 미 국무부 대변인 필립 크롤리는 “미국은 경우에 따라, 국가에 따라, 지역에 따라 협정을 달리 협상한다”(7)고 밝힐 뿐이다.

미국 정부가 군사관계 강화와 핵협력을 하려는 데는 목적이 있다. 바로 태평양에서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것이다. 지난해 미국은 그런 식으로 대만에 60억 달러어치의 무기를 팔았다. 또 동티모르와 아체 지역, 파푸아 등지에서의 민간 학살 자행에 연루된 코파수스 인도네시아 특수부대와 협력관계를 재개한다고 발표했다. 남중국해에서는 힐러리 국무장관의 말대로 ‘미국의 국익’을 내세워 통행의 자유를 변호했다. 서해에서는 한국과 합동 군사훈련을 했다. 중국과 일본의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 영토분쟁 때는 미-일 상호방위조약을 근거로 필요시 일본을 지지하는 입장임을 상기시켰다. 이런 조처들은 대부분, 아니 전부 중국이라는 강대국의 부상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중국이 떠오르면서 자동적으로 미국은 중국 주변국의 전략적 가치를 더 높이고 있다. ‘미국 4개년 국방검토 보고서(US Quadrennial Defense Review) 2010’에서는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베트남을 안보 분야의 잠재적 파트너로 언급한다. 미 국방부의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인 쿠르트 캠벨은 이를 좀더 명확하게 표현한다. “동남아시아 우방국 전부를 둘러볼 때, 가장 멋진 비전을 제시하는 나라는 바로 베트남이다.”(8) 미국의 입장에서 이 나라는 유용한 패이자, 그 이상이다. 이제 공산주의가 아닌, 향후 중국의 팽창주의를 막기 위한 패이다.

미국의 특별 대접, 중국 견제용

이런 강박증에 대해 반발도 있다. 수세기에 걸쳐 베트남은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 하면서도 그 안에서 맴돌고 있다.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는 여전히 상당하다. 중국으로부터의 수입 비중이 압도적인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 뉴사우스웨일스대학 명예교수이자 베트남 전문가인 칼릴 테이어는 결론적으로 “베트남에 대해서는 어느 나라도 확신할 수 없으며 중국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다”라고 본다.(9) 본질적으로 베트남의 외교는 중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최강대국과 우호관계를 발전시키려 하면서도 동시에 주변 강대국인 중국과 실제로, 또 외관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하길 원한다. 전 미국 주재 베트남 대사인 딘호앙탕은 외교적 어려움을 솔직히 털어놓는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중국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할 수만 있다면 큰 성공이다.”(10) 미국의 처지에서도 이런 외교를 실행하기란 쉽지 않다. “미국은 아시아와 멀리 떨어져 있고 베트남·중국 모두와 불균형한 관계를 맺고 있어, 계속 이런 상호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미국 버지니아대학 국제관계학 교수이자 <중국과 베트남: 불균형 정치>(11)의 저자인 브랜틀리 워막은 상기시킨다. 중국의 태도는 때때로 강경하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에서 이 대목을 읽을 수 있다. “베트남은 불확실하고 어려운 내부 상황과 함께 양 강대국 사이에서 위험천만한 게임을 하고 있음을 진작 깨달았어야 한다. 중국과 베트남이 군사적 대치 상황에 이른다면 그 어떤 나라의 항공모함도 안전을 보장해줄 수 없을 것이다.”(12)

20세기 말 남중국해의 파라셀군도와 스프래틀리군도를 놓고 중국과 베트남의 영유권 분쟁이 가시화됐다.(13) 최근 베트남은 함대를 강화했지만, 중국 함대와 겨룰 정도는 아니다. 결과적으로 “베트남이 원하는 것은 더 많은 나라들이 남중국해에 관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베트남을 보호해줄 수 있다. 또 깜라인항 시설을 확대하고 현대화하기 위해 도움을 얻길 원한다. 미 해군이 이 전략적 요충지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나라 해군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직 중국 해군에만 불리하게 되는 것이다.” 아시아·태평양 안보전문가 리처드 비칭거의 분석이다.

언젠가는 중화제국에 대항하는 베트남을 미국이 지원하게 될 것인가? 베트남의 과거 역사를 상기해보면 이는 어불성설일 것이다. 1945년 9월 2일 독립선언 이후 1950년 1월 신생 민주공화국 베트남을 인정해준 첫 나라가 마오쩌둥의 중국이었다. 소련보다 10여 일이나 앞섰다. 공산주의의 스승인 두 나라(이후 즉각 경쟁자가 됐지만) 사이에서 호찌민과 그의 계승자들은 지난 25년간 성공적으로 균형을 유지했다. 소련의 원조는 냉전 종식과 함께 중단됐다. 1970년대 말 베트남과 중국 사이에 공개적으로 드러난 갈등은 베트남 외교 사안 중 가장 터부시되는 문제다. 분쟁 발발 뒤 30년이 지난 지금도 1979년 2월부터 3월에 걸쳐 중국과 벌인 대담한 전쟁을 언급하는 건 불가능하다. 당시 수만 명이 죽었다. 베트남 언론은 교과서에서 말하는 정도 이상은 언급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중국과는 만사가 순조롭다.

지정학적 불안은 아직 남아 있다

역사는 베트남이 주변 강대국의 지정학적 계산에 휘말릴 위험이 상존함을 보여주었다. 베트남의 어느 누가 이런 사실을 망각할 수 있을까? 외교관 호앙안투안은 최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베트남은 미국과 강렬하고도 긴 협상을 진행한 유일한 나라다. 양국 간 신뢰와 이해가 상당히 진전됐더라도 전략적 착오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따라서 양국 관계는 어느 한쪽만의 지정학적 이해가 아니라 미국과 베트남 모두 국가적으로 이득이 될 경우에만, 평등의 기초 위에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14) 현재로서는 징조가 좋다. 그러나 ‘지정학적 지배력’(15)은 여전히 베트남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

글·자비에 몽테아르 Xavier Monthéard

번역·박지현 sophile@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국제단체 남극보호연합 한국지부 담당관. 주요 역서로 <녹색희망> 등이 있다.

<각주>
(1) 아이젠하워(1954~61), 존 F.케네디(1961~63), 린든 존슨(1963~69), 리처드 닉슨(1969~74), 제럴드 포드(1974~75).
(2) 2010년 7월 21일 43차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정상회의 때 하노이에서 한 연설.
(3) <뚜오이 뜨레>(Tuoi Tre), 2010년 12월 20일자, 하노이.
(4) 위인 가드카르 윌콕스, ‘An ambiguous relationship: Impressions of the United States in Vietnamese historical scholarship, 1986~2009’, <World History Connected> 7권 3호. 워싱턴 DC, 2010년 10월자.
(5) Siddharth Varadarajan, ‘인정받아 우쭐해진 인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11월호 참조.
(6) <Asian Juggernaut: The Rise of China, India and Japan> (HarperCollins·New york·2006)의 저자. 반대 의사가 없을 경우 학자들과 연구자들의 발언은 인터뷰에서 인용함.
(7) Daniel Ten Kate & Nicole Gaouette의 ‘Us, Vietnam holds nuclear technology talks as suitors vie for contracts’, <블룸버그> 2010년 8월 6일자 인용.
(8) Agence France-Press, 2010년 7월.
(9) 2010년 12월 10일 하노이 사회인문과학대학에서 열린 콘퍼런스에서 발표된 Carlyle Thayer의 ‘Vietnam’s relations with China and the United States’ 참조.
(10) 하노이 인터넷 매체 <VitenamNet>, 2010년 2월 17일 인터뷰.
(11) Brantly Womack, <The Unites States and Sino-Vietnames relatio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New York, 2006. 2008년 전자출판된 <The Asia-Pacific Journal: Japan Focus>에서 인용.
(12) Li Hongmei, ‘Vietnam advisable not to play with fire’, <인민일보> 2010년 8월 17일자.
(13) 1974년 1월부터 중국은 파라셀군도를 군사 점령했고, 베트남과 대만은 이에 항의했다. 중국·베트남·말레이시아·필리핀·대만은 스프래틀리군도의 여러 섬을 각각 점유하고 있다(브루나이는 이에 영유권을 요구했지만 파병은 하지 않았다). 관련 정치 문제와 사안을 분석하기 위해 2010년 12월 <Harvard Asia Quarterly>, Cambridge(massachussetts)에 실린 Stein Tonnesson의 ‘China’s coming change in the South China sea’ 참조.
(14) 호앙안투안,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 개선: 하나의 답’,  <Contemporary Southeast Asia> 32권 3호, 싱가포르, 2010년 참조.
(15) 2011년 3월 몬트리올의 International Studies Association에서 발표된 Carlyle Thayer ‘The tyranny of geography: Vietnamese strategies to constrain China in the South China sea’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