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 대통령과 왕들의 부동산 전쟁
대중의 불만에 직면한 우간다 대통령 요웨리 무세베니는 경찰을 동원한 탄압, 언론 감시, 야당 위협 등과 같은 강경책을 내세우고 있다. 물가 상승과 부패 스캔들은 25년째 집권 중인 현 정부를 약화시켜왔다. 또한, 이 위기는 전통 부족왕국들, 특히 영토권을 주장하고 나선 부간다 왕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
우간다를 구성하는 전통 부족왕국들 중 가장 큰 왕국인 부간다의 대변인 찰스 피터 마이가는 “우리가 소유한 토지의 가치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우리는 토지를 되찾아 우리 뜻대로 매매하거나 임대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정부는 신처럼 제멋대로 굴면서 우리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며 정부를 규탄한다. 600만 명의 바간다 부족은 빅토리아 호숫가와 3200만 명이 거주하는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 사이에 흩어져 산다. 역사학자 파레스 무티바는 “이들은 자신의 토지가 타인에 의해 무참히 점유되고 있다며 분개하고 있다. 긴장이 고조되면, 오늘의 가해자가 내일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1)
왕들의 연방정부, 쿠데타로 몰락
동아프리카 경지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우간다는 외국 투자자들이 자주 찾는 나라가 되었다. 이들 투자자 대부분은 페르시아만과 인도 대륙 출신이다. 지난 4년간, 80만ha가 이들에게 매각되거나 장기임대됐다. 캄팔라는 광적인 부동산 투기장이 되었으며, 1912년 2850명에 불과하던 주민은 현재 200만 명으로 증가해 201㎢에 밀집해 살고 있다. 많은 군벌과 사업가들이 1990년대 후반 콩고민주공화국(DRC)의 내전과 2005년까지 지속된 수단의 내전, 2007년 겨울 부정선거로 촉발된 케냐의 선거위기 같은 격동기를 겪으면서 부동산 투기라는 안전한 보험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변호사 데이비드 음팡가는 “돈세탁하는 데 부동산만큼 단순한 방법은 없다. 그래서 부패한 돈들이 그리로 몰리고 있다. 약탈 전쟁에 참여한 일부 우간다 장교들의 돈이나 횡령한 돈, 예를 들어 개발원조기금에서 빼돌린 돈 등이 부동산 투기에 몰리며 땅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언덕땅은 반 에이커(1ha의 20%)에 족히 50만 달러는 줘야 살 수 있다”고 했다. 이런 사태는 중앙정부에 대한 바간다 주민의 뿌리 깊은 울분을 키우고 있다.
새 정권과 우호 관계, 그러나 땅 앞에선…
캄팔라는 독립 우간다의 수도가 되기 전, 부간다 왕국의 수도였다. 14세기에 입헌군주제로 출범한 부간다는 권력의 극단적인 중앙집권화와 이상적인 지리적 위치 덕분에 1890년부터 식민지 개척에 나선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주요 파트너 역할을 했다. 인도양 해안을 타고 들어온 영국 식민주의자들은 결국 부간다를 점령했다. 훗날 윈스턴 처칠은 이 땅을 “아프리카의 진주”라 불렀다. 1900년, 런던과 부간다 왕국의 카바카(Kabaka·왕) 간 조약 체결로 부간다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런던은 왕에게 500파운드를 주고 캄팔라를 포함한 2만3300㎢(왕국의 총면적은 5만763㎢)를 얻었다. 부간다의 왕은 906㎢의 작은 부지만 할당받은 반면, 나머지 땅은 52개 가문 지도자의 몫으로 돌아갔다. 또 마일로(Mailo)법이라는 법률에 따라, 비(非)바간다 부족도 부간다에 발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무티바 교수는 “종이쪽지에 간단한 서명만 있으면 충분했다”고 말한다.
1962년 우간다 독립과 함께, 2만3300㎢의 영토는 부간다 왕국에 반환되었다. 부간다의 군주 에드워드 무테사 2세가 새로운 우간다의 첫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1966년, 우간다 북부 출신 밀턴 오보테 총리는 국가(우간다) 안에 국가(부간다)가 존재하는 상태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하고 연방헌법을 폐지했다. 그는 무테사 2세를 축출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같은 해 5월 24일, 이디 아민 다다가 정부군을 이끌고 무테사 2세의 지지자 100여 명을 사살한 뒤, 캄팔라 멘고 언덕에 있는 왕궁을 점령했다. 무테사 2세는 런던으로 망명해 그곳에서 1969년 사망했다. 결국 부간다 왕국은 영토 2만3300㎢를 우간다 정부에 몰수당한 뒤 몰락했다. 지난 20년간의 독재와 외국의 개입, 그리고 연이은 반란으로 강제이주의 혼란 속에 빠졌던 많은 비바간다 부족들은 옛 왕실 토지에 정착한 뒤, 그곳을 다른 왕국 출신의 이주민들에게 임대하고 있다.
외국 투자자들, 토지에 눈독
1986년, 5년 동안 반란군 활동을 벌이던 요웨리 무세베니가 정권을 잡자 부간다 왕국은 희망에 부풀었다. 부간다 왕국 덕분에 우간다의 강력한 새 지도자가 승리했기 때문이다. 부간다의 도움이 없었다면, 국가저항군(NRA)이 ‘덤불숲지대 전쟁’을 캄팔라까지 확장하지도 못했을 테고, 무세베니가 이끄는 국가저항운동(NRM)에 정치적 날개를 달아주지도 못하여, 이들이 권력을 잡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2) 성대한 대관식을 통해 부간다의 새 군주로 등극한 왕 로널드 무웬다 무테비 2세는 왕궁과 자신의 몫으로 배정된 땅 906㎢를 되찾았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소유했던 토지 2만3300㎢는 중앙정부의 차지가 되었다. 이 땅의 반환 문제는 부간다 왕국과 우간다 정부 간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1980년대 말 이후, 국제 투자자들은 한물간 과거의 토지제도를 사유재산 시스템으로 대체하라고 요구했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맞는 진정한 시장 개방을 요구한 것이다. ‘좋은 거버넌스’를 표방하는 데 정성을 기울인 무세베니 대통령은 이에 화답해 국가 토지의 사유화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1998년, 토지매매를 용이하게 하고 토지 사유권을 공식화하는 법률이 가결됐다. 권력 이행의 새로운 동력 벨트인 국토부가 토지 경매를 시작했다. 국제금융기관(IFIs)의 지지로 이뤄진 다른 많은 개혁들과 마찬가지로, 1998년 법은 주로 힘있는 개인 투자자들에게 혜택을 주었다. 몇 세대 전부터 살고 있던 불법 거주자들이 주로 희생양이 되었다. 적법한 ‘세계화’는 이들에겐 완벽하고 단순한 약탈일 뿐이었다.
토지 소유권 분쟁에 법원 몸살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기자이자 우간다 북부 마을의 일상을 전달하는 블로그 ‘카티네’(Katine)의 운영자 중 한 사람인 앤 퍼킨스는 “합법적인 체제 변화는 상업적 이익을 노리고 거대 부동산회사를 차린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사유재산권은 투자만 부추기는 게 아니라 돈을 빌릴 수 있는 담보가 된다. 그래서 세계은행이 열정적으로 무세베니를 부추겨 1998년 법률을 채택하도록 했다”고 꼬집었다.(3) 2010년, 토지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자 정부는 새 법률을 통해 희생자들에게 정의를 추구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우간다인권재단(FHRI)의 집행이사 리빙스턴 웨와냐나는 “정부가 좋은 의도로 새 법을 시행했더라도 이런 형식적인 법률은 토지 소유주와 불법 거주민 사이의 복잡한 이해관계에서 빚어진 토지분쟁만 가중시킬 뿐이다”라고 지적했다.(4)
상업 라디오의 광고 프로그램과 왕국이 소유한 토지세로 국가 예산을 마련해온 부간다 왕국은 부간다 국토부를 통해 새 법률에 강력히 항의했다. 한편 정부는 국제 언론을 통해 “수도권 지역의 지주들은 주로 유력 바간다인들이며, 이들 중 최고의 지주가 바로 바간다 군주다. 농지개혁은 저들의 소유 시스템을 붕괴시킬 것이다”라고 항변했다.(5)
캄팔라 법정은 토지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가진 것이라 해봐야 손바닥만 한 땅뿐인 극빈층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도 없는데, 설상가상으로 부패한 공무원이나 정부 지도자를 거쳐 위조된 토지문서가 넘쳐나고 있다. 수도의 서민지역인 빅토리아 호수까지 이어지는 늪지대에 버섯처럼 늘어선 서민주택의 벽에는 ‘팔 집이 아님’이라는 안내판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런 안내판은 소유주 몰래 자행되는 야만적인 토지거래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캄팔라의 21%를 점유한 빈민촌을 탐내고 있다. 이미 신중산층이 차지한 주택들이 북부 아촐리 부족 이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이른바 빈민섬의 가장자리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촐리 부족의 대부분은 신중산층을 고객으로 삼아 급성장 중인 민간 보안업체에 종사하고 있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빈민들
왕궁 언덕에 위치한 카바카 정부는 두 편으로 나뉘었다. 1966년 이전의 영토인 2만3300㎢의 반환 요구를 굽히지 않는 보수주의자들이 한편이고, 무세베니 대통령 측근의 사업가들과 함께 일할 준비가 되어 있는 혁신적인 젊은이들이 다른 한편이다. 부간다 국토부가 관리하는 토지 906㎢의 운명은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유전 놓고 남수단과 영토분쟁 조짐
2009년 9월 10일, 새로운 시위가 수도에서 발생했다. 시위는 카바카(왕)가 자신의 왕국 관할 지구 중 무세베니 대통령이 비바간다 부족을 통치자로 임명한 지역을 공식 방문해 지역주민들과 만나려 했으나, 정부가 안전상의 이유를 내세워 이를 금지하면서 촉발됐다. 야신 아루미 마케레레대학 정치학 교수는 “분할 전략은 통치를 더 용이하게 하려는 국가원수의 습관”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3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폭력 사태는 이제 다른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실제로 토지를 약탈당한 부족은 바간다 부족뿐만이 아니다. 우간다 토지의 80%는 전통적인 토지 양도 시스템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우간다군은 북부의 아촐리 부족 공동체 땅에서 반군 ‘주님의 저항군’(LRA)을 갑작스레 몽땅 몰아냈고, 사람들은 정부가 200만 명에 달하는 이들의 주거를 어떻게 책임질지 의심스러워하고 있다.(7) 이와 관련해 변호사인 세와냐나는 “우간다 북부의 전쟁은 일부에겐 난민촌으로 강제이주한 사람들의 땅을 차지할 기회였다”고 했다.또한 아프리카 신흥국인 남수단이 국경선 반대편에서 이 지역을 그들의 영토라 주장하며 넘보고 있어 영토분쟁이 일 조짐이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의 금융지원을 통해 캄팔라와 남수단의 수도 주바 사이에 600km에 달하는 아스팔트 도로가 확실한 경제통로로서 완공된 이후의 일이다. 캄팔라 지역 외에도 특히 우간다 동부, 콩고민주공화국과의 사이에 자연 국경을 이루는 앨버트 호수 분지에 위치한 분요로 왕국의 전통 토지를 둘러싼 분쟁이 최고조에 달한 듯 보인다. 2006년 이 지역 부동산 투자 전망을 확 뒤바꿀 만한 석유와 가스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북쪽으로 거대한 리프트 계곡까지 이어지는 이 지역에는 20억 배럴의 석유가 매장되어 있다. 아일랜드 회사 툴로오일은 지역의 노른자위인 머치슨 공원의 자연보호구역에 인접한 150㎢ 땅에 대한 탐사개발권을 획득했다. 프랑스 토탈사와 중국해양석유회사(CNOOC)는 각각 15억 달러씩 투자하여 툴로오일의 유전 3분의 1을 인수했다. 이탈리아 국립탄화수소공사(ENI)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석유광산은 지금부터 2012년 말까지 개발될 것이다. 현재 짓고 있는 정유소가 2016년에 완공되면, 하루 2만~2만5천 배럴의 석유를 생산해 우간다의 에너지 독립을 보장하게 될 예정이다. 또한 트리폴리의 금융 지원으로 건설되다가 리비아 사태로 잠시 공사가 중단된 송유관이 완공되면 케냐의 몸바사로 석유를 수출하게 될 것이다.
지난해 ‘유명인사들’이 분요로 왕국에 속한 공동체에서 사들인 토지는 6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8) 이들은 우간다토지위원회 소속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토지 소유권을 넘겨받았을 것이다. 직무를 유기한 유명인사 중에는 NRM의 전 대표이자 현 정보장관이기도 한 분요로의 공주 카바쿰바 마시코가 포함되어 있다. 그녀는 현재 캄팔라에서 “석유가 이 지역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이라 공언하고 있다. 대통령 측근의 엘리트 근위대가 현재 이 지역을 지키는 것도 분명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터이다. 국가원수의 친아들인 무후지 카이네루가바가 이 엘리트 근위대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다.
유령 국왕이 외국기업에 개발권 넘겨
툴로오일의 우간다 지사 사장 브라이언 글로버는 “유전이 개발되는 한복판에서 사자, 코끼리, 물소, 기린을 볼 수 있다는 건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다”라고 했다. 더 나아가, 이 아일랜드 사업가는 “이런 구경을 할 수 있게 해준 분요로 왕국의 반두라 페타르에게 감사한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분요로 왕국의 어느 누구도 이같은 통치자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신디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하는 분요로 왕국의 ‘총리’(9) 키이자 야베리는 아직도 이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며 “그들은 또다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석유가 발견되었을 때 우리는 행복했다. 경제적으로 뒤처진 분요로가 발전해 영국 식민지 시대의 결과인 빈곤에서 벗어나길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에겐 여전히 대학도 없고, 병원 의사도 부족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공동체와 의논 한마디 없이 체결되었다”며 황당해했다.(10) 왕국의 홍보담당관 헨리 포드 미리마는 “석유가 생산되기 시작하면 분요로의 젊은이들이 송유관을 공격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야베리는 “니제르와 나이지리아의 석유 델타지역 주민들이 체험한 것과 똑같은 문제를(11) 우리가 겪게 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우리 식탁에 초대받지 못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식사를 하고 있다. 그들이 먹는 것을 바라보며 침을 흘리다가, 언젠가 누군가가 식탁을 뒤엎어버리는 날이 결국 오게 것이다”라고 못박았다.
2011년 대선에서 패배한 부간다 부족 출신의 대선 후보 나미산고 캄야는 자신이 우간다 정부와 전통 왕국들 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토지 시한폭탄의 재깍거림을 멈출 방법을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녀는 “우간다 정부가 연방정부로 회귀해, 각 지역의 광물 및 농업 자원을 무세베니 정부가 운영하는 지역정부에 맡기지 않고, 지역이 이들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실 지역정부는 블랙홀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부간다 왕국은 오래전부터 연방제와 토지 2만3300㎢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 모든 게 바간다 부족의 고유어로 ‘우리 것’을 뜻하는 ‘아피에’(afye)의 기치 아래 재편되고 있다. 그래서 캄야는 정당 명칭도 극히 단순하게 ‘우간다를 위한 연방동맹’이라 붙였다고 말한다. 이 정당은 “멀리 보는 동물”인 기린을 로고로, “때를 만난 아이디어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는 빅토르 위고의 말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지난 2월 18일, 무세베니는 4선에 성공해 5년간의 임기를 시작했다. 이후 캄팔라에서는 높은 물가에 항의하는 시위와 야당을 지지하는 시위가 늘고 있다. 정치 칼럼니스트 이브라힘 아수만 비지이카는 “대중의 불만은 미처 다 폭발하지 못했다. 무세베니가 막 정권을 잡은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무세베니 세대들은 과거의 비극을 답습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토지 문제가 이들의 분노 수위를 높일 수 있고, 그것을 나라 전체로 확산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글·알랭 비키 Alain Vicky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각주>
(1) Phares Mutibwa, <The Buganda Factor in Uganda Politics>, Fountain Publishers, Kampala, 2008.
(2) 1985년 7월 27일, 밀턴 오보테의 독재 체제는 티토 오켈로가 주도한 쿠데타로 전복됐다. 하지만 야당 편에 섰던 요웨리 무세베니는 국가저항군(NRA)과 동맹을 맺고 변함없이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후 그는 1986년 1월 29일 우간다 대통령에 취임했다.
(3) 블로그 ‘Katine’에 게재된 기사 ‘The politics of land reform’, 2009년 2월 25일, www.guardian.co.uk/katine 참조.
(4) http://www.fhri.or.ug.
(5) 장필리프 레미, ‘요웨리 무세비니 대통령을 약화시키는 우간다의 피투성이 폭동’, <르몽드>, 2009년 9월 15일.
(6) 2011년 5월 24일, 아마다음바바지를 총리로 하는 새정부가 들어섰다.
(7) Cf. Tim Allen & Koen Vlassenroot, <The Lord’s Resistance Army: Myth and Reality>, Zed Books, Londres, 2010.
(8) Margaret A. Rugadya <Escalating Land Conflicts in Uganda>, 2009년 6월, www.oxfam.org.uk.
(9) 명예직에 불과하지만, 각 왕국은 자신만의 정부를 갖추고 있다.
(10) <인도양 뉴스 레터>, 파리, 2010년 12월 18일, www.africaintelligence.fr/LOI/ 참조.
(11) ‘나이지리아, 분노의 석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4월호.
우간다 내전 연대기
1900년 - 주변의 여러 작은 전통 부족왕국들을 통치하던 부간다 왕국이 런던과 조약을 체결하고 영국 보호령이 됨.
1962년 10월 9일 - 독립에 성공한 우간다는 연방헌법을 채택. 바간다 부족의 왕 에드워드 무테사 2세가 종신 대통령에 취임하고, 우간다인민회의(UPC)의 설립자 밀턴 오보테가 총리에 취임함.
1966년 2월 22일 - 권력의 중앙집권을 찬성하던 오보테는 참모총장 이디 아민 다다의 지지로 쿠데타를 일으켜 무테사 2세를 권좌에서 축출함.
1967년 9월 8일 - 새 헌법은 단일 정당을 둔 대통령 체제를 출범시킴.
1971년 1월 25일 - 아민 다다의 쿠데타 발발.
1972년 9월 - 아촐리와 랑기스 부족에 대한 부족 탄압 시작.
1974년 - 경쟁 부족과 지식인, 오보테 지지자들에 대한 박해 시작.
1976년 6월 25일 - 아민 다다가 스스로 종신 대통령을 선언함.
1979년 4월 11일 - 탄자니아의 지원을 받은 반란으로 아민이 추방됨. 이후 우간다국가해방전선(UNLF, Uganda National Liberation Front)에서 임명한 정부들이 계속 들어섰지만 정국 불안은 지속됨.
1980년 12월 10일 - 오보테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부정선거 논란으로 내전이 비화됨.
1986년 1월 25일 - 오보테와 함께 국가저항군(NRA)을 창설한 요웨리 무세베니가 쿠데타를 일으켜, 그가 주도하는 국민저항운동(NRM)이 정권을 잡음. 이후 그는 우간다의 정치를 개방하고 자유경제 프로그램을 가동함.
1987년 - 조지프 코니의 반군 ‘주님의 저항군’(LRA)이 반란을 일으킴.
1996년 5월 9일 - 무세베니 대통령 당선.
2001년 3월 12일 - 무세베니 재선 성공.
2005년 7월 28일 - 국민투표로 다당제가 승인됨.
2005년 10월 6일 - 국제형사재판소(ICC)가 LRA 지도자 5명의 체포 영장 발부.
2006년 2월 23일 - 무세베니 3선 성공.
2006년 8월 26일 - 20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이후 LRA와 휴전 협정 체결.
2008년 9월 - 서부 우간다에서 주요 유전 발견.
2009년 9월 10일 - 수도 캄팔라에서 정부 세력과 바간다 부족의 왕 카바카 지지자들 간 충돌로 3명 사망.
2011년 2월 18일 - 무세베니 4선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