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 제너레이션’ 작가들은 무엇에 매혹되었나?

100년 전의 시대정신

2020-12-31     아가트 멜리낭 l 극작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자신들의 삶과 글의 의미를 찾아 헤맨 미국의 젊은 작가들은 만취한 상태로 독창성을 발산하며 파리와 뉴욕을 넘나드는 비공식 집단을 형성했다. 

 

“빌어먹을, 지옥은 지독한 자극제로다.”(1)

1921년. 2년 전 개최된 파리평화회의는 유럽 정세를 변화시켰다. 파리는 세계예술의 수도가 됐다. 제1차 세계대전은 1000만 병사의 목숨을 앗아갔고 스페인 독감은 5,000만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인간의 생명은 가치를 잃고, 전통적인 가치는 붕괴했다. 미국이 세계무대에 등장했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은 새 지평을 열며 양극화와 대립을 예고했다. 전쟁에 대한 공포는 역설적으로 축제와 창작력을 급격히 발전시켰다.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이 유행하던 프랑스에서는 신경쇠약에 걸린 폴 데샤넬 대통령이 사임하고 제1회 공산당 대회가 개최됐다.(2) 금주법이 시행 중이던 미국에서는 워런 G. 하딩 대통령이 스캔들로 고전했다. 매사추세츠 주법원은 파업과 테러혐의로 무정부주의자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월스트리트에 있는 J.P. 모건 은행에서는 차량 폭탄테러로 40명의 사망자와 수백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뉴욕은 ‘포효하는 20년대’, 파리는 ‘광란의 시대’

미국의 젊은 작가들은 유럽과 미국, 파리와 뉴욕 사이에서 망설이며 질문했다. “내일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앞으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3) 이 질문은 1920년대를 관통한 화두다. 이들은 어떤 답을 찾았을까? 유쾌한 허무주의, 에스프리 누보(Esprit Nouveau 새로운 정신), 투쟁, 공산주의, 음주, 정신착란, 자살, 박장대소였을까? 아니면 사회 참여적 주제와 새로운 형식이었을까?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가 “재즈의 아이들”이라고 부른 재즈 음악가들은 뉴욕과 파리에서 만취한 상태로 듀크 엘링턴 또는 콜 포터의 곡을 신들린 몸짓으로 연주했다. “재즈의 아이들”은 뉴욕의 북적이는 ‘스피크이지’(speakeasy 금주령 시대의 무허가 술집)나 파리의 카페 르셀렉트(Le Sélect), 라클로즈리(La Closerie)의 테라스에서 미국의 ‘포효하는 20년대’와 파리의 ‘광란의 시대’의 신화를 만들어갔다. 

너무나 멀리 떨어진 두 도시의 20년대는 너무나 닮았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몽파르나스의 “진정한 예술가들은 미국식으로 차려 입었다”라고 말했다. 앙티브에서는 미국 백만장자들이 햇볕에 그을린 목에 진주 목걸이를 길게 늘어뜨렸다. 전쟁과 가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대신 브로드웨이를 지나가는 저 택시를 쳐다보라. 피츠제럴드가 택시 지붕에서 탭댄스를 추고 “앨라배마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성”인 그의 부인 젤다가 보닛 위에 걸터앉아있다.

22세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캐나다 일간지 <토론토 스타(Toronto Star)>의 해외 통신원으로 파리에서 “축제”와 같은 시간을 보냈다. 산책을 하고, 글을 쓰고, 세상이 끝날 듯이 술을 퍼마시고, 실비아 비치에게 책을 빌려 읽었다. 실비아 비치는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Shakespeare and Company)’를 설립 및 운영한 미국 여성이었다. 그녀는 후에 제임스 조이스의 장편소설『율리시스 Ulysses』를 출판하기도 했다. 헤밍웨이는 또 한 명의 미국 여성, 거트루드 스타인과도 교류했다. 

스타인은 영향력 있는 시인, 미술품 수집가이자 공공연한 동성애자로 매주 토요일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 밑에 앉아 방문객을 맞이했다. 초반에는 조르주 브라크, 앙리 마티스와 입체파 화가들이 주를 이뤘다. 1920년대 초에는 미국 작가들도 그녀의 집을 찾았다. 스타인은 이 아방가르드(avant-garde 전위파) 미국 작가들에게 이름을 붙여줬다. “당신들은 모두 ‘잃어버린 세대’요.”(4)

1926년 헤밍웨이가 자신의 첫 장편소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The Sun Also Rises』의 제사(題詞)로 인용해 유명해진 이 표현은 자신들의 역사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불편한 삶을 선택한 모든 자발적 망명자들을 지칭한다. 영국으로 귀화한 미국 미주리주 출신 시인 T.S.엘리엇에서부터, 스타인의 단골 방문객들의 조국인 미국을 혐오한 서정시의 혁신가 에즈라 파운드, 막 첫 장편소설을 발표한 존 더스패서스, 피츠제럴드와 젤다 모두 이에 해당했다. 

 

“뜨개질을 하지 않는다면 책을 들고 오라”

피츠제럴드 부부와 함께 스타인의 집을 방문하던 ‘재치 넘치는(The Wit)’ 도로시 파커는 특히 독설로 가득 찬 작품, 우울증과 사교생활로 점철된 삶으로 ‘잃어버린 세대’를 가장 잘 대변하는 작가 중 한 명이었다. 

항상 머리를 감지 않은 채 모자를 쓰고 다닌 파커는 잡지에 기고하며 문단에 입문했다. 그녀는 초기에 『증오의 찬가 A Hymn of Hate』(5)를 출간한 잡지사 <배너티 페어(Vanity Fair)>에 기고했다. <배너티 페어>를 비롯해, <보그(Vogue)>, <뉴요커(New Yorker)>, <라이프(Life)>등의 잡지에 실렸다가 여러 모음집이나 『도로시 파커 모음집 The Portable Dorothy Parker』(Viking Press)으로 합본 출판된 파커의 시, 단편소설, 평론은 예리면서도 비현실적이었으며, 짓궂으면서도 관대하고, 잔혹하면서도 유쾌한 세계를 담아냈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자아성찰적 연극평론이라는 한 장르를 탄생시켰다. “뜨개질을 하지 않는다면 책을 한 권 들고 오라.” 파커는 당시 첫 장편소설 『천국의 이편(This Side of Paradise)』을 발표하고 큰 성공을 거둔 24세의 청년 피츠제럴드와 절친했다. 1920년, <뉴욕 타임스>의 유명한 연극평론가 알렉산더 울컷은 브로드웨이에 있는 앨곤퀸 호텔에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파커도 초대를 받았다. 칵테일을 마시며 전쟁을 회상하고, 경력을 예상하고, 험담을 나눈 이 모임이 성공을 거두자 이들은 계속해서 모였다. 이후 10년 동안 ‘앨곤퀸 원탁모임’은 긴장감이 흐르던 시대에 독설과 도발을 일삼던 문인들의 만남의 장 역할을 한다.

물질주의, 자본주의, 인종주의를 논했던 ‘원탁모임’은 곧 ‘악질들의 모임’으로 불리며 미국의 문학, 연극, 언론을 자극했다. 앨곤퀸의 뮤즈들(파커는 이 단어를 매우 싫어했다)중 가장 뛰어난 지성을 뽐낸 파커는 이 모임에서 빛을 발했다. 여배우 루이즈 브룩스뿐만 아니라 하포 마르크스, 피츠제럴드,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헤밍웨이도 앨곤퀸 호텔의 모임에 합류했다.

“새롭게 만들어라!”(6) 1922년, T.S. 엘리엇은 런던에서 자신의 지지자이자 교정자이자 친구인 에즈라 파운드에게 헌정한 『황무지(The Waste Land)』를 발표했다. 시적 혁명이자 언어, 시대, 인용의 입체파 회화로 불린 이 시는 한계에 다다른 유럽을 “한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 주리라”라고 묘사하며, 꼭 읽어볼만한 작품으로 손꼽혔다.

 

“부유함에서 비롯된 순수한 아름다움”

존 더스패서스는 뉴욕 5번가에 기거했다.『3명의 병사(Three Soldiers)』를 출판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갑작스러운 성공을 거둔 더스패서스는 1922년 피츠제럴드 부부와 플라자 호텔에서 점심을 했다. “금으로 만든 10달러 지폐를 닮은 꽃들”(7)로 장식된 호텔의 호화스러움은 젊은 더스패서스에게 냉혹한 공산주의 사상을 심어줬다. 칵테일을 몇 잔 마신 뒤 빨간색 경주용 자동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했다. 더스패서스와 젤다는 대형 관람차를 타고 스콧은 차에서 위스키를 마저 마셨다. 더스패서스는 후에 피츠제럴드 부부에 대해 “그들은 부유함에서 비롯되는 순수함을 발산했다. 실망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운 사람들”이라고 회상했다. 

롱아일랜드에서의 피츠제럴드 부부를 상상해보라. 대저택에서 열리는 요란한 연회를 즐기며 영감이 넘치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편집자이자 기자인 대부호 허버트 베이어드 스워프가 주최하는 상상을 초월한 파티에는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의 온갖 유명인과 주요 인사가 초대됐다. 그러나, 도로시 파커가 가진 것은 방 한 칸이 전부였다. 그녀는 첫 단편소설을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자신이 싫어하던 부자들과 어울렸으며 위스키에 맛을 들였다. “어서 당신 잔을 비우고 같이 한 잔 더 마셔요.”(8) 피츠제럴드는 진과 사교계에 흠뻑 취해 2년 동안 고작 소설 3장(章)을 완성했다.

헤밍웨이 역시 첫 단편소설들을 발표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1925년, 그가 파리의 딩고 바(Dingo Bar)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그 유명한 피츠제럴드가 바에 들어왔다. 잘 알려진 두 사람의 첫 만남 이야기다. 헤밍웨이가 무력한 전후시대를 묘사한 소설『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를 쓸 때 『위대한 개츠비』의 저자 피츠제럴드는 교정과 충고를 통해 많은 도움을 줬다. 

 

“그들은 닮지 않았다. 단지 같이 있었을 뿐”

친구가 된 두 사람은 스타인의 집, 카페 라클로즈리에 동행하다 조용히 사이가 틀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문학적 경쟁과 술을 바탕으로 한 황홀한 동경, 경멸이 반쯤 섞인 질투심이 동시에 존재했다. 호기심을 유발하면서도 서글픈 관계다. 윌리엄 포크너는 두 사람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들은 서로 닮지 않았다. 단지 같은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9) 그렇다.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 있었다. 

파커는 1926년 헤밍웨이가 앨곤퀸 호텔 모임에 합류하자 몹시 들떴다. 파커가 “철저히 간결한 문체”로 평가한 헤밍웨이의 글은 그녀를 사로잡았다. 파커는 1년 만에 <뉴요커>에 10편의 시와 단편소설을 발표했다. 결별, 사교계의 해로움, 음주, 비, 그녀의 실제 삶, 공허함 등의 주제를 직설적인 문체로 써내려간 작품들이다. 헤밍웨이는 파커에게 자신이 경험한 전쟁, 스페인과 파리에서의 생활을 들려줬다. 파커는 그녀의 정신적인 영웅과 함께 대서양 횡단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파리! 그녀가 혁신적인 망명자로 부르던 모든 이들이 그곳에 있었다. 파커는 뤼테시아 호텔에 기거하며 거트루드 스타인의 집을 찾았다. 식당에서는 말이 없는 제임스 조이스를 멀리서 경탄에 찬 눈길로 바라보기도 했다. 이 시절 파커는 첫 번째 시 모음집 『충분한 밧줄(Enough Rope)』을 발표했다. 이 시집은 몇 달 뒤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피츠제럴드는 파커에게 ‘부유한 부부’ 사라와 제럴드 머피를 소개했다. 

머피 부부의 연회에는 파리의 예술계와 재계 인사들이 참석했다. 파커는 여름 동안 프랑스 남부 리비에라에 있는 머피 부부의 집에 묵었다. 피츠제럴드는 『밤은 부드러워(Tender is the night)』에서 이곳의 생활을 “세련된 유명인사들과 흐느낌 소리를 닮은 재즈의 물결”로 묘사했다. 배가 좌초된 더스패서스, 부인과 정부를 함께 데려온 헤밍웨이, 공작부인들에게 토마토를 던지는 피츠제럴드…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의 여름이었다. 『밤은 부드러워』에 등장하는 딕과 니콜은 머피 부부를 모델로 했다.

 

대공황 시대에 무기력했던 ‘잃어버린 세대’

1929년 10월 24일, 뉴욕증시가 붕괴했다. 광란의 시대도 막을 내렸다. 대공황이 시작됐고 수백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잃어버린 세대’ 작가들의 책에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자신들이 속한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과 투우에 대한 글을 썼다. 피츠제럴드는 돈을 벌기 위해 100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엘리엇은 신비주의 작품인 『네 개의 사중주(Four Quartets)』를 구상했다. 

오직 더스패서스만이 3부작 『미합중국(USA)』(1938)에서 미국 정치를 묘사했다. 새로운 형식을 선보이며 시대의 투쟁에 참여한 작품이다. 더스패서스의 친구가 헤밍웨이가 지지하는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스페인에서 암살당한 이후, 더스패서스는 헤밍웨이와 완전히 결별했다. 이런 그가 냉전 동안 초반동적 성향을 보이고, 유진 매카시를 지지하는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유감이다. 

에즈라 파운드도 정치적인 글을 썼다. ‘새로운 문명’을 추구하는 인생의 역작, 『칸토스(Cantos)』를 집필했으며 파시즘과 반유태주의를 적극 지지했다. 파운드는 이후 정신병으로 미국의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으며 베네치아에서 말년을 보내는 동안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피츠제럴드의 상황 또한 최악으로 치달았다.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작품인 『밤은 부드러워』(1934)는 완성하는 데 9년이 걸렸다. 이후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며 할리우드 생활에 시달리다 결국 44살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헤밍웨이는 우상이 된다.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를 발표한 뒤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7년 후에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잃어버린 세대’는 하나의 문학운동으로 자리잡을 시간도 없이 사라졌다. 단지 그 시절, 정치, 사교계 그리고 환멸에 찬 시선이 그들을 모이게 했을 뿐이다. 

도로시 파커는 살아남았다. 1930년대에는 <뉴요커>의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며 뛰어난 단편소설 『금발의 여인(Big  Blonde)』을 발표했다. 장편소설은 절대 쓰지 않았다. 한 남자와 두 번 결혼했으며 할리우드에서 호화롭게 10년을 보냈다. 하지만 실제로 인정받은 작품은 영화로 제작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작은 여우들(The Little Foxes)>과 조지 쿠커 감독의 <스타 탄생(A Star is Born)> 2편밖에 없다. 한때 보스턴에서 사코와 반제티의 유죄판결에 반대해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할리우드에서는 공산당과 반나치연맹에 가입했다. 

도로시 파커는 술을 무척 많이 마셨는데, 때로는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와 함께 마셨다. 남성 잡지 <에스콰이어(Esquire)>의 비정규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했으며 ‘패배한 세대’(Beat Generation 잃어버린 세대의 뒤를 이은 방랑적 기질의 예술가들-역주)에는 속하지 못하고 캘리포니아에서 문학 교수로 강단에 섰다. 남편도 잃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던 그녀는 위스키에 취한 채 호텔 방에서 삶을 마감했다. 1967년, 73세의 파커는 화려한 파크가(街)에서 마지막 파티를 즐긴 뒤 자신의 방 안, 반려견이 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파커는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에게 유산을 남겼다. 

 

 

글·아가트 멜리낭 Agathe Mélinand 
극작가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John Dos Passos, 『Trois soldats 3명의 병사』, Le Castor Astral, Bègles, 2018(초판 1948).
(2) Julian Mischi, ‘Il y a cent ans naissait un parti authentiquement populaire 100년 전 진정한 민중의 정당이 탄생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0년 12월호.
(3) T. S. Eliot, 『La Terre vaine et autres poèmes 황무지 외』, Points, Paris, 2014(초판 1922).
(4) Ernest Hemingway, 『Paris est une fête 파리는 하나의 축제다』, Gallimard, Folio 총서, Paris, 2012(초판 1964).
(5) Dorothy Parker, 『Hymnes à la haine 증오의 찬가』, Phébus, Paris, 2010(초판 1967).
(6) 에즈라 파운드의 현대주의 구호, 1928.
(7) John Dos Passos, 『La Belle Vie 아름다운 삶』, Gallimard, L’Étrangère(이방인) 총서, 2002(초판 1966). 뒤의 인용문도 같은 책에서 발췌.
(8) Dorothy Parker, 『Mauvaise journée, demain 형편없는 하루, 내일』, 10/18, Paris, 2000(초판 1928).
(9) William Faulkner, 『Le Domaine 저택』, Gallimard, Folio 총서, 2004(초판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