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을 ‘모둠’으로 앉혀야 하는 이유

2020-12-31     나탈리 캥탄 l 교사

나는 학생들에게 끊임없이 받아쓰기 시험을 보게 한다. 받아쓰기가 시작되면, 학생들 모두 같은 자세로 나란히 줄지어 앉은 채 혹 한 단어라도 놓칠까봐 고개도 들지 않고 오직 하나의 일에 집중한다. 개미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다.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정말 행복한 시간이다. 

그들도 스스로 매우 중요한 일을 한다는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아이들이란 자신들의 느낌대로 행동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러고는 모든 문장을 다 받아 적는 행복감을 누리려고 한다. 하지만 항상 행복할 수는 없다. 본문과 다른 것을 받아 적게 하면 난리가 난다.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 최대한 신속하게 밀고 나가야 실망을 줄일 수 있다. 그 후에는 아이들 각자가 혹은 여럿이 함께 보여주는 아주 날카로운 집중의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럼에도 받아쓰기 시험을 내면서 누리게 되는 수준 높은 고요함은 어디에도 비할 데가 없다. 오로지 공포정치를 펼치는 교사들만이 손에 넣을 수 있는 고요함이다. 이제는 그런 교사들이 많지는 않아도, 한 학교에 한 명씩은 있다. 또한, 받아쓰기를 채점하는 것만큼 멋진 일도 없으리라. 집중력을 전혀 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라디오를 듣거나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기계적인 작업인 덕분이다. 

대체로 같은 부분에서 같은 실수들이 나오기 때문에 시험지가 잔뜩 쌓여 있어도 초고속 채점이 가능하다. 30장에 30분이면 충분하다. 받아쓰기보다 더 빠르게 채점할 수 있는 시험지는 없다. 또한, 학부모든 학생이든 그 누구도 채점 결과에 이견을 보이지 않는다. 

받아쓰기 본문으로 작가 겸 영화배우였던 앙토냉 아르토나 소설가 에밀 졸라의 작품을 인용했다는 이유로, 또는 오해가 섞일 법한 제스처나 농담을 했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불만을 가지는 일은 있어도, 받아쓰기 시험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학생들의 미움을 사는 경우는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그렇다.

프랑스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들 대부분이 20점 만점임을 고려할 때 무려 -40점이라는 최저 점수가 나올 수 있는 시험은 받아쓰기가 유일하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놀라운 점수는 아니다. -40점이 나왔다면 난독증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2010년의 어느 날도 여러 아이들이 꾸역꾸역 받아쓰기 본문을 받아 적으며 구렁텅이에 빠지고 있었다. 대부분 바보 소리를 듣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불현듯 나의 친한 친구들도 맞춤법을 곧잘 틀렸다는 것이 생각났다. 또한, 내가 학창시절 내내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던 난독증 환자였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과 살고 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맞춤법이 엉망인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맞춤법은 엉망임에도 세상에 대한 예리한 사유를 지닌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반대로 완벽한 맞춤법을 사용함에도 사고수준은 형편없는 이들도 존재한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공무원의 신중한 의무를 연상케하는 맞춤법 준수

실제로 맞춤법은 잘 지키면서도 바보같이 사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던가. 그럼에도 맞춤법 수준에 따라 사람을 분류하는 건 소개팅 앱에서도 나타난다. 맞춤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자신처럼 맞춤법을 잘 지키는 사람과 연결되기 마련이다. 사회적인 자기선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맞춤법 수준이 떨어지는 사람은 문장을 두 줄 이상 늘어놓지 못하고, 나아가 자기 의견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다. 말하자면 그것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나오는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종교적이었든, 중립적이었든, 의무적이었든 간에 어쨌든 이 나라에서 지난 백여 년간 이어져 온 공교육과 사교육이 이뤄낸 성취이기도 하다. 

맞춤법의 수준과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의 수준은 서로 닮아 있다. 사람들은 음담패설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도, 복합과거시제의 문장에서 직접목적보어가 동사보다 전치될 경우 과거분사의 성·수 일치 여부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너그럽다. 그러나, 이런 규칙을 잘 아는 것이야말로 지식수준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이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 애초에 이해가 가능한 것이 아니긴 하지만) 규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동료교사들 중에서도 의사소통 중에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우리 모두 끊임없이 무언가를 적고 있지 않은가) 생기는 맞춤법 실수들을 그대로 두는 경우가 많은 것에 놀란 적이 있다. 그것은 아이들도 금방 찾아낸다. “선생님, 그 선생님도 맞춤범을 잘 틀리시던데요!” 그럼 난 아이들을 진정시킨다. “알퐁스 드 라마르틴도 맞춤법을 잘 틀리는 사람이었지만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잖니.” 

그러나 나 역시 공무원은 맞춤법을 어기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공무원 시험이 마법과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도 아닐뿐더러 공무원 시험을 통과한다고 해서 그 즉시 맞춤법 실수가 멈춰지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맞춤법이라는 것은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른바 ‘신중의 의무’) 공직사회의 날카로운 감시 하에 놓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공무원에게 맞춤법 준수를 요하는 조항은 국내 법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전설과도 같은 ‘1832년 법령’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그저 가상의 법령으로 머릿속에서만 존재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공교육계 역시 법제화된 신중의 의무는 찾아볼 수 없다. 군대에는 신중의 의무가 존재하지만 교육계는 그렇지 않다. 최근 한 장관이 교사에게 ‘귀감’의 의무가 있음을 강조하는 단락을 법조문에 포함시키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특히 그가 내놓은 개혁안에 반기를 드는 교사들이 있었고, 그는 그 교사들을 탐탁지 않아 했다). 

즉, 공교육에서의 ‘신중의 의무’도 머릿속에만 존재해온 것이다. 어쨌든 법제화된 적도 없었고, 구속력이 짙어져만 가는 이런 조항을 만들어내려는 강박적인 시도는 불안을 야기한다. 일례로 (아무튼 공교육에서 만큼은) 앞으로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는 조항들이 생기리라는 환상을 품을 수 없다. 그저 매를 들게 만드는 소소한 내부적인 법이 만들어질 뿐이다. 왕보다도 전제적이고, 국가보다도 선도적이며, 제도보다도 관료주의적이고, 경찰보다도 억압적인 결과다.

 

자기 감독과 감시 사이의 모둠 앉기

한편, 학생들을 4명씩 모둠을 지어 앉힐 필요가 있다. 아이들이 우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율적인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우리는 그저 아이들이 자립성을 가질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춰준 뒤 적어도 아이들의 시야에서는 사라져야 한다. 채우고, 풀고, 찾아내고, 뒤섞어야 할 문장들을 적은 인쇄물을 나눠주고는 재빨리 컴퓨터 뒤로 달아나 아이들이 주어진 모든 일을 마칠 때까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예외적으로 혹 도움을 요구하는 학생이 있다면 (우린 그런 아이들을 일종의 ‘지배인’이라고 부른다) 문제를 제대로 이해했을 법한 다른 모둠으로 보내주도록 한다. 그러면 아이들끼리 서로 설명을 주고받을 것이다. 수업 시간이 끝날 무렵이 되면 유연한 몸짓으로 모둠들 사이를 오가며 점수를 매겨준다. 점수는 색깔로 매기는데 초록색이면 성공, 노란색이면 보통, 빨간색이면 실패를 의미한다. 하지만 네 명씩 모여 있는 만큼 모둠 전체가 빨간색을 받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최소한 네 명 중 한 명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초록색 점수를 따내기 마련이다.

이런 절대자유주의적인 교육방식에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학생이 곧 선생이 되는 것이다. 이보다 좋은 학습방식은 없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혹시라도 감독관이 교실에 들렀을 때 학생들을 모둠으로 앉히지 않고 기존 방식대로 칠판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도록 한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 교사는 쫓겨나고 말 것이며, 쫓겨나지 않더라도 스스로 떠나도록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할 것(‘낙담시키는 것’이 포인트다)이다. 그렇다면, 권위주의적인 체제가 교사에게 권위주의적이지 않을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사실은 그보다 더 복잡하다. 보이지 않는 권위가 교실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컴퓨터 뒤에 몸을 숨기고 있을지라도 초록, 노랑, 빨강 등 점수에 대한 약간의 웅성거림 외에는 개미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야 한다. 또한 교사는 프린트물을 나눠준 뒤 재빨리 컴퓨터 쪽으로 달려가 24~31명에 달하는 학생들 모두가 제시간 내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를 바라는 한편 온라인학습시스템(ENT)에 접속해 계속 말을 하고 설명을 이어가야 한다. 이것이 가능해지려면 어떤 조건이 선행돼야 할까?

우선 24~31명의 학생들이 모두 이런 권위에 동화돼, 스스로가 직원인 동시에 주인이 돼야 한다. 자기 안에 있는 직원의 게으름은 주인에 의해 곧바로 개선돼야 하며, 주인은 항상 주의를 기울여 직원을 조금도 빠뜨리지 않아야 하고, 혹 빈둥대려는 직원이 있는지 살피며, 모든 직원은 스스로를 존중해야 한다. 또한 직원들은 어깨너머로는 주인의 시선을, 귀로는 주인의 지적을 의식해야 한다. 

특히 그 지적이 주변의 동료들, 이 경우 같은 반 아이들에게 향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그 누군가에게 하는 말임을 알 수 있도록 이중으로 귀를 열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 내용들을 순식간에 적어 내려가던 내게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이것이야말로 자기 감독을 구현시킨 장치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24~31명의 아이들에게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숨어 있는 바로 그 감독관에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마치 무대 뒤에서 대사를 뱉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이 장치는 초록색 점수를 얻는 공무원에게는 누구에게나 내재돼 있을 것이다.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감독관은 항상 머릿속에 자리를 잡고 내가 규율을 잘 지키는지 확인한다. 모둠으로 앉아, 자율성과 자기평가를 지속하며, 고요하면서도 소란하게, 쉴 새 없이 근면성실하게 일하며, 이 사람 저 사람의 감시 하에 놓여 있는지 지켜보는 셈이다.  

 

 

글·나탈리 캥탄 Nathalie Quintane
작가이자 교사. 이 기사는 그의 저서 『학교에 간 햄스터 Un hamster à l'école』(2021년 1월 14일 출간예정)에서 일부 발췌한 것이다.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