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소보에서 정의 실현은 여전히 가능할까?

코소보해방군 지도자 체포 이후

2020-12-31     장-아르노 데랑스 외

대(對) 세르비아 무력항쟁 기간 중 게릴라 반군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범죄의 그림자가 20년간 코소보를 맴돌고 있다. 하심 타치 대통령과 그의 코소보해방군(KLA) 동지 몇 사람이 11월 5일 체포됐다. 이는 마침내 면죄부의 종말을 알리는 전조가 될 것인가? 지금까지 서방세계는 안정을 명목으로 희생자들을 무시해온 새 권력을 확고히 지지해왔다.

 

2020년 11월 5일, 하심 타치 코소보 대통령은 미디어에 사임을 발표하고,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설치된 코소보 특별재판소에 기소된 사실을 인정했다. 코소보해방군(KLA)의 전 대변인이자 지도자로서 1998~1999년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에 대항한 무력항쟁 기간과 그 후에도 몇 달간 저지른 전쟁 범죄 및 반인륜적 범죄로 기소된 것이다. 

그로부터 몇 시간 전, 코소보정보국(Shik)의 전직 국장이자 현 부국장인 카드리 베셀리 코소보민주당(PDK) 대표도 레제프 셀리미 하원의원과 함께 기소됐다. 그 전날에는 KLA의 전 대변인이자 전 국회의장(2007~2014)인 자쿱 크라스니치가 프리슈티나에서 체포됐다. 타치 대통령은 2020년 6월 24일에 이미 국제사법재판소의 기소 발표로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과의 회담을 취소해야 했다. 특별재판소에 의해 체포돼 네덜란드 교도소로 이송된 네 명의 정치인은 박해, 자의적 구금, 잔혹행위, 고문 및 살인 등 조직적 집단범죄 혐의에 대해 조사를 받아야 한다. 1998년 1월 1일에서 2000년 12월 31일 사이에 구 세르비아 지역에서 자행된 범죄의 재판을 맡은 코소보 특별재판소는 주로 유럽연합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운영되며, 코소보 사법시스템과 연결돼 있다. 헤이그에 설치된 특별재판소는 외국 판사들로 구성되며, 레바논, 시에라리온, 중앙아프리카공화국 특별재판소처럼 부분적으로 국제적인 관할권을 가진다. 

 

수석 검사, “조사 진행을 막는 방해가 있었다”

2019년 여름부터 게릴라 반군 출신 수십 명이 때로는 용의자로, 때로는 증인으로 특별재판소에 출석했다. 2020년 9월 24일, 첫 번째 피고인이 특별재판소 판사 앞으로 이송됐다. 코소보 북동부 랩(Llap) 지역의 전 사령관 살리 무스타파는 세르비아인, 로마니인, 알바니아인을 대상으로 100여 건의 살인, 학대, 고문, 자의적 구금을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1)

스위스 출신의 딕 마티 유럽평의회 의원이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가 2011년 1월 의회에서 승인되면서 그 결과로 코소보 특별재판소가 설치됐다.(2) 미 중앙정보국(CIA)의 비밀수용소에 대한 연구로 이미 잘 알려진 마티 의원은 수백 명의 세르비아 민간인들과 로마니인들이 사법 외 체포를 당해 알바니아로 추방당했을 가능성과 실종됐을 가능성을 조사했다. 마티 의원은 또한 코소보해방군(KLA)이 정치적 적대자로 간주하는 알바니아인들 -대부분 코소보 알바니아계 온건파 지도자 이브라힘 루고바(1944~2006)가 이끄는 코소보민주연맹(LDK)의 활동가들 - 을 불법구금, 고문 및 살해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 같은 범죄는 무력분쟁 중 자행된 것이지만, 1999년 코소보가 유엔 보호령이 된 후 옛 세르비아공화국의 남부 지방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평화유지군이 4만여 명 주둔 중인 상황 속에서도 그 같은 범죄는 계속됐다.(3) 마티 보고서에서 고발한 비인도적이고 굴욕적인 대우와 실종 사건은 유엔 코소보 임시행정기구(UNMIK)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도 이미 확인한 사실이었다.(4)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도 KLA 관련 범죄를 조사했지만, 1999년부터 2007년까지 ICTY의 수석검사를 맡았던 카를라 델 폰테는 자서전을 통해 “더 이상 조사를 진행하지 못하도록 막는 방해가 있었다”라고 주장했다.(5) 

게다가 델 폰테는 증거자료를 고의적으로 파기한 사례도 있었다고 폭로했다. 2014년 7월 유럽연합 독립검사로 임명된 미국 외교관 존 클린트 윌리엄슨은 마티 보고서에서 고발한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그런 범죄를 재판하기 위한 임시법원의 설립은 ICTY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2015년 전범 특별재판소 설치를 승인하는 헌법 개정안이 코소보 의회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브뤼셀과 워싱턴의 강한 압력이 필요했다.

마티 보고서는 또한 해외 판매를 목적으로 세르비아 수감자들의 장기를 적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 엄청난 혐의는 보고서 발표 즉시 전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자 장기밀매 범죄를 KLA와 연관 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의혹을 거부하는 거센 반격이 시작됐다. 델 폰테 전 수석검사의 대변인인 플로랑스 하트만에 의하면, 그런 반격은 다른 학대를 강조함으로써 세르비아군이 저지른 범죄를 ‘상대화’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하는 ‘수정주의’의 망령을 불러일으키면서, 델 폰테 전 수석검사의 ‘책임 없음’이 인정될 때까지 계속됐다고 한다.(6) 

장기밀매 의혹은 거대한 범죄의 숲을 가리는 나무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는 보고서의 일부일 뿐이며, 만약 그 사실이 밝혀졌다면 그렇게 많은 수감자들이 조사를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마티 보고서는 코소보 중부 드레니카 출신의 소수 활동가들이 세르비아 정권에 대항하는 무장투쟁의 독점권을 어떻게 선점했는지를 강조한다. 가족적 유대로 단결된 이 집단은 권력과 수익을 독점하기 위해 자신들의 잠재적 라이벌을 제거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KLA는 전쟁 후에도 오랫동안 활동을 계속한 코소보정보국(Shik)의 그림자 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는 PDK를 탄생시켰다. 평화를 되찾은 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참전용사도 PDK의 기반이 됐다. 참전용사의 지위는 다양한 사회적 혜택에 대한 권리를 보장했으며, 참전 기간보다는 정치적 충성도에 따라 그 혜택이 부여됐다. 행정부는 전 게릴라 사령관이 체포될 때마다 동원되는 이 압력집단과의 갈등을 두려워한 나머지,(7) 오랫동안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특별재판소의 판사들은 그 중요성을 간파하고, 살리 무스타파를 심문한 직후, 정의를 모욕하고 증인을 위협하며 재판상 비밀을 누설한 혐의로 기소된 KLA 참전용사단체의 강력한 두 수장 히스니 구카티와 나심 하라디나이의 심문을 명령했다. 

전쟁이 끝난 후 코소보에서는 공공연히 ‘애국 전쟁’ 운운하는 분위기가 조장됐다. 이 ‘해방’의 영웅적 서사에서 전쟁 범죄는 오직 세르비아 밀로셰비치 정권의 전유물인 것처럼 인식됐다.(8) 이 서사에서 KLA 전사들은 1999년 3월에 개입을 결정한 NATO의 ‘지상 동맹’이었으며,(9) 루고바는 세르비아군이 통제하는 프리슈티나에서 활동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수호한 인물로 통했다. 

 

증인살해, 공갈협박, 폭력…

그러나 이 민족 영웅신화는 점점 호소력을 잃고 있다. 한편, 루고바가 이끄는 LDK 전사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범죄가 폭로되면서 코소보 알바니아인의 정치적 통일성에 대한 허구는 약화됐다. 다른 한편으로는, 폭력의 위협에 굴복한 국제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공모 속에서, 더 이상 전사들의 영웅주의를 들먹이며 전 게릴라들이 초래한 국가 분열을 정당화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10) ICTY는 니콜라 샤이노비치 전 총리와 블라스티미르 조르제비치 전 내무부 차관 등 여러 고위 세르비아 공무원들을 재판했고, 그 결과 샤이노비치와 조르제비치는 2009년과 2014년에 각각 18년형을 선고 받았다. 

반면 ICTY가 KLA의 전 사령관 여러 명을 기소했음에도, 큰 처벌을 받은 인물은 단 한 명, 1998년 여름 라푸슈니크 수용소에서 저지른 범죄로 2005년 징역 13년형을 선고받은 하라딘 발라뿐이다. 발라의 최고위 지도자인 파트미르 리마이 전 코소보해방군 사령관도 2003년 체포됐으나, 2년 후 무죄 선고를 받았다. 리마이는 코소보로 돌아와 ‘순교자’라는 명성을 얻으며 정계에 즉시 복귀했다. 코소보의 법치 회복을 위해 설치된 Eulex는 클레츠카 마을에서 세르비아인 포로 7명과 알바니아인 1명을 살해한 혐의로 리마이에 대해 새로운 소송을 제기했지만 그는 2012년 5월 다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코소보 서부의 카리스마 있는 게릴라 사령관 라무시 하라디나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증인 보호는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하라디나이는 총리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2005년 3월에 기소돼 헤이그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2008년 4월 3일 무죄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이 판결은 2010년 7월 21일 ICTY 항소법원에서 뒤집혔다. 증인 압박 혐의로 구금 명령을 받은 것이다. 1심 재판을 몇 주 앞둔 2007년 2월, 코소보의 로마니 공동체에 거주하던 결정적 증인 쿠이팀 베리샤가 몬테네그로 포드고리차 거리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하지만 하라디나이는 2012년 11월 다시 무죄 선고를 받았다.

공갈이나 협박, 신체적 폭력은 목격자 자신에게 국한되지 않고 친척에게까지 확대됐다. 그 결과 검찰 신문을 받은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청문회 출석을 거부하거나 증언대에 서길 거부했다. 아김 조가이는 Eulex의 파트미르 리마이 재판에서 증언하기로 돼 있었다. 조가이는 KLA 121여단의 군사경찰장을 역임했으며, 클레츠카 비밀감옥의 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1998년에서 1999년까지 그 비밀감옥에서 알바니아와 세르비아의 민간인 여러 명이 구금, 고문,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가이는 2011년 9월 27일 독일 뒤스부르크의 한 공원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자살설이 공식적으로 배제되지는 않았지만 조가이의 가족은 그가 심한 압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11) 조가이가 리마이에 대해 남긴 서면 증언은 재판관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티 보고서가 나온 지 몇 주 후 장-샤를 가르데또 모나코 하원의원이 ‘증인 보호’라는 뜨거운 주제에 관한 보고서를 유럽평의회 의회에 제출했다.(12) 가르데또 하원의원은 “코소보처럼 모두가 서로를 아는 작은 나라에서 증인으로 선다는 것은 특히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증인들을 다른 도시와 지역으로 이주시키는 것도 어렵지만, 제3국에서 증인들을 대규모로 수용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13)

특별재판소의 기능이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자, 의구심이 더 커지고 있다. 이 재판소는 최고위급 간부들을 재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하수인들만 불러들이게 될 것인가? 특별재판소의 첫 기소는 그런 우려를 잠재울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특별재판소가 임시재판의 긴급 필요성을 내세우면서 ICTY가 실패한 곳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오라호바츠 실종 세르비아인 가족협회의 대표 네고만 마리치는 사법제도에 대한 모든 신뢰를 잃은 듯 보였으며 기자의 질문에도 마지못해 답했다. 

그가 보기에는, 사건이 발생한 지 20년도 더 된 지금, 이미 많은 목격자들이 사라진 후 전범 혐의자들을 잡아들이는 건 늦어도 너무 늦은 일이다. 피고인들이 마침내 진술할 것인가? ‘종교에 귀의한 이들’이나 ‘회개한 이들’이 증언할 용기를 낼 것인가? 일부 인물들이 해방 투쟁이라는 명목으로 저지른 범죄를 인정하고 코소보 사회가 과거와 화해하기까지,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글·장-아르노 데랑스 Jean-Arnault Dérens 
로랑 제슬랭 Laurent Geslin

두 사람은 <르 쿠리에 데 발캉> 기자로, 『강들이 만나는 곳. 유럽의 변경, 발칸반도에서 캅카스까지(Là où se mêlent les eaux. Des Balkans au Causase, dans l'Europe des confins)』(Paris: La Découverte, 2018)를 공저했다.

번역·김루시아
번역위원


(1) 코소보 특별재판소, 헤이그, 1차 공개심판, 2020.9.28.
(2) Dick Marty, ‘Le traitement inhumain de personnes et le trafic illicite d’organes humains au Kosovo 코소보 내 비인륜적 대우와 장기밀매’, 유럽평의회 의회 보고서 12462호, Strasbourg, 2011.1.7.
(3) Jean-Arnault Dérens, ‘Au Kosovo, la “sale guerre” de l’UÇK 코소보해방군의 더러운 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1년 3월호, 한국어판, 2011년 6월호.
(4) ‘Human rights in Kosovo: as seen, as told,’ vol. II, 1999년 6월 14일―10월 31일, OSCE, Vienna, 1999년 11월 5일.
(5) Carla Del Ponte, 『La Traque, les criminels de guerre et moi 추적: 전쟁 범죄자들과 나』, Éditions Héloïse d’Ormesson, Paris, 2009. 
(6) Jean-Arnault Dérens, ‘Trafic d’organes au Kosovo: un rapport accablant 코소보의 장기 밀매: 저주받은 보고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 웹사이트, 2014년 1월 4일, www.monde-diplomatique.fr
(7) Nathalie Duclos, 『Courtier de la paix. Les vétérans au cœur du statebuilding international au Kosovo 평화의 중개인: 코소보 내 국제적 국가 건설의 중심에 있는 재향 군인들』, CNRS Éditions, Paris, 2018.
(8) ‘Vingt ans après, les plaies ouvertes du Kosovo 20년 후 코소보의 열린 상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 웹사이트, 2019년 3월, www.monde-diplomatique.fr 
(9) ‘Kosovo. Les fantômes d’une guerre de gauche 코소보. 좌파 전쟁의 유령’, <La Revue du crieur>, 12호, Paris, 2019년 2월호.
(10) Ana Otašević, ‘Faillite de la mission européenne au Kosovo 코소보에 파견된 유럽 임무단의 몰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6월호, 한국어판 2015년 7월호.
(11) Jean Daville, ‘Crimes de guerre et protection des témoins au Kosovo: “Eulex m’a tuer 코소보 전쟁 범죄와 증인 보호: Eulex가 나를 죽였다’, <Le Courrier des Balkans>, 2011.10.3. www.courrierdesbalkans.fr
(12) ‘La protection des témoins: pierre angulaire de la justice et de la réconciliation dans les Balkans 증인 보호: 발칸반도의 정의와 화해의 초석’, 유럽평의회 의회 결의안 1784호, 2011.1.26. 
(13) Jean-Arnault Dérens, 인터뷰, <Le Courrier des Balkans>, 201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