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의 ‘후지모리 개혁’에 발목 잡힌 페루

2020-12-31     로맹 미구스 l 언론인

페루는 2021년 4월 대선을 앞두고 있지만 국민들의 기대는 크지 않다. 연이은 사임과 탄핵으로 2016년 선거 이후 무려 3번이나 대통령이 바뀌었다. 2001년 이후 당선된 4명의 대통령 가운데 3명이 부정부패 혐의로 기소됐고 나머지 1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 불안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020년 11월 16일 정오를 살짝 넘긴 시점, 페루 의회는 박수갈채 속에서 투표를 마감했다. 투표 결과 우파의 프란시스코 사가스티가 국회의장직으로 선출돼 페루 공화국의 임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됐다. 사가스티의 전임자인 우파 출신의 마누엘 메리노는, 또 다른 우파인 마르틴 비스카라가 보수파 의원들의 농간으로 탄핵 된 이후 임시대통령으로 취임했으나 일주일도 안 돼 사임했다. 

2년 전에는 비스카라의 전임자이자 대선 승리로 대통령이 된 마지막 대통령인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가 뇌물 수수 의혹으로 탄핵당했다. 은행가 출신의 쿠친스키는 전임자였던 오얀타 우말라(2011~2016), 알란 가르시아(2006~2011), 알레한드로 톨레도(2001~2006)에 비하면 정치적으로 우파에 가까웠다. 1년 전 칠레, 콜롬비아, 에콰도르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규탄하는 민중들의 거센 항의로 몸살을 앓았다.(1) 당시 <르몽드>는 “페루는 예외”라면서, “지난 몇 개월, 남미지역 국가 여러 곳에서 격렬한 시위가 발생했음에도 페루 국민들은 정치인들의 부패와 타락에 매우 담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썼다.(2) 

그러나 프랑스의 일간지 <르몽드>는 에보 모랄레스 전 볼리비아 대통령이 2019년 쿠데타로 사퇴한 사건을 두고 “모랄레스 가의 몰락”을 주장했다가 불과 2주 후, 2020년 10월 대선에서 모랄레스가 이끄는 사회주의정의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는 바람에 망신을 당했던 것처럼, 페루에 관해서도 완전히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3) 페루 국민들은 2020년 11월 메리노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일 당시 전혀 ‘담담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힘이 없고, 정치권은 불안정하고, 부패는 만연한 상황에서 이런 시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악의 뿌리는 몇 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제위기를 집권기회로 삼다

1980년대 들어서서 페루는 여러 가지 구조적인 위기에 봉착했다. 빛나는 길, 투팍 아마루 혁명의 게릴라와 정부 간의 유혈 충돌이 연달아 일어났다. 6만 9,280명이 죽거나 실종됐고, 페루 사회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4) 게다가 1960년대에 도입된 경제 모델도 위기를 맞았다. 1988년부터 본격화된 탈산업화와 초인플레이션은 민심을 악화시켰다. 정치권은 신용을 잃었고, 국민들은 기존 체제에 등을 돌렸다.(5) 

이런 위기로 인해 기존 정치인이 아닌 새로운 인물이 선거에서 승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기자 출신으로 언론사 사장을 역임하며 1990~1995년에 리마 시장직을 지낸 리카르도 벨몬트 카시넬리가 대표적인 예다. 오늘날 페루 국민들이 벌이는 정권 퇴진 시위는 이 시기에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다. 중간에 10년 정도, 공백기가 있기는 했다. 공백기가 생긴 이유는, 1990년 6월 10일에 치러진 대선에서 일본계 엔지니어인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보수파 작가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를 꺾고 승리를 거뒀기 때문이다.(6)

후지모리는 전임 대통령들에 대한 페루 국민들의 반감을 ‘반체제적’ 담화로 결집했고,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줬다. 출신 정당과 상관없이 ‘유능한 인물들’로 내각을 구성해 유혈 충돌을 중단시키겠다고 약속했으며, 게릴라의 세력 확산을 우려하던 주요 업계를 안심시켰다.(7) 그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당시 IMF 총재였던 미셸 캉드쉬를 만나기 위해 미국을 방문했다. 페루로 돌아온 뒤에는 선거공약의 실천에 온 힘을 쏟았고, 위기에 빠진 페루경제를 살리기 위해 강력한 충격요법을 처방했다.

정파와 인물을 아우르는 통합정부를 구성하겠다고 야심차게 선언했지만, 사실 후지모리의 정당인 변화90(Cambio90)은 의회에서 과반석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하원에서는 180석 중 32석, 상원에서는 62석 중 14석 뿐이었다. 의회는 후지모리가 추진하는 각종 ‘개혁’ 프로젝트에 제동을 걸었고, 상원은 반정부 게릴라 소탕 작전 중에 벌어진 인권유린 사례들에 대해 갑자기 우려를 표명했다.

이에 후지모리는 군의 지원을 등에 업고 강권을 발동했다. 1992년 4월 5일, 후지모리는 의회를 해산하고, 제도적 보장을 없애고, 제헌 의회를 소집했다. ‘친위 쿠데타’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부터 ‘치노(Chino, 중국인을 뜻하는 단어로 후지모리의 별명)’는 자신의 로드맵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혹독한 탄압도 서슴지 않았다. 

1993년 승인된 개정헌법은 페루의 경제구조를 재정의했다. 제58조와 제59조는 국가의 역할을 ‘사회적 시장경제’의 틀 안에서 민간 분야의 발전을 도모하는 것으로 한정했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독일의 경제학자 알프레드 뮐러 아르마크가 만들어낸 표현으로, 그는 1948년 “국가의 사회적 역할이란 소비자의 수요에 따라 결정되는 가격으로 다양한 소비재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썼다.(8)

 

탄핵, 해외도피… 그러나 시스템은 그대로

1994년 세계은행과 페루 대기업들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설립된 페루경제연구소는 공공 기능의 수행과 민간 분야의 이익증대를 동시에 만족시키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이 싱크탱크는 후지모리 정부를 위한 법 제정과 개혁 고안의 본거지가 됐다. ‘후지모리주의’가 경제적 엘리트의 이익을 대변하는 거대 민관집단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렇게 공공분야와 민간분야 간 경계가 점차 희미해지면서 부패 스캔들이 연이어 터졌고, 페루 사회는 크게 동요했다.

결국 후지모리는 탄핵되고 법원 판결을 피하기 위해 2000년 일본으로 도피했지만, 그가 마련해 놓은 시스템은 페루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게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서 페루의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하고 천연자원의 가격이 상승하자, 기존 체계를 개혁하겠다는 의지는 약화됐고 불평등 현상의 심각성도 점차 잊혀졌다.

1980년대부터 이어진 정치적 위기로 인해 페루에서는 종종 새로운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들은 전통적인 정당 출신들과는 달리 사회적 기반도 지역적 연고도 없기 때문에, 다 합쳐도 의회의 과반석이 되지 않는 군소 정당들의 지지를 받아 선거에서 승리를 거뒀다. 따라서 대통령이 된 후에도 정책을 실행할 때 자신을 지지해준 정당들의 각기 다른 입장들 사이에서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후지모리 모델’과 관련된 부패 사슬이 줄줄이 폭로돼 제도적 위기까지 발생하면서, 페루의 정치 불안은 더욱 심각해졌다.

2015년 6월 19일, 브라질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기업을 운영하고 있던 마르셀로 오데브레히트가 부정부패 혐의로 구속됐다.(9) 오데브레히트가 미국 법무부에게 감형을 조건으로 뇌물을 건넨 이들의 명단을 폭로하면서 이 사건은 국제적 스캔들로 확대됐다. 당시 미국 법무부의  서성희 부차관보(뉴욕주 변호사, 한국계 출신)는 오데브레히트가 내부적으로 “부정부패 전담 부서를 은밀하게 운영하면서 전 세계의 고위층 인사들에게 수억 달러를 건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10) 대중에게 공개된 수천 건의 문서에는 오데브레히트의 공공 계약 수주를 도우면서 부정부패, 뇌물 수수, 돈세탁 등을 저지른 남미의 유력 정치인들이 여럿 포함돼 있었다.

민간 분야와 공공분야의 결탁으로 이미 투기가 만연한 상태였던 페루는 오데브레히트 스캔들의 파장을 견뎌내지 못했다. 2017년에서 2019년 사이에, 후지모리 이후의 모든 대통령은 불법적으로 자산을 축재한 혐의로 기소됐다. 톨레도, 우말라, 쿠친스키 전 대통령들 모두 부정부패 혐의로 법정에 서야 했다. 이 사건에 연루된 가르시아 전 대통령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자택에서 경찰에게 체포되기 직전에 권총을 이용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시위와 선거는 별개인가?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정치인들을 향해 ‘물러가라’고 외치며 시위를 종종 일으켰던, 페루 국민들의 민심은 선거결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일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하면, 후지모리 전 대통령은 유혈충돌을 이용했다.(11) 테러 공모 의혹을 제기하거나 테러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방식으로 정적들을 공격한 것이다. 내전을 지겹도록 겪은 페루 국민들은 후지모리의 술수로 ‘급진’ 좌파 인사들이 줄줄이 투옥되는 모습을 보면서 좌파에 등을 돌렸다. 또한 후지모리는 대통령 직무부를 이용해 후견주의(clientelism)를 강화했다. 민영화를 통해 얻은 자금으로 운영되던 이 부서는 정부기관을 거치지 않고 빈곤층에게 지원금을 직접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조치들 덕분에 후지모리는 서민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페루연구소 소속의 인류학자 라몽 파후엘로는 또 한 가지 사실을 지적했다. “후지모리의 정치적 및 군사적 체제 하에서 신자유주의 문화가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페루 국민들은 위기를 극복하려면 공동 조직이나 정치적 집단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은 개인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고, 성공은 개인의 적극성으로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확산됐다.”

‘신자유주의적 사고방식’이 일반화되면서 페루 국민들은 전통적인 좌파의 담화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됐다. 그러나 2016년 4월 대선에서 좌파연합 광역전선(Frente Amplio)의 후보인 베로니카 멘도사가 18.74%의 득표율을 얻어 간발의 차로 결선 투표 진출에 실패하면서, 좌파에게도 미미하게나마 희망이 비치기 시작했다. 

베로니카 멘도사 후보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과거 좌파는 페루를 포기했다. 좌파 인사들은 NGO나 대학 안으로 숨어들었다. 페루의 좌파는 좌파의 핵심 원칙을 저버렸다. 바로 국민들의 곁에서,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방식으로 투쟁을 이어나간다는 원칙이다. 우리는 이런 투쟁을 바탕으로 정치적 계획을 실현해야 한다. 그 순서가 뒤바뀌어서는 안된다.”(12)

구태의연한 정치에 질려버린 페루 국민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가는데 성공한 멘도사는 ‘페루를 위해 다 함께’ 좌파연합의 후보로 2021년 4월 대선에 출마할 예정이다. 그리고 멘도사는 최근에 이웃 국가인 칠레가 했던 것처럼, 헌법 개정과 페루를 장기적인 위기에 빠뜨린 기존 체제의 개혁을 놓고 국민 투표를 실시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멘도사의 주장은 페루 국민들 사이에서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이제는 페루 정부도 그녀의 말을 가볍지 않게 받아들여, 사가스티 현 페루 대통령이 현재로서는 헌법 개정이 불가하다고 못 박기도 했다.(13) 신자유주의 예찬론자인 페루의 경제학자 에르난도 데 소토는 이 문제를 주제로 공청회를 열 것을 멘도사에게 제안했다.(14) 만약 멘도사의 주장이 마냥 허황된 것이었다면, 현 체제의 옹호자들이 이처럼 예민하게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페루는 예외’라는 것은, 역시 틀린 말인 듯하다. 

 

 

글·로맹 미구스 Romain Migus
언론인. 라틴 아메리카에 관한 정보 제공 사이트 <Les Deux Rives>(les2rives.info)의 개설자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번역위원


(1) Renaud Lambert, ‘La droite latino-américain dans l'impasse 라틴 아메리카 우파, 위기에 봉착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및 한국어판 2020년 3월호.
(2) Amanda Chaparro, ‘Amérique latine : l’exception péruvienne 라틴 아메리카 : 페루는 예외’, <Le Monde>, 2019년 12월 27일.
(3) Anne-Dominique Correa, ‘Bolivie, chronique d’un fiasco médiatique 볼리비아, 언론 실패 연대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0년 10월호.
(4) ‘Informe final’, ‘Anexo 2’, 진실화해위원회, Lima, 2003년 8월 28일, www.cverdad.org.pe
(5) Michel Chossudovsky, ‘Pérou “ajusté”, Péruviens écrasés ‘구조 조정’된 페루, 짓밟힌 민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1년 10월호.
(6) Ignacio Ramonet, ‘Les deux Mario Vargas Llosa 카스트로에서 부시, 마침내 노벨로. 소설가 바르가스 요사의 편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0년 11월호.
(7) José Comas, ‘Alberto Fujimori quiere renegociar con el FMI la deuda externa peruana’, <El País>, Madrid, 1990년 6월 13일.
(8) François Denord, Rachel Knaebel, Pierre Rimbert, ‘L’ordolibéralisme allemand, cage de fer pour le Vieux Continent 독일의 질서자유주의, 유럽의 철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8월호.
(9) Anne Vigna, ‘Au Brésil, les ramifications du scandale Odebrecht 대통령을 탄핵시킨 브라질 오데브레히트사의 부패 사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및 한국어판 2017년 9월호.
(10) ‘Odebrecht and Braskem plead guilty and agree to pay at least $3.5 billion in global penalties to resolve largest foreign bribery case in History’, 미 법무부 공보, Washington, DC, 2016년 12월 21일.
(11) ‘Conclusiones generales del informe final de la CVR’, 제103조, 진실화해위원회, Lima, 2003.
(12) ‘Verónika Mendoza : “Il faut ouvrir un débat politique avec la population, mais à partir de ses propres réalités et de son propre langage” 베로니카 멘도사 : “국민들의 현실과 의견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정치 토론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Venezuela en Vivo, 2016년 10월 21일, www.romainmigus.info
(13) Marco Aquino & Marcelo Rochabrun, ‘Presidente interino de Perú dice “no es el momento” de plantear una nueva Constitución’, <Reuters>, 2020년 11월 20일.
(14) 에르난도 데 소토, ‘#DebateConstitución - Verónika Mendoza y Hernando De Soto’, YouTube, 2020년 1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