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당 100주년을 맞이한 프랑스 공산당은 어디로?
1920년 12월 창당 이후, 프랑스 공산당은 프랑스 정치 지형에서 국민이 주도하는 정당, 국민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유일한 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도층과 노동자층의 간극이 그 어느 때보다 깊어 보이는 요즘, 프랑스 공산당의 역사는 많은 교훈을 남긴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여, 동맹하라!’ 단상 뒤 플래카드에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구호가 걸려있고, 그 위 펄럭이는 깃발에는 ‘노동자 해방은 노동자들의 업적이 될 것’이라는 제1인터내셔널의 슬로건이 보인다. 1920년 12월 25일 투르에서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 사회당의 전신-역주)의 전당대회가 개최된 후, 70%의 사회당원들이 탈당 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IC)에 입당했다. 일명 ‘제3인터내셔널’, 1919년 3월 레닌과 볼셰비키가 주도해, 전 세계에 자신들의 혁명을 일으키고자 창설한 당이다.
이 전당대회에서의 토론과 그 이후 벌어진 일들이 단순히 역사적 가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 이기주의를 넘어선 국제적인 연대 추구, 부르주아 체제와 연루되는 경향이 있는 국회의원들의 관리, 노동조합 투쟁과 정치적 투쟁의 유기적인 결합에 대한 고민은 오늘날의 고민에도 큰 울림을 안겨 준다. 공산주의 운동은 사실 프랑스 노동자들, 더 넓게는 도시와 농촌의 서민층 당원 조직망을 통해 발전했다. 이처럼 서민층의 이익을 반영하고 추구하는 것은 오늘날의 좌파정당이 갖추지 못하고 있는 역량이다.
투르 전당대회 때 공산주의 인터내셔널(IC)에 입당할 것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가 청산되기를 바랐다.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SFIO가 연합 정부에 참여하면서 다 망쳐났다고 말했다.(SFIO 당원인 쥘 게드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국무장관으로 일했다.) 그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평화와 혁명의 원칙을 부정하고, 계급협력에 매진하는 의원들에 대한 반감을 가졌다.
“말만 많을 뿐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유럽 대륙에서 행해지고 있는 학살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노동조합과 페미니스트를 탄압하는 국가를 옹호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볼셰비키가 요구하고, 인터내셔널 당원들이 바라는 새로운 정당은 의회와 언론이 당원의 감독에 순응하는 정당이었다. 정당 내 의원들과 일반 당원 사이의 간극은 상당히 깊었다. 전쟁 중 토목부 장관 비서실장이었던 레옹 블름처럼 68명의 의원들 중 50명 이상이 당원들의 뜻과 반대로, 다수를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SFIO를 분열시켰다.
셰르 지역을 대표하는 구두수선공 에밀 르라는 지역구 의원 두 명을 언급하며 전당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반의회주의자들이다. 우리당 국회의원들의 행위가 해롭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회의원이 적으면 적을수록 당원이 더 많아질 거라고 말하곤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당비 인출기’로 전락해서 소수 개인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회의원이 되면 조직의 단일성을 파괴하고, 조직체계를 파괴하고, 연합 정당에 들어가려 한다.(1) (...) 선거에서 사회당에 표를 주고 싶지 않다. 우리는 혁명적인 사회당을 원한다.”(2) 공산주의 인터내셔널(IC)에 입당한다는 것은 사회주의의 급진화에 대한 열망을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권력으로 간주되는 러시아의 1917년 10월의 혁명을 지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IC) 입당 발의문의 기안자는 초등교사 노동조합원 페르낭 로리오와 언론인 보리스 수바린이다. 그들은 전당대회가 열렸을 당시에는 수감 상태여서 전당대회에 참석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러시아에서 꾸민 거대한 음모에 연루돼, 1920년 봄 이후 체포된 수많은 당원들 중 일부였다.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이라는 구실로 파업 중인 철도 노동조합을 진압했고, 그들 중 1만 5,000명이 해고됐다.
공산당은 자체적으로 출세주의자들을 감시하며 부르주아 정부의 맹렬한 공격에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적인 중앙집권화’는 볼셰비키가 제정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21개 가입조건 중 하나였다. “현재 격렬한 내전의 상황 속에서 중앙집권화된 방식으로 공산당이 구성되고, 군사규율처럼 엄격한 규율이 세워져야만 공산당은 자신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1920년 7월 전당대회에서 주장했다.
이런 중앙집권화는 러시아 혁명과 유럽에서 일어난 폭동을 옹호하기 위한 쟁점사항이자, 프랑스 공산당원들이 바라는 요구사항이었다. 사회주의 선언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엄정한 조직이 필요하다. 당원들은 말을 행동으로 옮기기를 열망했다. “말만 많을 뿐 제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센네우아즈 주의 대표는 아쉬워했다.(3) 보클뤼즈 주의 대표인 교사 에르네스 드낭뜨는 말했다.
“우리는 제3인터내셔널을 지지한다. 그것은 엄정한 규율을 가지고 있고, 덕분에 우리는 행복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아무나 들어와서 멋대로 할 수 있고, 무위도식하는 곳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제3인터내셔널은 수정주의를 비판하며,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과거를 지적한다.”(4)
노동조합, 페미니즘, 반식민주의
투르 전당대회의 에피소드를 떠나, 유래의 신화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의 공산주의 정당의 창당은 여러 단계에 걸쳐 이루어졌다. ‘공산주의’라는 이름 자체도 1922년 1월에서야 비로소 새 정당의 이름으로 최종적으로 결정됐다. 1925년부터 소련 공산당을 모델로 수많은 시도를 하고 볼셰비키화한 이래, 이전의 사회주의 정당과는 다른 실제 정당이 만들어지기까지 여러 해가 걸렸다.
제1서기 루이 오스카 프로싸르와 같은 SFIO 출신 지도부들은 1923년 1월 빠르게 당을 떠났다. 인쇄소 교정자인 피에르 모나트 같은 무정부주의 성향의 노동조합원들도 당을 떠났다. 수바린, 로리오 등 창당 멤버들은 대부분 자의든 타이든 당에서 멀어졌다. 당 내부에서 민주주의는 점점 억압받고 있었다.(5)
SFIO에는 엘리트 지식인들, 자유 전문직 종사자들, 수많은 변호사와 기자들이 가득한 반면, 프랑스 공산당은 1920년대부터 노동자출신 지도자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지역별 지부로 구성된 SFIO와 달리, 공산당은 세포 조직과 같은 형태로 당원들의 노동조합 활동을 장려했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영향으로 프랑스 공산당은 선거에 노동자들을 많이 입후보시켰다. 1920년 해고된 혁명주의 철도 노동조합원인 피에르 세마르는 1924년 당 서기장이 됐다.
SFIO는 식민지주의의 남용을 비판하는데 그친데 반해, 프랑스 공산당은 소련이 이끄는 대로 반식민지 투쟁에 참여했다. 공산당은 1925년~1926년에 일어난 리프 전쟁 때, 리프 지도자 아브드 엘 크림과 연대할 것과 모로코에서 철수할 것을 촉구했다. 1922년 초 만들어진 식민지연합은 정치적 평등(투표권), 사회적 평등(동일한 근로와 급여)을 요구하며 프랑스 식민지 출신의 당원들을 결집했다. 식민지연합의 인도차이나 지부에서 활약했던 호찌민은 1925년 파리 지방선거에서 공산당 후보로 나섰다. 그는 1945년 9월 베트남의 국가 주석이 됐다. IC는 주체자들과 활동을 중심으로 반식민주의, 범아프리카, 반인종차별주의의 흐름을 연합하는 국가 간의 연대를 추진했다.
공산당은 1930년대부터 나라 전반에서 촘촘한 조직망으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며 소도시 지방선거에서 승리하고, 당원수가 급등하면서 확장됐다. 공산당은 프랑스 사회 현실에 공산주의 메세지를 적용하며 노동자들의 거대한 성채 내부에 공산주의를 확산시켰다. 일례로, 파리 서부 비양쿠르 지역 르노공장 노동자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농촌에서는 토지 집중화로 위태로워진 소규모 가족 농지를 지키고자 하는 열망에 부응했다. 좌파 연합정당인 인민전선에 공산당이 참여한 1936년, 공산당에서는 르노 조립공이었던 알프레드 코스트가 불로뉴비양쿠르에서 선거에 당선됐고, 농업노동조합활동을 했던 종묘업자 마리우 바제이유가 코레즈에서 당선됐다.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위한 투쟁은 노동조합, 페미니즘, 반식민주의 주장과 연결된다. 여성, 이민자 후손들, 서민층 등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이들에게 공산당의 존재 의미는 컸다. 저항을 가능케 하는 매개체이자, 개인 해방을 위한 원천이었던 것이다. 마르타 데스뤼모는 1936년 마티뇽 협정(프랑스 정부의 중재로 고용주와 노동자가 체결한 전국적 규모의 중앙 노사 협정-역주)에 참여한 유일한 여성이었다. 북부지방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9세에 학교를 관두고 하녀로 취직했다.
이후 직물공장에서 일하면서 그녀는 여러 번 파업을 주도했다. 그녀는 글을 읽고 쓰는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녀는 모스코바 국제레닌학교를 졸업한 후 1932년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에 들어갔다. 권위적, 관료주의적으로 비치는 공산당에 대한 이미지와 차별화해, 프랑스식 공산주의는 이런 현실을 혁신할 수 있다고 선전할 필요가 있었다.
‘직업 혁명가’들은 노동자인가?
프랑스 공산당은 1930년대 이후 매우 강력한 대중 정당이 됐다. 독일군의 점령에서 프랑스가 해방된 뒤부터 1970년대까지 4공화국 체제 하에, 프랑스 공산당은 선거에서 득표의 1/4을 차지하며 프랑스 정치사에서 좌파 지형을 점령했다. 1936년 인민전선 연합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여당으로 프랑스 해방에 참여하면서 프랑스 공산당은 사회적인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암브루아즈 크루아자는 유급 휴가와 사회보장제도를 만들었고, 모리스 토레즈(Maurice Thorez, 박스 기사 참조)는 공직, 근로시간 단축을 이룩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산주의의 위협은 ‘단기 20세기’ 동안 노동자 계급의 운명을 개선시키는 개혁을 이끌어냈다.(6) 2차 세계대전 이후, 보수주의자들의 눈에도 복지국가로의 발전만이 사회적 혁명을 피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였다.
프랑스 공산당은 서민 출신 인물을 국가의 고위직에 올려놓았다. 그 외에 고위직은 경제적 문화적 엘리트들의 전유물이었다. 대표적으로 1945년 11월부터 1946년 12월까지 산업생산부 장관을 지낸 마르셀 폴이 있다. 그는 복지시설에 살던 고아 출신으로, 13세 때부터 농장에서 일했고, 그 후에는 선원으로 일하며 전기공 자격증을 취득했다.(7) 파리 북부의 생투앙 발전소에서 일하던 그는 중요한 노동조합 간부가 됐다. 레지스탕스였던 그는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에 수용됐다. 그는 여기서 기업가 마르셀 다솔과 같은 프랑스인 수감자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위원회를 조직했다. 프랑스가 해방된 후 그는 전기와 가스의 국영화 책임자가 됐다. 그는 직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며 공기업을 노사의 본보기로 만드는 데 공헌했다.
루이 아라공, 프레데릭 졸리오 큐리, 파블로 피카소와 같은 지식인, 과학자, 예술가들과 동맹을 맺고, 서민 출신의 당원들에 의해 활성화된 프랑스 공산주의 운동은 정치계의 규칙을 파괴하는 유례없는 시도를 했다. 공산당은 서민 출신의 간부들을 위한 교육과 승진 장치를 마련했다.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공산당 지도부 요직에 있었던 세 사람, 광부 모리스 토레즈, 제련공 프누아 프라숑, 제과 노동자 자크 뒤클로는 공산당의 대중적인 정체성을 상징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세 사람은 일찌감치 ‘직업 혁명가’라는 직책을 가지면서, 노동자 계급과는 멀어졌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공산당 지도자들은 대중적인 엘리트 출신들이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고등교육을 받았다. 단순노동자, 이민자, 여성들은 조직의 말단에 위치한다. 그러나 다른 정당에는 이런 서민 출신들이 거의 없다. 공산당에서만 서민 출신이 공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세기 말까지 프랑스 공산당은 매우 남성중심적인 정치계에서 가장 페미니즘적인 정당이었다. 1930년대부터 나타난 보수적인 윤리관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여성 당원들을 위해, 페미니즘이 지배도식을 넘어설 수 있게끔 만들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노동자들을 국회에 당선시켰을 뿐만이 아니라 해방 이후 여성들의 진출도 확대시켰다. 독일 감옥에서 숨진 남편과 함께 레지스탕스로 활동했던 교사 오데트 루는 1941년 1월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녀는 1945년 레 사블르 돌로느의 군수로 당선됐다. 28세에 그녀는 군의 수장에 오른 최초의 여성이 됐다. 같은 해 10월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33명의 여성들 중 17명이 공산당 의원이었다.
1956년, 프랑스 국회에는 19명이 넘는 여성의원이 있었는데, 그중 15명이 공산당 의원이었다. 에쏜에서 당선된 유제니 뒤베르누아는 간호사이자 레지스탕스로 강제 수용소에 수감됐었고, 그녀의 남편은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에서 숨졌다.
노조와 제3인터내셔널, 도구로 전락하다
프랑스 공산당은 회사와 지역사회에서 개인 해방을 위해 부르주아 엘리트들과 투쟁하고 남성과 투쟁하는 활동가들을 위한 강력한 도구였다. 그러나 공산당은 조화되지 않는 목소리에는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모든 내부 분열은 단일성이라는 이름으로 축출됐다. 스탈린주의 정당에서 1960년대 초까지 토레즈와 그의 측근들은 라이벌을 떨어트리기 위해서 많은 일을 벌였다. 1961년 인사 책임자인 로랑 카사노바와 서기 마르셀 세르방은 계파활동으로 비판받고, 지도부에서 파면당한 뒤 하급 당원으로 강등됐다. 이 두 사람도 1952년 전쟁기간 공산당의 책임자이자 역사적인 지도자였던 샤를르 티용과 앙드레 마르티 두 사람을 따돌리는 데 가담했었다.
공장과 지역구 안에서 상부상조하는 매개체이자, 고용주의 지배와 서민 계층의 정치적 배척에 대항하는 투쟁 도구인 공산주의는 종파주의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양면성은 자본주의 국가 내 공산당의 상황과 소련에서 일어난 일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며 확립된 인민 민주주의에서 일어난 일들 사이의 간극과 겹쳐진다. 공장 내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대항세력을 형성하기 위해 노동조합원들이 공산당에 가입한 데 반해, 같은 시기 소련에서 노동조합은 생산성 목표 달성을 위해 노동자를 관리하는 도구였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IC)는 소련의 외교도구로 변해버렸다. 1943년 인터내셔널이 해체된 후에도 프랑스 공산당은 이탈리아 공산당과는 달리 계속해서 소련에 충성스러운 지지를 보냈다. 서유럽의 또 다른 거대 공산주의 정당은 사실 1956년부터 공산주의 국가 모델을 다양화할 것을 주장했다. 1968년 프랑스 공산당은 바르샤바 조약기구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에 개입한 것을 비판했고, 그 후 10년 이상 소련과 거리를 두는 동시에 사회당과 함께 좌파 연합에 참여하며 정책에 동조했다. 전직 제련공이자 1970년~1994년까지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조르쥬 마르셰는 1979년 23번째 전당대회에서 투표한 결의안에서 사회주의 국가의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종합평가’를 작성했다.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들은 1991년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계속해서 사회주의 체제가 우월하다고 주장했었다.
소련이 붕괴됐을 당시 프랑스 공산당은 이미 신자유주의의 공격, 사회당의 집권, 탈공업화의 복합적인 요인으로 대중적인 역량이 크게 손실된 상태였다. 1983년 정부의 ‘긴축 재정 전환’ 시기에 프랑스 공산당은 투쟁대상이었던 신자유주의 정책에 굴복해야 했다. 선거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이런 모순성은 1997년~2002년 사회당 리오넬 조스팽 정부에 참여하며 계속됐고, 동시에 노동자 그룹이 분열하면서 공산당은 세력은 약화됐다.
창당 100주년, 그러나 아직도…
프랑스 공산당은 북아프리카 이민자 출신 노동자나 개인 서비스직, 임시직 여성과 같은 서민 출신의 새로운 정치인을 배출해낼 수 없었다. 1990년대~2000년대 동안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는 서민 계층을 대변하기를 단념했고, 중산층에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8) 당원들의 활동이 감소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국회의원과 그 조력자들은 노동조합과는 거리를 두고 지방 자치를 중심으로 전문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며 공산당 조직 속에서 점점 더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창당 100주년이 된 프랑스 공산당은 최근 유럽 선거에서 2.49%를 기록하며 보잘것없는 득표율을 기록하는 작은 정당이 됐지만, 당비를 내는 당원이 5만 명에 이르는 등 아직도 거대한 당원을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 공산당은 여전히 인구 1만여 명의 50여 개 도시에서 선출직을 맡고 있다. 2020년 파리 북부에 위치한 인구 4만여 명의 스땅 시에서 아제딘 타이비가 재선된 것은 번창한 사회에서도 대중적인 공산주의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알제리 이민자 출신 노동자의 아들이며, 반인종차별주의자인 그는 17세부터 거리에서 사회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물론 서민층의 삶의 방식이 개선되고, 직업이 안정화되고,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면 공산당 더 넓게는 투쟁 활동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서민 계층이 사라진 것은 아니며, 2018년 가을부터 있었던 노란조끼 시위가 보여주듯이 그들은 항상 변화를 열망한다.(9)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강세를 보인 것은 단기간이었다. 21세기 초, 공산주의 정당뿐 아니라 좌파정당 전체가 위기에 처했다. 사회민주주의가 복지국가의 붕괴에 기여하고, 금융계의 이익에 동조했다는 것은 부정적인 신호다. 선거에서 기권율과 극우의 득표가 늘어났다는 사실 또한 엘리트 지도자와 서민 노동자 사이에 간극이 깊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편, 대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 프로젝트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라고 볼 수 있다.
글·줄리앙 미쉬 Julian Mischi
국립 농업·식량·환경 연구소 사회학 연구원. 주요 저서로 『공산주의자들의 정당. 1920년부터 오늘날까지 공산당의 역사』(Hors d'atteinte, 2020)등이 있다.
번역·김영란
번역위원
(1) 1919~1924년 중도 정당과 우파 정당의 연합
(2),(3),(4) <1920년 12월 25일~ 30일 투르에서 열린 18번째 전당대회>, 사회당(SFIO, Parti socialiste), Paris, 1921.
(5) ‘Un court moment révolutionnaire. La création du Parti communiste en France(1915-1924) 짧은 혁명의 순간. 프랑스 공산당의 창립(1915~1924)’, Libertalia, Montreuil, 2017.
(6) Eric Hobsbawm, ‘L’Ère des extrêmes. Histoire du court XXe siècle (1914-1991) 극단의 시대. 단기 20세기의 역사(1914년~1991년)’, Agone, Marseille, 2020(초판: 1994)
(7) Nicolas Chevassus-au-Louis, Alexandre Courban, ‘Marcel Paul. Un ouvrier au Conseil des ministres 마르셀 폴. 국무위원이 된 노동자’, Éditions de l’Atelier, Ivry-sur-Seine, 2020.
(8) Julian Mischi, ‘Comment un appareil s’éloigne de sa base 어떻게 한 정당이 당원들로부터 멀어졌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5년 1월호.
(9) Hélène Richard, ‘Le peuple des ronds-points 원형교차로의 군중’, <마니에르 드 부아르>, n˚168, 2019년 12월/202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