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 기계라는 돌팔이 안마사

2011-07-11     장노엘 라파르그

파리에서 지하철을 탈 때면, 자동개폐문에게 얻어맞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부주의한 사람, 행동이 재빠르지 못한 사람, 조금 크다 싶은 가방을 멘 사람, 어른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 아이 등은 자동문에 어깨나 관자놀이를 호되게 강타당하기 일쑤다. 지하철 상시 이용객들이 볼 때는 그저 웃음이 나오는 사건일 뿐이다. 그들은 자동문 대처법을 이미 익혔고, 문에 강타당하는 사람들이 부주의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자동문이 아닌 사람이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고 승객을 때리는 역무원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사회적 물의가 될 뿐만 아니라, 절대 그냥 넘길 수 없는 일로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사고능력이 없는 기계라는 이유로 우리는 이를 그냥 받아들이고 있다. 기계에는 사고능력이 없으니, 그로부터 당하는 폭력에는 의도성이 없다고 치부한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기계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판단능력이 없지만, 대신 의도적인 판단이 담긴 프로그램의 제어를 받는다는 것이다. 타 도시에는 자율개표기가 있으나, 자동문 시설이 아니다. 역무원이 직접 검표를 하는 지역도 있다. 오바뉴나 샤토루 같은 지역은 도심 대중교통이 무료이다.

기계적 행위? 의도적 프로그래밍

논란의 여지가 상당한 경제논리에 의거한 이런 검표 절차는 또 다른 제약을 낳는다. 개찰구의 패널은 승객들로 하여금 공간을 확실히 구분하게 한다. 개찰구 안과 밖은 확실히 나뉜다. 내가 사는 외곽지역 기차역도 최근 자동개폐문을 설치했고, 이 때문에 개표를 하고 승강장에 들어온 승객이 신문을 사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역무원에게 뭔가 물으러 가는 게 불가능해졌다. 승객들은 승강장에 설치된 (터무니없이 비싼) 자동판매기를 사용해야 하고, 뭔가 읽고 싶어도 벽에 붙은 광고판을 쳐다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프로그램화된 장치들은 셀 수 없이 널리 퍼져, 우리의 일상을 관리하며 도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별표를 누르세요”라는 자동응답에 울화가 치민 적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던가. “상세정보를 얻고 싶으시면 ‘상세정보’라고 정확히 응답하세요”라는 기계음에 “상세정보”라고 대답하면,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해주세요”라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그래서 다시 “상.세.정.보”라고 또박또박 말하면, “다음에 다시 걸어주십시오”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해괴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프로그래밍된 자동응답 서비스를 예견했던 정보기술(IT)계의 선구자 앨런 튜링은 1950년에 테스트를 실시했다. 철저히 텍스트화된 인터페이스만으로 통신이 이루어진다면, 과연 통화 상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기계인지 우리가 알아챌 수 있을까?

자동응답은 아무것도 모른다

텔레마케팅이나 온라인 고객서비스는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한다. 프로그래밍된 고객서비스를 이용할 때, 우리는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다고 봐야 할까? 대부분의 고객센터 상담원들은 ‘전문적인’ 프로그램에 따라 응답하며, 자율적 판단의 여지는 일절 없다. 이런 자동화는 고객의 문제나 문의사항이 대부분 동일하다는 전제에서 생겨났다. ‘로봇이나 다름없는’ 상담원들은 일종의 여과장치인 셈이다. 즉, 심각하지 않은 문제에 전문기술자가 개입하는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 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상담원이라는 여과장치가 지나치게 효과적인 나머지, 정작 문제 해결에 필요한 사람과는 말 한 번 못해보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자동응답 서비스가 아닌 사람이 직접 응대하는 서비스일 경우, 고객은 문의사항에 대한 해결책을 얻는다기보다는, 상담원과 대화함으로써 일종의 공감을 얻고, 심지어 이야기를 통해 불만을 해소하기도 한다. 1950년대 말 헨리 래보릿이 증명했듯, 상담원과의 통화를 통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함으로써, 마치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한 것과 동일한 효과를 얻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고객센터 전화상담원들은 프로그래밍된 대본에 따라 대화를 이어가기 때문에, 사실 그들이 누구든 상관없다는 이점이 있다. 이들은 하루는 행정실에서 일하고, 다음날은 전화상담센터에서 일하고, 그 다음날은 설문조사기관에서 일한다. 그들이 배우는 것은 극히 간단하다. 어떤 상황에서든 무조건 긍정적인 표현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불가능합니다”가 아니라 “문의사항 해결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식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고객센터가 값싼 노동력이 널린 프랑스 국외의 프랑스어권 국가에 자리하고 있으니, 상담원들이 정작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당연하다. 카사블랑카나 튀니스에 사는 상담원이 프랑스에 거주하는 고객이 우편물을 받지 못한 문제에 얼마나 큰 관심을 두겠는가.

(지식을 얻을 기회를 박탈당했다는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 고객센터 상담원들은 주도적으로 일할 기회도 없고, 지식이나 경력을 통해 금전적 혜택을 받기는커녕, 이를 쌓을 기회조차 없다. 따라서 특정 인력이 고객센터에 반드시 필요한 인재가 될 가능성은 전무한 것이다. 100% 자동화된 그 밖의 다른 프로그램 중에는 고객만족도 조사를 위해 임의추첨한 고객에게 전화를 거는 경우도 있다. 질문사항은 서비스 전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상담통화의 질적 만족도에 대한 것일 때가 많다. “상담원이 예의바른 태도로 응했습니까? 상담원이 올바른 프랑스어를 사용했습니까?” 이런 조사는 오로지 고용주를 위한 것으로, 고객센터의 질적 수준 관리 업무를 고객에게 떠넘기는 셈이다. 마리안 뒤자리에의 표현을 빌리면, 고객은 일종의 팀장 보조와 같은 위치이며, “하위직 상사”쯤 되어버리는 것이다.(1)

단순노동을 줄이기 위한 대책이라는 말로 포장돼 있지만, 기계에 의한 자동화는 ‘인적자원’의 자율적 판단이나 능력에 가치를 두는 게 아니라, 스트레스와 불만을 감당해내는 능력에 가치를 매긴다. 절차라는 것은 결국 상담원의 권한 밖의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문제의 책임자를 찾지 못하게 하도록 고안된 듯 여겨질 정도다.

‘인적자원’, 자율성을 잃다

여기서 잠깐 신분증을 예로 들어보자. 신분증 사진을 보면 나 자신을 알아볼 수가 없다. 무표정하고, 미소도 없고, 공허한 눈을 하고 있다. 스스로 슬픈 표정을 짓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은 도통 나 자신처럼 느껴지지 않고, 타인이 나를 알아보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는 내무부의 공식 지침이다. “눈을 고정하고, 표정이 나타나지 않은 얼굴이어야 하며, 입술은 다물어야 한다…, 얼굴 크기는 32~36mm 사이로, 아래턱에서 머리끝까지 담겨야 한다.”(ISO/IEC19794-5) 내무부 지침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신분증 사진은 사람이 검사하는 게 아니라, 인물 인식을 위해 복잡하게 고안된 프로그램이 검사하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은 규격에 맞는 인물만 인식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공식적인 얼굴이 프로그램의 요구에 맞게 찍혀야 하는 것이다. 오로지 평가표와 표정 없는 얼굴밖에 인식하지 못하는 프로그램을 위해서.

‘포토샵의 제왕’은 프로그램 그 자신

최근 카메라에 포착된 사람의 입술을 읽는 프로그램이 시험단계에 와 있다고 한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에 등장하는 컴퓨터 HAL9000을 떠올리게 하는 소식이다. 프로그램은 사람의 손짓과 자세, 움직임을 읽는데, 예를 들어 승강장에서 전철 몇 대를 그냥 선 채로 보내는 사람은 수상한 인물로 분석한다. 사람들이 가는 방향과 반대로 가는 사람도 의심스러운 인물로 분석한다. 조금이라도 일상적인 성향에서 벗어난 행동이 보이면 바로 경보가 울리고, 통제가 가해진다. 심지어 미 국토안보부는 FAST(Future Attribute Screening Technology)라 불리는 설비를 공항에 설치하기로 했는데, 이 기계는 심박수가 빠르거나 눈길을 외면하는 등의 의심스러운 태도를 감지해낸다. 필립 K. 딕 원작의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범죄가 발생하기도 전에 미리 예견하는 것과 비슷하다.(2)

표면상으로는 별 문제 없어 보이는 디지털 기계조차 충분히 강제적이고 위압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상황이다. PC는 많은 직종에 큰 변혁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일부 직종은 구식이 되어버렸다. 예전에는 사진 보정기를 만드는 데 몇 년이 걸렸다. 필요한 도구와 자재를 골라야 하고, 이를 만질 손재주를 지닌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차지했고, 기술자는 자리를 박탈당한 채 종속된 신분이 되었다. 어도비나 애플사 기술자들의 결정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예술가이자 디자이너인 존 마에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누가 ‘포토숍의 제왕’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과연 누가 힘을 갖고 있을까? 프로그램 사용자인가, 프로그램인가?” 마에다가 보기에 창작자의 안녕은 제작도구의 보유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우리 자체가 사물로 전락하는 시대에, 프로그래밍된 기계의 사용자인 우리는 과연 어떻게 ‘디지털에 의해 결정되는 운명’에서 벗어나,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미래로 갈 수 있을까? 해킹을 둘러싼 논란을 보라. 디지털 기계의 일반적 사용을 넘어서서 그 이상으로 활용한다는 것, 제재를 모르는 프로그램, 프로그램 기능을 단 하나도 간과하지 않으며 그 능력 이상으로 개선하는 능력, 혹은 DIY(Do-It-Yourself)가 가능한 프로그램을 둘러싼 논란은, 사실 기술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다.(3)

글·장노엘 라파르그 Jean-Noél Lafargue
저서로 장미셸 제리당과의 공저 <프로세싱- 창조수단으로서의 컴퓨터>(피어슨, 파리, 2011년) 등이 있다.

번역·김윤형 hibou98@naver.com

<각주>
(1) 마리안 뒤자리에, <소비자라는 직업>, 라데쿠베르트, 2008.
(2) ‘미국, 테러를 사전에 예고하는 감식기 테스트’, <네이처>, 런던, 2011년 5월 27일.
(3) 장마르크 마나크, ‘정보화 사회의 맥가이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