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토레즈의 일기

2021-01-14     세르주 알리미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인 1964년 7월, 다시 한번 크림반도로 휴가를 떠나는 선상에서 모리스 토레즈는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1912년 7월 17일, 나는 12살 나이에 4번 갱도에서 암석 분류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 구절은 토레즈의 일기의 마지막 몇 페이지 중 일부가 됐다. 토레즈는 뇌졸중으로 반신불구가 된 후 소련에서 2년 반 동안 치료를 받았는데, 이때 재활운동의 일환으로 1952년 11월 25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1) 초반에는 손이 떨려 노력이 필요했다. 첫날에 다섯 단어부터 시작해 하루에 한 문장을 완성하는 데 몇 달이 걸렸다. 시간이 지나며 점차 필체가 안정되고 문단이 이어졌다. 하지만 하루에 2~3문단을 넘기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건강 상태도 일기에 기록했다. 예를 들어 1957년 9월 어느 날에는 “(내)조끼 단추를 채웠다가 끌렀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다수의 프랑스 공산당(PCF) 지도부가 경찰에 쫓기거나 투옥된 시기였기 때문에 PCF 서기장이었던 토레즈는 일기에 너무 민감한 내용은 기록하지 않도록 주의했다. 이 때문에 독자들은 생일, 가족 파티, 산책, 여행, 기차역에 친척 마중을 나간 일 그리고 ‘자네트’가 만든 산딸기 젤리와 브랜디에 절인 체리처럼 전혀 비밀스럽지 않은 내용들로 채워진 많은 부분을 건성으로 넘길 것이다.

자네트와 모리스, 토레즈 부부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부인이자 공산당 동지였던 자네트는 정치국(Politburo) 소속으로 공개 집회를 조직했다. 모리스가 “아주 훌륭하다”, “생기가 넘친다”, “주목할 만하다”라고 평가한 그녀의 글들은 주로 노동자, ‘어머니’ 그리고 ‘주부’로서의 여성을 주제로 했다. 토레즈 부부는 여성에게 피임을 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1956년 4월 5일, 토레즈는 “신맬서스주의에 빠진 일부 공산주의 의사들의 선동”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한 달 뒤에는 “여성 해방으로 향하는 길은 사회 개혁과 사회 혁명으로 통하지 낙태 시술소로 통하지 않는다”라고 천명했다. 하지만 이 “길”은 프랑스 하원으로도 통했다. 그해 선출된 19명의 여성 하원의원 중 15명이 PCF 소속 공산주의 운동가였는데 토레즈는 이 사실에 몹시 기뻐했다. 여담이지만, PCF가 이런 성과를 거둔 것을 보면 당대 다른 정당들이 얼마나 후진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기의 내용이 어딘지 모자라다고 느끼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토레즈는 수많은 만남들을 언급하면서도 자세한 내용은 전혀 밝히지 않았다. 1960년 6월 24일 일기를 예로 들어보자. “집에 찾아온 카사와 점심을 먹으며 긴 이야기를 나눴다. 카사는 다양한 문제에 대해 본인의 관점을 제시하고 견해를 표명했는데, 나는 정치국 소속 인사들에 대한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반박했다. 기회주의자와 적에게 빌미를 제공하는 그와 세르뱅의 일부 태도에 대해 경고했다.” 이때는 드골 정권을 “파시즘으로 나아가는 개인적인 독재자”로 묘사하는 PCF의 터무니없이 엄격한 평가와 다른 몇몇 주요 주제에 대해서, 로랑 카사노바와 모리스 세르뱅 그리고 다른 PCF 지도층 인사들이 대립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로랑 카사노바와 이 “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무슨 말이 오갔는지 알 수 있으면 좋았을 것이다. 같은 해 8월 토레즈는 알바니아의 국가원수 엔베르 호자를 만났으며 열흘 뒤에는 소련의 니키타 흐루시초프 서기장과도 만남을 가졌다. 일기는 알바니아와 소련이 국제공산주의운동의 분열에 가장 앞장서던 시기에 이루어진 이 두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 역시 전혀 밝히지 않았다.

모스크바에 대한 토레즈의 애정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흐루시초프가 1956년 2월 열린 제20회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전임 서기장 스탈린을 통렬하게 비판한 사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일기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켰다. 이 시기 이전에는 스탈린이 일기에 자주 등장했다. 이후에도 스탈린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그 빈도는 줄어들었다. 1956년 1월 토레즈는 스탈린이 1928년에 남긴 러시아어 문장을 일기에 옮겨 적었다. 자신의 삶과 행동을 요약하는 문장이었다. “국제주의자는 의구심이나 망설임 없이 아무런 조건도 따지지 않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을 수호할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 USSR은 전 세계 혁명 운동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토레즈는 정반대의 이유로 모두가 모스크바에 반기를 들고 나섰을 때도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인 그리고 무엇보다 수정주의적인 주장”이나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모험주의적이며 반(半)트로츠키주의적인 노선”을 추종하지 않았다.

1958년 드골 장군의 재집권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주요 사건인 알제리 전쟁은, 토레즈의 일기가 담고 있는 시기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53년 7월 14일, 7명의 알제리인이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 혁명 기념일 축하 부대행사에서 목숨을 잃은 후 토레즈는 “국가에 대한 경찰의 핏빛 도발”을 비난했다. PCF는 이 분쟁에서 선봉에 서지 않고 알제리 독립 운동가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대신 “알제리의 평화”를 촉구하는 선에 그쳤다. 하지만 토레즈는 일기에서 이 식민지 전쟁 기간 동안 일간지 <뤼마니테(L’Humanité)>가 발매금지를 당한 횟수(27번)를 기록했으며, 사회당 정부를 포함해 뒤이어 들어선 모든 정부가 확립한 “고문과 학살을 자행하는 임의적인 제도”를 규탄했다. 게다가 비밀군사조직(Organisation armée secrète (OAS) 알제리 독립 직후 드골 장군을 암살하고 프랑스의 정권 탈취를 계획한 극우 단체-역주)의 테러로 공산주의 운동가들 역시 목숨을 잃은 사건과 관련해 극명한 불신을 표명하며, 정권의 기둥 역할을 하던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의 자택이 플라스틱 폭탄 테러를 당한 다음날 “드골정권과 OAS의 공개적인 결탁”을 비판했다...

1962년 토레즈는 “(내가) 초등학교 졸업장을 받은 지 50년이 되는 기념일”을 축하한다. 그의 회고록은 이 ‘인민의 아들’이 그동안 걸어온 길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토레즈는 공산주의 운동으로 바쁜 와중에도 1958년에 20권이 넘는 책을 읽었으며 1963년에는 38권의 책을 읽었다. 러시아어로 된 헤라클레이토스의 저서, 라틴어로 된 카이사르의 저서, 바뤼흐 스피노자, 몽테뉴, 드니 디드로의 저서, 르네 데카르트의 서한집에 이르기까지 읽기 쉬운 책들도 아니었다. 

이런 지적 호기심을 현 정치 지도자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가?  

 

 

글·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미국 버클리대 정치학 박사 출신으로 파리 8대학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1992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합류한 뒤 2008년 이그나시오 라모네의 뒤를 이어 발행인 겸 편집인 자리에 올랐다. 신자유주의 문제, 특히 경제와 사회, 언론 등 다양한 분야에 신자유주의가 미치는 영향과 그 폐해를 집중 조명해 왔다.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Maurice Thorez, 『Journal 일기』, 1952-1964, 장누마 뒤캉쥬(Jean-Numa Ducange)와 장 비그뢰(Jean Vigreux)가 (아주 놀라운 실력을 발휘한) 편집본, Fayard, Paris,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