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눈물은 짜다

6월호 ‘영국의 사회운동, 잠에서 깨어나다’를 읽고

2011-07-11     최연희

‘모든 눈물은 짜다.’ 야누쉬 코르착이 한 말이다. 코르착이 누군가. 아동의 수호자, 대변자로 살다가 끝내 아이들과 함께 나치 수용소 가스실로 걸어 들어간 교육자이다. 스스로의 삶과 실천으로 모든 아동은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 권리가 있으며, 이것이 마땅히 법의 신성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유엔 아동권리협약의 기초가 된 사상가이다. 그런 코르착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각자 지닌 이유에 대해 공명하고 그 정황에 응답하려는 사람들을 평생 동안 찾았다. 타인의 눈물에 반응한다는 것, 코르착은 이것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지녀야 할 기본 자질로 보았다. 한마디로 남의 눈물은 맹물이 아니란 말이다. 내 눈물이 짜고 애달픈 한.

대화 바라는 마음 담긴 눈물

요즘 주변에서 많은 눈물을 만난다. 아마존의 눈물, 북극의 눈물, 인기 프로그램인 <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들이 혼신을 다해 부르는 노랫소리에 저도 모르게 흘리는 시청자와 청중평가단의 눈물, 공중화장실에 가면 볼 수 있는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눈물까지.

나에게 특별한 눈물이 있다. ‘우리는 공부하는 기계가 아니다’, ‘학생도 사람이다’라며 학생이 학교에서 매 맞지 않을, 밥 먹을 수 있는, 잠잘 수 있는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하도록 하는 서울 학생인권조례제정 주민발의를 위한 서명운동에서 100일도 넘는 날을 매일같이 거리에 나가 서명을 받느라 코피를 쏟고 입이 부르튼 청소년들에게 서명지를 갈가리 찢어 얼굴에 던지며 ‘너희 같은 애들 때문에 학생들이 맞아야 한다’며 을러대는 어른들과 마주한 열여덟 살 청소년들 얼굴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하지만 내 가슴에 박힌 눈물은 펑펑 쏟아지던 그 눈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폭풍 같은 눈물을 흘리다가 쓱 닦고는 다시 환하게 웃으며 지나는 시민들에게 서명지를 건네는 청소년 활동가들의 눈가에 아직 대롱대롱 맺혀 있는 눈물이었다.

<소금꽃 나무> 김진숙을 위해 조남호 회장 앞에 구천구백 번이라도 무릎을 꿇겠다며 애타게 흘렸던 배우 김여진의 눈물도 지워지지 않는다. 여배우는 눈물 흘리는 모습조차 아름다워야 한다고 했다. 그런 김여진이 왜 눈물콧물 짜면서 울었을까. 남도 아니고 당신들이 고용했던, 함께 일하며 회사를 일궈냈던 한진의 노동자들과 대화를 해달라는 바람 때문이다.

가슴 절절한 눈물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는 요즘, 코르착의 말대로 정말 모든 눈물은 짠 걸까? 나는, 우리는 타인의 ‘심정’과 ‘처지’에 얼마만큼 공명하고 응답하고 있을까?

영국을 뒤덮은 사회적 저항의 물결을 소개한 기사를 다시 읽었다. 지난 3월 영국은 대학 등록금 대폭 인상과 대대적인 교육 예산의 삭감 소식에 학생들이 총집결했고, 사회 전 영역으로 저항운동이 급격히 전파되고 있었다. 그땐 그저 나라 밖 소식으로 지나친 당시 영국인들의 사회적 분노가 지금의 우리 모습과 얼마나 닮았는지 깨닫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유독 조심스럽고 침체되어 있던 영국의 사회운동이 다시 불붙고 있는 것은 바로 보편적 사회보장과 사회보호가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상승 기회는 막혔고, 소득 격차는 50년 이래 최고로 벌어졌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하다. 대형 기업의 탈세만 막아도 실제 기업으로부터 거둬들일 수 있는 세금이 지금의 두 배가 된다는 기사 내용을 보면, 영국과 놀랄 만치 닮은 우리도 이와 같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기업하기 힘든 나라다. 재벌과 거대 기업, 사학재단들의 말만 들으면 그렇다.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4강이라도 갔는데, 자신들을 위하는 것 말고는 뭘 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는 자본은 ‘우린 아직도 목마르다’며 물그릇을 내주지 않는다. 목이 타들어가는 갈증에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도, 한국도.

헛되지 않은 희망, 영국의 사회운동

사정이 이런 지경인데 참 미련하게도 우린 여전히 희망을 믿는다. 나 혼자만의 행복은 의미 없다며 모두의 행복을 위해 길바닥에서 희망의 촛불을 들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희망의 버스를 타고, 희망의 천릿길을 걷는다. 박수받는 사람이 아닌 박수치는 사람들로 세상은 더 아름다워진다고 했다.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위대하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의 희망이 허공에 날리는 헛된 꿈이 아닐 수 있다는 증거 또한 영국에서 찾을 수 있다. 긴축재정에 항의하는 시위 과정에서 국유림 매각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연합전선이 구축되면서 영국 정부는 한발 물러서게 된다. 또한 긴축재정안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면서 민영화를 중단시키려는 몇몇 시도가 성공해 켄트주 연안 도시의 수많은 시민들이 항구 매각을 부결했다. 이 소식은 무참히 파헤쳐지고 있는 4대강 공사와 팔려 나온 인천공항의 모습과 겹쳐 묘한 안도감마저 준다.

<소금꽃 나무>의 김진숙을 보면 환경운동가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이 떠오른다. 1천 년을 살아온 삼나무가 벌목용으로 무자비하게 파헤쳐지는 것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녀는 61m 높이의 아주 오래된 루나라는 삼나무 위에서 2년 넘게 살았고, 결국 삼나무들을 지켜냈다. 나무의 ‘심정’에 공명하고 그 눈물에 응답한 것이다.

우리는 김진숙 그녀가 어떤 심정으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여 35m 위에서 180여 일을 홀로 견뎠는지 차마 다 알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맨몸으로 천릿길을 걸어서라도, 무장한 용역 직원과 대테러 경찰특공대의 진압이 있을지라도, 몸과 마음이 그곳을 향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적어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타인의 눈물에 공명하고 응답하고자 한 것이다. 그녀가 잠시라도 편안하게 눈을 붙일 수 있도록 크레인 밑을 지켜주겠노라고 밤을 지새우던 사람들, 그들이 희망을 줄 것이다. 영국에서처럼.

희망 향한 발걸음, 타인과 공명하기

하긴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당신께 이 나라를 바치겠노라고 두 손을 모았던 그분도 분명 진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이해하지 못한, 갖지 못한 것도 바로 그 ‘심정’이다. 심정은 머리로 공감할 수 없다. 이해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처지에 서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독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피할 수도 있었을 일로 눈물을 흘리게 한다면, 그것은 죄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했다. 닦아줄 수 있는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은 가장 비겁한 일이다. 어떤 심정으로 폭우가 쏟아지는 거리에 가냘픈 촛불을 들고 그 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는지, 어떤 심정으로 김여진이 울고 있었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분은 알아야 했다. 조남호 회장은 알아야 했다.

영국 노조에 전기충격을 가한 학생들의 시위로 영국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깨어날 차례다. 모든 눈물이 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다시 천릿길을 걸어서라도, 희망의 버스를 타고서라도 남의 처지와 심정에 공명하며 응답하려는 사람들과 함께. 그 시작과 끝 모두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