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압·내분으로 쇠락한 스페인 아나키즘

프랑코 체제하 핍박, 망명… 정통주의자·개량주의자 대립

2008-12-30     앙헬 헤레린 로페스 | 역사학자

공화주의 치하(1931-1936)와 내전 기간(1936-1939) 동안 스페인에서 아나키스트 노조주의는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주요 조직인 노동전국연합(CNT)에 가입한 숫자가 1931년 6월에 53만5천명, 내전 기간동안 20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이는 오늘날 상황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공화주의 치하(1931-1936)와 내전 기간(1936-1939) 동안 스페인에서 아나키스트 노조주의는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주요 조직인 노동전국연합(CNT)에 가입한 숫자가 1931년 6월에 53만5천명, 내전 기간동안 20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이는 오늘날 상황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왜냐 하면 아나키스트 노조주의는 스페인 사회에서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적어도 과거와 비교할 때 극히 미미한 위상만을 차지하고 있다. 프랑코의 탄압, 내부의 갈등, 세대교체의 실패, 미미한 국제 지원 등 일련의 요소들이 이 집단의 쇠락을 설명해준다.

 프랑코 체제하의 CNT 몰락
프란시스코 프랑코 체제는 노조, 그중에서도 특히 CNT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비밀조직이었던 CNT는 지휘부가 종종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독재가 시작된 첫 10년 동안 11개의 전국위원회와 60개 이상의 지방조직이 해체되었으며, 여러 명의 지도부 인사들이 1941년 발렌시아에서처럼 처형을 당했다.
프랑코 체제의 전제적이고도 경찰에 의지하는 속성이 모든 비밀조직에 위협적이었을지라도, CNT는 연방구조 즉 노조, 지방위원회 및 전국위원회를 유지하면서 임무를 수행했다. 프랑코 체제의 몰락이 임박했다고 확신한 CNT 지도자들은 숫자의 힘을 믿었다. 1946년에 5~6만 명에 달하는 가입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견고한 그룹으로 편제되고 지하 활동에 능한 제한적인 전투주의를 기반으로 안전을 기꺼이 희생시키려 들었다.
따라서 한 위원회가 몰락하면 조직이 연쇄 붕괴되었고, 수십 명의 투사가 투옥되는 과정을 겪었다. 그 결과 1950년대 초부터 지휘부가 붕괴되며, 대중조직으로서의 CNT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모든 반(反)프랑코주의 조직이 내전이 끝난 후 내부 투쟁의 영향을 다양하게 받았지만, CNT 멤버들 사이에서 그 투쟁은 특히 격렬했다. 격돌은 자유주의 운동 사상 최초의 분열을 가져왔고, 1945년부터 1961년까지 16년간 지속되었다. 그런 다음 또 다른 결정적인 분열이 1960년대 중반에 일어난다. 동일한 약어(略語)를 사용하는 두 개 조직이 탄생한 것이다.
 
'정통주의'와 '개량주의'의 내분

혁명을 추구했고 구성원 대다수가 망명 중이던 '정통주의자' CNT는 페데리카 몬트세니와 그의 동료 헤르미날 에스글레아스가 이끌고 있었는데, 순수한 아나키스트주의 원칙으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했다. 집단화와 용병제를 옹호하던 이 분파는 내전 기간 동안 공화주의 정부에 협력한 사실을 단죄하고자 했다. 자유주의 운동이 허약해진 원인으로 간주한 탓이다.
반면 노조주의적이고 스페인에서 다수를 구성하던 '개량주의자' CNT는 기타 반프랑코주의 조직들과 연대하려고 애썼다. 망명 중인 공화주의 정부들에 협력하는 방식을 포함, 이 두 개의 조직은 프랑코를 권좌로부터 내쫓는 전술 차원에서도 이견을 보였다. 정통주의자들이 직접 행동, 다시 말해 봉기나 사보타주 혹은 테러를 염두에 둔 데 반해 개량주의자들은 정치적 협상을 선호했다. 그들은 독재의 종말을 유도하기 위해 서구 강대국들을 동조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반면 정통주의자들은 1945년 12월 자신들의 간행물 <CNT>에서 "프랑코의 몰락은 모든 형태의 폭정에 맞선 직접 행동을 내부로부터 벌인 결과일 것이다. 그것은 모든 외교적 행동과 무관하며, 모든 통치를 넘어선 행위이다."라고 주장했다.
정통주의자 CNT는 1947년 툴루즈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이러한 형태의 행동들을 스페인에서 벌일 수호위원회를 창설했다. 한편 개량주의자들은 탄압이 전투적 행동을 어느 정도까지 잠식시키는지 지켜보면서, 국제적 도움이 없을 경우 독재자를 쫓아내기가 힘들 것이라 판단했다. 전국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자문했다. "국민이 손에 무기를 든 채 패배를 당했다. 그들의 손이 비어있는데, 폭력 투쟁에 나서라고 그들에게 어떻게 호소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격돌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더 불행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정통주의자 지휘부가 개량주의자들을 비밀 조직 지휘부에서 몰아내기 위해 스페인으로 투사들을 보내는 모습을 사람들은 목격했다. 이러한 행위는 투사들 사이의 분열을 가져왔고, 일부 경우 체제가 탄압적 행동을 벌이도록 도와주었다. 게다가 절체절명의 순간에 스페인의 CNT는 망명 중인 중심조직으로부터 경제지원 혜택을 받지 못했다.

 '5만명 회원이 2천 명으로'
내부 투쟁의 영향은 심각했다. 특히 1967년에 일부 전투원들로부터 진정한 '처벌기구'로 간주된 '분쟁문제위원회'가 창설된 후 지방 분과의 해체와 투사들의 축출이 줄을 이었다. 1945년 파리 전당대회에 참석했던 5만 명의 가입자는 30년이 지난 후 2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정통주의자들이 승리를 거둔 후 전쟁 전 전당대회 때 인정되었던 혁명노조주의, 직접 행동, 자유주의적 공산주의라는 '신성한 3부작'은 미래의 행동지침으로 사용된다.
그런 식으로 CNT는 국가를 자신의 적으로 간주하기를 계속했다. 부의 재분배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이 증대했기에 광범위하게 덕을 본 노동계가 비판을 자제하던 순간에조차 그랬다.
무엇보다도 조직 내부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세대교체의 실패였다. 투사들은 내전에 연루된 채 남아있었다. CNT는 프랑코의 수직적 형태의 노조에 참여하기를 거부했고1), 그로 인해 젊은 노동자들과의 접촉이 어려워지면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실패했다. 의미 있는 사례가 있다. 1960년에 체포된 44명의 CNT 멤버들 중 41명이 전쟁 초에 이미 18세 이상이었다.
동일한 현상이 망명중인 조직에도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에 전력을 경주하면서 귀환의 희망을 품던 망명 조직은 자신들을 받아들인 국가의 사회적, 정치적 투쟁에서 배제되고 있었다. 그들은 조직 갱신에 필요한 중요한 자원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었고, 사적 자유의 옹호, 문화 혹은 섹슈얼리티 등 전통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전초 역할을 담당하던 토양을 포기하고 있었다.
독재자가 숨을 거두었을 때 국제적 도움이 미미했던 사실 역시 주목해야 한다. 반프랑코주의를 부르짖던 다른 운동들이 외부로부터 상당한 지원을 받았던 반면, CNT는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굴곡 많은 길의 초입에 홀로 서있었다.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무수한 다른 자유주의 운동들도 자국에서 탄압을 경험하거나 내부 투쟁의 고통을 겪으면서 허약해졌다.
민주주의로의 이행 초기에 벌어진 대중적이지만 일시적인 몇몇 시위들(예를 들어 1977년에 '로스 레예스,los-Reyes'들의 산세바스티안 회합, 바르셀로나 자유주의자들의 날 등)에도 불구하고 CNT는 예전의 영광과 힘을 결코 되찾지 못했다.

 


 

* 마드리드 국립원거리방송통신대학(UNED) 교수. <프랑코 치하의 노동전국연합. 지하활동과 유형(流刑)(1939-1975)>을 저술했다. 

1) 프랑코 체제가 통제하던, 협동조합 노조주의의 공식 형태였다.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투사들이 점진적으로 이 진영에 통합되면서 전투력이 배가되었고, 그로 인해 노동총동맹(UGT : Union General de Trabajadores) 혹은 노동자위원회(CCOO : Comisiones Obreros)처럼 ) 민주주의 체제로의 이행과정 시 주요 노동자 노조의 간부들을 양성하는 장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