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의 신기루

세계인구를 굶기지 않고 덜 생산하는 법

2021-01-29     리 필립스 l 작가

일부 환경운동가들은, 극에 달한 환경위기에 앞에, 단 하나의 해결책이 남았다고 주장한다. 다름 아닌 ‘탈성장’이다. 이들은 이상기후에 대한 책임이 성장 그 자체에 있다고 주장한다. 성장이 에너지 수요를 부풀리고 탈탄소경제 실현을 방해하므로, 재화의 생산 즉 경제활동을 줄이면 환경문제가 해소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몇 가지 난제를 품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야기한 문제 앞에서 항상 무력한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곤 한다. 

1980년대에는 ‘구멍 난 오존층’이 생태학적 위협을 대변했다. 오존은 태양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가스로 당시 대기권 내의 농도가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오존층 파괴 현상은 피부암, 면역 결핍성 전염병, 수자원 파괴, 생화학적 순환 교란, 농업 생산 감소를 예고하며 기후변화 못지않게 인류를 위협했다. 이 역시 인간의 활동이 배출한 가스들 때문이었다. 주범은 염화불화탄소(CFC)로 언론은 곧 CFC가 사용되는 냉장고와 스프레이 형태의 제품에 책임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1987년에 채택된 몬트리올 의정서가 1989년 1월 1일 발효된 이후 CFC 배출량은 98% 급감했다.(1) 2000년대부터는 대기권 내 오존층이 회복되기 시작했으며 2075년이면 원상태로 복구될 것으로 기대된다.(2) 1980년대에 살았던 이들은 환경을 위해 헤어스프레이를 사지 말라는 말을 들은 적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이 말을 듣지는 않았다. 정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몬트리올 의정서는 개인의 실천을 기대하는 대신, 산업계가 고용한 로비스트들의 하소연을 무시하고 시장에 직접 개입해 규제했다. 

 

냉장고를 없애면 온실가스도 없어질까?

만일 기술발전을 강요하는 규정 대신 냉장고 개수 증가를 억제하거나, 사용 개수를 줄이려고 했다면 참담한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정해진 개수를 초과하는 냉장고를 사용금지시켰다면 CFC의 배출량 증가를 억제할 수는 있었겠지만, 배출 자체는 막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목표가 온실가스의 배출감소가 아니라 온실가스 자체를 퇴출시키는 것과 같은 논리다. 선진국이 개도국에 냉장고를 포기하라고 요구했다면, 그 어떤 논리도 이런 요구를 정당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세계적으로 냉장고의 수가 부족하다는 것이 진보주의자들의 주장이 아니었던가? 오늘날 냉장고 수는 늘었지만, 다행히도 오존층에는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오존층을 파괴하지 않는 기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이처럼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토머스 맬서스(인구 증가는 언제나 식량 공급을 추월하기에 인류의 운명은 나아질 가능성이 없다는 이론을 펼친 영국의 정치 경제학자-역주)와 오늘날 그의 추종자들이 실수를 범하고 있는 이유도 설명해 준다. 인간은 세균배양 접시에 담긴 박테리아가 아니다. 

다른 종과는 달리 인간은 일정수준으로 자원을 계속 소비하지 않으며, 기술발전과 정치적 선택으로 변화를 이끌 수 있다. 자연의 한계에 부딪히면 그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 혁신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의 역사가 혁신의 역사로 요약되는 이유다. 인간의 작품이 뛰어넘을 수 없는 유일한 한계는 물리학과 논리학의 법칙뿐이다. 언젠가는 공간이동도 가능할지 모른다.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상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영구기관(외부에서 에너지를 한 번만 전달받으면 더 이상의 에너지 공급 없이 스스로 영원히 작동하며 일한다는 가상의 기관-역주)의 발명은 힘들 것이다. 물리학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탈성장론자들이 맬서스에 비교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점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인류를 지구에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빗대며 혐오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의 탈성장론자들은 환경 파괴로 발생하는 사회적 불공정성에 맞서는 투쟁을 신념으로 삼고 있다. 이들은 탈성장 운동이 맬서스와는 달리 인구과잉에는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인구가 아닌 경제 성장의 제한이 목표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생태학적 재앙을 촉발시키지 않고 생산가능한 재화의 양을 상회하는 한계선을 찾아냈다고 가정해보자. 이어서 세계경제가 이 한계선에 만족하고 생산을 늘리지 않는다고 상상해보자. 마지막으로 모든 사회가 이 생산량을 완벽하게 평등한 방식으로 분배하지만 인구는 제한 없이 계속 증가한다고 상상해보자. 어떻게 될까? 매년 아이들은 새로 태어나고 가용재화는 공평한 방식으로 분배되지만 1인당 분배량은 줄어든다. 생산은 감소하는데, 인구는 계속 증가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모두가 가난해진다. 사회가 인구상한선을 설정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지구상에 유통되는 재화의 양이 너무 많다거나 인구가 너무 많다는 주장 역시 결국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빵은 있되 장미는 사라진 미래

트로이 베테스를 비롯한 일부 탈성장론자들은 생태학적 혼란의 위협을 고려하면 선진국 국민에게 어느 정도 ‘환경적 긴축’을 요구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에 동조한다. “환경위기의 해결책은 전 세계 수억 명의 최고 부유층이 생활수준을 낮추는 것을 전제로 한다.”(3) 베테스는 이 ‘수억 명’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유럽과 미국의 인구를 다 합쳐도 10억 명이 되지 않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그 ‘수억 명’이 베르나르 아르노(세계에서 가장 큰 명품업체 LVMH 그룹의 회장-역주)만 일컫는 것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인류학자 제이슨 히켈을 비롯한 몇몇 이론가는 탈성장이 긴축강요 정책이 아니라 풍족보장 정책이라고 변론한다. 고소득 국가에서는 삶의 수준을 유지, 나아가 향상시키면서도 생산감축을 계획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현존자원을 재분배하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 히켈의 설명이다. 

경제성장이 사라진 미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해보자. 운 좋게도 세계적인 불평등 전문가 중 한 명인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가 이미 알기 쉽게 설명해 놓은 자료가 있다. 밀라노비치에 의하면 2018년도 세계 연 평균소득은 약 5,500달러다.(4) 그런데 히켈은 이 연 5,500달러를 기준으로, 모든 초과분을 극빈층의 소득을 끌어올리는데 환원하자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서구 국민의 연소득은 5,500달러(약 4,600유로) 이상이며, 훨씬 높은 소득을 올리는 이들도 많다. 프랑스 국립통계경제연구소(INSEE)에 의하면, 프랑스의 평균 연봉은 2015년에 2만 6,634유로(세전)에 달했다. 여기서 4,600유로로 소득이 감소하면 프랑스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은 알랭 마들랭, 프랑수아 피용, 브뤼노 르메르 등 전·현직 경제장관 및 총리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밀라노비치의 계산에 의하면, 평균 이상의 소득을 벌고 있는 세계인구 27%의 소득이 2/3 이상 감소할 것이다. 

탈성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이런 변화가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예산을 이전해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선진국이 점진적으로 생산을 감소시키는 동안, 후진국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전 세계적인 균등화가 이룩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선진국의 부를 약 2/3 감소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공장, 기차, 공항은 지금의 약 1/3만 운영하고, 전기, 난방, 온수는 1일 8시간만 사용하고, 차량 소유자들은 3일에 1일만 차를 쓰고, 주당 13시간만 일하면 된다.” 밀라노비치의 결론이다. 

탈성장론자들은 밀라노비치의 설명은 과장됐다고 반론을 제기한다. 서구의 생산감소가 이렇게 횡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현대사회를 이롭게 하는 요소들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고 불필요한 요소들만 사라질 것이다. 히켈은 “환경을 파괴하면서도 사회에 거의 또는 전혀 이롭지 않은” 분야들로 마케팅, 사륜구동 자동차, 소고기, 일회용 플라스틱 제품, 화석 연료를 꼽았다. 

우리가 불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엄청나게 많이 생산하고 있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서구 생산활동의 2/3를 잉여분, 즉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들을 팔기 위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물론 아니다. 따라서 히켈은 주당 노동시간 축소, 여가시간 확대, 사회복지사업 확충 등 다른 해결책을 제안한다. 명실상부한 진보주의자들은 히켈의 시각에 찬성하지만 이런 해결책이 개인의 소득감소를 보상하고 경제생산을 감소시킬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우선 여유시간 증가가 빈곤의 비참함을 상쇄할 수 없다. 굶을 각오로 노동에서 자유로워질 가능성은 이미 모두에게 열려 있지만, 이런 자유를 원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착취당하는 것보다 큰 고통이, 착취조차 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여가활동과 사회복지사업이 온실가스를 덜 배출할 것이라는 생각은 이런 활동이 공산품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에너지도, 천연자원도 필요하지 않다는 믿음에 근거한다. 그런데 여가와 서비스 분야가 물론 중공업보다는 덜 ‘지저분’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염을 덜 시키는 것은 아니다. 악기는 나무, 금속, 플라스틱으로 만든다. 병원은 수백 종류의 금속과 석유의 2차 제품으로 만든 장비들로 채워져 있다. 등반 장비, 카약, 자전거 역시 결국 땅속에서 캐낸 재료로 만든다. 

특히 선진국 사회가 겪고 있는 주택난 해결을 위해서라도 공공서비스의 재평가와 발전은 매우 중요하지만 복지국가만이 우리의 안녕을 보장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아니다. 영화, 장난감, 와플 메이커, TV도 안녕에 기여할 수 있다. 이 모든 소비재들을 없앤 ‘소박한 삶’으로 회귀하는 것이 행복의 비법이라는 환상은 최상위 계층의 부르주아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소박한 삶’을 꿈꿀 여유도, 부자들만이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구소련에서 내부적으로 가장 끊임없이 제기된 비판은 삶에 생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화려한 색채의 옷도, 음악도, 파인애플도 없는 회색빛 사회였다. 

우리는 당연히 빵을 원한다. 하지만 장미도 원한다.  

 

 

글‧리 필립스 Leigh Phillips
『Austerity Ecology and the Collapse-porn Addicts : A Defence of Growth, Progress, Industry and Stuff 긴축 생태학과 붕괴론 포르노 중독자들 : 성장, 진보, 산업 뭐 그런 것들에 대한 옹호』(Zero Books, 2015년)의 저자.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그러나, 2010년대 초부터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신고된 오존가스 배출량 증가가 관측됐다. 몰래 배출한 역내 국가가 있는 것이다.
https://ozonewatch.gsfc.nasa.gov/meteorology/annual_data.html
(2) ‘The Antarctic ozone hole will recover’, NASA, 2015년 6월 4일, https://svs.gsfc.nasa.gov
(3) Troy Vettese, ‘To freeze the Thames’, <New Left Review>, n° 111, 런던, 2018년 5-6월호.
(4) Branko Milanovic, ‘The illusion of “degrowth” in a poor and unequal world’, <Global Inequality>, 2017년 11월 18일, http://glineq.blogspo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