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멀이 힘든 미국인의 망상증
조 바이든 미국 신임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의 흔적을 철저히 청산하고 분열된 국가를 통합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두 가지 목적이 동시에 실현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공화당과 민주당이 서로 으르렁거리는 가운데, 한쪽이 망상증에 빠져 쓰라린 고통에 사로잡힐수록, 다른 한쪽은 상대방을 훈계하고 싶은 유혹에 더욱 깊이 빠져들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시대는 자아도취와 무능, 그리고 폭력의 절정에서 막을 내렸다. 억만장자 대통령은 최악의 선물로 대미를 장식했다. 2020년 11월 3일 대선에 패배한 그는 결과에 승복하는 대신, 무더기 소송전(대부분 기각됐다. 트럼프 자신이 임명한 판사들까지 기각 판결을 했다)으로 법원의 업무를 마비시켰다. 본래 승리가 자신의 것이었는데 강탈당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성경 말씀처럼 절대적인 진리로 둔갑했다. 특히 가장 젊고 야심찬 의원들이 이 ‘진리’를 부지런히 전파했다.
하지만 대망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1월 6일, 트럼프는 지지자들을 향해 상하원 의원들이 바이든 당선인의 승리확정 절차를 진행 중이던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으로 집결할 것을 호소했다. 그 다음은, 모두가 다 아는 그대로다. 성난 군중이 입법부의 심장에 난입해 한 편의 코미디 같은 무법 활극을 선보였다. 아마 그들은 이 테러가 트럼프의 권력을 보전해주리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이런 1차적 목표 외에 더 깊은 의중이 있었을까?
이번 사태에서 의사당에 난입한 시위대는 미국인 대부분이 신성시하는 선을 넘어버렸다. 나아가, 그들은 트럼프의 재임기간 4년 동안 누구도 해내지 못한 놀라운 업적을 세웠다. 공화당이 마침내 수치심을 느끼게 만든 것이다. 그 전까지는, 유명 보수 인사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선동으로 인해 흥분한 시위대에 노골적이고도 우호적인 지지를 보냈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이번 사태를 ‘안티파’(극좌성향의 반파시스트 운동-역주)가 배후 조종했다고 몰아세우며, 의사당 난동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바쁘다.
트위터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자사 사용자의 계정을 차단해버렸다. 미 하원은 트럼프를 상대로 두 번째 탄핵절차를 개시했다. 대통령이 임기 중에 두 번이나 탄핵 대상이 된 것은 미국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뼈아픈 역풍은, 미국 주요 은행들이 공화당에 자금지원 중단을 선언한 일이다. 공화당이 법망을 피하도록 적극 협조해주던 그 은행들이 말이다.
어쩌면 미국에 새날이 밝았는지도 모른다. 10여 년 전부터 다수의 저명한 전문가들이 예견했듯 말이다. 그들은 곧 보수주의가, 즉 레이건과 ‘그랜드 올드 파티’(GOP, 공화당의 별칭-역주)의 시대가 붕괴할 것을 예견했다. 인구학적 변화와 다문화 진보주의의 승리,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 보수주의를 쓸어버릴 것이라고. 현재 트럼피즘이 광기와 폭력의 늪으로 침몰 중인 현상은, 저들의 예언이 비로소 실현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공화당에서 민주당으로, 이 ‘이탈자’들은 누구인가?
하지만 이 질문에 올바른 답을 원한다면, 먼저 트럼프의 시대를 총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20~3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공화당을 이탈해 민주당으로 이동한 유권자들의 정체성을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유권자 부류에 대해서라면 필자 역시 너무나도 잘 안다. 대개는 인생의 화려함과 즐거움을 한껏 만끽하며 살아온 학식 높은 고매한 이들이다. 특히 필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부유한 백인 교외지역 주민들이다. 이번 선거에서 조지프 바이든은 미국 최대 명문학교가 소재한 100개 카운티에서 무려 84%의 표를 얻었다. 중위소득(전체 가구 중 소득을 기준으로 50%에 해당하는 가구의 소득-역주)이 가장 높은 100개 카운티에서도 57%의 표심을 잡는 데 성공했다.(1) 30년 전만 해도 두 경우 모두 공화당이 가뿐히 승리를 거두었던 곳들이다.
지역구의 경제적 중요도와 유권자의 투표 성향을 서로 비교해보는 작업은 현 상황을 파악하는 데 여러모로 큰 도움을 준다. 언젠가 힐러리 클린턴도 2016년 대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가장 ‘역동적인’ 지역구들을 손에 넣었다며 자화자찬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2/3를 차지하는 지역들이었다.(2) 그런데 이번에 바이든 후보는 그보다 훨씬 더 앞선 성과를 이뤄냈다. 이 민주당 후보가 승리를 거둔 카운티는 사실상 미국 전체 경제활동의 71%를 차지했다. 반면 친 트럼프 성향의 카운티는 기껏해야 29%의 비중에 그쳤다.(3)
사실 필자도 이런 종류의 연구들이 기준으로 삼는 미국의 한 부촌에서 자라났다. 바로 캔자스시티 외곽에 자리한 존슨 카운티다. 백인들이 도심을 떠나 자기들끼리 마을을 형성하며 살아가는 이른바 백인탈출 현상(white flight, 백인 중산층이 유색인종의 증가에 따른 범죄율 증가와 인종 융합 등을 피해 도심에서 교외로 빠져나가는 현상-역주)을 여실히 보여주는 부유한 교외지역이었다. 필자의 가정이 매우 부유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사회적 환경만큼은 캔자스 상류층이라고 할 만했다. 주민들은 대개 변호사, 의사, 건축가들이 주류를 이뤘고, 그들의 자녀는 모두 명문공립학교를 다녔다. 그들은 반들반들 윤이 나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고급스러운 대형 쇼핑센터에서 장을 보며, 드넓은 그린 위에서 골프를 치고, 월드 클래스급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즐기며, 귀족들이 살 법한 호화 대저택에 거주했다. 청년 시절 필자는 펑크록을 튼 자동차에 친구들을 태우고 존슨 카운티 6차선 대로를 달리며, 동네 부르주아들의 거만함을 조롱하곤 했다.
당시 우리가 그들을 조롱했던 것은, 그들이 지배계급이었기 때문이었다. 존슨 카운티는 단순한 백인 부촌이 아니라, 미국에서 가장 골수 공화당 색채가 강한 지역이었다. 당시 보수주의 인사들은 요직을 장악하고, 선거에서 족족 승리를 거뒀다. 우리는 원래 세상이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우리 카운티는 1916년 이후로 단 한 번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에 대거 표를 던진 적이 없었다. 아무리 우드로 윌슨이 백악관 주인이던 시절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존슨 카운티에 사는 유권자들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나 존 F. 케네디는 경멸하면서도, 정작 1964년 공화당에 치욕스러운 참패를 안겨준 맹렬한 반공주의자 배리 골드워터는 경애했다.
그럼에도, 2020년 11월 존슨 카운티는 민주당 후보인 바이든에게 표를 몰아준 캔자스 5개 카운티에 속했다. 필자는 투표에 앞서 동네를 둘러보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민들이 공들여 가꿔놓은 정원마다 ‘BLM’, ‘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라는 푯말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 유권자들은 여전히 백인 중심, 기업 중심의 부유한 주민들이다. 지금도 그들은 거대하고 우아한 저택에 살며, 그들이 보유한 부동산은 고공행진 중이고, 그들의 자녀는 미국 최고 명문학교를 다닌다.
하지만, 이제 ‘그들’이 우파가 아니라 좌파라는 점이 다르다. 오늘날 미국에서 통용되는 의미의 좌파 말이다. 지금도 원한다면 저 지배계급의 요란한 저택들을 향해 조소를 던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러려면 깜짝 놀랄 준비를 해야 한다. 저택들마다 이런 푯말을 꽂아 놓은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권리는 곧 남성의 권리.” “과학의 말을 경청하라.” “사랑은 사랑일 뿐.”(동성애혐오자들을 향한 구호)
홈그라운드의 역습, 트럼프의 참패
이 지역에서는 지난 11월 손에 땀을 쥐는 한 판 정치 대결이 펼쳐졌다. 캔자스 주 상원 의석을 놓고 존슨 카운티의 민주당 후보와 캔자스 서부의 공화당 후보가 서로 맞붙은 것이다. 친 바이든 성향의 후보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상대후보 보다 무려 4배의 자금을 선거에 쏟아 부었다. 700만 달러 대 2,800만 달러의 대결이었다. 미국의 정치판에서는 대개 금권세력은 무조건 공화당을 대대적으로 후원하는 것이 관례였다. 사실 미국의 시스템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이런 사실을 상기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 사실만이, 왜 공화당이 언제나 그런 정책을 추구하는지, 어찌하여 공화당이 시장의 법칙을 맹목적으로 신봉하는지, 왜 공화당 지도자들은 조기 은퇴 후 로비스트로 변신을 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물론 어찌하여 공화당이 선거자금 규모에서 늘 민주당을 압도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설명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트럼프는 그동안 공화당의 규칙을 문자 그대로 잘 따라왔다. 백악관의 주인으로 지내는 지난 4년 동안 부유층과 재계를 위해 온갖 시혜를 베풀었다. 세금을 낮춰주는가 하면, 부정부패한 자들을 사면해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바이든 후보가 대선 자금으로 16억 달러를 투입하는 동안 트럼프는 기껏해야 11억 달러에 만족해야 했다. 결국 이 허풍쟁이 억만장자는 자신의 홈그라운드에서 참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월스트리트와 실리콘밸리는 대대적으로 민주당의 편에 섰다. 특히 ‘GAFAM’(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이라고 불리는 인터넷 공룡업체들이 모두 빠짐없이 집결해 바이든 후보의 주된 후원자가 돼줬다. 물론 트럼프도 식품가공·석탄·석유 등 ‘구 산업’ 부문에서는 승점을 올렸다. 하지만 미국의 문화를 규정짓는 거의 모든 부문이 ‘반 트럼프 저항군’을 형성했다. 가령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그를 혐오했고, 기술 부문이 그를 꺼렸으며, 교수 사회가 그를 거부했다. 외교계도 그를 증오했다. 물론 국내 안보기관(이라크 전쟁은 공화당의 책임이었다)과 언론(극우 언론은 예외)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미국 중앙정보국(CIA)까지 그를 정조준하고 나섰다. 급기야 지난 4년간 미국첩보기관은 순식간에 180도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이제는 오히려 좌파가 CIA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세상이 찾아왔다. 트럼프가 2016년 러시아의 미 대선 개입을 과장했다고 비판하며 CIA를 온갖 적대와 중상모략의 표적으로 삼았다면서 말이다. 반 트럼프 운동의 ‘구술사’(oral history)를 다룬 <워싱턴포스트>의 기사 역시 미국 안보기관의 이런 반전 이미지를 여실히 증명했다.(4)
이 기나긴 증언록은 여러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마다 대통령의 행태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어떤 사정으로 그들이 ‘저항군’의 편에 서게 됐는지를 설명하는 유명 인사들의 경험담이 담겨있다. 이 일간지는 2016년 트럼프 당선 이후 증언자들이 겪었던 극도로 공포스런 경험과 2017년 1월 그들이 결국 반 트럼프 ‘여성 행진’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게 된 배경, 2017년 1월 21일 CIA 청사 ‘추모의 벽’(임무 수행 중 순직한 요원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에서 트럼프가 한 연설에서 받았던 정신적 충격에 이르기까지, 온갖 자잘한 부분까지 빼놓지 않고 조목조목 소개했다.
<워싱턴포스트>가 ‘성스러운 장소’라고 표현한 곳에서 대통령은 평소처럼 아둔하고도 거만하기 짝이 없는 연설을 했다. 민주당 소속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태미 덕워스는 “더 없이 수치스러운 연설이었다”고 평가했다. 바이든과 경선에서 맞붙었던 상대 후보이자, 현재 미국의 교통부장관에 지명된 피트 부티지지는 “진정 암울한 순간이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CIA를 대하는 정치인의 무례한 태도에 분개하는 것은 진보 진영이 보여준 가히 괄목할 만한 혁신적 변화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혁신적 변화의 역사적 중요성은 그만 조용히 묻히고 말았다. 그것이 모두 전 CIA 국장 마이클 헤이든의 발언 때문이었다. ‘추모의 벽’ 연설을 논평하기 위해 방송에 초대된 헤이든은 “첩보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다. 첩보기관의 요원이 하는 일도 언제나 최대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다. 나는 그런 점이 바로 우리가 언론과 비슷한 점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트럼프 시대의 악몽, ‘러시아게이트’
사실 트럼프 시대에는, 자유주의 성향의 언론과 워싱턴 정가가 흔히 ‘정보 공동체’라고 부르는 것을 서로 구별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2017년, 마이클 헤이든 전 CIA 국장은 CNN의 논평가가 됐고, 버락 오바마 정권에서 국가정보국 국장을 지낸 제임스 클래퍼는 NBC에 합류했다. 그 밖에도 수많은 정보기관 수장들이 방송인으로 변신했다. 이들은 전부 TV에 나와 트럼프주의자들의 ‘가짜뉴스’나 블라디미르 푸틴이 미 대선에 미친 은밀한 영향력에 대해 한 마디씩 떠들어댔다.
이런 상황은 필연적으로 ‘러시아게이트’ 사태로 귀결됐다. 수 년 동안 도처에 출몰한 트럼프 시대의 악몽이었다. 애초 스캔들의 기원은 ‘공모’였다. 다시 말해 트럼프가 어떤 식으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2016년 대선을 조종하기 위해 러시아 정부와 공모했다는 주장이 첫 출발이었다. 즉 트럼프가 단순히 무능력자, 내지는 사기꾼이기만 한 게 아니라, 자국에 적대적인 외세의 첩자 노릇을 했다는 의미였다.
수백 건의 폭로가 이 사건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어떤 전문가가 어떤 작은 부분을 침소봉대해서 해석했는지, 저널리즘의 규범이 어떤 식으로 무너졌는지, TV 뉴스매체가 러시아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어떻게 시청률을 올렸는지 등의 문제는 훗날 역사가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겠다. 대신 우리는 본질적인 부분에만 집중하기로 하자. 즉 이 사건이 결국엔 트럼프 시대의 미디어 연속극을 이뤘다는 사실, 온갖 확실한 진실들을 근거로 일방적인 시각만 보여주던 언론 ‘1면’ 타이틀의 주요 테마였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폭로’란 결코 끝까지 가는 법이 없었다. 로버트 뮬러 검사로부터 러시아 정부와 공모 또는 결탁한 혐의로 기소된 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특검 보고서도 2019년 3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수사 결과 최종적으로 트럼프 캠프 관계자들이 대선에 개입할 목적으로 러시아 정부와 공모 또는 결탁했다는 혐의는 찾아볼 수 없다.” 결국, 트럼프 시대의 가장 요란한 정치 스캔들이 잉태한 것은 언론 스캔들이었다.
언론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경멸하던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기 위해 언론윤리를 내던졌다. 자신들의 눈가리개를 은밀히 감추는 대신, 그 눈가리개가 바로 트럼프의 끊임없는 거짓말에 맞서기 위한 신무기라고 합리화했다. 작가 매트 타이비가 기술했듯, ‘러시아게이트’는 ‘신세대 대량살상무기’였다. 그것도 기존의 무기보다 한층 더 살상능력이 엄청나게 거대한 무기 말이다. “당시 오류나 과장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는지 사건의 진실을 날려버릴 정도였다. 우리는 그야말로 편파적이 됐다. 진실과 허구를 구분해야 할 역할을 하는 독립언론의 개념이 무색해질 정도였다.”(5)
하지만 이 언론 스캔들은 큰 파장을 낳지 않았다. ‘러시아게이트’에 대해 가짜 뉴스를 보도한 논평가들 중에 처벌 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더욱이 저널리즘 쇼가 완전한 실패했는데도 주인공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외세와 백악관 내 공모자에 맞서 의연히 투쟁을 벌인 슈퍼히어로로 자처했다. 2017년 <워싱턴포스트>가 채택한 멜로드라마에 나올 법한 문구처럼, 한 마디로 “민주주의는 어둠 속에서 사멸”하는 법이었다.
이 민주당 성향의 매체는 트럼프 시대를 냉전시대와 비교하며 쏠쏠한 재미를 봤다. 과거 냉전시대도 어두운 러시아 세력이 민주주의를 위협했다. ‘진실한’ 언론이 외세의 프로파간다에 맞서 절체절명의 투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미국 사회가 분열될 때마다 러시아는 가짜 뉴스를 이용해 모든 정파를 상대로 혼돈의 씨앗을 뿌리며 미국의 분열을 조장했다.” 2018년 소련의 악명 높은 정보공작 활동에서 이름을 딴 ‘인펙션 작전’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에서 <뉴욕타임스>는 이렇게 진단했다.(6)
“표현의 자유, 소수자들의 사회정의를 침해”
그렇다면 신냉전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방법은 대체 무엇일까? 지난 냉전보다 훨씬 더 냉혹할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진실 그 자체를 표적으로 삼은 전쟁인데 말이다. 민주당 진영은 지난 냉전 때에도 톡톡히 효과를 봤던 낡은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바로 검열이었다. 최신 인터뷰에서, 미국의 유명인권단체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의 전 총무이사이자 구세대 좌파 인사, 아이라 글래서는 어느 날 한 우파 성향의 명문학교에서 여러 인종들이 뒤섞인 청중을 앞에 두고 강연을 했던 일화를 소개했다.
“청중들을 바라보는 순간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토론이 끝나고, 강연장을 찾은 사람들은(특히 가장 젊은이들 중에는 교사도 섞여 있었다)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신들이 추구하는 흑인, 여성, 온갖 소수자들을 위한 사회정의 실현은 결코 표현의 자유와는 병립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표현의 자유가 자신들의 적이라고 주장했다.”(7)
사실 글래서가 지적한 이야기를 고려하지 않고는, 미국의 현 정치판을 이해하기가 여러모로 힘들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수많은 진보세력이 무더기 ‘가짜뉴스’와 잘못된 사상에 거리의 시민들이 노출되는 것을 막겠다며, 인터넷공룡회사들과 손을 잡고 연합전선을 형성했다. “가령 불건전한 목소리를 인터넷 플랫폼에서 추방하자. 11월 대선 이후 트럼프가 올린 트윗글처럼, 허위 주장들은 규제당국이 경고 메시지를 이용해 숨기거나 차단하자. ‘사실 무근의 조작되거나 정확하지 않은 주장’이 담긴 콘텐츠를 삭제하자.”
하지만 어두운 푸틴의 세력으로부터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기에 앞서, 먼저 과거 냉전이 어떤 식으로 전개됐는지를 한 번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 1940년대 말 ‘적색 공포’는 공산주의 세력과 결탁하는 트루먼 행정부를 비판하기 위해(그리고 우파 성향의 대외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 조장됐다. 빨갱이 사냥은 ‘국가전복세력’을 표적으로 삼아 그들을 조용히 침묵하게 만들거나, 직위를 박탈하거나, 삶을 파멸로 몰아가려 했다. 그야말로 의혹이 곧 자백과 동일시되던 도덕적 히스테리의 시대였다.
현 정치문화도 우리를 비슷한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더욱이 이번 의사당 난입 사태로 사회적 편집증과 공포 분위기는 심화됐다. 하지만,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고 적을 괴멸할 이 시대의 에드거 후버(전 FBI 초대국장)는 누구일까? 앞서 언급한 <뉴욕타임스>의 동영상은 우리에게 러시아는 ‘미국 사회의 분열’을 이용해 정보공작 활동을 벌였다고 알려줬다.
하지만 우리는 이 주장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요즘은 트위터의 작동방식도 다르지 않다. CNN도, 페이스북도, 대부분의 미디어들도 마찬가지다. 매트 타이비가 자신의 저서에서 증명했듯, 그것이 현대 매스미디어의 ‘비즈니스 모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는 밤낮으로 문화전쟁이 벌어진다. 분노와 분열이 시청률을 올리는 연료다. 라디오를 켜면, 극중 연기가 형편없다고 배우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텔레비전을 켜면, 경찰에게 기물을 던지고 조각상을 파괴한 반파시스트 운동가들을 비판하는 칼럼니스트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진실도, 침묵도 전문가의 손에 달려있다
물론 항상 정보조작이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뉴욕타임스>는 실제로 자신들이 선동하는 문화전쟁이 진정으로 선과 빛을 위한 십자군 전쟁이라고 굳게 믿는다. 물론 보수세력이 반대세력의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수 있다. 과거 여러 역사적 순간이 여실히 증명하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무기를 손에 쥔 쪽은 우파가 아니다. 문화적 정당성이라는 무기는 전적으로 분노한 세력의 손에 들려 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답은 아주 간단하다. 진실을 아는 것은 전문가들이다. ‘침묵’ 버튼을 누를 권리는 전문가들에게 있다.
문화전쟁의 정당성은 주장의 진실 여부에 달려있지도 않으며, 진실 여부 판단 자체도 쉽지 않다. 어떤 사실의 진실 여부는 해당 전문가들의 견해에 달려있는 게 현실이다. 반면 ‘불완전한 정보’란 발언권이 없는 일반인들이, SNS 등에서 음모론을 퍼뜨리며 내뱉는 허위 주장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보조작의 문제는 엘리트층의 권위 위기와 연관이 깊다. 특히 트럼프의 등장 이후 엘리트층의 권위는 한층 위태로워졌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조너선 라우치 연구원도 혹독한 2016년 여름, 미국의 시사전문지 <디 애틀랜틱>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가장 심각한 정치적 문제는 국민이 기득세력을 버린 데서 기인하는 것이지, 결코 그 반대가 아니다.”(8)
권위의 위기에 대한 우려는, 최근 미국의 일부 진보세력들이 몰두하는 연구주제다. 전문성의 위계서열을 복원하는 문제가 시급한 도덕적 사안으로 제시되고 있다. “과학을 존중하라.” 민주당 지지자들이 사는 동네에는 이런 문구가 적힌 푯말이나 자동차 스티커가 곳곳에 눈에 띤다. 전문성을 존중하라. 위계서열을 존중하라. 다시 말해, 그대의 자리를 벗어나지 말라.
가령 저들은 대외정책이란 으레 ‘외교 공동체’에 맡겨야 한다고 확신한다. 중앙은행의 정책은 농민들이 미치는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각각의 직업세계에서 내부적으로 합의를 본 의견에 대해서는 적어도 공개석상에서 만큼은 절대로 이견을 내지 말아야 한다. 의혹은 없애거나 억제해야 한다. 의료계 관계자들은 모두가 하나로 일치된 의견을 피력해야 한다. 이런 식의 사고 억제 논리가 거의 모든 지식 분야에 걸쳐 널리 퍼져 있다.
여기서 필자는 결코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각종 음모론과 외국인혐오주의자들의 견해, 혹은 대학 교육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지 필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점은 민주당의 미래, 미국 좌파의 미래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전통적인 엘리트층의 권위를 따르지 않는 데 있다고, 때로는 복잡한 말로 때로는 속된 말로, 번갈아가며 누누이 강조해봐야 소용없다. 민주사회는 그저 구역질만 느낄 뿐이다.
하지만 정말 최악의 경우는 따로 있다. 엘리트층이 전례 없이 똘똘 뭉쳐서, 자신들만이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며 특권을 정당화할 때다. 미디어가 모든 중립성을 포기하고, 스스로 슈퍼히어로를 자처하거나, 신비롭게도 자신들이 진실하고 정당하다고 선언할 때다. 그리하여 그들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며 엄청나게 왜곡된 정보를 향해 돌진하는 때다. 이런 경우, 우리 미국 사회는 절대로 그런 위선을 그냥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주저 없이 바로 행동에 나설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진보세력의 행태
결국, 이런 식의 설교는 비생산적인 것임이 분명하다. 지난 4년간 저들은 트럼프 지지자들을 계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상대가 자신들의 부패한 우상에게 헌신하는 역효과를 낳고 말았다. 미국의 좌파는 역사적으로 훈계 전술의 무용함을 잘 알고 있다. 1936년 대선 캠페인 기간, 지배계급(언론사 사주, 경제학자, 기업의 변호사 등)은 루스벨트의 재선을 막고자 공포심을 조장하며 똘똘 뭉쳤다. 전체 신문사의 약 85%가 재선에 도전한 현직 대통령 루스벨트에 반기를 들었고, 독재자 수습생·공산주의자·파시스트 등 온갖 신랄한 표현으로 그를 공격했다. 그 당시 언론은 루스벨트가 격노한 미치광이들을 선동하고, 공인된 전문가들을 무시하며, 소련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런 선거 캠페인은 효과를 톡톡히 거뒀다. 루스벨트가 끝내 ‘경제계의 왕정주의자들’에 반격을 가하며, 선거에서 가뿐하게 낙승을 거둔 것이다. 트럼프와는 반대로, 루스벨트는 진정으로 민중적인, 진정한 ‘포퓰리스트’였다. 당시 수많은 논평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오히려 미국의 상류층이 루스벨트를 상대로 연합 전선을 형성한 것이 루스벨트의 인기를 더욱 높여주는 역효과를 낳았다.
만일 30년 뒤에도 역사가란 직업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면, 훗날 역사가들은 우리가 경험한 지난 4개월의 시기를 바라보며 혐오감과 혼란스러움이 교차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신종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수만 명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해괴한 음모론이나 날려대는 백악관 주인에게 혐오감을 느낄 것이다. 한편 진보세력의 행태를 보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을 것이다. 어떻게 저들은 반대세력을 검열하겠다고, 당대 최고의 경제·문화 권력과 결탁한 것일까?
글래서에 의하면, 교실 내 괴롭힘을 막기 위해 대학이 엄격한 언어규범을 도입하기로 했을 때, 좌파 교수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아마 그들은, 그 규범을 적용할 대상을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글래서는 “선의를 지닌 진보세력들이 깨닫지 못한 사실이 있다”라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언어 규제는 최루가스와 같아서, 손에 쥔 상태에서 상대가 가까이 있다면 매우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지만,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순간, 특히 정치적인 측면에서 오히려 내가 최루가스를 마실 수 있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의사당 난입 사건으로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검열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가? 그렇다면, 민주당은 제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지난 30년간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경멸을 숨기지 않는 반면, 상류사회의 권위에 대해서는 허리를 굽혔던 한 정당, 민주당의 행위를 묘사할 수 있는 수식어는 많다.
하지만, ‘진보적’이라는 형용사밖에 없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글‧토머스 프랭크 Thomas Frank
언론인. 정치평론가. 최근 저서로 『The People, No : A brief History of Anti-Populism』(Metropolitain Books, New York, 2020)이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번역위원
(1) Aaron Zitner, Dante Chinni, ‘How the 2020 election deepened America's white-collar/blue-collar split’, <The Wall Street Journal>, New York, 2020년 11월 24일.
(2) Eli Watkins, ‘Hillary Clinton : US does not deserve Trump’, <CNN>, 2018년 3월 12일.
(3) Mark Muro, ‘Biden-voting counties equal 70% of America's economy’, 브루킹스연구소, Washington, DC, 2020년 11월 10일.
(4) Philip Rucker 외, ‘Voices from the fight : An oral history of the four-year movement to defeat Donald Trump’, <The Washington Post>, 2020년 11월 8일.
(5) Matt Taibi, 『Hate Inc. : Why Today's Media Makes Us Despise One Another』, OR Books, New York, 2019년.
(6) Adam B. Ellick, Adam Westbrook, ‘Operation Infektion. Russian disinformation : from Cold War to Kanye’, <The New York Times>, 2018년 11월 12일, www.nytimes.com.
(7) Nick Gillespie, ‘Would the ACLU still defend Nazi's right to march in Skokie?’, <Reason>, Los Angeles, 2021년 1월.
(8) Jonathan Rauch, ‘How American politics went insane’, <The Atlantic>, Washington DC, 2016년 7-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