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를 베끼는 중국의 관료교육

2021-01-29     알레시아 로 포르토르페뷔르 l 사회학자

시진핑 주석은 서구적 가치를 폄하하고 ‘중국식’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정작 중국은 미국 하버드대의 공공행정 교육과정을 통해 관료를 양성한다. 2000년대 초 중국식으로 변형 개설된 MPA(공공행정학석사) 과정을 이수 중인 관료의 수는 현재 수천 명에 이른다.

 

오늘날 중국의 유례없는 부상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중국은 여전히 권위주의 체제국가임에도, 막강한 기술대국이다. 또한 학술 수준도 높아지고 있다. 1949년부터 당 국가체제였던 중국은 어떻게 비민주적 제도 하에서 혁신과 개방을 추진했을까? 하버드대 출신의 리징 베이징대 정치학 교수(1)는 “개혁의 주체도, ‘샤오캉 사회(小康社會)’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주체도 공무원”이라고 말한다. ‘샤오캉 사회’란 모두가 편안한 삶을 누리는 사회로, 중국이 내건 국가발전 목표다. 

중국의 공직사회는 1980년대 덩샤오핑이 이론화한 중국식 사회주의의 유산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소비문화와 강력한 계획경제를 조합한 시장자본주의 모델을 바탕으로 행정조직의 기틀을 잡은 것이다. 당 국가 체제 하의 지난 40년 동안 중국 정부는 민간부문과 협업하는 가운데, 복잡해지는 기술적 문제들에 대한 정부개입도 정당화해야 했다. 이 같은 형태의 공직사회는 아직도 중국 밖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중국 공직 인사 수천 명이 20여 년 전부터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행정전문대학원)을 모델로 한 미국식 MPA(공공행정학석사) 과정을 거친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 정부가 MPA 도입을 장려하는 이유

1999년, MPA 과정이 중국에 처음 상륙했다. 이후 2001년부터 MPA 과정이 정식개설돼, 최소 3년 경력의 현역 직장인이 입학했다. 모집 대상은 지자체 공무원이 주를 이뤘지만, 공기업이나 비정부기구, 정부 산하의 비영리단체 노동자, 민간기업 직장인도 입학이 가능했다. 미국의 교육방식으로 행정 엘리트를 양성하려는 이런 시도는, 서구 자본주의에 대항할 독립적인 근대화 모델을 세우려던 중국 공산당의 포부와는 상반된다. 해당 교육과정이 중국의 신진 엘리트들을 민주주의 체제로 이끌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 이를 당 내부의 잠재적 민주화 동력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중국 정부가 MPA를 적극 장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칭화대에서 설명하는 MPA 과정의 목표는 “지도자로서, 공직자로서 다양한 해결과제에 대비해 직무 역량을 개선 및 혁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의 간부양성 교육기관인 중앙당교나 기존 행정학교와는 달리, MPA 지원생(대졸 이상)은 당 소속 여부나 직급에 무관하게 입학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박스 기사 참조). 또한, MPA 과정은 놀랍게도 일반 대학에 설치된다. 그전까지 대학은 공직부문 관료 및 간부 교육과는 별개였다. 반면, 중앙당교나 기존 행정학교에는 MPA 과정이 없다. 서로의 교육목표가 다른 만큼 공존이 가능할 텐데도 말이다. 

관료양성 교육이 일반 대학으로 이전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였다. 전문화된 지식교육이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되던 시기였다. 특히 북미 지역 등 세계적인 명문대학의 교육과정이 큰 인기를 끌었다. 게다가 대학은 정치와 무관한 중립적 연구기관이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대학중심의 미국식 행정교육을 장려한 데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와 세간의 인식이 녹아있다.  MPA 과정 학생들이 서구의 사상과 제도에 노출되면, 기존 관료제의 기반을 흔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MPA는 대학에 근간을 둔 만큼 관료제의 생존과 지속에 필수적인 전문성을 담보해줄 수도 있다.

MPA 학위의 도입은 기술역량의 취득과 강화를 통해 시장경제로 이행하고, 복잡다단해지는 노동시장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상위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이에 중국은 대대적으로 미국식 전문 학위를 개설했고, 각 과정은 모두 대학에 설치됐다. 1991년에는 경영학 석사(MBA)가, 1992년에는 건축학 석사, 1996년과 1997년에는 각각 법학 석사와 교육 및 공학 석사 과정이 개설됐다. 1999년에는 농경학 석사 과정까지 생겼다. 행정학도 예외일 순 없었다. 당시 국가발전개혁위원회와 국무원, 교육부, 인적자원부 등 정계의 비중 있는 주체들은 모두 전문화된 교육에 대한 의지가 있었고, 단순히 당에 소속돼있다는 점은 이제 공무 수행에 충분한 자격 요건이 될 수도, 돼서도 안 됐다. 그 당시 중국공산당에서 능력 있고 전문적인 공무원 양성의 필요성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이유다.

 

중국 지도부에 포진한 미국 유학파들

1920년대 미국에서 태동한 행정학 교육의 경우, 믿을 만한 교육 모델이 될 수 있었다. 본디 원활한 공무 행정을 유도하고 부패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초창기 행정학 교육은 오늘날 MPA 과정의 전신으로서 1914년부터 미시간대, 버클리대, 스탠포드대 등에 개설됐다. 저마다 차이는 있지만 미국 내 300여 개의 MPA 과정이 개설돼 있으며, 개설 목적은 모두 동일하다. 법치국가와 권력 분립, 표현의 자유(특히 기본권과 기본적 자유) 같은 원칙을 헌법으로 보장하는 민주주의 모델과 그 역사적 배경을 기반으로 하는 통치관을 장려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 정부가 이 교육과정에 이끌렸던 이유는 미국 유학파 출신이 현재 중국의 고등교육기관 및 연구기관 지도부에 대거 포진해있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패권은 물론 언어와 경제를 장악한 미국이 전 세계적으로 미치는 문화적, 상징적, 규범적 영향력은 해외 유학파 출신 관료들에 의해 더욱 증폭된다. 한 세기 이상 다수의 학생과 연구원들이 중국과 미국을 오갔으며, 연구 기량을 높이려는 적극적인 전략도 펼쳐졌다. 따라서 중국에는 귀국 후 지식과 인맥을 펼칠 해외 유학파가 넘쳐났다.

이렇듯 학술교류에 호의적인 분위기를 타고, 미국식 MPA 모델은 순조롭게 대륙으로 진출했다. 1996~1998년에는 교수진과 교육부 공무원으로 구성된 중국 측 대표단이 미국과 캐나다, 유럽 등을 방문해 최고의 행정 교육 제도를 연구했다. 이들은 특히 미국 행정학 교육의 요람이었던 시러큐스대 맥스웰스쿨,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피츠버그 카네기멜론대, 뉴욕 컬럼비아대 등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후 이 학교 교수들이 중국으로 초빙돼 학술교류 여건을 평가하고 조언을 제시했다. 이런 상호방문 과정은 서로의 교육관행을 이해시킬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교육적 실효성이 평가되고 특히 중국에 도입할 만한 요소들이 정해졌다. 대표단 중 일부는 미국식 MPA 과정의 중국 내 도입을 장려하기 위한 내부 의견서도 작성했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1999년 5월, 미국식 MPA 도입 계획을 최종승인 후 최고의 명문대학들에 제안서를 요청하고, 24개 대학에 파일럿 차원에서 처음으로 MPA 과정을 개설했다. MPA를 우선적으로 도입한 곳은 베이징대, 칭화대, 중국인민대, 상하이 푸단대 등 중국의 주요 명문대학들이었다. 전통적인 엘리트 교육기관으로서 이들 대학은 점점 치열해지는 경쟁으로부터 생존할 수단과 역량을 추구하며 MPA 과정을 도입했다. 

이후 15년 간, 100여 개의 행정대학원이 설립됐다. 2001년 24개였던 MPA 학위 과정은 2016년 146개로 늘었으며 2004년 1,055명에 불과했던 학위 취득자 수도 10년 후에는 1만 476명으로 약 10배로 늘었다. 지금까지 총 15만 명 이상이 MPA 과정을 밟았다. 해당 수치가 710만 명에 달하는 공무원 수에 비하면 적게 느껴질 수 있지만, 선발과정을 통하는 소수 대학 개설학위임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인원이었다. MPA의 교육목표 이식은 성공적이었다. 변형된 형태의 학위과정도 늘고 학생도 계속 증가했다. 양국 간의 행정체계와 정치제도의 차이는 별로 문제되지 않았다.

 

최신 개념을 중국의 사례에 적용

홍콩 중국대에서 공부하고 칭화대 교수로 재직 중인 첸 웨이는 “학생들이 외국에서 공부한 내 경력에 관심이 많다”고 얘기했다. “요즘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참신한 개념들이 주로 외국 책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MPA에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공공 정책과 조직 이론, 사회과학, 정치경제학, 인적관리방식, 정량적 접근법, 행정법 등을 가르치며, 이밖에도 공공 부문의 경영이나 공공 정책 분석, 사회주의 이론과 관행, 영어, 지역 발전, 도시 거버넌스 등 중국 현지 수요에 보다 특화된 과목들도 있다. 

“학생들의 관심을 일깨우는 일이 중요하다”고 역설한 첸 웨이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 최신 개념을 알려주는 한편 실제 생활에서 가져온 다양한 사례들을 제시하는 두 가지 방식을 사용했다. 그는 “MPA 과정이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야 하는 만큼 현장에서의 사례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수업은 “각각의 새로운 주제에 대해 집단 토론”을 하는 방식으로도 진행되는데, “일단 토론 분위기가 조성되면 교수자로서 발언을 점점 줄이고 학생들이 보다 많은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한다고 했다.  

외국의 이론과 사례를 기반으로 한 강의에서 교수자의 적절한 중재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이는 사실 학생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현장에서의 실제 행정에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MPA 과정의 교수자 및 책임자들은 정치나 사상적 측면에서의 차이는 인정하지 않은 채 서구의 이론과 현지의 관행 사이에서 발생하는 격차만을 강조한다. 그저 교수법에만 역점을 두며 MPA 과정을 현지화하려는 것이다. 그에 따라 모든 MPA 과정에서는 공통적으로 사례 중심 학습이 이뤄진다. 모의 상황을 설정하고 관련 토론을 진행하는 것이다. 1880년대 미국 법대에서 맨 처음 생겨나 비즈니스 스쿨을 통해 대중화된 이 같은 교수법은 오늘날 중국 석사 학위 과정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중국에서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교육용 예시 자료를 만들어낸 뒤 이를 수업에서 활용하자면 특정한 방법론과 절차를 따라야 한다. 이런 과정이 수반되지 않으면 강의실에서는 실제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룰 수 없으며, 특히 사회과학 교육이나 공공 정책 교육과 관련해선 더더욱 그렇다. 그렇게 ‘사례 연구’라는 방식을 통하면 강의실 내에서도 소위 ‘민감한’ 주제들이 다뤄질 수 있다. 사회적 불평등과 부패 및 공금 횡령, 강제 수용, 인구 재배치, 환경오염, 에너지 자원의 민영화, 실업, 사회적 취약성, 조세 제도의 역기능 등과 같은 주제들이 수업 주제로 다뤄지는 것이다. 또한 ‘사례 연구’를 통하면 자유로운 토론까지도 허용되는데, 사전에 정해둔 틀과 역할에 따라 교육 목적에서 토론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상황적 ‘틀’이라는 개념의 활용

중국에서 사용되는 상황적 ‘틀’이라는 개념은 구조를 단순화하고 지나치게 한정하는 측면이 있어 미국에선 그리 좋게 보지 않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상황적 ‘틀’을 상정한 덕분에 외려 자유로운 발언이 제기되기도 한다. 가령 칭화대 강의의 경우,(2) “홍수 예방과 회의 참석 가운데 무엇을 더 우선해야 하는가? - 행정 갈등 상황에 직면한 지역 위원회의 경우”라는 사례가 제시됐다. 양쯔강이 범람할 수 있는 이례적인 긴급 사태가 발생하고 상관의 지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학생들은 위계질서를 고려하는 한편 두 갈등 상황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한다. 

아울러 학생들에게는 “만일 본인이 조직의 책임자 위치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든가, “조직 책임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가능한가?” 등의 질문들이 제기된다. 명령에 대한 불복종이나 저항을 유도하기보다는, 자유 의지의 문제와 더불어 숙련된 경험과 지역 상황에 정통한 행정 책임자의 선택을 이끌어야 할 사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하다. 무엇이든 토론주제로 삼을 수 있고, 어떤 의견이든 표현할 수 있다. 학생들은 모든 것이 마치 수업 중의 가상 상황인 듯 오늘날의 중국에 대해 이야기한다. 학생들은 스스로와 무관한 특정 상황에 대해 관찰자의 시각에서 객관적인 의견을 제시한다. 학생들은 제한 없이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으며, 어떤 발언이나 의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수업 중의 상황은 현실과 직접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 교육은 주로 ‘리터니’가 맡는다. ‘리터니’란 서구권이나 일본, 홍콩 등 아시아 다른 지역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와 대학이나 업계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교수자들이 서양의 이론이나 사상에 친숙한 만큼 학생들은 이런 사례 중심 학습을 통해 외국의 방법론이나 사상, 개념 등을 쉽게 접할 수 있고, 나아가 서구 이론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 이를 각자의 업무 환경에 대입할 수 있다. 사실 학생들이 수업 중에 접하는 대다수의 사례는 기존의 업무 환경에서 이들이 적용해온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기준점도 다르고 구속 여건도 상이한 양쪽의 상황에 정통한 ‘리터니’만이 이 까다로운 ‘이식’ 작업을 성사시킬 수 있다. 

 

“모든 문제는 새로운 이론으로 해결 가능”

초창기 졸업생들의 행보를 보면 오늘날 중국의 관료제에서 나타나고 있는 변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들이 해외의 사례에서 보고 배운 경험이 제도의 변화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존 체제의 안정성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MPA 과정의 학생들은 관리로서의 책임이나 부패 척결, 기술적 역량, 선정 등과 같은 개념, 사상, 가치 등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한편 기존의 관료제 문화와 공존하고 호환될 수 있는 혁신적 영향력의 새로운 행정 문화를 만들어낸다. MPA 과정을 통해 외국의 지식을 습득한 뒤 이를 국내에 적절히 이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외부 요소의 도입은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가속화될 수도, 줄어들 수도 있으며, 일시적으로 중단될 수도 있다. 

푸단대에서 MPA 학위를 받은 왕핑 역시 “정부의 기존 관념으로는 오늘날 사회문제에 대처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예전에는 분쟁이 있으면 법정을 찾던 사람들이, 이제 중재로 문제를 해결한다. 정부의 도움 없이 분쟁이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은 경제적인 일이다. 관행을 바꿔 더 많은 분쟁이 중재로 해결되게 해야 한다. 이는, 새로운 이론의 도입으로 가능하다.”  그는 “모든 지식을 항상 활용하지는 못한다”라고 인정했지만, “나는 교육을 통해 장기적으로 일하는 방식에 도움을 될 ‘역량’을 함양했다”라고 덧붙였다. MPA를 취득하면 활동 권한의 폭이 확대되고 활동 역량도 강화되며, 장기적인 차원에서의 직무 권한도 커지기 때문이다. 

왕핑은 “MPA 과정에서 배운 이론이 업무에 있어 가이드라인이 된다”라고 말했다. “학위가 승진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지식은 업무 관행을 바꾸는 데 유용하다”라고 설명했다. MPA를 수료한 젊은 관리들은 학위 과정에서 배운 지식을 실제 업무에 적용함으로써 공직자로서의 ‘덕’을 함양한다. ‘덕’은 중국 공직사회에서의 역량평가 지표지만,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동조 여부와는 무관하다. 발전적인 미래상과 공동의 가치로 충만한 이 학생들은 자신이 새로운 사상이나 개념에 깨어있는 존재로서 기존의 관행과 새로운 관행을 모두 원만하게 조율할 줄 안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충성도에 기반을 둔 능력주의(메리토크라시)의 기존 체제에 있어서나 지식 및 업무 역량에 기반을 둔 신규 체제에 있어서나 무리 없이 적응하고 직업 역량을 발전시키는 이들은 중국의 신진 관료로서 모든 분야의 문제점을 순조롭게 해결하고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를 극대화하고자 노력한다. 국가의 지도부 자리까지 넘보는 이들은 현대적 동력이든 보수적 동력이든, 기회가 있으면 잡을 준비가 되어 있다.  

 

 

글‧알레시아 로 포르토르페뷔르 Alessia Lo Porto-Lefébure
사회학자.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 및 국립고등공중보건학교 소속 연구원. 저서로 『Les Mandarins 2.0. Une bureaucratie chinoise formée à l'américaine 만다린 2.0. 미국식으로 형성된 중국식 관료제』 (Presses de Sciences Po, Paris, 2020) 등이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번역위원


(1) 이 글에서는 가명을 썼으며, 인터뷰 내용은 『Les Mandarins 2.0』(Presses de Sciences Po, Paris, 2020)에서 발췌했다. 
(2) Cas CCCC-05-40-E, School of Public Policy and Management of Tsinghua University, Beijing, 2005.

 

 

당 충성도에서 성과제로의 변화

 

중국에는 중앙당교, 국립행정학교, MPA 취득이 가능한 행정대학원은 물론 각부 부처에 특화된 평생교육기관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관료양성 기관이 존재한다. 이런 관료 교육 체제는 때에 따라 능력주의(메리토크라시) 논리로 기울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당내 신뢰 구조 유지를 위한 충성도의 논리를 따르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간부직과 공무원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에 행정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간부직의 경우, 소비에트 체제의 공직 분류 모델에 따라 1950년대 중국 공산당이 채택한 행정 조직 구조를 따르고 있다. 법적으로 두 관료 범주의 용어적 차별화가 이뤄진 건 1987년부터인데, 다만 그 후에도 양쪽의 인력 관리는 여전히 일원화되어 있다.(1) 실제로 고위직 공무원 상당수는 당 간부직을 겸하고 있으며, 중국공산당 인사부는 여전히 각급 행정 단위를 관장한다. 

1950년대부터 수도권과 지방에 설치된 중국 공산당 중앙 당교는 중앙 차원의 교육기관으로서 신임 공산당 간부를 위한 지도자 교육을 담당해왔다. 중앙 당교는 특히 베이징에서 채택한 공공 정책이 각급 조직으로 온전히 전달될 수 있도록 사상 주입에 힘썼다. 이와 더불어 1990년대에는 (평생 교육을 통한) 기술 역량 강화를 위해 프랑스 국립 행정학교를 본뜬 다수의 행정 학교가 신설됐다. 공직사회로의 진입 경로는 더욱 불투명해졌다. 성과가 중시되며 경력 비중이 점점 더 늘고 있긴 하나 1993년 이후 줄곧 중하위 직급에서만 정식 채용 절차가 진행됐고, 고위 행정 간부와 당 간부의 선발은 지금도 여전히 당에 대한 충성도 수준에 따라 이뤄졌다.(2)

중국은 605년부터 수 세기 동안 과거제를 통해 우수한 행정 인재, 문관을 선발해왔다. 오늘날의 간부직과 과거의 사회지도층을 직접적으로 비교할 순 없지만 예전에는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 곧 나랏일을 하는 관리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과거제는 각 관리의 직업 능력보다 문학이나 철학 분야의 지식을 중시했으나, 이후 1860년부터 역사나 자연과학 같은 과목도 그 비중이 늘어났다. 출신보다는 학식 수준에 따라 관리를 선발하던 과거제는 차츰 사회지도층을 배출하는 주요 기제로 자리 잡는다. 합격하려면 상당한 자질 소양이 요구되는 만큼, 상당한 입시비용이 소요됐기 때문이다. 

이후 1898년 국자감이 문을 닫고 1905년 과거제가 폐지됐다. 이는 국가의 이상과 행정력의 불일치가 근대화의 장애물이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존재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중국의 엘리트 계층은 항상 당면 과제나 위기에 맞설 근대적 역량이 부족했다. 따라서 무조건 ‘현대화된 행정’을 내세우는 것도 이 부분에 대한 부족함을 인정하는 셈이며, 이는 결국 교육과 연관된다. 중국 황실이 무너지기 직전인 1911년에는 개혁파가 앞장서서 미국과 독일 모델에 따른 대학 개설에 자금을 지원했으며, 그에 따라 1905년에는 푸단대가, 1911년에는 칭화대학이 설립됐다. 이들 대학은 유교적 전통과는 달리 실무 중심 교육을 지향했고, 해외 유학파 교수들이 가져온 책을 번역해 참고서로 활용하곤 했다. 1차 대전 후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차기 지도층이 갖춰야 할 지식의 폭을 쇄신해야했기 때문이다. 해외 유학도 늘었다. 1차로 120명이 1872~1881년 미국으로 떠났으며, 1896~1911년 수천 명이 일본으로 떠났다. 1949년까지 계속된 미국 유학 행렬은 이후 소련 및 사회주의 국가로 우회된다. 

그런데 이런 서양식 교육만으로는 (중앙 조직에 대한 소속감의 측면에서) 기존의 교육 제도를 대체하지 못한다. 체제에 대한 충성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 내에서 학생의 정치적 역량 함양을 위한 고민과 토론이 이뤄지지만, 그렇다고 대학에서의 수업이 관료제 자체에 영향을 주지도 못한다. 1927년과 1937년 사이 집권한 국민당이 내세우던 근대화 담론도 유학파 신진 관료들의 호응을 받았으나, 그 끝은 좋지 않았다. 국제연맹의 유럽 전문가들이 제시한 조언에 따라 1932년부터 근대적 국가의 신진 관료를 양성하기 위한 몇 가지 소극적인 개혁이 고등 교육 부문에서 이뤄졌으나 결국 1952년 마오쩌둥에 의해 폐기됐기 때문이다. 1921년 상하이에서 출범한 중국공산당은 (근대식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가담하기 시작하는 가운데) 조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관료제가 맡을 역할에 대한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과거의 개혁파와 달리 마오쩌둥은 대학에서의 행정 교육이 실무와 동떨어져있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이를 혁명의 장애물로 규정하기도 했다. 따라서 마오쩌둥은 기존 체제를 모두 해체한 후 정치적 충성도를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하는 한편, 문화 자본에서 기인한 차이를 가급적 없애고 관료제가 사회 계층을 이루지 못하도록 했다. 그럴 경우 지속적인 혁명의 저해 요인이 될 수 있을뿐더러 정의로운 사회를 안착시키는 데에도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문화대혁명과 더불어 더욱 극심해진 사상단속과 재교육 방식을 통해 마오쩌둥은 행정 체제 그 자체를 무력화시킨다. 기존의 책임직 행정 관료들이 1950년대의 1차 숙청에서 살아남았다고는 하나, 선발 시험이 폐지된 1966년부터는 이들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1968년부터 행정 책임자의 60%가 군인 출신으로 물갈이되고 정치적 충성도에 따라 간부의 선발과 승진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간부직에 오르려면 무엇보다도 ‘빨갱이’로서의 확실한 사상 검증이 필수적이었다. 도시 지방 할 것 없이 간부 교체가 잦았으며, 언어폭력과 신체공격도 비일비재하고 모욕과 수모를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급기야는 외지로 호송돼 일명 ‘5월 7일 학교’(3)라 불리는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사상 재교육을 위한 기관이었다. 

1976년 마오쩌둥 사망 후에는 당과 국가 사이의 구분이 없어진다. 대학은 해체됐으며, 오직 정치적 충성만이 진급의 유일한 잣대였다. 1978년부터는 엘리트 지식인에 대한 교육과 관료제의 복원이 서서히 이뤄지면서 청대의 전통이나 혁명 초기의 기존 체제와 맥을 같이했다. 아울러 “교육 수준이 높고 경쟁력이 뛰어나며 보다 전문적이고 청렴한 청년들을 재능 위주로 선발”해 새로이 행정 인력을 충원할 필요성이 제기됐다.(4) 1985년과 1990년대 말 사이 야심차게 이뤄진 고등교육개혁도 그 일환이었다.  

 

 


글·알레시아 로 포르토르페뷔르 
번역·배영란


(1) 2005년 4월 27일 채택 후 2006년 1월 1일 발효된 중화인민공화국 공직법 제16조.
(2) 중화인민공화국 공직법 제21조.
(3) 일명 ‘5월 7일 학교’라 불리는 ‘혁명 학교’는 문화대혁명이 실시된 이후인 1966년 5월 7일 세워진 곳이다. 
(4) 1987년, 1992년, 1997년 중국공산당전국대표대회 주재 중국공산당서기장의 각 보고서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