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정치의 분열증

대중 계급을 분열시키는 행동주의

2021-01-29     스테판 보 외

오랜 역사에 뿌리를 둔 정체성의 언어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소셜 미디어와 스트리밍 뉴스 채널을 통해 폭증했다. 한때 우익의 전유물이었던 정체성의 언어는, 이제 대다수의 활동가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담론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인종문제를, 상대편을 공격하는 도구로 만들어버렸다.

 

2020년 5월 25일, 미국 미니애폴리스의 한 행인이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죽어가는 장면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영상이 소셜 네트워크와 뉴스채널에서 연달아 확산되면서 인종문제가 다시 논란의 중심에 떠올랐다. 미니애폴리스의 백인 경찰이 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살해한 사건은 전 세계적으로 감정의 폭풍과 시위를 촉발시켰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반인종주의 운동가, 언론인, 정치인, 지식인, 전문가, 예술가, 작가 등 다양한 행위자들이 이 범죄사건과 사건 자체의 정치적 중요성에 대해 의견을 제시했다.

프랑스에서는 지난 15년간, 인종차별 범죄나 그렇게 의심되는 행위에 대한 공개적 비난이 계속 ‘인종문제’의 형태로 언론에 노출됐다. 2020년 7월 3일 57명의 지식인들이 서명한 ‘반인종주의적이고 식민화된 프랑스 공화국을 위한 마니페스토’라는 청원서가 온라인 매체 <메디아파르>에 게재되자, 2020년 7월 26일 주간지 <마리안>은 80여 명의 유명인사들과 20개 단체가 서명한 ‘사회문제의 인종화에 반대하는 호소문’을 게재함으로써 응답했다.

 

“생활세계의 식민지화”

두 청원의 비교는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교차 맹목”이라 부른 게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알제리 전쟁이 끝날 때까지 특정 경찰관의 인종차별적 폭력과 프랑스 식민지에서 일어난 ‘국가 인종주의’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메디아파르>의 청원자들에게 사회적 요인을 뒷전으로 한 채 인종문제 및 탈식민지 문제에 초점을 맞춘 정치 프로젝트를 지지하게 했다. 반대로, <마리안>에 게재된 항소문의 필진은 오늘날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불평등에 사회계급이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을 환기시켰다. 

이들의 정체성 투쟁은 ‘우리의 세속적이고 사회적인 공화국, 모두를 위한 기회!’라는 슬로건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들은 이 슬로건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역사에 분리란 없었다”라는 주장을 펼치지만, 진정한 역사가나 사회학자라면 이 주장을 지지할 수 없을 것이다. 각 진영이 소규모 지식인 집단을 동원해 벌이는 이런 정체성 충돌은 연구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연구자들을 곤경에 빠트리고 있다.

2000년대에 이뤄진 디지털 혁명은 이런 ‘대중 담론의 인종화’에 크게 기여했다. 미디어 산업의 놀라운 발전은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생활세계의 식민지화”(1)라고 명명한 현상을 완성했다. 이 거대한 정보생성 기계는 우리들 각자에게 축적된 감정을 연료로 삼아 24시간 내내 가동한다. 그리고 우리가 불의, 굴욕, 공격 등에 직면하면,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을 하게끔 유도한다. 19세기 말 대중매체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정치 뉴스의 ‘변동’은 오늘날 절정에 이르러, 범죄자에 대한 비난과 피해자의 명예회복에 치중하면서 점점 더 사회문제에 대한 이성적 분석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소셜 네트워크를 소유한 미국의 글로벌 기업들은 이 과정을 공격적으로 가속화시켰다. 이런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수십억 명은 더 이상 미디어에 의해 조작된 담론의 수동적인 수신자가 아니라, 담론의 개발과 확산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행위자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셜 네트워크는 국가의 틀을 넘어서는 공공 매개공간을 탄생시켰으며, “피부색 불문(color-blind)”,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캔슬 컬처(cancel culture, 소셜 네트워크에서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팔로우를 취소하는 행위)” 같은 표현들의 빠른 확산에서 볼 수 있듯이, 대중적 논쟁의 미국화에 크게 기여했다. 인종차별이 오늘날 시민들의 감정을 동원하기에 가장 적합한 정치적 주제가 된 만큼, 인종차별에 대한 비난이 미디어에서 점점 더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물론, 인종차별문제를 부정하거나 최소화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대중매체에서 이런 복잡한 형태의 인종차별이 확산 중인 현실(2)을 간과하는 것도 결코 아니다. 프랑스의 전 식민지(마그레브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 출신 이민자들(이들 중 대다수는 노동 계급에 속해 있다)(3)은 1980년대 경제위기의 첫 희생자였다. 이들은 주택, 고용, 또는 국가기관과의 관계(경찰의 ‘안면’ 신원 확인)에 있어 여러 형태의 분리를 경험했다. 게다가 이런 이민자 세대는, 정치적으로는 노동운동 및 공산주의 운동이 20세기에 가져다준 집단적 희망이 붕괴되는 현실을 직면해야만 했다.

 

인종만이 차별의 기준인가?

공개토론에서 정체성 논쟁이 갖는 중요성을 감안할 때, 이 젊은이들 중 일부가 종교, 출신, (피부색으로 정의되는)인종 등 자신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최우선으로 내세움으로써, 자신들을 위한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 거부를 표현한다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불행히도, 그들 중 가장 가난한 이들은 사회적·경제적 이유로, 소속 공동체 및 귀속 집단을 다양화할 수 있는 자원을 박탈당하고 있다. 

이런 사실은 그들이 왜 세계를 ‘우리’(도시의 흑인청년들, 아랍인들, 배제된 사람들, 혹은 ‘우리 무슬림들’) 대 ‘그들’(부르주아, 프랑스인, ‘갈리아인’, 백인, 무신론자 등)로 이분화하는지 말해준다. 인종차별과 끝까지 싸우려면, 이런 정체성의 구속과도 싸워야 한다. 이 정체성의 구속은 젊은 반항자들에게 그들이 대중계급에 속해 있으며, 그것이 그들의 사회적 존재를 규정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피부색을 시민들의 모든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관행을 결정하는 변수로 제시하는 인종차별의 언어는 복잡하고 미묘한 사회 속 권력관계를 전혀 드러내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사회학적·통계학적·민족지학적 조사는 사회적·민족적 변수가 항상 서로 다른 강도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과학의 모든 기술은 (지리적·역사적·상호작용의) 맥락에 따라 다양한 행동변수들의 작용을 정교하게 밝혀낸다. 하지만, (경제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으로 결정되는) 정체성의 여러 차원들로 인해 사회계층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 무엇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일례로, 사회적 이동성 덕분에 중산층(교사, 교육자, 사회복지사, 연예계 종사자 등) 또는 상류층(방송기자, 작가, 가수, 영화배우 등)의 삶에 접근할 수 있게 된 이들을 보자. 이 ‘계급 상승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자원을 정서적·직업적·문화적 네트워크를 넓히는 데 활용한다. 그것이 더 많은 자유를 위한 투자임을 그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노동계급에 속해있는 식민지 출신 이민자의 후손들은 왜 희생자로 남아있어야 하는가? 왜 그들은 해방의 열쇠를 박탈당해야 하는가? 

그런 정체성 담론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권력관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노동계급 내 분열을 유발한다. 이는 1980년대부터 좌파 헤게모니를 무너뜨리기 위해 보수세력이 추구한 목표였다. 모든 ‘백인’을 특권층으로 간주하면서 정치적 투쟁을 인종적 차원에 묶어두는 것은, 특권층이 같은 논리로 자기방어를 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백인’이 대다수인 만큼, ‘백인이 아닌 이들’은 영원히 소수로 남게 될 운명에 있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4) 스타일의 참회가 ‘백인’으로 정의된 개인들이 ‘특권’을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정치를 도덕적 교훈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인 이런 경향이 이제 프랑스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인종문제를 논할 때는, 미국의 사례가 항상 언급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종문제에 대해서는, 인종차별을 아직도 미국의 핵심적인 문제로 남아있게 만든, 미국 흑인차별 반대운동의 실패를 설명하기 위해 정치철학자 마이클 왈저가 최근 발표한 분석을 참고하는 것이 유용하다. 왈저는 1960년대 초 학생 신분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주도한 시민권 투쟁에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50년 후 그는 자신의 정치참여의 기반이 된 그 순간에 다시 초점을 맞춘 연구를 발표했다. 이 연구에서 왈저는 미국 북동부의 명문대학(하버드대, 브랜다이스대)의 학생들, 특히 자신과 같은 유대인 학생들과 흑인 목사들, 활동가들 간에 형성된 연대의 힘을 상기했다.

 

히스패닉의 생명 또한 소중하다

왈저는 그런 연대를 뒤늦게 평가하면서, 진보진영에서 필요한 정치적 동맹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우리는 흑인 민족주의를 이해하는 한편, 정치적 실수라고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소수민족인 자신들이 목소리를 내려면, 연합정치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을 학습해왔다. 인구의 10%이상, 20%를 이루면 고립되지는 않을 것이다. 동맹이 필요하며, 동맹을 촉진하는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흑인 민족주의는 이를 거부했으며, 그로 인해 막다른 길에 이르게 됐다고 생각한다. (...) ‘정체성 정치’가 미국 정치를 장악하면서 흑인, 히스패닉, 여성, 동성애자 등으로 분리된 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런 다양한 형태의 인종 투쟁 사이에는 연대가 없었다. 예를 들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말은 경찰의 행동에 대한 흑인들의 합법적 분노를 근본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나 히스패닉도 흑인보다 나을 바가 없는 대우를 받고 있다. 그런데도 내가 아는 한 ‘히스패닉의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운동은 없으며, 경찰개혁을 위해 인종집단 연합을 만들기 위한 공동의 노력도 없다.”(5)

안타깝게도, 왈저가 지적한 현상은 프랑스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확실히 ‘투쟁의 수렴’을 위해 호소하는 목소리는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방향으로 투쟁하는 사람들은 이제 2000년대 디지털 혁명과 함께 도래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 이전에는 공공장소에서 대의를 외치려면, 많은 활동가들을 규합한 단체들이 대의를 정의하고 집단옹호 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위임 받지 않은 소수의 활동가들도 대의를 외치며 미디어의 관심을 충분히 끌 수 있다. 따라서 인종차별 반대 투쟁의 명목으로 연극을 금지하는 것처럼, 관심을 끌기 위한 일부 활동가들의 도발적 행동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이런 행동에 대한 기자들의 안일한 태도는 진보세력을 끊임없이 분열시킨다. 표현의 자유와 인종차별 반대는 지금까지 좌파의 전유물로 인식됐다. 그리고 극소수 세력의 쿠데타는 결국 그들끼리 적대시하게 했다.

결국, 이런 분열은 보수주의자들에게 탄탄대로를 열어줄 것이다.  

 

 

글‧스테판 보 Stéphane Beaud 
사회학자. 주요 저서로 『La France des Belhoumi. Portraits de famille (1977~2017) 벨루미 가족의 프랑스, 가족의 초상화(1977-2017)』가 있다.
제라르 느와리엘 Gérard Noiriel 
역사학자. 스테판 보와 공동집필한 『Race et sciences sociales. Essai sur les usages publics d’une catégorie 인종과 사회과학: 카테고리의 대중적 사용에 관한 에세이』가 2021년 1월에 출간될 예정이다.

번역‧김루시아
번역위원


(1) Jürgen Habermas, 『Théorie de l'agir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론』, Fayard, Paris, 1987(초판 1981).
(2) Gérard Noiriel, 『Le Venin dans la plume. Édouard Drumont, Éric Zemmour et la part sombre de la République 펜에 있는 독. 에두아르 드뤼몽, 에릭 제무르, 그리고 공화국의 어두운 그늘』, La Découverte, Paris, 2019. 
(3) 이런 사실은, 지역언론의 보도에서 전 식민지 출신 이민자들이 주로 범죄행위나 수감자집단과 연관된 것으로 그려지면서 이들에 대한 잘못된 일반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4)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에 대한 아마존 트윗: “흑인에 대한 불공정하고 잔혹한 처우는 중단돼야 한다”(2020년 5월 31일).
(5) Michael Walzer, Astrid Von Busekist, 『Penser la justice 정의를 생각하다』, Albin Michel, ‘Itinéraires du savoir’ 총서, Paris,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