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권의 권위추락을 파고든 음모론

COVID 19의 어두운 이면

2021-01-29     프레데리크 로르동 l 경제학자, 철학자

만약 <홀드업(Hold-Up)>이 없었다면, 음모론을 반대하는 이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홀드업>은 백금-이리듐 블록처럼 세브르의 국제 도량형국에 완벽한 음모론의 표준으로 등록해둘 법한 작품이다. 인터뷰에 응한 인물 중 몇몇은 참으로 새로운 발상에서 출발해 정치 지도자들처럼 휴전선을 넘나들며 각종 은총을 베푼다. 사람들은 왜곡된 내용을 보며, 자신들이 이성적이며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긴다. 이 음울한 시기에는 웃을 일도 많지 않다. 지구 평면설이나 달 공동설 같은 음모론이라면, 웃음을 선사할 수도 있으니 환영이다.

하지만 온라인 기반의 음모론 집단 큐어넌(Qanon)은 다르다. 그들은 정치계로 파고들어 총기를 동원하고 차량 수백 대를 몰고 난입하는 등 일촉즉발의 상황을 초래한다. 어쩌면, 프랑스에서도 곧 비슷한 광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징후는 벌써 나타나고 있다. 현재로서는 마스크와 백신에 관한 음모론이 적잖게 대두된다. 사람들은 이제 그 어떤 이슈라도 음모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실감한다. 그리고 이성적인 집단이 무력감 속에서 음모론 퇴치 전략을 구상하는데 난항을 겪으며 우려한다는 점도 실감할 수 있다. 단언컨대 이성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각계 전문가가 이구동성으로 쏟아내는 말

다큐멘터리 방영 직후 평론이 쏟아지며, 열광적인 반응을 시사했다. 경멸과 냉소의 폭풍 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양적’ 접근뿐 아니라 ‘질적’ 접근도 시도해봐야 한다. <홀드업 Hold-Up> 논란이 보여주는 특징은 매체나 전문가들의 반응이 일제히 관심을 유발한 ‘동기’에만 집중했다는 데 있다. 각계 전문가들이 분석해 다수가 인용한 내용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음모론답게, 불안감을 부추기는 주는 ‘음향’, 음침한 분위기의 ‘배경’(에서 전문가를 인터뷰), (각종 음모론을 끼워 맞춘) ‘몽타주’  형식. 결국 <M6>, <TF1>, <LCI>, <BFM>, <France 2> 등 각종 방송국 르포에서 흔히 쓰는 평범한 기법과 변변찮은 효과를 재활용한 것이다. 오랜 세월 언론이 조잡한 구성을 유지해 왔기 때문에 음모론 다큐멘터리를 보는 시청자들은 아무런 거부감 없이 익숙한 형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급기야 방송 업계의 표준이 조작에 활용됐다는 점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음모론인가, 해독인가?

하지만 언론은 음모론자들을 그저 광인으로 낙인찍는 데서 끝나면 안 된다는 점을 간파했다. 언론은 음모론자들을 우선 이해해야 하고, 깊숙이 숨겨진 원인을 함께 파헤쳐보자며, 늦게나마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 고질적인 언론계의 음모론을 샅샅이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우선, <리베라시옹>에서 니콜라 셀니크는 아주 진지하게, ‘감춰진 것을 발견한 기분’이 음모론에 동조하는 동기라고 말했다. 그 역시 음모론을 비웃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음모론을 믿는 친구 앞으로 편지’를 썼다. 니콜라 셀니크는 언론의 본래 신조는 해설, 즉 ‘해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해독하다(décrypter)’의 어원에는 잘 알 수 없는 것을 알기 쉽게 풀어낸다는 의미가 있다. 현상을 ‘해독’ 한다는 자부심이 없다면 언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사방에는 ‘숨겨둔 것을 해독’하려는 사람들만 보인다. 아벨 메스트르와 뤼시 술리에는 <르몽드>의 여러 지면을 할애해 음모론을 유포하는 사이트 못지않게 음모론 신봉자 수가 급증하고 있다면서, 코로나19와 음모론이라는 이중 전염병이 번지는 현상을 우려했다.

 

공인된 해독자들은 언제나 ‘재 암호화’라는 특정한 방식을 은연중에 사용해왔다.

 

여기서 ‘감춰진 것을 발견’하려는 개개인과 ‘해독자’에 해당하는 엘리트 집단은 분명 눈에 보이지 않는 평행 관계에 놓여있다. 공인된 해독자들은 지금까지 그 무엇도 해독하지 못했을 뿐더러, 매번 ‘재 암호화’라는 특정한 방식을 자각도 못한 채 사용해왔다. 바로 이 점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신자유주의 교리도 여기에 해당한다. 무지한 대중에게 친절을 베풀어 부유세(ISF) 폐지나 정부 부채 감소, 노동법 철폐 같은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설명하는 방식만 봐도 ‘해독’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 ‘해독한다’라는 것은 이제 우민들이 명령을 따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고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부유세를 폐지하지 않으면, 두뇌 유출을 막을 수 없다”라는 해독(해설)이다. “기업 운영자금을 지원하려면 자본세를 줄여야 한다”라고 하면 모든 게 명확해진다. “병원이 대응력을 높이려면 병상을 줄여야 한다”(좀 더 적절한 해독으로 “통풍이나 관절염 환자의 입원을 누가 반기겠는가?”가 있다. 한층 쉽다). 혹은 “자녀들에게 빚을 남기지 않도록 공공지출을 줄여야 한다” 등.

언론인으로서 현상을 ‘해독’하는 일은 기쁘고, 사회와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일이다.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우민들에게 모든 정보는 암호화된 상태나 마찬가지여서, 해독이 필요하다. 현상을 해독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그런지, 그렇게 했을 때 어떤 이득이 생기는지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사람들은 현상을 이해하는 데서 만족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일을 제대로 못하는 해독자가 현상을 해독해 전달했을 때, 어떤 일이 생길지 안다면 어떨까? 

여하튼 음모론자들에게 ‘해독’이라는 의미만큼은 제대로 전달됐다. 하지만 세상의 이치를 모르면 직접 찾아 나서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을 계속 듣다 보니, 결국 자충수를 두고 만다. 하지만 제대로 해독하지 못한다. 무턱대고 덤벼든다고 해독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음모론자들은 자신들이 진실에 인접해 있다는 인상을 언론에 풍기고자, 무엇인가 이면에 감춰져 있다는 전제를 깔았다. 그들은 감춰진 ‘무엇’이 있다는 논리만 반복하다가 이내 또 다른 의혹을 찾아 나선다.

 

음모론자들의 뇌시경

음모론자들의 자체 해독은, 왜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까? 이때 최정점의 우위를 점하는 논리는 음모론이다. 여타 최첨단 과학처럼 음모론도 변수를 통제한다. 물리학에 ‘콤프턴효과(광자와 물질 내 전자가 충돌하는 현상)’, ‘도플러 효과(파원과 관측자 중 하나 이상이 운동하고 있을 때 발생하는 효과)’, ‘아인슈타인-드 하스 효과(자기회전 효과)’가 있다면 음모론에는 ‘밀푀유 논증(millefeuille argumentatif·천 겹의 잎사귀 논증)’이 있다. 밀푀유 (논증)’을 맛보지도 않고 <홀드업>에 관한 기사를 쓴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실, 거짓, 진실…” 폭로매체로 유명한 <메디아파르(Mediapart)>의 기자는, 더 나아가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우리의 뇌는 (논리를 벗어난 음모론에) 이토록 취약한가?” 

‘우리’라는 말로 특정 대상을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뇌’는 실제로 음모론이 싹트는 근원지다. 음모론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뇌’에서 일어난다. 실상 사회적이지 않은 사회심리학(그러나 사회적이지 않은 것이 바로 사회심리학의 주된 경향이기도 하다)을 연구하는 사회심리학자는 즉각 인지과학으로 통하는 ‘뇌’를 언급하며 만병의 근원을 설명해주는 마법의 단어 ‘편향’을 꺼내 든다. 

음모론자들의 ‘뇌’가 실수를 저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지적) 편향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딸이 언어 장애를 겪는 이유는?”이라는 질문에 (청각적) 편향 때문이라는 논리도 성립한다. “밀푀유 편향(파이 반죽 사이사이에 크림이 가득 들어있는 밀푀유를 먹다보면, 파이를 먹는지 크림을 먹는지 헷갈린다), 확증 편향, 지향성 편향(범죄로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군가?) 등과 같이, 편향은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것을 뜻한다. 과학적 해석까지 갔으니, 논의가 꽤 진척된 셈이다.

한편, 사회심리학자는 ‘사회심리학’이 ‘사회’를 다루는 학문임을 기억한다. ‘현대사회의 심각한 불평등’도 물론 기억한다. 따라서 음모론은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 사이에 퍼진다는 결론을 내린다. 예상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면 신뢰를 줄 수 있다. 하지만 과학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마크롱 대통령은 ‘노란 조끼’ 운동의 배후에 러시아가 있다고 믿었고, 사회당 상원의원 프랑수아 파트리아는 2011년 도미니크 스트로칸이 연루된 스캔들이 ‘음모론’이 아니라 ‘모략’이라 일축했다.

프랑수아 파트리아가 단호하게 못박기도 했지만, 회자되는 인물들이 ‘저교육층’에 속하지 않으므로 음모론이 될 수 없다. 음모론이 빈곤한 사람들의 인지장애로 생긴다는 학설에 근거해 사회심리학계에서 ‘눈물 젖은 햄이 전두엽 피질에 해롭다’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한다면, 사회심리학은 비로소 사회적이면서 과학적인 분야로 완성될 것이다.

 

권위를 잃어가는 제도권의 발언

그렇다면 전문가들이 언론에 얼굴을 들이밀며 거론하는 그 ‘이해’는 대체 어디로 갔나? ‘이해’, 혹은 ‘몰이해’가 무엇인지 이해하고픈 강렬한 욕구가 솟구친다. 사실, 좋든 나쁘든 ‘제도권에서 나오는 말’의 권위가 추락하는 가운데 사회 내에서 각종 의견이 활발히 오가는 상황은 놀랍지 않다. 그런데 제도권의 말이 갖는 권위는 대체 왜 추락했는가? 이 질문은 제도권에서 가장 회피하고 싶어 하는 말이다. 물론 이해는 할 수 있다. 자기 성찰에는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니 애초부터 난관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문제는 음모론자들의 뇌에서 만들어진다고 결론을 내리면 그만이다.

 

제도권의 말이 지니는 권위는 왜 추락했는가?

제도권에서 가장 회피하고 싶은 질문일 것이다.

 

제도권에서 쏟아내는 말의 권위가 무너진 것은 외부에서 불어온 충격 탓이 아니다. 자신들의 숱한 결점의 무게에 짓눌려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 권력 기관의 거짓말부터 살펴보자. 여러 권력 기관이 거짓말을 쏟아냈다. 비만 치료제 메디아토르(Mediator)를 만든 제약사 세르비에(Servier)사가 거짓말을 했다. 항뇌전증제 데파킨(Dépakine)을 만든 사노피(Sanofi)사도 거짓말을 했다. 브리지스톤(Bridgestone)이 거짓말을 했다. 경쟁력 및 고용에 대한 세액공제(CICE) 200억 유로로 일자리 백만 개를 만든다고 했던 프랑스산업연맹(Medef)의 약속도 거짓이었다. 

거짓말은 그 외에도 더 많다. 루브리졸(Lubrizol)사와 공공당국이 거짓말을 했다. 원자력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원자력 지지 관료들의 발언도 거짓이다. 연구계획법(Loi de programmation de la recherche)도 거짓말로 점철됐다. 고등교육연구혁신부 프레데릭 비달 장관은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했다. 경찰의 무력 사용을 말하자면 난장판이 따로 없다. 검찰, 지방정부, 프랑스 경찰 총국 감사관실(IGPN), 장관, 대통령이 모두 합세해서 거짓말을 하고, 추잡함까지 눈부시게 잘 보여줬다. 코로나 문제는 달리 비할 데가 없을 지경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가장 강력한 이해관계를 만들어냈지만, 이해가 얽히면 진실은 자취를 감춘다. 강력한 공공정책과 해당 정책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서로 상충하면 모순을 조율하는 역할이 필요하다. 이해관계의 모순을 유발하는 원인을 바꾸지 않고 틈새를 좁히려면 말로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여러 가지 말과 구변을 다해 입장을 설파한다. 처음에 ‘교육’을 하고 ‘해독과 해설’을 한다. 그러다 해독이 통하지 않으면 남는 것은 거짓말뿐이다. 

옳지 않지만 일어난 일(예: 복면 쓴 지하 집단도 아닌 프랑스 경찰이 시위진압용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다)과 옳은 일을 하지 않는 이유(예: 환자를 더 많이 돌볼 수 있도록 병상을 줄인다)를 구구절절 설명한다. 저물어가는 신자유주의는 절대적이고 단순한 억압을 빼면 거짓말의 바다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는 그 바다에서 마냥 허우적대는 중이다. 그런 거짓말은 어느덧 일상적인 것이 됐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거짓말에 익숙하지 않다. 제도권의 주장과 실제 삶 사이에는 도무지 메울 수 없는 괴리가 자리하고 있기에 제도권에서 쏟아내는 말의 권위는 언젠가는 무너진다.

그래서 그 권위는 힘을 실어주던 언론과 함께 산사태처럼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엄밀히 따지자면 언론은 너무 적극적으로 너무 오랫동안 제도권에 힘을 실어줬다. 너무 많이 반복했고, 동조했고, 조급히 행동했다. 다큐멘터리가 개봉되던 그 날에도 음모론자들은 언론이 비판 공세를 퍼부을 준비 태세를 갖추는 모양새를 지켜봤다. 그러나 음모론자들은 소위 ‘비판적 사고’라는 측면에서 <테에프1>, <프랑스2>, <베에프엠> 방송 3사가 공동으로 중계한 레아 살라메와 마크롱 대통령 인터뷰 방송을 기억한다. 본질적인 내용은 빠진 채 단순한 미사여구만 늘어놓은 거짓말투성이의 정부 연설이었다. 

경찰이 ‘노란 조끼’ 시위대에게 행사한 폭력을 두 달 동안 철저히 은폐했던 일도 기억한다. 시위대가 살페트리에르 병원에 난입했다고 말한 내무부 장관의 억지 주장을 그대로 보도했듯이, 그동안 언론이 정부의 나팔수를 자처하며 거리낌 없이 가짜 뉴스를 유포하던 일도 기억한다. 억울하다며 항변하는 언론도 있다. “부당한 평가다. 우리 언론은 변화하고 있다. 우리는 현장을 뛰어다니고, 저명한 기자들을 현장에 보내 로터리 시위 상황을 취재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두고 다가가고자 한다.” 

이런 항변이 정녕 사실이라고 해도, 때는 늦어도 너무 늦었다. 언론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제도권의 편에서 선택적으로 진실을 은폐했다(잘못된 선택이 아니라 맹목적인 순종이었다). 그렇게 해서 언론이 얻은 교훈은 변화에 적응해야 하고, 더 경쟁적이어야 하고, 희생을 받아들여야 하며, 유럽이 우리의 미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반문했다. “설마 프랑스가 세계화 대열에서 이탈하기를 원하나요?” 이 체제에서 장장 30년 동안 실업, 불안, 불평등, 자살이 폭증했고, 공공 서비스가 망가졌다. 사람들의 마음도 황폐해졌다.

제도권의 말이 왜 권위를 잃었느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제도권은 사회를 황폐화하는 말들을 쏟아내면서 제각각의 방식에 따라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하거나, 진실을 너무 많이 은폐하거나, 너무 방임하거나, 좌시하거나, 미화했고, 사람들을 진저리나게 했기에 결국에는 그 값을 치르는 셈이다. 음모론이 활개 치는 지금, 제도권은 응분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다. 언론인이나 컨스피러시 워치(Conspiracy Watch)의 전문가가 아니고서야 이런 상황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30년에 걸쳐 조금씩 금이 가던 제도권의 권위라는 탑이 어느 화창한 날에 돌연 와르르 무너진 꼴이다. 하지만 널리 알려진 대로 한 번 무너진 신뢰는 쉽게 회복하기가 어렵다. 이제 모든 게 폐허가 됐고, 당분간은 잔해와 먼지 더미 안에서 견디고 버텨야 한다. 언론 대다수가 잔해 속에서 애써 큰 그림을 외면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언론은 <홀드업>을 견디고(Hold-up), 사람들이 제대로 이해하도록, 생각이 엇나가지 않도록 잘못을 바로잡아야 했다.

 

재교육과 호의 베풀기

그사이 각종 미사여구가 전부 거짓이란 것이 밝혀졌고, 이어서 음모론자들을 마주하게 됐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음모론자들을 광인으로 취급하던 시절은 지났고, 무섭게 밀려드는 조류를 막을만한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자명해졌다. 그렇다면 그 방안이 뭐란 말인가? 안타깝게도 당장은 딱히 방법이 없다. 적어도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으로는 안 된다. 제도권의 발언이 신뢰를 잃었듯이, 장기간에 걸쳐 무너진 탑은 장기간 공을 들여야만 재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예컨대, 교육과 연구 연계망에 대한 신뢰를 되찾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릴 것이다). 반 음모론 집단이 하나의 거대 권력으로 똘똘 뭉친다면 집단 전체에 대한 신뢰는 ‘0’이 될 것이 뻔하다. 

실제로 거대 언론 집단이 지금처럼 산을 이루고, 대다수가 신자유주의 질서에 편입하거나 각종 권력 앞에서 굽실거리는 태도로 일관한다면,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은 다들 두 집단을 똑같은 선전 기관으로 취급하면서 결국에는 ‘다른 곳’을 찾아 나설 것이다. 제도권이 내부에서 ‘다른 곳’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사람들은 결국 외부에서 ‘다른 곳’을 찾을 수밖에 없다. 모든 게 무너지고 단절된 현 상황에서는 시대에 부응하는 노력을 하고 고통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변화할 줄 모르는 제도권은 정신없이 다른 수단을 찾아 헤매기만 할 뿐, 고질적인 사고방식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교육 전략 전문가들을 만나 의견을 구하는 게 좋겠어.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원만하게 접근해 보자고.” 그렇게 해서 음모론자들 앞으로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이 우리의 친구라고 호소한다. 이는 <리베라시옹>이 택한 방식이다. <르몽드>식 대응도 있다. “다큐멘터리의 분위기가 그렇게 침울하지 않았다면, 다들 데굴데굴 구르며 포복절도했을 거야.” 

문제는 바로 여기 있다. 이런 대화도 오고 간다. “<컨스피러시 워치>의 발레리 이구네를 만나봅시다. 지금까지 루디 라이히슈타트를 만났는데, 그는 너무 투박하고 반 음모론의 기수였잖아요. 지금 상황에서는 적절치 않은 인물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시즌은 이렇게 전개된다. “사실을 근거로 논박하고, 해설을 제시해야 해요. 비난이나 조롱은 안 돼요.” 그리고 해법을 내놓는다. 제법 인간적이고 호의적이다. 시작은 좋다. “외줄 타기를 하는 셈이에요.” 전문가도 결국 한숨을 몰아쉰다. 

한편, 트리스탕 망데스프랑스는 “상대가 모두 미치광이들”이라면서 “그런 이들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느냐”며 견뎌내야 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음모론자가 더 많아지지 않도록 힘을 집중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한다. “처음 음모론을 접하는 사람들을 겨냥해 예방조처가 있어야 합니다.” <컨스피러시 워치>의 발레리는 이미 작업에 착수했다. <르몽드>에 의하면 “아동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음모론 감시단’ 워크숍을 열고 있다. 일찌감치 싹을 꺾어놔야 한다.” 반(反) 음모론 진영의 전반적인 문제는, 다른 경우라면 등줄기가 서늘해질 만한 발언을 서슴없이 개진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개인의 비약이 아니라 반 음모론 진영의 일반적인 노선이다. 

<프랑스 퀼튀르(France Culture)>, <르몽드>, <르가르(Regards)> 등 많은 언론에 얼굴을 내밀며 전방위적인 활동을 펴는 토마 위숑의 생각은 이렇다. “언론에서 교육을 통해(…) ‘가짜 뉴스’라는 전염병을 예방하는 접종을 실시해야 한다.” 제롬 살로몽 프랑스 질병관리본부장의 브리핑을 듣는 기분이라면,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음모론을 반대하는 사람들 머리에는 세균, 예방법, 방역선 같은 이미지가 가득하다. 정치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 음모론은 정치 사안이나 담론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의학적인 문제일 뿐이다.

여기에서 언론이 생각하는 교육, 아니 재교육이 무엇인지가 명백히 드러난다. 음모론 분석이 한편으로는 병리학,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학이라는 틀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재정비된 재교육 캠프에서 교육진은 열렬한 공감과 경청의 본보기를 보여줄 것이다. <르몽드>는 “음모론의 확산은 많은 이들에게 도전 과제를 준다. 상대를 배척하거나 조롱하지 않고도 과거 어느 때보다 설명과 검증에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라는 말로 기사를 마무리한다. 문제를 이렇게까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니, 황당한 노릇이다. 결국, 한 치도 변한 게 없으니, 음모론의 앞길은 여전히 창창할 것으로 보인다. 왠지 모르게 <탱탱 콩고에 가다 Tintin au Congo>의 시절로 회귀한 듯한 기분이 든다. 선교사들을 현지에 파견하기 전에 심리학 과목을 이수하도록 조치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산신령 같은 건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이해하도록 인내와 친절을 다하겠습니다. 신은 오직 한 분, 하느님뿐이니까요.”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경제학자, 철학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