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민중시위의 거대한 뿌리, 1960년 2월
6년간의 전쟁 끝에, 알제리 곳곳의 이슬람 민중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돌연 거리를 점령했다. 이 1960년 평화시위는 프랑스 당국뿐 아니라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허를 찔렀다. 이 운동은 탄압 속에서도, 민족주의자들을 정치적 해법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드골 장군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2019년 2월부터 2020년 3월까지(코로나19로 3월 이후 시위가 중단됐다) 알제리에 파란을 일으킨 민중시위는, 중요하지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한 가지 사건과 맥락을 같이 한다. 60년 전, 프랑스 정부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 소속 무장조직 민족해방군(ALN)을 괴멸했다고 주장하자,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던 수천 명의 알제리 국민들이 도심에서 독립을 외치며 일어난,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1960년 12월 11일, 판자촌 거주민 등 빈민들의 행렬이 목숨을 걸고 유럽인 구역으로 몰려들었다. 행렬의 대다수는 노인들과 여성 및 어린아이들이었다. 이런 저항들은 무자비한 진압을 야기했고, 이후 프랑스 정부는 그 사실을 은폐했다. 그러나 이 저항들로 식민 지배 체제가 무너졌고, 알제리는 독립을 쟁취했다. 이는 알제리 해방 투쟁의 중심에서 민중계급의 참여가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음을 시사한다.
이 봉기는 샤를 드골이 그의 ‘제3의 길’ 강령을 추진하기 위해 알제리로 이동하는 중에 발생했다. 이제 막 독립을 쟁취한 사하라 이남 지역 약 15개 국가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정부 수반은 프랑스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수호하는 지배 행정기관을 알제리에 설치하는 데 유리한 전략을 세웠다. ‘알제리령 알제리(Algérie algérienne)’라 명명된 이 계획은, 대개 저항적 성격을 띤 시위들에 의해 무산됐다. 이 시위들은 드골 장군이 이동하는 경로는 물론, 알제리 전역에서 거의 3주에 걸쳐 점점 확산됐다. 드골은 대도시 방문을 피해야 했고, 결국 체류 일정을 축소해야 했으며, FLN과 협상을 맺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프랑스 대통령은 1960년 12월 14일 유엔(UN) 총회에서 ‘식민지 독립 부여 선언’을 검토하고, 이어서 그해 12월 19일 같은 틀 내에서 ‘알제리 문제’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던 바로 그 시기에 알제리를 방문했다. 전 세계 기자들이 봉기를 지켜봤으며, 뉴욕에서는 직접적으로 반향이 일기도 했다. 이제 프랑스 정부는 소수의 ‘테러리스트들’에 맞서 다수의 알제리 국민이 프랑스를 지지한다고 주장할 수 없게 됐다. ‘식민지 독립 부여 선언’ 뿐 아니라 ‘자유 결정권을 알제리 문제 해결의 근거’로 인정하는 결의안도 채택됐다.
민중계급의 자주적 행동
1960년 12월 9일부터 아인테무셴트와 틀렘센에서, 이어서 같은 해 12월 10일에는 오랑과 알제에서 시위대가 조직됐다. 이들은 거리에서 식민지인들을 공격하고 아랍인 구역에서 탄압을 시도하는 유럽인들의 폭력에 맞섰다. 알제리 독립이라는 발상 자체를 거부하는 극우파는 프랑스 알제리 전선(FAF)을 조직해 군사 쿠데타를 준비하고 강압적인 인종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이런 폭력 행위들이 자행되자 차별에 시달리던 지역들은 집단적 자체 방어로 대응했다. 이 최초의 불씨들이 여러 대도시에서 순식간에 거대한 행렬로 변모하자 유럽인들은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고, 행렬은 경찰, 군대, FAF 특공대와 대치하며 출입이 금지된 도심구역으로 향했다. 민중은 아랍 여인들이 내는 특유의 진동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고, ‘이슬람 국가 알제리!’ ‘FLN과 협상하라’ 같은 구호를 외치거나 이런 구호가 쓰인 현수막을 흔들며 경찰이 세운 바리케이드를 넘어 거리를 뒤덮었다. 최초로 수많은 알제리 국기가 거리 곳곳에 나부꼈다.
1960년 12월 11일, 알제 시의 벨쿠르에서 1만 명이 넘는 알제리 국민들이 강경 탄압에도 아랑곳 않고 거리를 점거했다. 그날 오후 드골은 총기 발포를 허가했다. 프랑스군과 경찰은 알제리 수도의 여러 지역에 이어, 알제리 전역의 도시 곳곳에서 발포를 자행했다. 프랑스 정부는 12월 9~16일에 알제에서 11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사망한 이들은 전부 비무장 민간인들이었다. 이 사건을 조사하고 나서 경찰, 프랑스 군대 및 민간인에 의한 사망자 수를 집계해본 결과, 1960년 12월 9일 아인테무셴트의 대치에서 1961년 1월 6일 티아레의 대치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260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위들로 말미암아 굳건한 이미지를 갖고 있던 ‘알제 전투(1957~1958)’와 ‘FLN의 종식’의 신화는 무너졌다. “정부의 전복을 기도하는 전투와 ‘폭도’의 전문가들에게 민중시위는 잃어버린 환상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고 기자 앙리 알레그(1)는 썼다. 그는 『문제』(2)라는 저서에서 프랑스 군대의 고문 자행을 고발한 최초의 인물들에 속한다. 영화인 질로 폰테코르보는 그의 영화 <알제 전투>(1966) 마지막 장면을 1960년 12월의 실제 봉기 영상들로 마무리했다. FLN의 알제 지부가 프랑스군의 자크 마쉬 장군 휘하 낙하산 부대에 의해 괴멸됐다 해도 독립의 구상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임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이 봉기들로 마침내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군사적 압박이 느슨해졌고, 독립 운동가들이 조직을 재건할 기틀이 마련됐다. 이 봉기들은 FLN이 민중계급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재조직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민중이 대거 독립투쟁에 참여했음을 보여주었다. 식민지와 군부 내 극우 세력의 군사 쿠데타 계획도 무산됐다.
봉기에는 처음부터 수많은 여성들과 아이들이 참여했으며, 이들은 시위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혁명 초기부터 여성들은 독립 운동가들을 보살피거나 먹을 것을 제공하기도 했다. 여성들은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고 메사우다 차데르가 말했다. 1960년 12월 당시 어린아이였던 메사우다 차데르는 이 사건의 생존자였다. 아인테무셴트, 오랑, 알제, 안나바와 콩스탕틴에서 남녀 젊은이들이 자체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알제리 국기와 현수막 등을 준비해 비밀리에 경찰서에 갖다 놓거나, 초기 집회들을 조직했다.
이처럼 ‘알제리 국민’이라는 정체성은 그들이 식민 지배 전선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형성됐다. 이들은 유럽인들에 맞섰으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맞섰다. 이들은 거리를 점거해 되찾음으로써 다시 도시의 주인이 됐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의 육신을 해방함으로써 독립이 구체적으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것은 프란츠 파농이 그의 저서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3)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식민 지배에 이제껏 구속당해온 근육과 신경의 봉기였다. 역사학자 말리카 라할이 진행 중인 연구들은 이 과정이 1962년 여름 내내, 공식적인 독립 축제 때까지 계속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경찰이 포위한 지역에서 알제리의 남녀 시민들은 간이 급식소를 설치해 음식을 나누었고, 기자들을 안내하거나 비밀리에 자체 진료소를 마련해 운영했다. 이것이 바로 독립국가 알제리, 민중계급이 자주적으로 운영하며, 민중이라는 집단의 실천을 통해 형태를 갖춘 알제리였다.
우리가 수집한 증거들은, 명백히 자발적으로 일어난 이런 봉기들이 식민 치하 130년간의 민중 저항과, 6년간의 독립 전쟁을 통해 치밀하게 준비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것은 집단의 행동이었지, 한 개인의 행동이 아니었다. 그해 12월 11일은 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 된 민중으로 존재한 날이었다”라고 무스타파 사디는 강조했다. 그는 벨쿠르의 모노프리 상점에 불을 질러 알제 봉기의 시작을 알리는 데 기여한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저항세력이 지역 공동체에서, 놀이와 운동에서, 노래와 문화적 전통에서, 연대와 상부상조, 속임수와 자기방어, 일상적 억압에 대한 반격의 형태로 벌인 일들을 보면, 정치성이 깊숙이 배어 있는 이런 행동들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알 수 있다. 인류학자 제임스 C. 스콧은 ‘감히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저항의 매우 은밀하고 다양한 형태들’을 연구했다. 그에 의하면 “어떤 피지배 집단이든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권력 비판을 표현하는 텍스트를 지배자들의 눈을 피해 생산했다.”(4) 1960년 12월 봉기의 흔적들은 이 기나긴 역사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위 기록을 은폐한 프랑스 정부
연구사례가 거의 없는 이 봉기는, 지중해 양안 국가들에서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2020년까지 이를 주제로 한 논문은 발표된 적이 없으며, 2010년 봉기 50주년을 맞아 알제리에서 발행되는 잡지 <나끄드(Naqd)>(5)의 특집 1호를 제외하면,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룬 사회·역사적 조사도 전무한 실정이다.(6) 프랑스 측의 공식 역사에서 이 시위들은 너무도 쉽게 사라졌다. 시위들과, 그 시위를 진압한 기록이 함께 은폐된 것이다.
이 시위를 기리는 공식적인 기념일이 알제리 독립전쟁이 발발한 1954년 11월 1일처럼 공휴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FLN 정부가 수립되고 이 시위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이 구체화됐다. FLN 정부는 ‘알제의 12월 11일’을 기념일로 정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고, FLN의 호소에 한 목소리로 응답한 ‘알제리 민중’을 부각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침내 2010년, 최초의 저항들이 시작된 알제의 벨루이즈다드(벨쿠르의 새 이름)에 ‘12월 11일 박물관’이 건립됐다. 이곳에서는 매년 공식 기념일 행사가 열린다. 저항의 증인들이 정부 대표들과 나란히 서서 연설을 하고, 노인들은 지역 축구클럽 ‘차바브 리아디 드 벨루이즈다드(CRB)’ 카페에서 옛 추억을 나눈다.
알제리 전역의 고등학교와 동네들에는 이제 이 시위를 기리는 이름들이 붙어 있다. 고등학교 역사수업에서는 이 시위들을 짧게 훑고 지나간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본 독립 이후의 세대들은 이런 저항에 대해 잘 모른다고 말하고, 이것을 ‘혁명’이라 표현하는 정부의 태도를 대체로 경계하는 분위기다. 역사학자 다호 제르발에 의하면 “정권이 출판물을 지원해 1960년 12월 시위의 혁명적 성격을 약화시키려 하는 것처럼, 그런 일들이 교과서에서도 일어나고 있다.”(7)
알제리 전쟁의 기억 속에는 다양한 시나리오가 있었다. 일례로 식민지 극우파는 FLN이 이 시위들을 사주한 것이라고 하면서, 드골이 시위를 조작해 이용한 게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7년에 걸쳐 군사 및 행정 기록보관소와 언론 기록보관소, 다양한 층위의 독립운동 증인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했다. 심리전을 활용한 조직들이 여러 도시에서 ‘형제애를 강조하는 모임’을 결성했고, 알제의 한 시위를 조작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 한 번의 시위도 일으키지 못했고, 시위를 심리전의 도구로 이용하는 데 실패했다. 반대로 봉기를 중단시키기 위해 식민지 정권은 맞불 시위와 폭력을 동원했다.
일부 무자히딘(이슬람 전사들) 역시 FLN이 시위를 준비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FLN 지도부는 시위를 예상하지 못했고, ‘알제 조직’이 실제 재건되고 있기는 했지만, FLN은 시위를 조직하지도 촉발하지도 않았다고 증언했다. FLN의 행동대원들이 남아있던 알제 등 몇몇 도시에서, 이들은 알제리 임시정부(GPRA)를 지지하는 구호를 내세우며 몇몇 시위대를 지휘하려 했을 뿐이다.
튀니스에 본부를 둔 알제리 임시정부는 사태의 추이를 보고 당혹했으며, 당시 식민 당국이 공작을 시도한 것에 비난을 표명했다. 1960년 12월 16일, 임시정부 수반 페르하트 아바스는 민중에게 거리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면서, 독립투쟁은 FLN에 맡겨달라고 설득했다. 그의 설득은 민중에게 먹혀들지 않았고, 시위는 여러 도시에서 계속 이어졌다. 바트나, 베샤르, 티아레에서 등지에서는 여러 날 동안 연이어 시위가 벌어졌다.
이처럼 ‘알제 전투’가 벌어진 지 3년 만에 식민지 민중계급은 혁명이라는 과업을 계승하는 데 성공했다. 민중계급은 옛 식민지들을 제국주의 방식으로 통치하려는 프랑스의 계획을 무너뜨림으로써 독립을 쟁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민중계급은 자발적으로 저항세력을 조직했기 때문에, 12월 11일의 시위는 독립 초기의 ‘자주(Autogestion)’ 시기 내내 알제리 사회를 형성하려는 시도로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알제리 정부는 이런 경험의 맥을 끊어놓고 만다. 이 경험은 2019년 히라크(Hirak, 알제리 및 모로코 북부 리프 산악지대, 레바논 등지의 민중저항운동)가 등장한 이후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글·마티외 리구스트 Mathieu Rigouste
연구원, 저서로 『단 하나의 영웅, 국민. 1960년 12월 알제리 봉기로 실패한 맞불시위 Un seul héros, le peuple. La contre-insurrection mise en échec par lessoulèvements algériens de décembre 1960』(Premiers Matins de novembre Éditions, 2020)가 있다.
번역·조민영
번역위원
(1) Henri Alleg(sous la dir. de), 『La Guerre d’Algérie, tome 3. Des complots du 13 mai à l’indépendance. Un État vient au monde 알제리 전투, 제3권. 5월 13일의 음모부터 독립까지. 하나의 국가가 탄생하다』, Temps actuel, Paris, 1981.
(2) Henri Alleg, 『La Question 문제』, Éditions de Minuit, Paris, 1958.
(3) 프란츠 파농은 1960년 12월 알제리 봉기에 이어 그의 마지막 책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4) James C. Scott, 『La Domination et les arts de la résistance. Fragments du discours subalterne 식민 지배와 저항의 기술. 일반인들의 담화집』, Éditions Amsterdam, Paris, 2009.
(5) ‘11 décembre 1960. Le Diên Biên Phù politique de la guerre d’Algérie 1960년 12월 11일. 알제리 전투의 정치적 디엔비엔푸’, <Naqd>, Alger, 2010.
(6) 저자는 저서 외에 블로그에서도 이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https://unseulheroslepeuple.org
(7) Mélanie Matarese, ‘Daho Djerbal, historien : Il reste peu de choses du 11 décembre 1960 역사학자 다호 제르발, 1960년 12월 11일의 유산은 거의 없다’, Visapour l’Algérie, 2010년 12월 12일, https://blog.lefigaro.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