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사람·종교·난민, 그리스-터키간 갈등의 근원
점점 심해지는 터키의 팽창주의 정책에 유럽의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특히 그리스는 과거 전쟁의 악몽에 다시 시달리고 있다. 동서양을 가르는 경계선이자 동시에 두 세계를 잇는 교두보 역할을 해온 그리스-터키 국경은 코로나 펜데믹 사태 이후 활기를 잃었다. 하지만 양국은 카스텔로리조, 트라키아, 레스보스 등 유동적이면서도 느슨한 국경선 주변으로 많은 것들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스 동단의 작은 섬, 카스텔로리조는 터키의 턱 밑에 자리하고 있다. 깊은 만을 따라 조성된 이 섬의 유일한 마을에 발을 디디는 순간, 시간이 더뎌진 듯하다. 지난 9월 말, 속이 훤히 보이는 바다에서 첨벙거리며 거북이를 잡는 아이들 곁에, 나이든 어부들이 카드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파푸트시스는 커피 한 잔을 들고, 드넓은 터키 해안과 수평선 너머 유일한 마을 카쉬를 여유로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 섬은 한적한 관광지에요. 여름이면 관광객들에게 이 사실을 주지시키죠.” 여행사를 운영하는 이 상냥한 남자는 확신에 차 말했다. 그와 한 테이블에 앉은, 인구 500명 규모의 마을의원들도 온화한 말투로 덧붙였다. “카스텔로리조는 위험한 섬이 결코 아니에요!”
웅장한 페리선이 작은 지중해 항구를 꽉 채우며, 돌연 섬 풍경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24시간 전 아테네를 출항한 배가 가까스로 항구에 정박해 승객들을 내려놓는다. 승객 중에는 전투복 차림에 챙이 넓은 군모(부시 해트)를 쓴 50여 명의 남자들이 보인다. 그리스 군인들은 빠른 걸음으로 만을 가로질러 바다 전망의, 한적한 절벽 위로 올라간다. “매월 정례행사처럼 반복되는 교대 행렬이죠.” 파푸트시스가 말했다.
해묵은 적대관계의 도구들
1947년 2월 파리조약(제14조)이 체결되고 이탈리아가 도데카니사 제도를 그리스에 할양한 이후, 카스텔로리조를 비롯한 도데카니사 제도에 속한 섬들은 공식적으로 비무장 지대에 속하게 됐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1974년 터키가 키프로스 북부를 점령한 후, 이곳에 그리스군이 주둔하며 터키해안을 감시 중이라는 것이, 여러 역사가들의 설명이다.(1) 특히 1996년 이미아섬을 둘러싼 그리스와 터키 간 영유권 분쟁이 고조된 이후, 이 지역에 대한 방어가 더욱 강화됐다. 카스텔로리조 시는 고지대에 배치된 인원의 숫자를 정확히을 밝히지 않는다. 섬주민도 관광객(코로나19 사태 이후 관광객의 발길이 뜸해졌지만)이 놀랄까봐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이 작은 천국에 암운이 드리워져 있음을 알고 있다.
요즘 카스텔로리조 섬은 최전선에 속한다. 자국 지도를 수정하고, 영유권을 재설정하기를 바라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도데카니사 제도는 그리스와 터키 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사이에 잠재적인 분쟁의 대상이 돼 왔다. 터키는 자국 해안을 따라 들어선 크고 작은 섬들과 암초에 대한 그리스의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특히 터키는 미국과 더불어 UN해양법협약(1994년 발효된, 일명 ‘몬테고 베이 협약’)을 체결하지 않은 소수의 국가 중 하나로, 그리스 도서에 대한 대륙붕 설정을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리스 정부는 자위적 조치(2)라는 명분 하에, 그리스 도서에 대한 군 주둔을 합리화하고 있다. 특히 터키의 키프로스 점령과 자국 인근에 대규모 터키 병력 주둔을 이유로 내세운다. 가령 터키는 소아시아 서부해안 이즈미르에 에게해를 관할하는 해군과 공군을 배치한 바 있다.
카스텔로리조 섬은 터키의 턱 밑에 자리하고 있다. 반면, 가장 가까운 그리스의 섬(로도스)과는 120km, 그리스의 대륙과는 무려 520km 이상 떨어져 있다. 대부분의 에게해의 섬들은 애당초 그리스의 배타적경제수역(EEZ)(3)에 포함된다(아래 지도 참조). 하지만 그리스는 자국에서 멀리 떨어진, 9㎢ 규모의 이 작은 외딴 섬 덕분에 동지중해에서도 역시 수백 킬로미터에 이르는 영유권 확대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하지만 터키 정부는 공식합의를 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이 해역을 자유롭게 항행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고 있다.
특히 10여 년 전 개발 가능성이 높은 유전이 이 지역에서 발견된 이후로 터키의 요구는 더욱 거세지고 있다. 최근 몇 달 간 터키는 수차례에 걸쳐 지질 조사선 ‘오루츠 레이스’를 문제의 해역에 투입했다. 참고로 오루츠 레이스(‘붉은수염’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하다)는 레스보스 섬에서 태어나 알제의 술탄이 된 15세기 오스만 제국의 해적 이름에서 따왔다.
사실상 오루츠 레이스 투입작전은 터키의 해상전술 이념인 ‘푸른조국’(오스만 제국 시대처럼 지중해 전역을 장악해, 역내 모든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민족주의적 구상-역주)과도 맥을 함께한다. 터키의 전 해군제독 젬 구르드니즈가 민족주의·이슬람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아 구상한 이 해양독트린은 흑해·에게해·지중해 해역에서 터키의 영유권 분쟁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최근 몇 달 동안 에르도안은 호전적 언사를 쏟아내고 있다. 지난 8월 26일은 1071년 터키 동부에서 일어난 만지케르트 전투 기념일이었다. 셀주크투르크가 비잔틴군을 궤멸시킨 이 전쟁기념일에, 에르도안은 “모든 실수는 곧 파멸로 치닫는다”라며 그리스에 엄포를 놨다. 그러자 수주가 흐른 10월 21일, 이번에는 보수당 출신 그리스 총리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가 키프로스와 이집트의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터키의 “공격 행위를 동반한 제국주의 환상”을 거세게 비난했다.
지난 8월 터키의 압박에 시달리던 그리스 정부는 키프로스공화국,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지원을 받아 이들 국가와 공동해상훈련을 벌였다. 이집트도 EEZ 획정에 합의하는 등 그리스에 힘을 보탰다. 이미 시리아, 리비아, 캅카스에서 터키와 분쟁 중인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단호하게 그리스의 편에 섰다. 그러자 집권당인 신민주당을 지지하는 카스텔로리조 시의 스트라토스 아미그달로스 부시장은 “우리 섬에 꼭 모시고 싶은 귀한 동맹”이라며 마크롱을 추켜세웠다. 2020년 9월 중순, 그리스는 프랑스의 다소 항공이 개발한 라팔 전투기 18대를 구매하겠다는 의사를 전격 발표했다.
“에르도안은 자신을 술레이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고, 리라화 붕괴에 직면했다. 그런 주제에 정복, 민족의 꿈 따위를 들먹이며 명예 회복을 시도하고 있다.” 카스텔로리조 섬에서 관광안내원으로 일하는 콘스탄티노스 라프티스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현재 터키 사회는 종종 에르도안 대통령을 장장 4세기(1430년 오스만제국이 테살로니키를 함락한 때부터 1830년 그리스가 독립한 때까지)에 걸쳐 터키가 속했던 과거 오스만제국의 ‘숭고한 문’을 지키던 술탄과 비교하곤 한다. 사실상 현대 그리스는 과거 오스만제국에 대한 저항을 바탕으로 정체성을 확립해온 나라인 만큼, 자국보다 4배나 부유하고, 6배나 거대하며, 8배나 인구가 많은 이웃나라 터키에 대한 시선이 지금도 좋지 않다. 터키를 향한 불신은 정파를 가리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 정당이 민족주의를 자양분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리스 정부는 오늘날 터키의 해양독트린 ‘푸른 조국’을 과거 제국주의의 맥을 잇는 신 오스만 팽창주의 정책으로 간주한다.
카스텔로리조 항만 어귀에는 현재 박물관으로 개조된 옛 이슬람사원(오스만제국이 남긴 얼마 되지 않는 유물)이 칵테일바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 건물이 홀로 그리스정교 예배당 26개를 마주본 자리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그리스는 그리스정교를 헌법에 ‘지배종교’로 명시하는 한편, 2000년까지는 신분증에도 종교를 기재하도록 했다. 사회당 정권의 요구로 종교 표기가 폐지되자, 막강한 힘을 지닌 그리스정교회가 불같이 분노하기도 했다. 사실상 그리스에서는 국민의 95% 이상이 그리스정교회 신자를 자처한다. “우리는 오스만제국의 속박 속에서도 꿋꿋이 그리스인으로 남았다. 우리 선조는 그리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카스텔로리조 섬을 수호했다. 우리도 우리 정체성을 지키려 싸울 것이다.” 별안간 라프티스가 잔뜩 흥분해서 말했다.
이 70세 노인은 자신이 사는 이 섬이 다른 지역보다 더 오래 저항해야 했던 역사를 환기시켰다. 오스만제국이 떠난 뒤에도, 카스텔로리조는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이유로 수없이 외세의 먹잇감이 됐고, 줄곧 프랑스(1915~1921), 이탈리아(1921~1944), 영국(1944~1945)에 점령 또는 병합 당했다는 것이다. 이 작은 섬은 1948년에서야 다른 도데카니사 제도에 속한 섬들과 함께 온전한 그리스 영토가 됐다. 이후 이 섬에는 그리스 국기가 자랑스럽게 내걸렸다. 카스텔로리조 만에는 터키의 도시, 카쉬(인구 8,000명)를 마주보는 발코니들마다 흰색과 푸른색의 그리스 깃발들이 무수히 나부낀다. 양국의 긴장이 고조된 후로는 더 많은 국기가 넘실대고 있다.
그리스 군인들은 큼지막한 국기 3개를 절벽 위에 그려 넣기도 했다. 라프티스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모두의 분통을 터뜨린” 한 일화를 소개했다. 2020년 9월 말, 정체불명의 드론이 이곳에 날아들어 터키 군가를 요란하게 울리며, 선명한 붉은빛의 깃발들을 쏟아냈다는 것이다. 터키의 국기를 떠올리게 하는 깃발이었다. 카스텔로리조 섬에서 태어난 라프티는 “그런 식의 공격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처벌 받아 마땅하다”고 분개했다. 그는 잠시 주변을 산책 중인 외지인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터키의 첩자가 섞여 있을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양국의 긴장관계는 40년을 넘었다. 결국 만사는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게 돼 있다. 양국 정부가 대화로 해결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카쉬가 훤히 내다보이는 한적한 암벽 위 선술집을 운영하는 시코스 마지아피스가 말했다. 이 휴양도시 출신의 터키인 여성과 결혼한 이 30대 남성은 “싸움은 외교관의 일이다. 주민들은 모두 형제다. 우리는 함께 자랐다”라고 말했다. 그는 청년 시절 카스텔로리조의 선술집 대신, 카쉬에 자주 발걸음을 하며 고향에서는 찾기 힘든 치과나 병원, 시장을 애용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로 국경이 폐쇄되기 전까지, 터키인들 역시 카스텔로리조 섬의 최대 관광객이었다.
난민이 ‘외교 무기’로 이용되는 레스보스
레스보스 섬 연안 북서쪽 450km 지점. 그리스인들이 지켜보는 배는 터키의 석유탐사선이 아니다. 레스보스 섬에서 불과 10km 남짓한 터키 연안에서 출발한 허술한 난민용 고무보트다. 인구 8만 5,000명 규모의 산악지형의 섬, 레스보스. 난민을 볼모로 삼은 양국의 또 다른 분쟁지역이다. 10여 년 전부터 레스보스는 난민 수십만 명이 유입되는 유럽연합의 주요 관문의 역할을 했다. 터키가 받아주는 400만 명을 제외한 아프가니스탄인, 시리아인, 이라크인, 콩고인들이 대대적으로 터키를 거쳐 이곳으로 유입된다.
비교적 관광객이 뜸한 황량한 해변이 펼쳐진 맞은편 터키 해안은 은밀히 난민들을 터키 밖으로 데려가려는 밀입국 안내인들이 애용하는 장소다. 하지만 일단 레스보스에 당도한 난민들은 그리스에서 난민신청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합법적인 방법으로 다른 솅겐지역 국가에 입국할 날만 기다리며, 발이 묶이는 신세가 된다. 그런데 지난 9월 8일, 레스보스섬의 모리아 난민캠프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화재가 발생해 난민들의 거처가 전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당시 캠프에 머물던 1만 3,000명 가운데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북 에게해 제도를 관할하는 콘스탄티노스 무트조리스 주지사는 난민의 유입이 터키의 전략적 계산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난민 유치를 완강히 반대하는 이 보수당 출신의 지역 인사는 “에르도안이 난민을 외교 무기로 이용하고 있다”라며 비난했다. “에르도안은 협상을 원할 때마다 우리에게 난민을 보낸다. 그는 기존 터키 지도자들과 달리 매우 공격적이다.” 그는 더 이상 난민이 들어오지 않기만 희망하고 있다. 그는 2020년 3월 양국의 긴장국면을 예로 들었다. 당시 시리아 북부 쿠르드족 공격으로 유럽연합의 비판에 직면한 터키 대통령은 2016년 3월 유럽연합과 체결한 난민 관리에 관한 협정을 깨고 유럽으로 가려는 난민들에게 자국 국경을 활짝 열어줬다. 그러자 그리스로 넘어가는 북동부 국경 지대에 수천 명의 난민이 쇄도했다. 결국 그리스 정부는 이 지역에 지원군을 급파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레스보스 섬에서는 며칠 만에 난민을 실은 배가 수십 척씩 당도하자, 현지 극우주의자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터키 정부와 일절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고 무트조리스가 힘주어 말했다.
그리스는 강경한 태도로 돌아섰다. 자국이 체결한 국제협약에도 불구하고 난민유입을 저지하기 위해 터키와의 국경 일부를 막아버렸다. 그리스 정부는 10월 중순 육상 접경지대에 27km 규모의 장벽을 설치할 계획을 발표했다. 이미 2020년 초 레스보스 섬 해안에도 2.7km 길이의 수상장벽을 설치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 인권보호 비정부기구들은 장벽설치가 불법이라며 맹렬히 비판했다. 레스보스섬에서 약사로 일하는 전 시리자 소속 하원의원, 게오르기오스 팔리스는 이를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계획이라고 일갈했다. 이후 여러 현지 소식통들은 장벽설치 계획이 중단됐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리스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스와 터키 간 대화 단절의 대가는 고스란히 난민들이 치르고 있다.” 시끌벅적한 레스보스섬 남부 미틸레네 항구에서 그리스술 ‘우조’를 곁들인 ‘메제’(레반트, 메소포타미아,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중앙아시아, 캅카스 등의 지역에서 식전주와 함께 즐기는 전채 요리-역주)를 즐기던 팔리스가 별안간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 9월 그리스의 해양부장관은 기자회견에서 2020년 1만여 명의 난민 입국을 ‘저지’했다며 자랑스럽게 떠벌였다. 한 달 후, 이번에는 이민부 장관이 난민을 강압적으로 돌려보낸 사실을 부인했다. 레스보스 섬 주민들은 입국을 거절당한 난민들의 모습에서 뼈아픈 과거를 떠올렸다. “과거 소아시아에서 추방됐던 그리스 난민의 모습이다”(로잔조약에 따라 인종청소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양국의 인구 맞교환을 추진하면서 일부 그리스인이 강제로 터키에서 추방됐다-역주)라고 팔리스가 말했다. 그리스에서는 ‘대참사’라고 불리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그리스와 터키의 현 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오스만제국의 멸망, 제1차 세계대전, 이어 그리스-터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소아시아에 살던 많은 그리스인들은 박해와 학살에 시달렸다. 여러 역사가들에 의하면, 민족말살을 목적으로 한 학살이 자행됐다.(4) 1923년 양국은 로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근대 터키의 국경을 거의 확정하는가 하면, 1920년 세브르조약(제1차 세계대전 후 1920년 8월 10일, 프랑스의 세브르에서 연합국과 패전국 오스만투르크 제국 사이에 조인된, 터키에 불리한 강화조약-역주)에서 명시한 그리스의 이즈미르(스미르나라고도 불림) 관할에도 종지부를 찍었다.(5) 당시 로잔조약은 ‘민족의 균일성’을 이유로, 종교를 잣대로 한 강제적인 인구 맞교환을 추진했다. 그리스에 살던 무슬림 50만 명(1920년 통계자료에 의하면, 레스보스 거주자의 6.5%를 차지)(6)이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그런가 하면 터키에 살던 그리스정교회 신도 120만 명도 고향을 등지고 그리스로 추방됐다. 총 3만 명 이상이 레스보스 섬에 유입됐다. 그리스인들은 추방자들을 ‘터키인의 씨’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그들은 그리스정교회 신도였고 그리스어를 할 줄 알았음에도, 섬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했다. 이즈미르의 대도시에서 추방당한 여성들은 ‘매춘부’라고 불렸다. 무려 두 세대가 지난 후에야 평화로운 관계가 정립됐다.” 소아시아 난민의 후손인 팔리스의 이야기다. “할머니는 8세에 이곳으로 이주했다. 섬주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터키인들을 경멸해야 했다. ‘저쪽’과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었다. 80세 전까지 두 번 다시 터키 땅을 밟아볼 수 없었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베스파 오토바이를 몰던 팔리스가 미틸레네 간선도로의 폐허들 앞에 잠시 멈췄다. 버려진 옛 이슬람 사원들이었다. 그 중 외벽이 완전히 무너진 한 건물에는, 굶주린 어린 고양이들만 드나들고 있었다. 또 다른 사원은 꽃가게로 개조됐다. “정부는 오스만제국의 유산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는 이 건물들을 재건하고, 관광 활성화를 위해 투자해야 한다. 이런 투자야말로 라팔 전투기 도입보다 훨씬 지역 안정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전직 하원의원이 애석한 말투로 지적했다.
서트라키아, 소수집단을 둘러싼 줄다리기
그리스 북동부의 터키·불가리아 접경지대에는 오스만제국의 과거가 여전히 살아있다. 서트라키아 지역에는, 여전히 문을 연 이슬람사원들이 목화밭, 담배밭, 해바라기밭 한 가운데 조성된 마을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불가리아에서 높은 산봉우리를 이루는 로도피산맥 언저리에 그리스의 이슬람 소수집단이 모여 산다. 정부는 이들 인구를 10만에서 15만까지 추산한다. 주로 롬족과 포막족(오스만제국 치하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불가리아어를 사용하는 슬라브계 민족), 그리고 다수의 터키계 후손들로 구성돼 있다.
“우리는 그리스의 시민이자 터키인이다. 우리는 근대 터키가 들어서기 전부터 터키인이었다.” 생물학자이자 전 시리자 소속 하원의원인 무스타파 무스타파가 설명했다. 이 몇 마디는 오스만제국의 역사가 빚은 이 지역의 복잡다단한 정체성을 그대로 함축했다. 이 지역 역시 현재 그리스와 터키가 벌이는 치열한 알력 다툼의 현장이 되고 있다.
오스만제국 치하에서 살아남은 이슬람 소수집단은 20세기 자신들의 주변에 근대 그리스의 국경이 그려지는 것을 고스란히 목격한 산증인들이었다. 그들은 로잔조약에 따른 강제적인 인구 맞교환의 운명을 무사히 피해갔다. 이스탄불에 총대주교청을 그대로 두고, 터키에 그리스정교회 디아스포라를 용인하기로 한 덕분이었다. 이슬람 소수집단은 자유로운 종교생활과 초등학교에서 터키어를 사용할 권리를 누렸다. 이 지역에는 소수집단을 위한 이중언어 학교가 100개 이상 있다.
“이곳에서는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두 종파 간 결혼은 허용되지 않는다.” 코모티니(터키어로는 귀뮐지네)시에 소재한 자신의 연구소에서 무스타파가 설명을 이어갔다. 구불구불한 개울을 콘크리트로 덮은 자리 위에 조성된 이 기독교·이슬람 마을에는 약 5만 5,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무스타파는 서트라키아를 단 한 번도 떠나본 적이 없다. 그는 “우리 소수집단은 결코 ‘세계인’이 아니다. 이 지역을 터전으로 삼은 마을 주민이다. 이곳에서 평화롭게 살려는 우리의 바람은 정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지역에 사는 다른 많은 이슬람인들처럼, 무스타파도 터키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코모티니에서 100km 남짓한 곳에 위치한 터키는 이 이슬람인들에게는 ‘든든한 후원국’이다. 하지만 그리스는 종종 ‘어머니의 나라’라고 불리는 터키의 영향력을 그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의 민족주의 세력은 자국의 이슬람 소수집단이 이웃국인 터키와 너무 가까이 지내다가 혹 독립을 요구하고 나서는 것은 아닌지 우려한다. 사실 이 소수집단의 지위는 현재 양국 불화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터키가 ‘터키계 소수집단’의 존재를 인정해줄 것을 그리스에 꾸준히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그리스는 종교에 따른 민족 구분을 단호히 거부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외교위기의 여파를 겪고 있다. 우리는 체스판 위의 말과 같다.” 무스타파가 잔뜩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 70세 노인은 1955년 이스탄불의 그리스인들이 박해의 표적이 돼 15명 가량의 사람들이 희생됐던 시절을 회고했다. 이어 1974년 터키가 키프로스 북부를 점령한 뒤에 또 다시 박해가 이어졌던 기억을 떠올렸다. 무스타파는 “우리 소수집단은 당시 그리스 정부로부터 모든 권리를 유린당했다. 운전면허증도 발급받을 수 없게 됐고, 토지를 매매할 권리도 잃었다”고 말했다.
한편 국경 저편의 사정도 비슷했다. 터키의 그리스인 공동체는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하나 둘 터키를 떠나갔다. 오늘날 이스탄불에 사는 그리스인은 기껏해야 수천 명에 불과하다. 양국의 갈등 관계는 오늘날까지도 서트라키아의 변화에 꾸준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90년대 상황은 나아졌다. 하지만 과거 그리스로부터 박해 받던 일부 이슬람 소수집단은 터키와 더욱 가까워졌다. 이는 그리스 민족이 이슬람 소수집단에 대해 불신의 이미지를 갖는 계기가 됐다. 많은 기독교 신도들은 이들을 이웃국의 첩자로 여긴다.” 코모티니 소재 트라키아민주대학의 객원교수이자 소수집단 연구자인 게오르기오스 마브로마티스가 말했다.
양국에 경쟁적인 민족주의 담론이 판을 치면서 코모티니 시는 어느새 불신의 기운으로 가득 찼다. “그리스의 극우세력은 우리를 오스만제국의 졸개로 여기고, 에르도안은 우리를 ‘부모’라고 부른다.” 카페에 앉아 있던 페르빈 하이룰라가 말했다. 서트라키아 문화교육재단의 원장인 그녀는 2017년 말 터키 대통령이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를 회상했다. 에르도안은 당시 이 터키계 공동체를 향한 그리스 정부의 ‘차별’을 거세게 비판했다.
“그리스 정부는 무능하다. 이 지역에서는 존재감이 더 큰 터키가 더 많은 영향력을 누리고 있다. 터키 정부는 이 지역에 수천 명의 첩자를 거느리고 있고, 매년 코모티니 주재 터키 영사관에 수백만 유로씩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기독교도가 속삭였다. 영사관과 친분이 있는 하이룰라는 “이곳의 터키 영사관도 사실상 에드리네(국경선에서 약 200km 거리에 위치한 터키 도시) 주재 그리스 영사관과 마찬가지로 외교적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터키 영사관은 코모티니의 다른 폐허가 된 건물들과는 자못 분위기가 달랐다. 삼엄한 감시카메라가 돌아가는 가운데, 높은 초록색 담장이 쳐진 영사관 건물을 검은색 복장을 한 경호원들이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그리스는 우리에게 호의적이다. 우리 공동체의 발전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며, 종교의 자유도 보장해주고 있다.” 사무실에서 취재진을 맞이한 셀림 이사가 말했다. 이슬람자산관리위원회 회장(그리스 정부가 지명)인 그는 코모티니에 소재한 20개 이슬람사원 중 한 사원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취재진에게 내밀었다. 아름다운 샹들리에가 있는, 최근 개축한 사원의 밝은 실내를 보여주며 그는 흡족해 했다. “하지만 그리스와 관계가 악화되면, 터키 영사관은 영향력을 강화한다. 그리고 터키계 소수집단을 인정할 것을 그리스 정부에 더욱 강하게 요구한다.”
기도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에, 이사는 눈을 크게 뜬 채 말을 이었다.
지난 12월 7일, 터키의 에르도안은 아크데니즈 대학과 세계대학위원회의 주최로 안탈리아에서 열린 동지중해 관련 세미나에 동영상 메시지를 보내왔다. 동영상 메시지에서, 동지중해에서 자국 지도를 새로 그리기를 열망하는 에르도안은 “우리의 권리를 유린하려는 해적 정신”에 대해 맹렬히 비난했다. 또한 “유럽연합의 연대라는 미명 하에, 터키와 터키계 키프로스인을 상대로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유럽연합에 촉구했다.
글‧엘리사 페리게 Elisa Perrigueu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아테네 특파원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번역위원
(1) Gilles Bertrand, 『Le Conflit helléno-turc 그리스-터키 분쟁』, Maisonneuve & Larose - 프랑스아나톨리아연구소, 파리-이스탄불, 2004년. Georges Prévélakis, 『Géopolitique de la Grèce 그리스 지정학』, Editions Complexe, Bruxelles, 2005년.
(2) 국제연합(UN) 헌장, 제7장, 제51조 : “이 헌장의 어떤 규정도 국제연합회원국에 대해 무력공격이 발생한 경우, 안전보장이사회가 국제평화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때까지 개별적 또는 집단적 자위의 고유한 권리를 침해하지 아니한다.”
(3) 한 나라의 주권이 행사되는 해양지대
(4) Colin Martin Tatz, 『With Intent to Destroy : Reflecting on Genocide』, Verso, London-New York, 2003년. Kostas Faltaits, 『The Genocide of the Greeks in Turkey : Survivor Testimonies from the Nicomedia(Izmit) Massacres of 1920~ 1921』, Cosmos Publishing - Attica Editions, Athènes, 2016년. Olivier Delorme, ‘Aux origines de la Grande Catastrophe 대참사의 기원’, 『Desmos/Le Lien』, 제21호, Athènes, 2005년.
(5) 1920년 8월 10일. 세브르 조약 제65~83조. “그리스 정부는 스미르나 시와 제66조에 명시된 영토의 행정을 책임”(제70조)지지만, 이 영토들을 여전히 “오스만의 주권 하에”(제69조) 두기로 한다.
(6) Emile Kolodny, Régis Darques, ‘Turcs, Grecs et réfugiés dans l'île de Lesbos au XXe siècle 20세기 레스보스 섬의 터키인, 그리스인, 그리고 난민들’, 『Méditerrannée 지중해』, 제103호, Paris, 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