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아드 총서를 강탈한 갈리마르

2021-01-29     티에리 디세폴로 l 아곤 출판사 창립자, 작가

프랑스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가 누리고 있는 걸출한 명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명성의 근간이 ‘플레이아드 총서(Bibliothèque de la Pléiade)’임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일 것이다. 1930년대 초, 작가 앙드레 지드는 갈리마르 출판사가 자크 시프랭이 창간한 플레이아드 총서를 인수하도록 “2년 가까이 설득해야 했다.” 당시에는 아무도 플레이아드 총서에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0년 후, 원작자 시프랭은 플레이아드 총서를 무력하게 ‘강탈’당했다.(1)

시프랭은 1892년 카스피해 항구도시 바쿠(현재 아제르바이잔 수도, 당시에는 러시아 제국 영토-역주)에서 석유사업으로 부를 축적한 항만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련 당국이 가업을 국유화하자 이탈리아 피렌체로 이주한 그는, 역사학자 버나드 베런슨 밑에서 일하며 미술서적 출판을 익혔다. 1920년대에 파리로 옮긴 시프랭은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 시대에 활동한 시인집단의 이름을 따 ‘플레이아드 출판사’를 세웠다. 목표는 간단했다.

세계문학 명작을 “손에 들고 읽기 편하면서도, 세련된 판형”으로 보급하는 것이었다. “엄청난 분량의 글을 한 권씩 모아 부드러운 가죽 표지로 제본”했으며 속지는 인디언지(Indian紙, 성서나 사전 인쇄에 사용하는 얇고 질긴 종이. 동양의 종이를 개량한 것이기에, 이렇게 명명됐다-역주)를 사용했다. 즉 대중적이면서도 수준 높으며, 실용적이고 비용 부담도 적은 문학전집을 출판하는 것이 목표였다.

1933년 9월부터 시프랭은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플레이아드 총서’를 지휘했다. 초창기에 출판된 샤를 보들레르, 장 라신, 볼테르, 스탕달, 에드거 포우,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 장 자크 루소 등의 작품에, 몽테뉴, 라블레, 미겔 데 세르반테스, 오노레 드 발자크, 파스칼, 윌리엄 셰익스피어 등의 작품이 합류했다. 1941년 8월, <Lettre de la Pléiade 플레이아드 소식지>(1999, n° 2)의 완곡한 표현처럼 시프랭이 “당시 팽배하던 반 유대인주의의 피해자”가 되기 전까지는 만사가 순조로웠다. 

사실 ‘불행’은 그 전부터 시작됐다. 1939년 늦여름, “파리와 주변 지역에 폭격이 임박했다고 확신한 갈리마르 출판사 창립자 가스통 갈리마르는 프랑스 북서부 망슈 주(州)의 사르티이(Sartilly) 인근에 위치한 자신의 소유지로 피신했다. 출판사 직원 일부도 가족을 데리고 합류했다. 하지만 시프랭은 함께하지 못했다. 프랑스군에 소집돼 방공부대에 배치됐기 때문이다. 폐기종에 걸린 시프랭은 1940년 소집 해제됐다. 작가 로제 마르탱 뒤 가르가 갈리마르 출판사의 문예지 <Nouvelle Revue Française 신프랑스평론(NRF)>의 텅 빈 본사에서 마주친 시프랭은 “소름끼칠 만큼 파리한 낯빛에 반 유대인주의에 쫓기는 듯한” 초췌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1940년 2월 시프랭은 출판사 동료들과 합류하고자, 부인과 어린 아들 앙드레와 함께 사르티이에 있는 작은 호텔로 ‘피신’했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NRF의 수뇌부”는 노르망디 지역을 떠나 남부 카르카손(Carcassonne)으로 피신했다(1940년, 북부 프랑스를 독일군이 점령하고, 남부 프랑스에는 비시를 수도로 하고, 1차 세계대전의 영웅 페탱을 원수로 하는 친독 정권이 수립됐다. 비시 정부는 프랑스 내 반독일 레지스탕스 운동을 약화하기 위해 프랑스가 자유 독립을 유지하는 것처럼 위장하려는 의도에서 설립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지스탕스 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역주). 

NRF의 편집장 장 폴랑 일가, 회계담당자 일가, 두 명의 운전기사, 재고 관리 책임자가 가스통 갈리마르와 동행했다. 하지만 시프랭 일가는 제외됐다. 그들은 파리의 아파트가 징발되자, 몽생미셸 만(灣)에 있는 여인숙 그랑드 오베르주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시프랭은 가스통 갈리마르가 보낸 1940년 11월 5일자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새로운 기반을 바탕으로 출판사를 개편하면서 본인은 귀하와의 협력과 ‘플레이아드 총서’의 제작을 중단합니다. 귀하에게 지불할 금액은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정산할 것입니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한 후 ‘선전 중대’(독일어로 Propagandastaffel, 나치 독일의 유럽 점령 당시 프랑스 신문사와 출판사를 통제하던 독일의 선전기관-역주)는 기업의 ‘아리아인화’(사회 모든 분야에서 아리아인이 아닌 이들, 특히 유대인을 축출해야 한다는 나치 이념-역주)를 강요했다. 1940년 10월, 선전 중대가 갈리마르 출판사에 전달한 권고사항은 명확했다. “유대인 자크 시프랭이 여전히 일하고 있다.” 가스통 갈리마르는 나치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유대인 출신 출판사 대표들을 해고한 그는 1942년 1월 20일, 유대인 담당 총국에 서신을 보냈다. “칼만-레비(Calmann-Lévy)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출판사의 영업 자산 인수를 제안합니다. 이제 갈리마르는 아리아인의 자본으로 운영되는 아리아인의 출판사임을 알려드립니다.”

그 사이, 마르탱 뒤 가르가 “카르카손의 도망자들”이라고 부른 이들은 칸으로 옮겨갔다. 가스통 갈리마르는 칸에서 아버지가 사준 길이 8m 범선 아이올로스를 타고 조카 미셸과 여가를 즐겼다. 망슈 주(州)에 남아있던 시프랭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는 이곳에서 철저하게 고독한 삶을 연명하고 있다(...) 나는 불안과 환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위조 서류를 마련한 시프랭 일가는 1941년 1월 생트로페에 도착해 지드와 재회했다. 그러나 열악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마르탱 뒤 가르는 이들의 상황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지드는 가스통 갈리마르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다”라며 분개했지만 소용없었다.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시프랭 일가는 마르세유에서 뉴욕행 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여행경비가 부족해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그만 발이 묶이고 말았다. 시프랭은 ‘비참한 상태에서’ 갈리마르에게 돈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갈리마르는 지드에게 미뤘다. 결국 시프랭에게 돈을 보낸 것은 지드였다. 

 

나치에 협력한 갈리마르의 일탈 

당시 가스통 갈리마르는 수개월 전부터 다른 중대한 문제로 고심 중이었다. 칸에 계속 머물 것인가? 파리로 돌아갈 것인가? 거의 모든 다른 출판사들은 출판을 재개하기 위해 파리의 나치 기관들 곁에서 열띤 경쟁 중 이었다. 아니면 프랑스를 떠날 것인가? “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에 피신해 있을 만한 돈은 충분하다.” 10월 말, 작가 피에르 드리외 라 로셸의 방문 후 가스통은 안심했다. 드리외 라 로셸은 나치 독일대사 오토 아베츠의 허가로 NRF의 출판을 재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을 만들려면 종이가 필요했다. “나는 상당량의 종이를 비축해 뒀다. 종이를 파는 것이 책을 만들어 파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정도다.” 다행이었지만 비축량은 바닥나기 마련이다. 다시 종이를 구하려면 점령자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그렇다면 좋다. 협력하겠다.” 피에르 아술린이 가스통을 미화해 쓴 전기 속 결론이다. 

11월부터 드리외 라 로셸이 NRF를 지휘하고 자크 도리오가 창설한 프랑스 인민당의 간부 한명이 출판심의위원회에 합류했다. 역사학자 파스칼 푸셰에 의하면, 이때부터 갈리마르 출판사는 선전중대의 ‘전문위원’이자 갈리마르의 수호천사 역할을 한 게르하르트 헬러가 찬사를 보냈듯 “프랑스-독일 지적 협력의 중심” 역할을 했다. 이 협력의 목표는 나치가 장려한 독일 고전작품 번역에서 “뒤처짐”을 만회하는 것이었다. 플레이아드 총서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작품 전체를 펴냈다. 가스통 갈리마르는 임무완수를 위해 점령군 참모본부의 독일군 장교이자 파리 유명인사 사교계를 자주 드나든 작가 에른스트 윙거에게 공을 들였다. 그는 윙거에게 플레이아드 총서 전집을 선물했는데 이 중에는 매우 희귀하고 비싼 책들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모든 책이 잘 팔렸다. 갈리마르 출판사의 책은 특히 인기가 높았다. “최고의 해로 여겨진” 1941년 여름 동안 폴 모랑의 신작 소설은 2만 2,600부가 팔렸다. 1942년에도 “업계는 좀처럼 보기 드문 성황을 누렸다.” 뉴욕 도착 후 실업 상태로 “죽도록 피곤하고 절망적으로 암울했던” 시프랭은 1942년 가스통 갈리마르와 연락을 재개했다. “이곳에서 ‘플레이아드’를 다시 제작하고자 했으나, 도무지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받았다.” 하지만 가스통 갈리마르는 “파리에서의 행복한 삶의 모든 요소가 모인” ‘플레이아드 음악회’, ‘플레이아드 상’, 문예지 <카이에 드 라 플레이아드(Cahiers de la Pléiade)>, ‘라 플레이아드 화랑과 도서관’ 등 ‘플레이아드’라는 상표를 아낌없이 활용했다.

시프랭은 낙담했지만 1943년 자신의 이름을 딴 출판사를 세웠다. 하지만 여전히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1944년 판테온 북스(Pantheon Books) 출판사에 합류했다. 이 출판사는 이후 프랑스 문화의 미국 도입에 핵심 역할을 한다. 같은 해 말, 가스통 갈리마르는 활동 복귀와 플레이아드 총서 출판 재개를 발표하며 다시 한 번 존재감을 과시했으나, 1년 뒤에 이 계획들은 흐지부지한 상태에 머물렀다. 시프랭은 지드가 플레이아드 총서를 위해 편찬한 프랑스 시 걸작선(Anthologie de la poésie française)의 출판권을 판테온 출판사에 넘기길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생활고 끝에 죽은 플레이아드의 창업자 

시프랭이 가스통 갈리마르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1950년 10월 24일자 서신은 플레이아드 총서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내용들로 채워졌다. 플레이아드 총서에 대한 나의 권리는 “터무니없이 적다. 당신 스스로도 인정한 사실이다.(...) 내 몫을 정산해 줄 것으로 믿겠다.(...) 수입이 거의 없는 나로서는 적은 금액도 좋다.(...)”. 11월 10일, 답신이 왔다. “온전히 호의에서 나온(...) 귀하가 만족할 만한 정중한 해결책으로(...) 귀하가 생존해 계시는 동안 매년 50만 프랑 지급을 제안합니다.” 이 답신을 받은 후 1주일 만에 시프랭은 세상을 떠났다. 

1949년, 시프랭은 14세 아들 앙드레를 프랑스에 보냈다. 앙드레로 하여금 시프랭 자신의 옛 친구들을 만나고, 갈리마르 출판사 본사와 가스통 갈리마르를 방문하게 했다. 이 방문은 소년이었던 앙드레에게 “매우 싸늘하고 서글픈” 기억을 남겼다. 10년 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하던 앙드레 시프랭은 다시 한번 갈리마르 출판사와 접촉했다. 이번에는 변호사의 조언을 구한 후였다. 

“1940년대와 그 이후에 대해서도 이론의 여지없이 백분율제로 산정한 금액을 지급해야 한다.(...) 그런데 갈리마르는 정액 지급으로 끝내려 한 것으로 보인다.(...) 최종 정산금을 정액으로 지급하던지, 귀하의 진정한 권리와 실제 지급해야 할 금액을 확정하기 위해 소송하던지 선택하길 바란다.” 

2000년대 초, 판테온 북스 출판사의 편집장을 역임한 후 뉴욕에서 <더 뉴 프레스(The New Press)> 출판사를 세운 발행인 앙드레 시프랭은 가스통 갈리마르의 손자 앙투안 갈리마르에게 할아버지의 빚을 상기시켰다. 앙투안은 소송으로 앙드레를 위협했다.

최초 발행 후 거의 한 세기가 지났지만 플레이아드 총서는 내용과 형식, 주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들의 작품집은 더 두꺼워져, 더 이상 ‘문고판’이라 할 수 없다. 휴대용 책이 아니라 소장용 책이다. 2판이 출판될 때 피에르 드 롱사르와 몰리에르의 작품집은 쪽수가 각각 50%, 75% 증가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한 부(部) 전체를 차지한다. 라블레, 셰익스피어, 라클로 작품집은 페이지가 약 2배로 늘었고, 1931년 처음 출판된 보들레르 전집은 내용이 127%로 늘어났다. 대학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결과다. 첨부 자료, 부록, 참고문헌, 해설, 주석, 저자 소개, 이본(異本)과 대학에서 발행한 자료들이 추가됐다. 갈리마르 출판사는 이를 구실로 이 ‘학술적인’ 책들의 가격을 올렸다. 프랑스 매체가 꾸준히 보도하는 플레이아드 총서의 역사는 생략된 부분이 있지만, 그늘이 없이 언제나 찬란한 금빛이다. 이렇게 제조된 신화는 매년 수십만 부 판매량이 대변하는 성공을 정당화한다. 

2011년, 앙드레 시프랭은 뉴욕 주재 프랑스 영사관에서 발행인으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 받았다. 이 훈장은 “자크 시프랭을 내쫓고 독일 당국에 복종한 결정”을 내리고 “실질적인 금전적 의무도, 도덕적 채무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갈리마르 출판사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보상”이기도 했다.(<르 드부아르(Le Devoir)>, 2011년 12월 5일)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한 것은 프랑스 매체가 아니라 미국 기자 존 R 맥아더와 퀘벡의 일간지 <르 드부아르>였다.  

 

 

글‧티에리 디세폴로 Thierry Discepolo 
아곤 출판사 창립자이자 『La Trahison des éditeurs 편집인들의 배신』(Marseille, 2017)의 저자.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가스통 갈리마르에 대한 모든 내용은 피에르 아술린이 그를 미화해 쓴 전기 『Gaston Gallimard. Un demi-siècle d’édition française 가스통 갈리마르. 프랑스 출판의 반세기』(Gallimard, Folio 총서, Paris, 2006)를 인용하고 파스칼 푸셰의 『L’Édition française sous l’Occupation, 1940~1944, 나치 독일 점령기 프랑스 출판 1940~1944년』(파리 7대학 현대 프랑스문학 총서, 1987)을 참고해 정정했다. 시프랭 일가, 지드, 마르탱 뒤 가르에 대한 내용은 아모스 라이히만의 논문 ‘Jacques Shiffrin, aller sans retour. Itinénraire d’un éditeur en exil, 1940~1950 돌아오지 못한 자크 시프랭. 1940~1950년, 망명을 떠난 발행인의 여정’(리옹대학-컬럼비아 대학, 2014)에서 인용했으며, 앙드레 지드와 자크 시프랭이 교환한 『Correspondance, 1922~1950 서신 1922~1950년』(Gallimard, Les cahiers de la NRF 총서, 2005)과 파리의 자크 두세 문학 도서관의 시프랭 관련 장서로 보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