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소비에트, 이것이 최선인가

2011-08-08     토니 우드

2012년 3월 대선을 앞두고, 크렘린이 대규모 정치 공작에 나선다. 1990년대 초 빈사 상태에 빠졌던 러시아는, 지난 10년간 부패한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한 채 경제적·외교적 재기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포스트 소비에트 전환 과정을 바라보는 2개의 대립되는 관점을 소개한다.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동유럽 공산권 해체와 관련된 저서들이 잇달아 출판됐다.(1) 그러나 소련 해체 뒤 러시아가 겪은 경험을 말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고르바초프에서 메드베데프 집권까지 러시아의 최근 역사를 분석한 대니얼 트레이스먼의 저서 <회귀>(2)의 출판은 그래서 의미가 더 깊다. 캘리포니아대학 정치학 교수 트레이스먼은 2004년 공동 집필한 글로 유명해진 인물이다. ‘한 정상국가’(3)라는 제목의 글인데, 소련 해체 뒤 러시아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과거의 무게- 독재, 관료주의 등의 유산- 때문에 고통받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을 뒤집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러시아가 비슷한 국민소득 수준의 다른 나라들이 겪는 발전의 문제에 직면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부패, 제도 부재, 불안한 경제 체제 등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된 뒤 러시아에서 진행된 전환은 비슷한 유형의 다른 국가들이 경험한 조정 프로세스 도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어떤 자유주의자의 미덕과 한계

트레이스먼의 분석 뒤에 숨은 이데올로기를 밝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1990년 러시아가 진행한 자유주의적 개혁은 찬양받아 마땅하다. 덕분에 러시아가 국제 경제 위계질서 속에서 제자리를 탈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냉전적 시각이나 ‘러시아의 영혼’을 들먹이는 관광객의 클리셰(고정관념)를 모두 극복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는 <회귀>에서 서구 여론이 묘사하는 바와 달리 러시아를 본래 모습 그대로 인식하려고 했다. 이 책은 두 가지 상반되는 관점을 오고 간다. 트레이스먼은 한편으로는 러시아가 시장경제에 적응하는 데 겪는 어려움을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시각으로 분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급작스러운 개혁이 현재 러시아의 모든 문제점을 낳았다는 관점을 제시한다.(4) 그런데 중립적 관찰자의 권위-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하고 또 다른 이들은 저렇게 말한다. 진실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에 기대 논의를 전개하다 보니 관점이 불분명해져서 결과적으로 서구의 지배적 의견을 더욱 강화한 셈이 됐다.

이 책의 전반부는 지난 20년간 차례로 러시아를 통치한 대통령들의 이력과 행적을 중심으로 최근 러시아 정치사를 조망한다. 그중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실수’를 한 인물로 묘사한다. 보리스 옐친은 정치적·경제적 장애물을 직관으로 돌파한 불완전한 영웅으로, 블라디미르 푸틴은 미심쩍기는 하지만 유리한 경제 상황의 덕을 본 인물로 그려진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푸틴의 ‘대역 배우’로 불리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집권 2년이 지났는데도 진정한 정책 방향과 속내를 알 수 없다고 평가한다. 역시 같은 시대를 다루는 이 책의 후반부는 러시아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소련의 해체를 가속화하는 힘, 1990년대의 경제적 전환, 체첸 사태, 서구 국가와의 관계 변화 등이 주요 분석 대상이다.

해체, 역사적 필연 아닌 우연의 연쇄

트레이스먼의 결론이 독자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 독창성 때문만이 아니다. 예를 들면 그는 러시아 대통령의 인기가 경제 사이클 곡선에 따라 오르내린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 한 장(章)을 통째로 할애한다. 또한 이 책은 때로 긍정적인 놀라움을 선사한다. 저자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세력 확장이나 미국의 위선적 외교정책에 러시아가 불편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는 견해를 표명한다.

트레이스먼은 소련의 해체를 역사적 필연보다 우연적 사건의 연쇄가 낳은 결과로 본다. 그는 1980년대 추진한 무모한 개혁이 소련 체제를 더욱 벼랑으로 몰아갔고, 그 뒤 발생한 몇 가지 ‘사건’과 그에 대한 ‘늑장 대응’이 몰락을 앞당겼다고 생각한다. 한편 트레이스먼은 ‘소련은 내부의 민족주의적 압력으로 해체됐다’는 관점을 비판한다. 소련 체제가 이미 빈사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인민이 부득이 민족주의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연한 사건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경제 개혁 문제와 관련해서는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위기 상황에 지도자가 된 옐친이 시장친화적 정책을 급조해 러시아를 구했다’고 생각한다. 트레이스먼은 오직 자유주의만이 구원해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는 당시 개혁이 초래한 결과로 흔히 지적되는 문제점들을 의도적으로 축소한다. 예를 들면 당시 국내총생산(GDP)이 끝없이 하락했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GDP라는 기준의 신빙성을 문제 삼는다. 또한 당시 10년간 텔레비전 등 가전제품 소비가 증가한 이유를 들어 인민의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보건이나 의료 분야의 공공서비스 파괴, 실업률 급증, 사회적 연대 실종 등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다.(5)

자본주의 강화를 민주화로 오인하다

결국 트레이스먼은 옐친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으면서 우리가 그동안 1천 번도 넘게 들어온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셈이다. 그에게는 옐친이 영웅적 예언자로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는 바위를 러시아 현실이라는 빙벽 위로 끊임없이 밀어 올린 시시포스 같은 존재다. 1991년 이후 많은 논객이 주장한 대로 트레이스먼은 “옐친의 통치 기간에 소극적이나마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진전됐지만 푸틴이 집권하면서 다시 과거의 권위주의로 후퇴했다”는 주장을 편다. 두 시대를 대조하는 이 관점은 1990년대의 개혁을 뒷받침하던 이데올로기적 변화를 제대로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이 변화된 이데올로기는 민주주의 자체보다는 자본주의를 더욱 강화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개혁주의자들’은 선거를 통한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한 만큼 더 빠르게 ‘충격 요법’을 추진했으며- 특히 1993년 옐친이 국회에 폭탄 세례를 퍼부었을 때- 헌정 중단을 도모한 크렘린의 공격을 지지했다. 사실상 러시아 체제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소유 원칙이 위협받을 때마다 조금씩 후퇴해왔다.

계급투쟁과 독점적 이윤 축적 외면

포스트 공산주의 러시아의 변신을 좀더 잘 이해하려면 대부분의 변화가 자본주의적 이해관계 속에서 진행되면서 새롭게 부상한 엘리트들이 러시아를 계급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과정을 파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러시아 엘리트들의 구성과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현재 러시아를 소유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1990년대의 혼란기에는 옛 소련 공산당 출신의 노 멘클라투라(특권계급)와 당시 성장 중이던 자유 기업이 러시아의 소유주를 자처했다. 거의 10년 동안 이들은 고부가가치 원자재인 금속·광물 수출, 의심스러운 금융정책, 옛 소련의 산업시설 약탈을 통해 재산을 끌어모았다. 1998년 불어닥친 루블화 위기는 러시아 엘리트의 구성을 바꿔놓았다. 은행·금융 부문이 약화되고 내수용 ‘실물경제’가 강화됐다. 그러나 2000년부터 가스와 원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지배계급뿐 아니라 나라 전체에 큰 변화가 초래됐다. 에너지 수출을 통해 로스네프트나 가스프롬 같은 국영기업뿐 아니라 수르구트네프테가스(2003년 해체)나 유코스 같은 민간기업들도 막대한 이윤을 챙겼다.

이렇게 축적된 이윤은 1990년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엘리트들을 탄생시켰다. 워싱턴에서 정치학을 연구하는 릴리아 셰프초바는 “옐친 시대의 과두체제는 현재의 관료주의 과두체제에 비하면 초보 수준에 가까웠다”고 평가한다.(6) 관료주의에 대한 언급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들은 이제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을 모두 지배하며 정부 정책뿐 아니라 기업의 경영 방침에까지 개입한다. 1990년대 초부터 러시아 엘리트들의 구성을 연구(7)해온 올가 크리시타노프스카야는 러시아의 새로운 주인들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그는 21세기 초부터 갈수록 강화되는 산업의 역할에 주목하면서 정치계와 경영계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는 상황을 지적한다.

약탈을 승인할 것인가 봉기할 것인가

서구 언론들은 갈수록 러시아 정부가 경제에 깊숙이 관여한다며 비난한다. 은밀한 재국유화 시도가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혹은 푸틴 정부에 깔린 정보부 조직망에 대한 경제적 대응물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러시아의 엘리트들과 관련해 더욱 충격적인 것은 자본에 대한 국가의 지배가 아니라 자본과 국가의 상호 침투 현상이다. 정치권의 고위 인사가 경영자로 스카우트되거나 반대로 경영자가 정계에 입문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행정 관료들은 가장 좋은 사업 소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으며, 정부 인사나 예산 결정에 경영 논리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모든 영역에서 발견되며, 특히 상대적으로 대기업(공기업이든 민영기업이든 관계없이)의 영향력이 큰 지역일수록 심각한 양상을 띤다. 주요 산업 부문의 기업들이 여전히 국가 소유로 남아 있지만 최대한 이윤을 뽑아내야 한다는 원칙은 변함없다. 국가 차원에서 부의 재분배가 아닌 소수 엘리트들의 치부가 목적이다.

오는 12월 총선과 2012년 크렘린의 새 주인을 뽑아야 하는 민감한 시점을 앞두고 정계와 재계 엘리트들은 국가의 부를 놓고 또다시 쟁탈전을 벌일 것이다. 아랍에서와 같은 민중봉기가 일어나지 않는 한, 러시아 민중이 할 수 있는 일은 엘리트들의 약탈 방식을 승인해주는 것뿐이다. 러시아인들이 봉기를 선택할 확률은 낮아 보인다. 그러나 소련이나 튀니지, 이집트 체제가 몰락한 역사적 과정은 우리에게 영원한 체제란 환상에 불과하다는 교훈을 주었다.

글•토니 우드 Tony Wood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각주>
(1) 예를 들어 Robert Service, <Comrades! A history of world communism>(Ha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07), Archie Brown, <The rise and fall of communism>(Ecco, New York, 2009), Stephen Kotkin, <Uncivil society: 1989 and the implosion of the communist establishment>(Modern Library, New York, 2009), Victor Sebestyen, <Revolution 1989: The fall of the soviet empire>(Pantheon Books, New York, 2009) 등이 출판됐다.
(2) Daniel Treisman, <The Return: Russia’s jorney from Gorbachev to Medvedev>, The Free Press, 뉴욕, 2011.
(3) <Foreign Affairs>, New York, 2004년 3~4월호에 실린 기사. Andrei Shleifer와 공동 집필.
(4) 스웨덴 경제학자, 안데르스 아슬룬드의 책, <How capitalism was built: The transformation of central and estern Europe, Russia, and Central Asia>(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7)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성경처럼 떠받드는 책이다. 아슬룬드는 1990년대 초 러시아의 민영화 정책 자문을 맡은 바 있다. 이와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는 사람들은 Peter Reddaway & Dmitri Glinski, <The tragedy of Russia’s reforms: Market bolshevism against democracy>(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Washington, 2001)을 즐겨 읽는다.
(5) ‘러시아의 한 세기’, <Manière de voir>, n°100, 2008년 8~9월호 참조.
(6) Lilia Shevtsova, <Russia: lost in translation. The Yeltsin and Putin legacies>, Carnegie endowment for international peace, Washington, 2007.
(7) Olga Kryshtanovskaïa, <Anatomiia rossiiskoi elity>(러시아 엘리트층 해부), Zakharov, Moscou,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