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아나키즘, 개인의 절대 자유 꿈꿔
크로포트킨 '상호부조론' 영향 커, 민족주의 바탕 사회문제에도 관심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1월호에 동시 게재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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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들-일본의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중국의 리스쩡(李石曾), 스푸(師復), 한국의 신채호(申采浩), 류자명(柳子明) 등-은 모두 크로포트킨주의자였다. 그 까닭은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相互扶助論)이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유행했고, 그의 사상이 동아시아 문화적 토양과 친근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크로포트킨의 윤리학 위주의 사상 체계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윤리정치와 다소 유사했을 뿐만 아니라,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국제 연대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는 것이었다. 물론 프루동과 바쿠닌의 사상도 소개되었지만 영향력 면에서는 크로포트킨과는 비교될 수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노동조합적 아나키즘도 수용되었는데,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노동자 계층이 형성된 다음에야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각기 다른 한·중·일 아나키즘
동아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은 본래 개인의 절대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이상 사회를 건설하고자 서양의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들은 개인의 자유보다는 사회 문제의 해결에 좀 더 많은 관심을 나타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동아시아 개별국가도 그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아나키즘의 성격에 일정한 차이가 드러난다. 아마도 서구적 근대와 한중일 3국의 전통이 만나는 과정에서 빚어진 한 현상일 것이다.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이 부정하고자 한 권력의 대표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인 천황제(天皇制)였다. 따라서 천황제에 대한 비판은 물론 천황 개인에 대한 테러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이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침략하는 군국주의의 길을 걷자, 동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반전운동(反戰運動)을 전개하며, 아나키스트의 국제연대를 통해 이를 저지하려고 노력했다. 이런 나름대로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일본 아나키즘의 길은 서유럽의 그것과 더욱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즉 일본 사회가 서유럽의 자본주의를 모방해 산업화에 성공하면서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하자, 아나키스트들도 이에 대항해 반자본(反資本) 반제(反帝)의 논리를 가지고 노동자 파업을 통한 부르주아 계급의 타도와 사회주의의 건설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半식민지 혹은 식민지의 상황에 놓인 중국과 한국(혹은 대만)의 경우는 상황이 좀 달랐다.
중국의 혁명가들이 아나키즘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직면한 정치권력은 다름 아닌 황제 중심의 전제군주제였다. 따라서 이들의 사회 혁명의 첫 번째 목표는 만주족 황제를 타도하는 이른바 배황혁명(排皇革命)이었다. 그런데 1911년 혁명의 성공으로 황제 체제가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혁명의 내실을 갖추기도 전에 곧바로 군벌 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에 절망한 아나키스트들은 중국 사회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정치 혁명을 넘어서 문화 혁명을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일제의 식민지라는 주권조차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운동의 시작에서부터 좀 색다른 양상을 보였다.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일본이라는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숙명적인 과제 아래 민족해방운동의 한 수단으로 아나키즘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그들의 운동은 처음부터 민족주의 사조와 밀접한 관련을 가졌으며, 정치 지향의 색채도 비교적 농후하였다. 그들은 한국뿐만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도 활동했기 때문에 그 나라의 아나키즘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게다가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주로 망명객이 많았던 까닭에 대중 운동보다는 주로 테러와 파괴와 같은 폭력 수단에 의존해 운동을 전개할 수 밖에 없었다.
덧붙이자면,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에서도 1920년대에 들어와 아나키즘 운동이 시작되었다. 대체로 한인 아나키스트나 대만인 아나키스트 모두 자국 이외에 일본이나 중국에서 활동했다는 형식적인 유사성이 존재하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차이점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한인 아나키스트는 국내외에서 활발한 테러 활동을 펼쳤으나, 대만인의 경우 거의 테러 활동을 찾아볼 수 없으며 주로 온건한 문화 계몽운동에 의존하였다.
민족주의·국제주의 동시 추구
동아시아 아나키즘 운동은 민족주의 사조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것이 두드러진 특색이다. 사실 20세기 시대의 화두인 광의(廣義)의 민족주의 사조로부터 자유로운 사상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일본의 경우 비교적 원론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국수주의(國粹主義)와 대립하지만 일부는 전통 문화 속에서 아나키즘의 기원을 찾았다. 중국의 경우는 이런 경향이 더욱 심하게 나타나는데, 초기 아나키즘 운동의 지도자 류스페이(劉師培)가 국수주의를 제창하거나 우즈후이(吳稚暉) 등이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國民黨)에 참여한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민족해방운동 차원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한인 아나키스트들에게서 민족주의와의 결합 현상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우리는 신채호의 사례를 통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가 협의(狹義)의 민족주의 사상, 즉 종족주의와 대립하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아나키즘은 기본적으로 국제주의를 추구하였다. 운동의 초창기인 1900년대에 아주화친회(亞洲和親會)나 사회주의강습회(社會主義講習會) 활동 등에서 이미 나타난다. 특히 1907년은 상징적인 해로서, 일본과 중국의 아나키스트들이 직접 교류를 시작한 때이다. 당시 고토쿠 슈스이가 중국, 인도를 비롯한 주변 국가들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도쿄에 거주하던 외국인 혁명가들은 이에 호응하였다. 그 결실의 하나로 중국인 혁명가들은 일본인 아나키스트들과 함께 '아주화친회'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아시아 각 나라의 혁명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혁명가 연합단체를 결성하고자 했는데, 동아시아 사회에 최초로 등장한 반제국주의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했으나, 인도 한국 월남 필리핀 말레이시아인 혁명가들도 참여했다고 전한다.
20세기 동아시아 진화론 수용 및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 민족주의자(혹은 제국주의자)의 사회진화론과 마르크스주의자의 계급투쟁론 사이에 아나키스트의 상호부조론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경우 아나키즘이 마르크스주의보다 먼저 사회주의 운동의 주류를 점했던 까닭에 이곳의 아나키스트들은 상호부조론을 매개로 민족주의 제국주의 이론에 대한 최초의 강력한 비판자가 될 수 있었다.
가혹한 탄압과 '아나-볼 논쟁'
1910년대에 일본은 고토쿠 슈스이가 대역사건(大逆事件)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사형을 당하고 일본 정부의 가혹한 사상 탄압으로 말미암아 '겨울의 시대'를 맞이했지만, 중국은 '중국 아나키즘의 초상'이라 불리는 스푸의 정력적인 활동으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스푸는 국제 아나키스트와의 교류를 시도했으며, 점차 일본 아나키즘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하던 오스기 사카에와도 연락을 맺고 있었다. 스푸의 갑작스런 죽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생들은 꾸준히 운동의 영향력을 넓혀갔으며, 1910년대 말부터는 시베리아나 연해주 등지에 건너온 러시아 아나키스트들과도 교류가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볼셰비키의 등장은 동아시아 3국의 아나키스트들에게는 새로운 강력한 도전자가 출현했음을 의미하였다. 이 사건은 곧이어 한·중·일 사회주의 운동의 대립과 분열을 가져왔으며, 아나키즘-볼셰비즘 논쟁을 촉발시켰다. 반드시 이 논쟁 때문에 아나키즘 운동이 쇠락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논쟁을 전후해 운동이 급격히 약화된 것은 사실이다. 이른바 아나볼 논쟁의 핵심은 이론의 경쟁이라기보다는 변혁 방법의 유용성 여부였으며, 당장은 결말이 나지 않았으나 민족주의의 고양과 국민국가의 건설이라는 시대 조류 앞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점차 궁지에 몰렸다.
1920년대 초에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 아나키스트의 국제 활동도 두드러진다. 한 예를 들자면, 1920년 10월 오스기 사카에는 극동사회주의자회의(極東社會主義者會議)에 참석해 달라는 한인 동지의 연락을 받고 상하이로 잠행했고, 이 때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연합 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다시 오스기 사카에가 중국에 간 것은 1922년 말로, 다음 해 베를린에서 열릴 예정인 국제 아나키스트 대회에 출석하기 위해 일본을 탈출하는 과정에서였다.
전쟁 상황 속 국제적 연대 지속
이 두 차례의 중국행을 통해 두 나라 아나키스트의 교류는 심화되었고, 결국 오스기 사카에의 주도 아래 일본 중국 한국 인도 등의 아나키스트들은 상해에서 국제조직을 결성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오스기 사카에가 군부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면서 이 계획은 유명무실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0년대 후반 중국에서의 한·중·일 아나키스트 연대 활동, 즉 상하이 노동대학(勞動大學), 푸젠성 천주민단훈련소(泉州民團訓練所),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의 결성 등은 동아시아 아나키스트의 국제 연대활동이 꾸준히 지속되었음을 말해준다.
1930년대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 침략, 즉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의 발발은 아나키스트 운동은 물론 동아시아의 역사 전개 과정을 크게 왜곡시킨 불행한 사건이었다.
일본은 천황제 강화와 군국주의 성장을 거쳐 대외 팽창으로 나아갔고, 전쟁 상황은 국내적으로 사상 운동의 압살을 가져왔다. 중국은 일제의 대륙 침략에 따른 위기감으로 정치적 민족주의가 대두됨에 따라 국민당과 공산당의 양당 구도로 재편되면서 아나키즘 운동의 입지가 좁아졌다. 한국(혹은 대만)도 일제에 의해 전시동원체제로 재편되면서 일체의 사상 운동이 말살되었다.
당시 국제 연대 활동은 주로 항일운동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1931년에는 한중 아나키스트 간에 공동전선이 제기되어 항일구국연맹(抗日救國同盟)을 결성했고, 한인과 중국인뿐만 아니라 일본과 대만 아나키스트의 참여가 있었다. 이 시기는 동아시아 아나키스트들이 직면했던 민족주의와 국제주의 간의 팽팽한 긴장 관계를 느낄 수 있는 때로, 우리는 생사를 넘어선 초국가주의적 연대 의식을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 동아시아 근현대사를 전공했으며, 최근 논문으로는 '1920년대 재중 대만인의 아나키즘운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52), 2007, 한국민족운동사학회), '중국공산당 창립에 영향을 미친 한인 사회주의자들'(<한중관계 2000년-동행과 공유의 역사>, 2008, 소나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