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러 가는 서구인들, 쫓겨나는 원주민들

2011-08-08     알랑 포페라르 & 폴 바니에

모로코의 마라케시에서 15km 떨어진 마을 타메슬로트는 황량한 주변 경치와 한눈에 구별된다. 모로코 관광 중심지 근처의 다른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타메슬로트는 지난 10년간 급성장했다. 인구가 3배 가까이 늘었고, 주택이 여기저기 들어서며 채 마르지 않은 시멘트의 회색빛이 즐비하다. 한 주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에는 올리브오일 짜는 방앗간이나 작은 직물공장 몇 곳밖에 없는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지금은 약국도 있고, 슈퍼마켓과 정육점, 커피숍이 들어섰습니다.”

남부 농촌 지역이나 메크네스·페스 같은 북부 도시에서 많은 사람이 유입됐고, 이들은 호텔이나 건축회사에 자리를 얻어 타메슬로트에 정착했다. 이농과 최극빈층의 소외 현상은 역설적으로 농촌 마을의 도시화를 야기했다. 타메슬로트 마을 입구 커피숍에서 일하는 마르완은 “이제 마라케시는 유럽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집세도 식료품값도 모두 너무 올랐다. 나는 메디나에 살다가 집세 낼 돈이 없어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타메슬로트는 집세가 시내 중심보다 30% 정도 싸다”고 말했다.

모로코 마라케시, 휴양지 급부상

한 스페인계 회사의 버스가 주거 도시인 타메슬로트와 지역 대도시 중심지를 잇고 있다. 학생들은 통학을 위해, 직장인들은 출퇴근을 위해 버스를 이용하면서 모두가 도시 외곽 지역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다.

마라케시~타메슬로트 간 10여km가 넘는 거리에는 공사현장이 즐비하다. 관광지 개발이 한창인데 크레인과 로더로 땅을 다지고 있다. 도로를 따라 펼쳐진 허허벌판 초입에 있는 모델하우스는 구매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여기저기 가로등이 들어설 자리가 표시돼 있어 곧 올라가기 시작할 건물 사이를 가로지를 통로의 윤곽을 미리 그려볼 수 있다. 일련의 광고판들은 주택 단지가 들어설 부지를 가리킨다. 이 중 ‘마라케시 로열 팜’ 빌라촌이 올 연말 첫 완공을 앞두고 있다. 여기에는 골프장을 중심으로 호화 호텔이 들어서는데, 부지가 230ha에 이른다. 판촉물을 보면, 이 빌라촌은 3m 높이의 철책과 벽으로 둘러싸이고, 감시카메라와 순찰대가 항시 운영되며, 자연친화적이면서 세련미를 갖춘 생활예술이라는 콘셉트에 맞춰 조성된다고 한다. 로열 빌라촌에 입주할 만한 경제력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한 주택 매매 광고는 모로코 신문뿐 아니라 파리의 지하철 광고판에도 나와 있다. 마라케시 외곽 지역 개발로 변두리 지역의 관광지화가 진행되면서 별장 소유주와 관광객들을 위한 주거 및 위락 지역 개발이 한창이다. 시내 및 근교 단지에 거주하는 유럽 관광객들과 이농에 내몰린 모로코 노동자들, 이렇듯 여가산업은 공간 구획에 따른 거주지 분리를 야기한 원인이다.

마라케시의 거주지 분리는 모로코의 불평등이 심화한 탓도 있지만, 외부적 요인에도 기인한다. 휴양지의 특급 호텔과 호화 저택을 별장으로 삼은 TV 스타와 미디어 거물들, 정치인과 기업가들에 의해 마라케시는 프랑스 엘리트 지배집단의 집결지 중 하나가 돼버렸다. 1997년 6월에는 프랑스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와 그 아내인 가수 겸 배우 아리엘 동발이 알랭 들롱에게서 자히아 저택을 사들였다. 2001년 10월에는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이 자히아 저택에서 몇m 떨어지지 않은, 모로코 국왕 모하메드 6세의 신축 저택과 라마무니아 특급호텔 사이에 있는 으리으리한 리아드(모로코의 전통 가옥)를 사들였다.(1) 이런 사례들은 드물지 않게 있고, 유명인들이 끼리끼리 결집해 상호 모방을 일삼는 행태를 잘 보여준다. 이렇다 보니 같은 도심 지역 안에 상류층끼리 모여 살게 됐다.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마라케시는 휴가차 건너온 사람들이 어울리는 사교계의 장이 된다. <렉스프레스>는 지난 1월 “브리스 오르트푀(프랑스 전 내무부 장관)와 에르베 모랭(전 국방부 장관)이 같은 호텔에 묵었다”고 보도했다. “그 근처에 티에리 드 보세, 알랭 카리뇽, 도미니크 뷔세로 같은 전직 장관들과 올리비에 다소를 비롯한 우파정권의 대중운동연합당(UMP) 소속 의원, 제롬 카우작과 장크리스토프 캉바델리 같은 사회당 인사, 프랑수아 소바데 같은 중도정치인, 장뱅상 플라세 같은 환경보호론자, (중략) 베르나르 앙리 레비, 피에르 베르제, 릴리안 베탕쿠르, 알베르 프레르 같은 인물들이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 장 사르코지, 야닉 노아, 알렉상드르 봉파르, 장르네 푸르투, 도미니크 데세뉴, 장피에르 엘카바슈, 기욤 듀랑 같은 인물들도 시내에서 눈에 띈다.”(2)

주택의 황토벽에 빗대 ‘붉은 도시’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마라케시처럼, 이들의 ‘실질적인 집단주의’(3)도 특수한 색채를 띤다. 작가 겸 편집인인 장폴 앙토방은 친구인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저택에 머무른 경험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햇살이 회랑과 주변을 덮은 덩굴 사이로 비치는 이 저택에서 나는 곧 내 집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꼈다. 유약을 바른 벽돌과 덧문, 시리아식 나무문과 돔으로 된 지붕에 둘러싸여 안락했다. 마사지사들과 가수들이 언제나 피로를 풀어주었고, 도서와 콘서트, 뿔 모양 꿀과자와 맛난 음료가 딱 맞춰 나왔다. 어딜 보더라도 광택이 나고, 샹들리에와 자수 장식으로 치장되었으며 페르시아와 터키의 유리 세공품, 완벽한 취향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왕궁식의 화려한 촛대가 마법의 향연에 분위기를 더했다.”(4)

“마라케시는 유럽인의 꿈의 도시였다. 마라케시는 아프리카였고, 호기심을 자아내는 곳이었으며, 동방이었다”라고 벨기에 대부호 알베르 프레르와 스트로스칸의 저택을 건축한 엘리 무얄이 말했다. 이제 마라케시는 파리에서 비행기로 3시간 남짓 걸리는 곳으로, 항상 동방적 매력을 뿜어낸다. 19~20세기 화가와 소설가들이 그린 에로틱하고 감각적인 세계가 바로 그곳이다. 군사 정복의 상상적 추(錘)가 되었던 동방의 매력 말이다. 마라케시에 대한 신비로운 유토피아적 환상 덕분에 지배층은 각별한 쾌락주의를 실현할 수 있었다. 한가로우며, 생산노동의 일상적 엄격함에서 벗어나 사회에서 자유로워진 이들은 “무위도식하며 철에 따라 이동하며 여러 나라를 떠도는 무리”였다.(5) 이들이야말로 미국의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묘사한 ‘유한계급’의 특성을 고루 갖추고 있다. 베블런은 “생산노동에서 오는 모욕감과 한가로운 생활을 가능케 하는 금전적 여유로 인해 비생산적인 시간 소비가 이루어진다”고 보았다.(6)

줄줄이 들어서는 호화판 별장

11~12세기 알모라비드 왕조시대에 발전한 팔메라이는 마라케시에서 떨어져 있었음에도 최근 급격한 발전을 이뤘다. 이 지역에는 걸프 지역 왕족들의 저택이 들어서 있을 뿐 아니라, 축구선수인 지네딘 지단과 데이비드 베컴, 모델 나오미 캠벨의 저택도 있다. 이곳을 관통하는 도로를 따라가면 웅장한 대저택과 초호화 건물들을 볼 수 있다. 위상을 뽐내며 서 있는 웅장하고 거대한 모래성들은 주변 언덕 지대 높은 곳에 서 있던 카이드(7)들의 성을 방불케 한다. 성 주인들은 이를 통해 자신이 한가하게 빈둥거리는 엘리트층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거창한 현관과 톱니 모양의 외벽 앞에서 조깅하거나 골프 치는 사람들, 낙타들이 지나가는 풍경은 마치 캘리포니아를 보는 듯하다.

마라케시의 귀족사회 전통은 프랑스의 보호령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921년 라마무니아 축조가 마라케시 호화 관광도시화의 시초로 볼 수 있다. 식민 통치권력이 유입되는 관광객을 주로 카사블랑카와 라바트, 아가디르 같은 해안도시에 유치하기로 결정하면서 관광산업 기반시설과 설비가 해안도시에 집중됐다. 하지만 프랑스 관리이자 모로코의 첫 총사령관인 위베르 리요테는 마라케시를 식민지배층만을 위한 전용 관광지로 삼기로 결정했다.(8)

붉은 도시 마라케시는 세계 어디든 계절에 따라 거주지를 바꿀 능력이 있는 부르주아 사회가 선호하는 도시 중 하나다. 수직으로 난 통행로가 특징인 이베르나주 지역은 프랑스 제2제국 휴양지 모델에 따라 개발됐다. 도빌이나 칸처럼 이베르나주도 카지노와 극장, 특급 호텔, 꽃과 나무가 우거진 정원을 중심으로 구획됐다.

1956년 모로코가 독립한 뒤에도 리요테 사령관의 정책 방향은 폐지되지 않았고, 오히려 민간 투자자와 모로코 정부에 의해 확대됐다. 그 결과 마라케시는 특급호텔 공급 초과 현상을 보이며, 4성급과 5성급 호텔이 전체 숙박시설 규모의 절반을 차지한다.(9) 뤼시앵 바리에르 그룹이 프랑스 국외에 문을 연 최초의 호텔 및 레스토랑이 마라케시에 있는 사실을 비춰 볼 때, 이 도시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다. 나우라 바리에르 호텔에는 푸케 레스토랑이 입점해 있는데, 그룹 홈페이지를 보면 ‘샹젤리제 거리의 유명 레스토랑 특유의 고급스러움과 독특한 분위기를 되살려 파리의 고급스러움과 세련미, 우아함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유럽 명사들, 그들만의 유토피아

모로코 정부는 마라케시에 유명인들이 집중돼 있는 사실을 국제관광 업계에 홍보하고, 이를 통해 다른 지중해 경쟁 휴양지들과 차별성을 두었다. 2001년 왕실이 주도해 개최한 마라케시국제영화제 같은 행사를 통해 해마다 유명인들을 유치함으로써 인기 휴양지로서 입지를 공고히 했다.

마라케시 방문객은 2001년 100만 명에서 2010년 180만 명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1973년 마라케시에는 호텔이 25개뿐이었지만, 지금은 152개에 이른다. 관광지역위원회장인 하미드 벤타하르에 따르면, 마라케시에는 모로코 전체 숙박시설의 30%가 몰려 있다. 관광객 급증에서 알 수 있듯, 모로코는 경제자유화로 국제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 창설을 위한 국제회의를 마라케시가 유치한 데는 이런 성공이 큰 도움이 됐다.

이는 관광지로서 마라케시의 매력을 한층 상승시킴과 동시에 ‘유명 인물들’을 대거 도시로 끌어들임으로써 문화재 상품화를 둘러싼 내부 찬반 논란을 종식시켰다. 영국 지리학자인 데이비드 하비가 지적했듯이, 문화재의 상품 가치는 문화재의 독창성에 달려 있다.(10) 각각의 장소마다 관광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고유한’ 특징이 없다면 관광은 존재 가치가 없다. 지역 관광산업 개발로 오히려 지역 고유의 특성이 사라지고 체인호텔, 레스토랑, 기성복 매장 등이 들어서면서 관광지의 특색이 지리적 특성 말고는 없게 된다. 각 지역과 그 지역 고유의 관습이 모두 획일화되고 만다. 이런 모순을 타파하려면 지역 마케팅을 활용해 수요를 조절하면서 부동산 투자를 창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마라케시는 도시 내 기업들이 사하라사막 근처나 아틀라스산 정상 주변의 다양한 자연경관과 메디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데마엘프나 광장 같은 역사 유적지를 홍보했고, 부유층이 많이 찾는 점을 이용해 마라케시의 투자 가치를 높였다.(11) 가십 잡지 기자들이 마라케시의 ‘모로코판 새 생트로페’를 볼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12)

유명인 마케팅 열 올리는 정부

스위스 구스타트나 프랑스 쿠르슈벨에서 볼 수 있듯 ‘소수 지배층의 부동산 투자 전략’은 도시에 최상류층을 유입시키는 데 공헌했고, 이들의 유입 역사는 이제 마라케시에 머물던 유명인들의 역사와 뒤섞이고 있다. “윈스턴 처칠이 1940년대와 70년대 자주 머물렀다. 이브생 로랑과 롤링 스턴스는 유행을 가져왔다”고 건축가 엘리 무얄은 설명했다. ‘위인들’을 통해 쓴 도시 역사는 현대 귀족층에게 자신을 위인들과 동일시하고, 자신이 마치 위인들의 당당한 계승자인 양 행세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준다. 마라케시에 별장을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특권층에 편입되는 길이며,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특권을 일부 부여받는 것과 동일시된다.

상류 중산층에게 누구나 누릴 수 있음직한 귀족적 생활에 대한 맹목적 열광을 불어넣은 것은 다름 아닌 경제 매체들이다. 1998년 <M6>에서 방영된 프로그램 <카피탈>은 메디나의 리아드를 특집으로 다루면서 엄청난 가격에 저택을 사들인 유럽인들의 왕족 같은 생활과 배경을 홍보했다. 덕분에 많은 투자자가 메디나로 몰렸고, 메디나는 큰 변화를 겪었다. 1960년대에만 해도 메디나는 빈곤한 도시였다. 마라케시 지배층이 식민통치자들이 남긴 주택을 찾아 궬리스로 이사하면서 메디나는 몰락한 부르주아층이나 노인, 구직을 위해 도시로 온 농민과 수공업자들의 주거지가 되었다. 프랑스 영사관이 떠났듯, 전문직 종사자들도 메디나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떠났다. 그렇게 역사의 중심지는 중요성을 점차 잃어갔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 메디나는 다시금 유럽인들의 부동산 관련 전략적 요충지가 됐다.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일부 모로코인들은 도시를 떠나야 할 정도였다. “저소득층 세입자들이 특히 영향을 받았는데,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자 집주인들이 집을 팔아치웠기 때문이다.” 도시학자이자 파리10대학 교수이며, 메디나개발계획 관리 책임을 맡았던 잉그리드 에른스트가 설명했다. 투기 탓에 집값이 폭발적으로 올랐다. “2003~2004년 8만 유로 정도였던 중간 평수 정도의 집 한 채가 2006년 20만 유로가 됐다.” 10년째 마라케시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발레리 바라다의 설명이다.

당신도 귀족이 될 수 있다

메디나의 사회지리적 분포는 점차 양극화됐다. 도시 중심 광장 주변의 일부 지역 거주 인구는 50% 이상이 유럽인이었고, 부유층을 위한 도심 재개발이 진행됐다.(13) 빈부 격차는 부유층 지역과 빈곤층 집중 지역을 분리해버렸다. 옛 유대인 거주 지역인 멜라지구는 1970년대부터 농촌에서 왔거나 몰락한 서민층들이 모여든 곳이다. 밟아 다져진 땅을 따라 난 좁다란 길과 그 위에 세워진 허술한 집들. 인구밀집 지역인 이 동네는 성매매로 유명하고, 도시 최극빈층이 집중된 곳이다. 메디나에 비해 인구밀도가 3배 높고, 가구의 4분의 3 량이 월소득 1천 디르함(90유로) 이하이다.(14) 

메디나의 전통적 기능도 해체되고 있다. 엘케미 지역 뒤편 시디칼렘지구와 하르에스수라지구는 소규모 목공 세공, 용접, 철 세공 작업장들이 모여 있다. 하지만 엘케미 시장에는 허름한 물건조차 없다. 판자나 시멘트를 얻으려는 공사판 일꾼들이나 잡동사니를 뒤지며 무언가를 주우려는 사람들뿐이다. 관광지가 된 제마엘프나 광장 주변부는 식민지 이전 모습을 간직한 메디나의 생산활동 지구와 매우 대조된 모습이다.

부동산 중개업자 발레리 바라다는“요즘 사람들은 집에서부터 자가용을 타고 나오기를 원하고, 길이 깨끗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관광지가 되고 나서 도로 포장과 정화 시설 구축 같은 도시정비 정책이 실시되었다. 동네마다 화덕을 갖춘 빵가게, 식료품점, 하맘(터키식 목욕탕)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기념품 가게가 채워졌다. 주요 통행로에 연결된 일부 막다른 골목들이 사유재산이 되면서 주민들의 우려를 사고 있다. 일부 투자자들이 통행로를 막은 뒤 인접 주택까지 빼앗다시피 사들였기 때문이다. 주택재건축도 문제가 되고 있다. 무얄은 “유럽인들은 테라스로 통하는 문과 수영장을 갖춘 집을 원한다. 가정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이웃 집 간의 안뜰과 테라스 사이를 폐쇄시키는 도시정비법 규정과 주택 건축 양식, 이웃 간의 관습까지 무시한다”고 했다. 식사 공간을 확장하기 위해 벽을 허물고, 지붕 위에 월풀 욕조를 설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집값 급등, 외곽으로 떠도는 사람들

한편 많은 사람들이 새로 집을 사들인 뒤 민박으로 개조하거나 휴가용 임대주택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재 메디나에는 이런 숙소가 500개에 이른다. 모로코 출신의 모리스 드 라르브르는 5~6년 전 처음으로 리아드를 매입했고, 잇따라 작은 주택들을 사들여 민박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마침내 작은 섬의 거의 절반을 사들였다. 저렴한 호텔 숙박비 정도만 내고 호화로운 저택에 머물 수 있기 때문에 사업은 날로 번창하고 있다. 고객에게 위화감을 주지 않는 수준에서 동방적 느낌이 들도록 장식했고, 안뜰에는 분수와 오렌지나무가 있다. 내부에는 혈기 넘치는 투숙객들을 위해 새 기계들로 꾸민 헬스장도 있다. 주인은 “모든 것이 휴식을 취하려는 사람들의 만족을 최대화하기 위해 고안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사업 성공에 대해 “내 노력도 있었지만, 모로코인들의 공동체 정신에 크게 덕을 봤다”고 자신의 리아드 테라스에 편히 앉아 설명했다.

그러나 모로코의 주요 노조인 노동민주연합의 마라케시지부 회계 담당인 하산 코라피는 그 이유를 다른 데서 찾는다. “관광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90%가 최저임금을 받고 있습니다. 월 2200디르함(약 190유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일반 민박업소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노동 여건이나 노동시간에 관한 정보는 알 길이 없습니다.”

불법 고용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고급 대형 호텔도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다. “고용주들이 노동법을 어기는 일이 허다하며, 노조 설립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2007년 마라케시 클럽메드에 우리 지부를 설립했는데, 노조원들은 몇 달 지나지 않아 세네갈, 이집트, 그나마 나은 테투앙 등 여기서 600km 넘게 떨어진 곳으로 재배치됐습니다.”

“마라케시에서는 시위를 조직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마라케시가 모로코의 얼굴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지요.” 관광산업은 특히 지역 내 평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혁명 이후 관광객이 급감한 이집트와 튀니지가 좋은 예이다. 그렇기에 도시 치안의 중요성에 모두가 공감한다. 경제활동인구의 3분의 1이 관광업에 직간접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에서 많은 시민이 소득에 타격받지 않을까 우려한다. 임금생활자들의 관광산업 의존성은 정치계에도 큰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지난 2월 20일 시위 때 정부가 청년들을 매수해 시위대를 교란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통합사회당 지역책임자이자 시위를 조직한 사반느조차 정부의 부추김으로 시위가 주춤해졌다고 한다.

제마엘프나 광장은 노동력 착취가 아침부터 밤까지 이루어진다. 주스 파는 상인들은 모두 일꾼들을 두고 있는데, 이들은 박자에 맞춰 반복된 동작으로 바쁘게 움직인다. 공장 노동자들이 작업복 대신 전통의상을 입고 있다고 보면 된다. 도시 상점의 종업원들은 호객용 미사여구를 하루에 족히 1천 번은 말해야 한다. 기계적으로 같은 질문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콜센터 상담원들을 떠올리면 된다. 상업활동으로 과열된 이 도시 한가운데에서 장사 열기에 지친 것은 사람뿐이 아니다. 마치 로봇처럼 피리 소리에 맞춰 종일 움직여야 하는 뱀마저 과로사한다.

노동력 착취 심각… 혁명 진원지로

그러나 시민들이 일어나 혁명운동을 조직한 곳은 다름 아닌 이곳 마라케시, 즉 자본 착취자들의 환상에 종속돼버린 마라케시이다. 민주화는 마라케시의 일상을 중단시켰고, 민중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관광산업에 의해 시민들조차 이른바 마라케시의 토속적 모습으로 홍보된 이미지에 맞게 행동하도록 한 곳에서 말이다. 지난 2월 20일 시위 덕분에(15) 마라케시는 더 이상 관광도시가 아닌, 정치공동체의 지역 근거지로 떠올랐다.

글•알랑 포페라르 Allan Popelard, 폴 바니에 Paul Vannier

번역•김윤형 hibou98@naver.com

<각주>
(1) 폐쇄적인 외형 구조이며, 안뜰을 중심으로 구획된 집.
(2) ‘Quand les politiques français jouent les bronzés à Marrakech’, <L’Express>, Paris, 2011년 1월 13일.
(3) 사회학자 미셸 팽송과 모니크 팽송-샤를이 만든 표현이다.
(4) Jean-Paul Enthoven, <Ce que nous avons eu de meilleur>, Le Livre de poche,  Paris, 2008.
(5) Jean-Paul Enthoven, op. cit.
(6) Thorstein Veblen, <Théorie de la classe de loisir>, Gallimard, coll. ‘Tel’, Paris, 1979.
(7) 북아프리카의 옛 명사층.
(8) Patrick Festy, Mohamed Sebti, Youssef Courbage, Anne-Claire Kurzac-Souali, <Gens de Marrakech. Géo-démographie de la Ville rouge>, Les Editions de l’INED, Paris, 2009.
(9) Ibid.
(10) David Harvey, <Géographie de la domination>, Les Prairies ordinaires, Paris, 2008.
(11) Lire Juan Goytisolo, ‘Jemaa-el-Fna, patrimoine oral de l’humanit?’, <Le Monde diplomatique>, juin 1997. ‘Comprendre le réveil arabe’, <Manière de voir>, n°117, juinjuillet, 2011.
(12) <La perle du Sud est le nouveau Saint-Tropez marocain!>, 갈라, 파리, www.gala.fr.
(13) 부유층에 의한 도심 내 빈곤층 및 서민지구 재개발을 의미한다.
(14) <Gens de Marrakech>, op. cit.
(15) 지난 2월 20일 시위는 지난 1월 말 ‘아랍의 봄’ 분위기에 힘입어 페이스북에서 시작됐다. 페이스북을 통해 ‘민주주의, 정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2월 20일 시위가 조직됐고, 이후 모로코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개최됐다. 시위운동은 헌법 개혁 계획이 충분치 못하다며, 지난 7월 1일 실시된 헌법 개혁 관련 국민투표 불참을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