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스탑, 플랫폼 포퓰리즘

2021-02-26     에브게니 모로조프 | 언론인

지난 1월, 온라인 개인 투자자들이 똘똘 뭉쳤다. 이들은 대형 헤지펀드가 하락에 베팅했던 기업의 주식을 대량매수해 주가를 끌어올렸다. 이것은 혁명인가, 기성질서의 전복인가?

 

게임스탑 주가 폭등의 여파는, 전 세계의 금융시장에 전파되며 큰 혼란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 사태는 개인 투자자들이 무소불위의 소수 헤지펀드에 굴욕감을 안겨준 해프닝 이상의 의미가 있다.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 난입 사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두 사태 모두 기득권에 대한 누적된 반감이 폭발하여, 인터넷 커뮤니티 이용자들의 주도 하에 기성질서의 총아로 불릴 만한 기관에 반기를 들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싱턴의 폭도들에게는 끊임없이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 데 반해, 반(反)월가 십자군은 비난을 비껴갔다. 투기 자본의 탐욕에 맞서 부실기업 주가 방어에 나선 이들 지하 혁명가는 여야 양측의 공감을 얻었다. 이 두 반란에서 디지털 반문화 운동가들이 취할 만한 교훈은 자명해 보인다. 기득권에 저항하는 반란이 승리를 거두려면 ‘남부연합 깃발’을 흔들며 담벼락을 넘는 대신, 스톡옵션과 파생상품 거래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리력을 행사하며 벌이는 혁명은, 트위터나 TV 방송에 실시간 중계될 수는 있다. 그러나 엑셀 스프레드시트를 저장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다.

이번 게임스탑 운동에 쏠린 이목은 헤지펀드에 대한 부정적인 평판을 방증한다. 물론, 여론의 반응에 비춰보면 불분명한 부분도 있다. 바로 온라인 저가 수수료 증권 거래 서비스의 부상과 함께 양산된 ‘민주화’ 담론이다. 이런 증권 플랫폼 중에서도 로빈후드(Robin Hood)는 게임스탑 반란에 디지털 인프라를 제공했다. 로빈후드의 창립자들이 밤낮으로 쉬지 않고 떠벌리는 구호에 의하면 이 회사의 설립 목적은 ‘금융 민주화’다. 이런 수사는 1970년대 초 뱅가드그룹의 사명(일반 시민들도 투자할 수 있도록 간단하고 안전하며 저렴한 금융상품을 만들 것)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로빈후드는 평범한 월가의 증권 중개회사와의 차별화를 추구하며, ‘실리콘 밸리에서 탄생한 혁명적이고 파괴적인 세력’이라고 자사를 규정한다. 로빈후드의 ‘민주화’는 뱅가드(Vanguard)나 블랙록(BlackRock)이 아니라 우버, 에어비앤비, 위워크의 ‘민주화’와 맥을 같이 한다. 이들 거대 디지털기업은 각각 교통, 주택, 사무실의 신속한 ‘민주화’를 약속했었다.

얼마 안 있어 이 신생산업은 ‘온라인 서비스로서의 민주주의’라는 아름다운 약속을 내걸고 전 세계에서 ‘민주화’를 목표로 반려견 산책, 육아, 다림질 등 경계를 넘나드는 사업을 전개했다. 이런 일상적인 일들이 대체 얼마나 억압적이고 전체주의적이기에, 급진적인 ‘민주화’가 필요한 것일까?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이런 사업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지속된 저금리 기조에 갇혀 투자처를 찾던 벤처투자자와 기관투자자의 자금으로 실현됐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우버나 위워크와 같은 기업을 몇백만개나 양산해내는 전방위적 ‘민주화’ 사업은, 자유민주주의의 참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는 일본 대기업 소프트뱅크나 사우디 정부의 투자를 받았다. 이런 금융의 흐름은 과거 유료 서비스였던 이메일, 카드, 공급과 수요 연계 등을 공식적으로 ‘무료화’하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해 발전, 사회적 유동성 등의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이들 플랫폼이 주장하는 불가피한 ‘민주화’의 과정은 대개 단순한 산술 계산의 산물이었다. 위워크는 결국 계산착오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도산을 막기 위해 투자자들로부터 10억 달러를 긴급 수혈 받은 로빈후드가 더 나은 운명을 맞이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계획은 대부분 계획에 그쳤다.

 

실리콘밸리와 월가 사이에 낀 플랫폼 포퓰리즘

그렇게 디지털 산업은 전 세계에 ‘포퓰리즘’을 전파하는 주요 공급자가 됐다. 이 말이 과장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스티브 배넌(전 백악관 수석고문), 빅토르 오르반(헝가리 총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터키 대통령)과 포퓰리즘을 연관 지을 수 있다면,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나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도 가능할까? 가능하다. 또한, 연관 지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그동안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원색적이고 독기 서린 국가주의적 ‘포퓰리즘’에 눈이 팔려, 세련되고 범세계적이며 온화한 ‘플랫폼 포퓰리즘’의 부상에서 실리콘밸리가 차지하는 비중을 눈여겨보지 못했다.

‘플랫폼 포퓰리즘’은 세상이 우리가 생각하는 바와 다르다는 점을 음모론에 버금가는 방식으로 거듭 강조하면서 성장을 구가한다. 유수 기업이나 택시 회사, 호텔, 투자 자본 등은 이익을 얻는다면 게임의 규칙도 서슴없이 바꿔놓았을 것이다. 디지털 기술이 약속하는 혜택은 ‘전복’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다. 플랫폼들은 이를 위해 자본주의 세력이 멋대로 활보하게 해서 디지털 시대 이전의 야만적인 잔재를 문명화하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실리콘밸리와 월가 사이에 낀 플랫폼 포퓰리즘의 역할은 다소 역설적이다. 인류의 안녕을 위해 더 야만적인 자본주의의 족쇄를 풀어서 자본주의를 견제하겠다는 약속을 한다. 여타 ‘포퓰리즘’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포퓰리즘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정책을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이들 투자자본이 대학지원과 노동자연금에 들어가는 재원을 날려버려도 어쩔 수 없다. 노동자들은 로빈후드로 인해 연기금을 포기해야 한다.

디지털 시대 이전의 경직성이 민주국가(자본주의국가더라도)의 근간인 법치주의의 존중에서 비롯됐다는 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플랫폼 포퓰리즘’이라는 뒤집힌 세계에서는 ‘민주화’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원칙을 해체하고, 디지털화와 투자자들의 무한한 재원이 부추긴 영구적인 경제 압력에 민주주의 원칙을 종속시키기만 하면 된다.

플랫폼 포퓰리즘이 기만적인 서사를 택해, 결국은 소프트뱅크와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점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플랫폼 포퓰리즘은 일관된 철학도 없이 결과가 아닌 절차에만 관심을 보이면서, 관료주의의 흉계와 쓸모없는 법치를 무시하고서도 여전히 자율성과 주도권을 손에 쥐고 있다는 점을 과시하려 한다. 장기적인 관점의 정책을 위한 노력이 무색할 지경이다.

분노에 차 게임스탑 사태에 동참했던 개미군단은 대부분 이번 일로 얻는 실리는 제한적이고 일시적일 것이라고 내다본다. 장기적으로는 또 다른 투기 자본이 이익을 가져갈 것을 안다 해도, 월가의 기득권을 응징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재확인하는 기쁨을 누군들 거부하겠는가?  

 

 

글‧에브게니 모로조프 Evgeny Morozov
<The Syllabus> 포털 설립자이자 발행인. 『Pour tout résoudre cliquez ici: L’aberration du solutionnisme technologique 이곳을 클릭해서 모든 것을 해결하세요, 기술 해결주의라는 착각』(FYP Éditions, Limoges, 2014)의 저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