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독재에 도전하는 미얀마 청년들

2021-02-26     크리스틴 쇼모 l 기자

총선 이후 권력을 뺏길 것이 두려웠던 미얀마 군부는 더욱 강경한 탄압을 강행하며 정권을 잡고, 선출된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은 ‘워키토키’ 통신 장비의 불법 소지 혐의로, 윈 민 대통령은 재난관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3주가 흘렀고, 미얀마 전역에서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악이 퍼지던 밤이 지나 아침이 되자, 다시 희망의 빛이 떠올랐다.”

2021년 2월 14일, 라민 오 미얀마 프로듀서는 트위터 계정에 미얀마의 경제 수도 양곤의 거리에서 군부독재에 맞서는 시위대의 사진을 올렸다. 그리고 몽둥이로 무장한 남자들이 어둠을 무기삼아 혼란을 조장하고 있는 동영상도 함께 올렸다. 이 불한당들의 목적은 2월 1일 일어난 쿠데타에 반대하는 시위 참가자들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며칠 전 군부는 2만여 명의 일반법 죄수들을 석방했다. 이 술책을 보며 1988년 민주화 항쟁을 떠올리는 미얀마인들이 있을 것이다. 그 당시 풀려난 범죄자들은 거리를 휩쓸며 공포 분위기를 조장했고, 군부는 이를 구실삼아 갑작스레 군사개입을 했고, 학살을 정당화했었다. 

‘군부가 공격한다.’ ‘미얀마를 구하자.’ 이런 해시태그들이 수천 개의 트위터 계정에 올라왔다. 2월 1일 새벽 3시, 군부에 저항하는 구조요청은 지난 10년간 품어온 민주화의 희망을 박살냈다. 국가고문이자, 국민민주연맹(LND)정당을 이끄는 아웅산 수치를 비롯한 미얀마의 의원들이 체포됐고, 이로써 민간과 군부의 권력 공유는 종지부를 찍었다.(1) 지난 11월 총선에서 LND에 압승을 선사해준 미얀마 국민들의 바람은 짓밟혔다. 총 1,117개의 선출 의석 중에서 LND정당은 5년 전보다 61석이 늘어난 920석을 석권하며, 전체의 82% 차지했다.(2) 떼인 세인 전 사령관이 창당한 통합단결발전당(군부 측 정당 : 역주)은 전보다 117석이 줄어든 71석만 건진 채, 전체 선출직의 6.1%에 그쳤다. 군부는 부정선거가 아니고서는 이런 선거 대패가 불가능하다며 이를 쿠데타의 구실로 삼았다.

미얀마의 새로운 통치기관, 국가행정위원회의 위원장에 오른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은 군부 TV 채널에 계급장과 견장이 새겨진 푸른 셔츠차림으로, 미얀마 국기를 배경으로 등장했다. 시대착오적인 이미지다. 쿠데타가 발발한지 8일 만에 그는 처음으로 국민들에게 직접 호소하며 설득하려 시도했다. 그는 헌법에 근거해 권력을 넘겨받았으며, 1년간의 비상사태가 끝난 후 새로운 선거를 치를 것이라고 확언했다. 그는 이번 군부정권은 이전의 군부정권들과는 다르며, ‘규율을 준수하는 민주주의’를 열망한다고 약속했다. 그의 전임자들 중 한 명인 탄 슈웨(1992년 4월~2011년 3월 미얀마 최고지도자 역임)도 ‘규율을 준수하며 번영한’ 민주주의를 말했었다. 

 

“우리는 깨어있다”, “나는 분노한다”

거리에서, 온라인에서 시위 행렬이 늘고 있다. 아웅 퀴야우 모에 사회통합센터장은 미얀마의 군 병력에 빗대, ‘50만 명에 저항하는 5,400만 명의 민족’이라고 말했다. ‘독재에 맞서 결집하자’라는 시위 슬로건을 따라 공무원들, 은행원들, 의료진들, 교사들, 변호사들, 학생들이 매일 결집하며 시민불복종운동은 유례없는 규모로 번지고 있다. 2월 14일, 시위를 보장하기 위해 철도가 멈췄고, 결근한 직원들로 인해 공항은 혼란에 빠졌다. 불법적인 권력 찬탈에 맞서 항의하기 위해 의료진들은 병원에 출근하지 않았고, 병원은 문을 닫았다. 그만큼 긴급사태인 것이다. 미얀마 국민들로서는, 이제 겨우 맛본 자유를 빼앗길 수 없기 때문이다.

미얀마의 10~30대는 인터넷으로 전 세계와 연결된 열린 나라에서 성장했다. “우리의 눈과 정신은 깨어있다. 무엇보다 SNS를 통해서.” 쿠데타 이후 숨어 지내고 있는 젊은 시위자 틴자르 슌레이 위가 강조했다. 그들은 미국의 선거와 홍콩의 시위를 지켜보았고, 그들의 부모가 들려준 탄압의 역사와 그들이 살아온 나날의 차이를 알고 있다.       

사람들은 독재정권에 대한 두려움, 야간 체포, 만연한 감시, 잔인한 군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1962년 국가 통합의 이름으로 당선된 정부를 미얀마군은 쿠데타로 전복시켰다. 그리고 1990년 군부는 야당이었던 LND가 승리한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2월1일 잠에서 깨어나면서 내가 느꼈던 괴로움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다.” 한 수필가는 말했다. “헤아릴 수 없는 슬픔과 어마어마한 분노를 느꼈다. 과거로 회귀한 것 같다”(3)라고 덧붙인 그녀는 1988년 여름, 반 군부 시위에 참가해 감옥에 수감됐다. 양곤의 거리에 시위하러 나온 한 젊은 노동자도, “나는 분노한다”라고 말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통탄했다.

권력을 잡은 군부의 야심가 민 아웅 흘라잉은 2000년대 초부터 그의 전임자들이 미얀마를 국제사회의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고, 민주주의로 점차적으로 되돌리기 위해 시작한 완만한 발전과정을 무시했다. 군부가 2008년에 제정한 헌법에 의하면 주요 3개 부처인 국방부, 내무부, 국경경비대는 군부의 관할이다. 그리고 의회의 다수결 저지 비율로서, 의회의 25%는 군부에 할당했다. 그러나 총사령관은 불안하다. 이런 헌법상의 보장만으로는 세계로 개방된 사회에서 경제적, 사회적 대변혁이 일어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 간의 대화를 권하는 NGO단체 Synergie의 테 윈은 “총사령관은 아웅산 수치 없이, 혼자서 군림하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수십 년간의 고립 이후 정치적 해빙은 경제제재 철회로 이어졌다. 24.8%의 국민들은 여전히 빈곤선 이하에서 살고 있지만, 지난 10년 동안 미얀마의 빈곤율은 절반으로 줄었다.(4)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에는 연간 성장률이 7%에 달했다. “미얀마는 투자자들의 엘도라도였다.” 두 금융기관의 창립에 참여했던 한 은행가는 회상했다. 그는 “그러나 아웅산 수치 정부의 자유 정책으로 군이 소유한 그룹들은 경쟁이라는 거센 풍파를 겪었다. 군에는 더 이상 과거처럼 보장된 고정 고객이 없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사업가들과 분석가들은 “지난 10년, 사령관들은 거품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외국 특히 서양과의 모든 접촉을 차단했다. 그들은 미얀마예외주의를 구현해야한다고 확신하고 있다”라는 점에 의견이 일치했다. 

군은 사회와 특히 청년층과 괴리가 있다. “우리 세대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SNS와 함께 성장한 청년들은 말했다. 쿠데타 다음날, 그들은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슬로건, 게시글, 그림, 사진을 올렸다. 그들의 저항운동을 확산시키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다. 군부정권이 만들고자하는 세상을 알리기 위해 그들은 디스토피아 세계를 그린 시리즈 <블랙 미러>, <더 퍼지>를 참고했다. 태국 시위대와 마찬가지로 영화 <헝거 게임>의 세 손가락 경례가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의 사인이 됐다.(5)

 

계엄령도, 집합금지령도 두렵지 않다

“우리의 시위는 LND 정당이나 아웅산 수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시위는 상징을 넘어 여러 가지 성격을 지닌다. 군대의 정치 개입을 종결시키기 위해 사회 전체가 결집했다. 우리는 완전히 민주적인 헌법을 원한다.” 틴자르 슌레이 위가 말했다. 예술가인 그녀는 양곤 거리에서 벌어진 시위 행렬에 감동했고, 동감했다. 어른이든 아이든, 부자든 빈자든 모두 시위에 참여했다. 군인의 친족들이 거주하는 건물 주민들도 참여했다. 2월 8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5인 이상 집합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시위자 수는 늘었다. 야간 체포에 맞서는 이웃을 보호하기 위한 시민위원회가 조직됐다. 

쿠데타가 일어난 후 보름동안, SNS 덕분에 온라인과 거리에서 동시에 시민불복종운동을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었다. 2월 3일부터 군부가 페이스북 서비스 제공자에게 페이스북 정지를 요구했음에도 말이다. 페이스북은 ‘미얀마인들의 피’처럼 여겨졌고, 페이스북으로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다. 시위대의 절반 이상이 페이스북 계정을 가지고 있다. 10년 전에는 인구의 2%만이 휴대폰을 가지고 있었다.(6) 중국, 베트남과 마찬가지로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는 VPN을 설치해야만 한다. 청년층은 연장자들에 VPN 설치 방법을 가르쳐줬다. “우리는 이런 기술 덕분에 시위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한편, 이 기술이 약점이기도 하다. 군부는 언제든지 인터넷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틴자르 슌레이 위는 강조했다.

공공의 적인 군부에 맞선 이 전투는 집단의식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미얀마는 1947년 수립된 이래 민족 간의 불화로 곪아왔다. 다수를 차지하는 버마족과 인구의 1/3에 달하는 다른 민족과의 갈등으로 국호 ‘미얀마 연방’에는 결코 도달 할 수 없는 역사를 가졌다. 통일이라는 환상에 대한 보증이라고 스스로를 내세우는 군부가 이런 민족 간 분열을 유지시키고 있다. 70년 전부터 카친, 샨, 라킨 등 특히 천연자원 관리 지역 주변에서 미얀마 군과 소수민족 군대 간의 전투가 반복되고 있다.(7)

2015년 군대, 정부, 소수민족 대표가 모인 팡롱 회의 Ⅱ를 개최하면서 아웅산 수치는 좀 더 다양하고 균형 있게 대표자들을 선정해 국가를 구성하겠다고 약속했다. 논의는 제자리걸음중이다. 버마족인 군대와 LND 정당은 소수민족에 대해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불안정한 요소들이 중앙권력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한다”라고 분석가 카린 자케는 말했다. 아웅산 수치는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달려가, 로힝야족 인종 청소 혐의로 기소된 자신의 국가와 군대를 변호했다. 

버마족은 불교지만, 로힝야족은 무슬림이다. 2016~2017년 로힝야족 수비군이 국경 검문소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미얀마군이 잔혹한 군사작전을 펼쳤고, 70만여 명의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아로 탈출했다. 군부와 불교 민족주의자들이 인터넷에 퍼트린 헤이트 스피치에 감화된 미얀마 국민 대다수는 민 아웅 흘라잉 총사령관과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 편이었다. 아웅산 수치는 더욱 인기를 얻었고, 그녀의 정당은 총선에서 압승했다.

오늘날 군부정권에 대항하는 시민 불복종운동이 급부상하면서 여러 변명들이 퍼지고 있다. 사람들은 지난날 로힝야족의 운명에 대해 무심했음을 후회했다. 그들은 로힝야족을 적으로 간주했었다. 사회통합센터장은 어떤 통일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위급한 일은 군대를 청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우리는 군대에 맞서서 결집해야만 한다. 이것은 원칙에 대한 문제다. 정당하게 선출된 LND 정부가 쿠데타로 전복됐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미국은 미얀마 정부의 자산을 동결했고, 미얀마 군부에 대한 또 다른 경제적 제재를 숙고중이다. “내가 조언했던 외국인 투자자들은 모든 옵션을 재검토중”이라고 전략분석가는 세부적인 설명 없이 말했다. 미얀마의 첫 번째 교역 상대국인 중국은 ‘정부의 변화’라고만 언급하고는 크고 작은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8) 두 번째 교역국인 일본은 군사 쿠데타를 비판했다. 그러나 나카야마 야스히데 방위차관은 “우리가 미얀마와의 교역을 중단한다면 미얀마군이 중국군과 더욱 결속할 것이며, 미얀마는 미국, 일본, 영국과 같은 자유 국가와 더 멀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9) 그러나 스즈키, 기린 등 여러 일본 기업들은 미얀마에서의 업무를 중단했다. 한편, 수브라마냠 자이샨카르 인도 외무 장관은 “일본과 인도가 복합운송 인프라를 건설 중인 칼라단 프로젝트를 중단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10) 프랑스 외무 장관 장이브 르 드리앙은 “EU는 현재 제재를 고려 중”이라고 말했다.(11)

그런 가운데, 과거로의 회귀를 상징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민주화의 결실이었던 시민의 안전과 사생활 보호법이 폐지됐고, 집에 투숙한 사람을 지역 당국에 신고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법이 제정됐다. 양곤과 미얀마 수도 네피도를 비롯한 미얀마 전역에 탱크가 주둔 중이다. 낮에는 미얀마 전국에 시위자들의 행렬이, 밤에는 체포가 이어진다. 인터넷은 오락가락하고 있다. 군부독재에 맞선 미얀마인들의 결의는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글‧크리스틴 쇼모 Christine Chaumeau 
기자

번역‧김영란
번역위원


(1) ‘L’icône de la démocratie birmane ménage les militaires 미얀마 민주주의의 아이콘이 군을 배려한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7년 1월호.
(2) 2020년 11월 8일, 미얀마는 상원, 하원과 지방의회 선거를 치렀다.  
(3) 응답자의 대다수는, 탄압에 대한 두려움에 익명처리를 원했다.
(4) <Poverty data : Myanmar>, 아시아개발은행, 2017년, www.adb.org
(5) Eugénie Mérieau, ‘En Thaïlande, les jeunes face à la monarchie et à l’armée 군주제와 군대에 맞선 태국의 청년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1년 1월호. 
(6) <Myanmar Telecommunications Sector>, Yangon Stock Exchange, 2018년 7월 30일, https://ysx-mm.com
(7) Renaud Egreteau, ‘Désunion nationale en Birmanie 미얀마의 국가 분열’, André et Louis Boucaud, ‘Plus de cent trente minorités 130개가 넘는 소수민족’,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각각 2012년 12월호, 2009년 11월호.
(8) ‘China’s ambassador to Myanmar says situation not what China wants to see’, <Reuters>, 2021년 2월 16일.
(9) ‘Japan defense official warns Myanmar coup could increase China’s influence in region’, <Reuters>, 2021년 2월 2일.
(10) Rahul Karmakar, ‘India-Myanmar Kaladan project in final stages : Jaishankar’, <The Hindu>, New Delhi, 2021년 2월 15일.
(11) ‘Birmanie : l’UE devra “envisager” des sanctions si l’état d’urgence n’est pas levé, selon Jean-Yves Le Drian 비르마니: 장이브 르 드리앙은 미얀마 비상사태가 철회되지 않는다면 EU는 제재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Le Figaro>(와 <AFP>), Paris,  2021년 2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