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연대할 것인가

반자본주의, 반인종주의, 생태, 페미니즘…

2021-02-26     프레데리크 로르동 l 경제학자, 철학자

모든 사회운동을 동시에 할 수 없다면, 과연 어디서부터 사회운동을 시작해야 할까? 지배에 저항하는 투쟁의 활동 반경이 제각각이라면, 우선 모든 투쟁의 정당성은 평등하다고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그리고 투쟁 간 관계가 절대적으로 분리됐다는 생각 대신 상대적 자치성을 인정하고 서로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자. 마지막으로, 다른 운동에 피해를 줄 수 있는 활동을 자제하자. 이같이 기본 원칙이 정립됐다면 이제 시작할 준비가 됐다.

 

오래된 전제부터 다시 논해보자. ‘반인종차별과 반자본주의 투쟁은 상호 연관돼 있다.’ 그렇다면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이는 간단하게 정의할 문제가 아니다. 꽤나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지배관계에는 ‘구조적’ 계급(1)이 존재하지만, 이 지배관계에 따른, 각 사회운동 사이의 상하구조는 명백히 규정돼 있지 않다. 더 우월하거나 더 열등한 사회운동이란 없다. 만일 상하관계가 존재한다면, 두 가지 측면에서 어리석은 일이다. 

우선 상징적인 측면에서다. 긴밀한 대화와 숙고 없이, 서로 다른 투쟁세력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결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각 사회운동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다른 세력을 종속시키려 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다. 두 번째로 전략적 측면에서다. 다양한 지배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오늘날의 상황에서 사회운동을 세분화하기는 어렵다. 이비스 호텔에서 파업 중인 객실 청소담당 흑인 여성에게 파업하는 ‘이유’를 종류별로 구분하거나, 순위를 매겨달라고 요청해보라. 이런 현실세계 속 지배관계의 복잡성 때문에, 하나에 대항해 투쟁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투쟁운동에도 참여한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다음의 네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1. 모든 투쟁이 평등하다는 인식이 없다면, 패권에 도전하는 세력이 하나로 뭉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평등’이란 양과 질을 모두 충족하는 평등을 말한다. 정당성의 무게는 같지만 각 사회운동의 활동 범위는 제각각이다. 물론 이 범위가 어느정도 겹치기는 하지만 지극히 일부일 뿐이다. 겹치는 범위 안에서는 다수의 지배관계가 구조적으로 중첩돼 존재한다. ‘각 투쟁 간에 어떤 상호관계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중첩된 일부의 영역이 어떤 방식으로 자리하고 있는지, 그 영역 밖에는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2. 중첩된 영역이 일부분에 지나지 않든, 그 안과 밖에 무엇이 있든 각 투쟁의 ‘상대적 자치성’을 인정한다는 점은 일맥상통한다. 

‘상대적’과 ‘자치성’. 둘 다 의미심장한 단어다. 반인종차별 투쟁이나 여성해방 운동의 자치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자본주의를 탈피하면 그에 대한 억압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불행히도 탈자본주의 사회이면서도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성차별, 혹은 전에 없던 새로운 계급구조를 가진 사회를 만드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투쟁에서 문제 삼는 억압은 그 존재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이지, 마치 파생상품처럼 자본주의라는 지배 매트릭스(그물망)를 기준으로 파생돼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것도 함께 사라지거나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3. 그러므로 모든 투쟁은 자치성을 지녔지만, 이는 상대적이다. 자본주의는 지배 매트릭스라는 특성으로 지배 계층 구조에서 우위를 선점한다.

이제 우리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2) 현대사회가 맞닥뜨린 모든 지배관계 중에서도 자본주의 지배관계는 다른 세력이 공격받거나 약해져도 굳건히 유지되는 위치에 자리한다. 사회에서 모방을 통해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약간의 조정이 필요할 때, 혹은 꼭 그래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자본주의는 기꺼이 이런 논쟁에 참여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기괴한 위선의 탈을 쓴 채 등장한다. 힐러리 클린턴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2016년 대통령 선거 캠페인에서 서슴없이 이런 발언을 했다. “우리가 만약 내일 대형 은행들을 무너뜨린다면, 과연 인종차별이 사라질까요? 성차별이 사라질까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사라질까요? 하루아침에 이민자를 향한 태도가 우호적으로 변할까요?”(3) 지난 수십 년 동안 사회교란에 일조한 단체(<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리베라시옹> 등)들의 활발한 활동을 지켜볼 시간은 충분했다. 힐러리 클린턴이 2016년 선거에서 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클린턴이 펼치던 교란과 대체 전략이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이 전략이 (위선적으로) 겨냥하던 사회운동 단체들도, 득보다 실이 크다는 점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이제 더는 ‘99%를 위한 여성운동’(4)과 같은 사회운동에 반자본주의를 끼워 넣지 않을 것이다. 이런 단체들은 단호하게 ‘반자본주의’를 고수하고 있지만, 여성운동 고유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한다. 바로 ‘상대적 자치성’이다. 그런데 이 ‘상대적 자치성’을 만든 주체는 다름 아닌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각 지배 간의 시너지 작용을 일으키고, 결과적으로 그 지배에 맞선 저항운동도 시너지 효과를 얻게 된다. 

여러 가지 현실이 유기적으로 결합됐던 이비스 호텔 객실 청소 담당 흑인 여성의 경우를 보자.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적 지배관계를 깎아내리려고 다른 지배관계를 이용한다. 그 결과, 임금차별을 겪은 여성일수록 성차별을 더 강하게 느끼고, 인종차별에 의한(5) 임금차별을 당해본 사람일수록 인종에 대한 억압을 더욱 강하게 깨닫게 된다. 자본주의 지배관계는 지배구조 상에서 우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다른 지배관계들을 움직일 수 있다. 그렇게 자본주의는 다른 지배관계를 한곳에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모든 투쟁세력을 결집하는 것은 사회운동가들의 오랜 염원이었다. 즉, 이 현상은 지속돼야 했다. 

그러나, 그러려면 우선 오랫동안 굳건하게 유지되던 자본주의의 우월한 위치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리고 원래 각자 나름의 정당성을 가지고 자력으로 생겨난 다양한 사회운동이 ‘상대적’ 자치성이라는 틀 안에 들어와야 했다. 즉, (힐러리 클린턴이나 <리베라시옹>처럼) 이해관계 때문에 각각의 사회적 투쟁이 자본주의와 별개의 문제라고 여기는 ‘절대적’ 분리 상태에서 벗어나야 함을 의미했다.

 

4. 절대적 분리 상태에서만 벗어날 게 아니라, 다른 사회운동에 대해 무관심하던 경향 또한 벗어나야 했다.

무관심 때문에 각 대의의 배타성에 갇혀 다른 운동의 가치를 무시하고 자기 대의에만 몰두하면, 결국 모두 손해를 입게 된다. 각자가 자신의 ‘일’을 우선시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다른 이의 ‘일’에 피해를 주면 문제가 된다. 폴 B. 프레시아도 같은 지식인이 구스 반 산트 감독이 대형 럭셔리 브랜드 구찌의 의뢰로 제작한 영상 <아티(Arty)>에 출연해 성소수자 인권 운동을 강력히 변호한다. 

그런데, 구찌는 노동자 착취에 탈세 혐의까지 있는 기업이다. 임금 투쟁 운동가들은 프레시아도에게 고마운 마음 따위는 전혀 없을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의 발언에 대한 풍자처럼, 사람들이 ‘최악’에 맞서기 위해 집결하는 ‘순수한’ 경우 즉, 특정 운동(이 경우 성소수자 운동)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만 관련된 일이고 자신들이 속한 세계에서는 문제시되지 않는다는 지독한 생각을 서민층에게 퍼트리려고 하는 경우, 모두가 하나로 뭉치는 듯하다. 

마찬가지로 엠마누엘레 코치아 같은 철학자는 카르티에 재단이 주관하는 전시회 <나무, 바로 우리(Nous Les Arbres)>(6)와 협력함으로써 지구와 나무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표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전시회 카탈로그와 건축물은 아름답다. (‘과학 자문’이 말하듯) 건물은 이미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건물 전체는 찬사 받을 만하다.(7) 재단이 주최하는 예술계 행사 ‘수아레 노마드(soirées nomades)’는 세련된 최신유행으로 가득하다. 이 럭셔리 보석 브랜드가 오래된 정계 모임에 우리를 들여 보내준다면, 카르티에가 부덕하다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무지개 연합’, 반자본주의와 반인종차별 구현

나무를 보호한다는 대의가 인간과 관련된 대의, 일례로 임금문제와 동떨어져 있음은 명백하다. 그런데, 이 나무를 위한다는 대의가 스스로에게마저 반할 일을 하지는 않았을까? 잡지 <트루 누아르>에서 엘리즈라는 익명의 저자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투쟁과정에서 과연 어떤 부류와 손을 잡을 것인가?” “이종 가부장제, 자본주의, 식민주의 및 추출주의(지구에서 천연자원을 추출해 세계시장에 판매하는 시스템-역주)”에 대항해 모든 사회운동을 집결할 새로운 동맹처를 찾던 프레시아도가 결국 극단적인 자본주의 단체와 손을 잡았다.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8) 

만일 프레시아도가 ‘내부’로부터 전복을 꾀하는 ‘전략적’ 행동을 한 것이고,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교묘하게 꾸며진 반자본주의 연설을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것이다. 또한 자본주의의 가공할 힘을 무시한 것이다. 몇 번이고 반복적으로 겪어온 자본주의의 파괴력,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무로 되돌린 후 자신에게 유리하게 다시 판을 짤 수 있는 자본주의의 역량을 말이다.

체제의 전복도 예외는 아니다. 프레시아도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는 “구찌와 일하면서 전례 없는 자유를 느꼈다”(9)라고 강조한다. 어쩌면 문제는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문제는 대의의 ‘순수성’도 아니고 전략의 효율성도 아니다(결국 주류 대중매체에 접근할 때 항상 제기되는 문제도 이와 같다). 문제는 문화가 지닌 세련된 매력과 아낌없이 돈을 뿌리는 자본주의 기관의 유혹이다.

저항을 지속하기 위해 누구와 관계를 맺을 것인가? 이는 필수적인 고민이다. 특히 그 특정관계가 다른 이의 투쟁에 피해를 줄 때에는 더욱 그렇다. 엠마누엘레 코치아는 식물에만 신경 쓸 뿐, 임금 노동자들에게 거의, 혹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지식인이 열의를 보이는 주제도 그 존엄성은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그 존엄성이란 나무를 향한 열정이 자본주의 단체를 정당화하는 데 일조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야 얻어지는 것이다. 

 

돈벌이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이 자본주의 단체들은 문화예술계를 후원하는 박애주의적 예술 애호가 행세를 한다. 그럼으로써 자본주의의 도덕성을 세탁한다. 즉 자본주의가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며, 돈벌이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걱정하므로 결국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퍼트리려 한다. 맙소사, 이는 결국 노동자는 노동자로 남을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선언한 셈이다. 그리고 임금 노동자들을 학살한다(전기톱을 손에 든 대형 럭셔리 브랜드 그룹들도 이에 포함된 지 오래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나무라니! 

“현대미술 박물관과 재단들은 쌍안경이 됐습니다. 그들을 통해 우리의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죠.”(10) 코치아는 그렇게 믿는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런 현대미술 재단들은, “우리의 미래”를 카르티에, 구찌, 그리고 베르나르 아르노라는 쌍안경을 통해 고찰하라고 종용한다. 코치아는 이런 식으로 그의 소중한 ‘나무’를 구할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지식인의 정치적 탈선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사회운동의 공존을 위한 정치적 윤리규범을 성문화해야 한다. 그 첫 번째 원칙은, 다른 사회운동에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서로를 향한 비방부터 자제해야 한다. 이는 쓸모없는 분열일 뿐이다. 또한, 객관적으로 다른 투쟁에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장소나 지원, 혹은 ‘동맹’이나 만남을 자제하자. 예를 들면, 유로존을 벗어나길 주장하는 국민연합이나 ‘좌·우파 분리독립주의자’(11) 같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을 지지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 혁명’으로 노동자 계급을 구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운동가들이 계급투쟁을 우선한다는 이유만으로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가지 말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작은 기적은 일어날 수 있다. 예컨대 1984년 파업 당시 영국에서 일어난 레즈비언·게이 단체의 광부 지지 운동(Lesbians and Gays Support the Miners)이 있다.(12) 최근 일어난, 인공수정(13) 허가 확대를 촉구하는 ‘모두를 위한 인공수정’ 운동 당시 여성단체 ‘빵과 장미로부터(Du Pain Et Des Roses)’가 토탈 정유공장 노동자 지지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더욱 놀라운 사례가 있다. 1968년 시카고의 가난한 백인 노동자 단체였던 ‘청년 애국자(Young Patriots)’는 백인 빈곤층의 전형(컨트리 음악, 총기 소지, 연합국기 등)이었음에도 흑인 무장조직 흑표당(Black Panther Party)과 협력했다.(14) 일리노이주 흑표당 당수는 총기에 관한 관심을 줄이고 구체적인 행동계획을 세웠고, 실제로 반인종차별과 반자본주의 아래 모든 세력을 집결해 연합을 구축했다. 놀랍게도, 실재했던 소수정당 연합인 무지개 연합(Rainbow Coalition)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적 같은’ 협동은 보편적 질서로 편입된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경제학자, 철학자

번역‧정나영
번역위원


(1) 이 글이 발췌된 『공산주의의 얼굴 Figures du communisme』15장에 소개된 논문 ‘반인종차별과 반자본주의. 패권에 대항할 동맹을 구축하기 위한 요소 Anti racisme et anticapitalisme. Éléments pour un bloc contre-hégémonique’ 참조.
(2) 같은 문서.
(3) Paul Heideman, ‘Class rules everything around me’, <Jacobin>, 2019년 5월 3일.
(4) Cinzia Arruzza, Tithi Bhattacharya, Nancy Fraser, 『99%를 위한 페미니즘 선언. Féminisme pour les 99 %. Un manifeste』, La Découverte, coll. Cahiers libres , Paris, 2019.
(5) 특정 출신이나 피부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의 사회적 관계 내에서 (지배받는) 위치를 의미한다. 
(6) <나무, 바로 우리 Nous les arbres>, Fondation Cartier, Paris, 2019년 7월 12일 ~ 2020년 1월 5일.
(7) Emanuele Coccia, ‘나무가 ‘우리’를 말하다 Les arbres disent “nous”’, <AOC>, 2019년 10월 1일, https://aoc.media
(8) Élise, ‘À quel monde nous lions-nous ?’, <Trou noir>, 2020년 12월 28일, http://trounoir.org
(9) 같은 문서.
(10) Emanuele Coccia, ‘나무, ‘우리’를 말하다 Les arbres disent “nous”’, art. cit.
(11) Frédéric Lordon이 쓴 다음 두 기사 참조. ‘명확성 ‘Clarté’’, ‘자금원 La Pompe à phynance’, 2015년 8월 26일, https://blog.mondediplo.net
(12) Kate Kellaway, ‘When miners and gay activists united : the real story of the film Pride’, <The Guardian>, 런던, 2014년 8월 31일.
(13) 인공수정(Procréation médicale assistée).
(14) Michael McCanne, ‘The Panthers and the Patriots’, <Jacobin>, 2017년 5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