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갯빛 ‘유고 노스탤지어’

2011-08-08     장아르노 데랑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비극적으로 해체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 각 공화국 내에서는 옛 유고연방에 대한 향수가 어느 때보다 강하다. 슬로베니아에서 마케도니아에 이르기까지, ‘티토 동지’는 여전히 숭배 대상이다. 국제사회에서 강한 국가로 인정받으려는 욕망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화된 기억이 뒤섞인 이 감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2011년 봄, 유로화 동전에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붉은 별이 등장했다. 옛 유고연방에 속한 국가 중 처음으로 슬로베니아가 유럽연합(EU)에 가입했고 2004년 유로존의 ‘새 회원국’이 됐다. ‘스탄’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프랑크 로즈만의 얼굴이 2유로짜리 기념 동전에 새겨졌다. 그는 1944년 11월 의문의 죽음을 당한 유고 파르티잔의 지도자다. 슬로베니아 우파들은 이를 못마땅해했지만, 수집가들과 ‘유고연방에 향수를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기념 동전 2유로를 찾느라 혈안이 되었다.

티토 추념하는 축제 부활, 대성황

지난 5월 25일, 베오그라드에서 ‘스타페타’(Stafeta) 축제가 거행됐다. 지난 25년간 스타페타가 그토록 성대하게 열린 것은 처음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옛 유고연방의 종신 대통령 티토가 잠든 부자 동네 데딘제의 ‘꽃의 집’ 앞에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붉은 깃발과 옛 유고연방 국기를 흔들며 ‘젊음의 성화’(Stafeta)가 도착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올해는 성화가 크로아티아 서쪽 이스트리아의 우마그에서 출발했다. 1945년부터 시작된 스타페타는 옛 유고연방의 주요 축제였다. 매년 유고연방의 다른 도시에서 출발한 성화는 여러 주자들의 손을 거쳐 ‘젊음의 날’이라고 명명된 티토의 생일 5월 25일에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이렇게 운반된 성화는 유고 인민군대 경기장에서 성대한 기념식과 함께 최종적으로 티토 장군의 손에 넘겨졌다.

스타페타는 1980년 5월 4일 티토가 서거한 뒤에도 몇 년간 지속되다가 1987년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다. 3년 전에 다시 부활된 이 축제는 해가 갈수록 인기를 더해가고 있다. 베오그라드에서 성화의 도착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1만~2만 명을 헤아렸다. 그중에는 군 제대자가 많이 눈에 띄었다. 평생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스타페타에 참가했다고 자랑하는 이들도 있었다. 개척단 제복을 입고 부모나 조부모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도 있었고, 20~30대 젊은이도 많았다. 그러나 40~50대는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이들은 유고연방 해체와 전쟁을 경험하며 성장한 세대다.

군중은 확성기에서 나오는 티토의 육성을 경청한 뒤 그와 같은 이름의 조카 요시프 브로즈(티토의 풀네임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다)의 연설을 들었다. 요시프 브로즈는 최근 세르비아의 다양한 공산주의 그룹들을 규합해 새 공산당을 창당하고 당수를 맡고 있다. 그는 리비아 대사관에서 온 사절들에게 긴 인사말을 건넨 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통일 유고슬라비아가 새롭게 부활하고, 세르비아는 절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다(1999년 NATO의 폭격 뒤 12년이 지난 지금 세르비아는 NATO 가입을 고려하고 있다).

요지프 브로즈의 신당은 아직 선거에 후보자를 낸 적이 없다. 지지자들도 신원을 공개하지 않는다. 이번에 우마그의 성화 출발을 조직한 크로아티아의 공산당 중앙위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2010년 몬테네그로의 티바트에서 성대하게 개최된 스타페타는 올해보다 덜 정치적이고 축제적인 분위기는 더 강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연맹의 적자를 자임하는 각 공화국의 단체들이 별로 신뢰를 얻지 못하는 상황과, 슬로베니아 사회학자 미차 벨리코냐가 ‘유고노스탤지어’ 혹은 ‘티토스탤지어’라고 명명한,(1)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감정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체 게바라 못지않은 ‘티토 브랜드’

이런 ‘경향’은 정치적이기보다 문화적인 것으로 봐야 할까?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에는 ‘카이 마르살로트’(장군님 댁)라는 유명한 식당이 있다. 종업원들은 개척단 제복을 입고 붉은 스카프를 두른 채 서빙하고, 벽에는 티토 사진이 가득하다. 옛 유고연방 공화국들에 이런 형태의 식당이나 카페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사라예보나 베오그라드에서는 나이트클럽들까지 가세해 ‘티토 콘셉트’로 인기를 끌고 있다. 벨리코냐는 ‘티토 브랜드’가 체 게바라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마케팅 상품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유고슬라비아는 ‘가상세계’ 속에서 여전히 존재한다. 많은 인터넷 사이트들이 경쟁적으로 티토 장군의 육성이나 과거 유고연방의 대규모 행사 동영상들을 올려놓았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일반 영사관’(2) 같은 사이트에 들어가서 클릭 몇 번만으로 ‘유고연방 여권’을 발급받을 수도 있다.

‘탈민족주의’와 ‘민족주의 보충물’ 사이

몇몇 망명자 역시 이 ‘가상 유고슬라비아’에서 살고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 가정에서 태어난 벨리보르 촐리치도 그중 한 명이다. 유고연방 수호를 위해 활동하다가 1993년 영국으로 망명해 살고 있는 그는 무국적을 고수하며 ‘유고슬라비아’ 이외의 어떤 ‘국가적’ 정체성도 거부한다. 가장 최근에 나온 그의 저서는 프랑스어로 쓰였지만(3) 그 전에는 모두 ‘세르보크로아트어’로 집필됐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모국어를 ‘세르비아어’ 혹은 ‘크로아티아어’로 정의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세르보크로아트어 혹은 크로아토세르비아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언어가 되었다. 옛 유고연방 국가들은 이제 공식적으로 각자의 국어를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 몬테네그로어, 세르비아어라고 부른다. 그러나 언어학자들은 지역별로 발음이나 어휘에 다소 차이가 있을지언정 이 언어들이 모두 동일한 언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따라서 오늘날 세르보크로아트어로 말하거나 쓴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정치적 선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말’ 혹은 ‘모국어’라는 표현으로 에둘러 표현하는 것과는 사뭇 뉘앙스가 다른 것이다.

공화국마다 크고 작은 질감차

올해 베오그라드에서 개봉한 영화 <시네마 코뮤니스토>(Cinema Komunisto)는 큰 성공을 거뒀다. 유고슬라비아 영화의 역사를 다룬 이 다큐멘터리에는 평생 8천여 편의 영화를 봤을 정도로 열렬한 영화광이던 티토에 대한 얘기도 등장한다. 티토의 전속 영사 기사는 매일 밤 티토에게 보여줄 새 영화를 고르느라 진땀을 뺐다고 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큰 성공을 거둔 유고 영화들 뒤에 엄청난 지원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특히 파르티잔 투쟁과 티토에 관한 영화가 많이 제작됐는데,(4) 그중 한 영화에서 리처드 버튼이 티토 역을 맡기도 했다.(5)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이 다큐멘터리는 젊은 여성감독 밀라 투라일리치의 작품이다. 그녀는 유고연방이 해체됐을 때 불과 10살 남짓한 소녀였다.

이 ‘유고노스탤지어’는 공화국별로 어떤 차이를 보일까? 우선 눈에 띄는 차이는 유고연방의 경험이 민족 정체성 형성에 강한 영향을 미친 지역, 가령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마케도니아뿐 아니라 슬로베니아에서도 과거에 대한 향수가 상대적으로 더 강하다는 사실이다. 슬로베니아와 마케도니아는 1945년 유고연방공화국에 편입되기 전까지 국가조직을 가져본 적이 없는 지역이다. 마케도니아어는 제2차 세계대전 뒤에야 공식 언어로 체계화됐고, 티토 정부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민족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마케도니아의 민족 정체성을 인정해주었다. 한편 세르비아인과 불가리아인은 “있지도 않은 마케도니아어와 마케도니아 민족을 만들어냈다”며 티토를 비난했다. 같은 방식으로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보스니아 무슬림의 고유한 정체성도 인정했다.(6)

세르비아의 급진민족주의를 대표하는 작가 도브리카 초시치는 자신의 소설 주인공의 입을 빌려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다”고 말한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적 담론 속에서 유고연방은 두 나라의 민족주의 발전을 가로막은 장애물이자 마케도니아·슬로베니아·보스니아의 민족 정체성을 탄생시킨 주범으로 묘사된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에서는 ‘유고노스탤지어’가 탈민족주의적 경향과 연결되는 반면, 그 밖의 공화국에서는 민족주의 감정의 보충물로 기능한다. 티토의 민족적 정체성이 각 공화국의 민족적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용되기도 한다. 슬로베니아 국경과 멀지 않은 크로아티아 서쪽에 자리잡은 티토의 고향 쿰로베크에는 최근 티토를 기리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7) 그러나 1990년대만 해도 일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는 “세르비아가 세르비아어조차 제대로 못하는 인물에 의해 35년이나 통치됐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티토를 두고 하는 말이다.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지만, 각 공화국에서 옛 유고연방을 이상화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오직 알바니아인만이 이런 ‘유고노스탤지어’ 혹은 ‘티토스탤지어’에 상대적으로 무감각하다. 그 이유는 오랜 기간 코소보가 겪은 억압, 유고연방 공화국이 아닌 별도의 자치지역이라는 특수성, 정체성과 상징의 차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설명할 수 있다. 슬라브 민족에 속하지 않는 알바니아인에게 유고슬라비아는 ‘남슬라브인’을 위한 국가였을 뿐이다.

연방 붕괴 원인 분석도 제각각

그러나 알바니아인 모두가 옛 유고연방을 욕하는 것은 아니다. 세르비아 남부의 가난한 알바니아 마을 프레셰보는 지난 수십 년간 주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 타향으로 하나둘 떠나면서 텅 비게 되었다. 1950년대에는 이민자 물결이 주로 베오그라드로 향했지만 그 뒤에는 서유럽 국가들로 몰려들었다. 바이라크타리는 오랫동안 베오그라드의 건설 현장에서 일한 뒤 벨기에로 이민을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유고슬라비아 출신 노동자단체의 열성적인 활동가가 됐다. 퇴직 뒤 조용히 여생을 보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그는, 요즘 주민들에게 열심히 알바니아 민족주의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베오그라드의 붉은 별 축구팀의 열렬한 팬이기도 하다. 그는 몇몇 친구와 함께 거의 음성적인 방식으로 몰래 이 팀을 응원한다. 붉은 별 팀을 공공연히 응원하는 것은 자신을 ‘세르비아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베오그라드와 유고슬라비아, 붉은 별은 내 청춘”이라고 고백한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알바니아계 주민 수만 명이 베오그라드에서 별 어려움 없이 살았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권력을 잡은 뒤 이들은 모두 베오그라드를 떠나야 했고, 타향에서 지금껏 향수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다.

향수, 고통스러운 현실 반증

그렇다면 유고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해체된 때는 정확히 언제이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5월 말 베오그라드에서는 민족해방전쟁 세르비아 참전 용사들이 개최한 토론회에 옛 유고연방의 최고위층 인사들이 초대됐다. 1990년 1월 눈물을 머금은 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연맹의 마지막 총회를 마치고 제14호실을 떠나야 했던 슬로베니아 출신의 공산당 지도자 소냐 로카르는 “당시 지도자들이 모두 놀라서 당황한 상태였고, 미래에 대해 어떤 전망도 갖지 못했다”고 회고한다. 유고연방 집단지도 체제(8)의 마지막 임기 직전에 전체 의장직을 수행한 보스니아 출신의 라이프 디즈다레비치는 유고연방 해체를 ‘외부의 적’에 의한 것으로 보는 몇몇 참가자와 달리 그 이유를 연방 체제의 내적 모순에서 찾는다. 반면 정치학자이자 현재 이보 요시포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의 자문역을 맡고 있는 데야노비치는 세르비아 주간지 <브레메>(Vreme)에 기고한 글에서 유고연방의 해체를 공산권 몰락이라는 배경 속에서 분석하고 있다.(9)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는 그 ‘차별성’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장벽 붕괴가 초래한 변화의 파도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유고슬라비아의 정체성은- 다시 말해 남슬라브인들의 동맹- 19세기 크로아티아 지식인들에 의해 처음 형성됐다. 따라서 20세기 사회주의 건설 과정과 필연적인 관련을 맺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상징적 차원에서 옛 유고연방에 대한 기억은 모든 사람이 그럭저럭 잘살았던 자주관리 사회주의의 ‘좋았던 한 시절’- 폭력과 사회적 억압으로 점철된 수년간의 ‘전환기’와 대비되는 시절- 에 대한 향수와 연관된다. 심지어 현재 모든 공화국이 이론상 가입 준비가 돼 있는 EU에 대한 대안으로 유고연방의 부활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스코페의 재래시장에서 만난 한 터키 출신 이발사의 말은 단호했다. “왜 그토록 EU에 가입하지 못해 안달인가? 만약 티토가 살아 있었다면 유럽이 유고슬라비아에 편입돼야 했을 것이다.”

옛 유고연방 공화국들에서 유고노스탤지어는 기억을 둘러싼 싸움의 최전선이다. 예전에 각 공화국들은 ‘처음으로 반파시스트 봉기’가 일어난 날을 국경일로 지정했다. 세르비아는 1941년 7월 7일, 몬테네그로는 7월 13일, 크로아티아는 7월 27일 등으로 각각 날짜가 달랐다. 그러나 이날들은 더 이상 국경일이 아니다. 7월 13일을 국경일로 정한 몬테네그로는 예외다. 이 날짜가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처음으로 선언한 날과 겹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날은 ‘다의적인’ 의미의 국경일이 되었다.

크로아티아는 이미 1990년대 초, 7월 27일을 국경일 목록에서 삭제했다. 이날은 크로아티아 민병대 우스타시가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인 마을 스르브를 공격한 날이다. 크로아티아 우파 중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분파는 지금도 이날을 잊지 않고 기리고 있다. 크로아티아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민당의 이보 요시포비치는 지난해 7월 27일 스르브에서 반파시스트 참전 용사 단체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민족회의가 주최한 추모회에 참가했다. 주변에서는 그의 참가에 반대하는 민족주의자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요시포비치 대통령의 참석은 이중적 의미가 있다. 그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소수자들에게 분명한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는 동시에, 반파시스트 전통을 현재의 크로아티아 공화국에까지 계승하고 싶었던 것이다.(10)

크로아티아 - 세르비아 화해 무드

세르비아에서는 7월 7일, 1941년의 반파시스트 봉기 70주년을 맞아 다양한 토론회가 열려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11) 1941년 7월 7일, 스페인 내전에도 참전한 공산주의자 지키차 요바노비치 슈파나크가 세르비아 나치 협력 정부의 경찰관 2명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산주의에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의 행동은 독일 점령군에 대한 저항의 의미보다는 ‘동족 살인’에 가까웠다. 세르비아의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은 과거 두 방향으로 진행된 레지스탕스 운동에 대한 입장에 따라 양편으로 갈린다. 한편에는 공산당이 주도한 파르티잔 투쟁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세르비아 왕조에 충성한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장군이 이끄는 체트니크가 있었다.(12) 유고연방 시절에는 우스타시와 마찬가지로 체트니크도 나치 협력으로 돌아선 전력 때문에 멸시를 받았다. 지역마다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는 이 뒤늦은 전향은 파르티잔 세력의 군사적 우위에 대항하기 위한 선택이었다.(13)

2000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가 정권에서 물러난 뒤, 7월 7일은 더 이상 세르비아의 국경일이 아니다. 학교 교과서에는 체트니크와 파르티잔이 동등한 위상으로 묘사된다. 또한 2004년 도입된 법은 체트니크 출신과 파르티잔 출신에게 동등한 연금을 지급하도록 하고 있다. 사회학자 요보 바키치는 “세르비아 역시 사회주의와 파시즘을 동일 선상에서 평가하는 유럽의 경향을 뒤좇아가고 있다. 지금까지의 ‘반공산주의 물결’이 곧 끝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정치 문제 거리 둔 채 민간 교류 활발

옛 유고연방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정치적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될 수 있을까? 몇 년 전부터 ‘유고권’(Yougosphere)의 탄생을 말하는 이가 많아졌다. 영국 기자 팀 주다가 옛 유고연방의 각 공화국 사이에 경제·정치·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새롭게 관계가 형성되는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이다. 정치적 측면에만 국한한다면 한때 교전국이던 이 국가들 사이의 관계는 현재 정상화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중에서도 지난 2년간 세르비아의 타디치 대통령과 크로아티아의 요시포비치 대통령의 화해 노력이 돋보였다. 공화국 간 교역 규모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각 공화국 간 경제적 의존도가 낮은데다 기타 지역, 특히 유럽에서의 수입이 급증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 측면에서의 교류는 일정 수준 이상을 넘지 못하고 있다. 반면 문화적 측면에서는 예전부터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돼왔다. 심지어 전쟁 기간 중에도 민족주의에 적대적인 예술가나 지식인들이 서로 관계를 맺어왔다. 유고 지역 혹은 다른 유럽국들에서 토론회나 페스티벌 등을 통해 끊임없이 만남의 장이 형성돼온 것이다.

지난 6월 말 몬테네그로 수도 포드고리차의 카르베르 서점에서 열린 문학 페스티벌에 옛 유고연방의 각 공화국에서 온 작가·기자·출판인 수십 명이 모였다. 토론회는 이 ‘지역’의 정체성과 관련한 주제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지역’이라는 말은 현재의 옛 유고연방 혹은 발칸반도를 지칭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중립적인 표현이다(경계가 불분명한 이 지리학적 개념 자체가 자주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14) 유명 출판사 뒤리외 드 자그레브 대표 네나드 포포비치가 분노에 차서 말했다. “지역은 한 국가의 일부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겐 더 이상 공동의 국가마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같은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고, 같은 언어로 같은 농담을 주고받는 이들이 사는 이 ‘포스트 유고슬라비아’의 공간을 무엇이라고 명명하면 좋을까?

매년 옛 유고연방의 최고봉인 슈하르산맥의 티토산 정상을 오르기 위해 수천 명의 등산객이 마케도니아에 모인다. 옛 유고연방의 등산 동호회들이 함께 이 모임을 조직한다. 참가자들은 이 행사가 정치적 목적으로 개최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지만, 한편으로는 “각 공화국에서 온 사람들을 실컷 만날 수 있는 기회”(15)를 누린다. 학교에서 세르보크로아트어를 배우지 못한 마케도니아와 세르비아의 일부 젊은이들은 다소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지만, 크로아티아·보스니아·세르비아·몬테네그로 등 각지에서 온 참가자 대부분은 대화를 나누는 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슈하르의 험준한 비탈을 함께 오르며 이들은 모든 정치적 요구로부터 거리를 둔 채 일종의 코이네(Koine·헬레니즘, 로마 시대의 그리스 공통어), 즉 남슬라브 문화 공동체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글•장아르노 데랑스 Jean-Arnault Dérens
최근 저서로 로랑 주슬랭과 함께 쓴 <고라니의 나라로의 여행: 21세기 초의 발칸>(Cartouche·파리·2010)이 있다.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각주>
(1) Mitja Velikonja, <Titostalgija. studija nostalgije po Josipu Brozu>, Ljubljana, Mirovni Institut, 2009.
(2) www.konzulatsfrj.com.
(3) 최근 저서 <Jésus et Tito>(예수와 티토·Gaïa·Montfort-en-Chaloss·2010)에서 그는 ‘유고에서 보낸 행복했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사라진 유고연방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4)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들은 독일과 이탈리아, 불가리아 점령군뿐 아니라 나치에 협력하던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시, 처음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가 점점 점령군 쪽으로 돌아선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왕당파 체트니크와도 맞서 싸워야 했다. 1943년부터 영국이 파르티잔을 지원했지만,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영토 대부분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시켰다.
(5) <수체스카의 전투>, 1973년 스티페 델리치 감독.
(6) 1971년 무슬림 민족 정체성이 공식적으로 인정됐다. 당시 무슬림의 의미는 충실한 이슬람교도를 가리키기보다는 민족 정체성으로 인식됐다. 그러나 보스니아 독립 이후 다른 명칭들이 사용되고 있다. ‘보스니악’(Bosniac)은 무슬림 전통을 고수하는 슬라브인들을 가리키고, ‘보스니안’(Bosnian)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을 지칭한다.
(7) Drazen Nemet, ‘요시프 브로즈 티토, 크로아티아에서의 죽음과 부활’, <중동·유럽의 기억과 역사>, Rennes, PUR, pp.73~78, 2010.
(8) 종신 대통령 티토가 서거한 뒤 유고연방은 의장 8명으로 구성된(6개 공화국과 2개 자치지역 대표) 집단지도 체제에 의해 통치됐다. 매년 교대로 이 중 1명이 전체 의장직을 수행했다.
(9) <Vreme>, 베오그라드, 2011년 6월 23일.
(10) ‘크로아티아: 스르브 반파시스트 봉기의 기념’, <Le Courrier des Balkans>, 2005년 1월 10일.
(11) <Vreme> 2011년 7월 7일자 기사, ‘Zasto Srbija nema antifascisti praznik?’(왜 세르비아에는 반파시스트 투쟁 기념일이 없는가?) 참조.
(12) Roland Vasic, <혁명과 재건 사이의 미하일로비치: 유고슬라비아 1941~1946>, L’Harmattan, 파리, 2009는 이 움직임에 대해 매우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13) Sonja Drobac, ‘세르비아: 제2차 세계대전 참전 파르티잔 출신과 체트니크 출신에 대한 동등한 대우’, <Le Corrier des Balkans>, 2005년 1월 10일.
(14) Maria Todorova 지음, Rachel Boyssou 옮김, <발칸의 상상들>, Editions de l’HEESS, 파리, 2011.
(15) Béatrice André, ‘마케도니아: 유고슬라비아 전체가 티토산에 모이다’, <Le Courrier des Balkans>, 2009년 6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