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차일드, “복권을 사세요”
정치인들은 “이제, 모든 국민이 중산층에 등극했다”라는 환상을 퍼트리고자 했다. 정치인들의 이런 시도와 관련해, 국영복권을 둘러싼 공식적·비공식적 쟁점들을 조명해보자. 국영복권의 주요 목적 중 하나는, 예술계 보조금 마련이었다. 국영복권은 영국 국교회가 항상 염원했으나 결국 이루지 못했던 ‘꿈의 기관’이다. 우선 국영복권의 대중적인 인기가 그렇다. 참여 의식은 간단하며, 매주 황금시간대 TV 앞을 지키는 주간 의식으로 이어진다. 열성적인 이들을 위한 추가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신봉자들은 같은 언어, 같은 규범과 흥분된 감정을 공유한다. 그들이 기대하는 보상에 비해 대가가 소소하다는 점도 같다. 게다가 대의를 위한 기금 조성에 기여한다는 명예로움까지 선사한다. (…)
오늘날 복권은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1994년 등장한 국영복권 ‘카멜롯’은 1년 후 44억 파운드의 매출을 올렸다. 이는 영국 국교회 수입의 7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국영복권사업을 낙관하던 이들도 그 정도 성공은 예상하지 못했다.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라는 제목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는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성공한 복권사업 개시’였다. 성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각종 복권을 사려는 줄이 슈퍼마켓을 채웠고, 새로운 복권상품이 개발됐다. 이에 따라 새로운 TV 프로가 편성됐다. (…)
한 세기 전,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매튜 아놀드는 사회계급을 청교도의 후예와 알콜 같은 유흥거리에 열광하는 도락가, 이 둘로 나눴다. 복권은 도락가들이 청교도를 제치고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3,000만 명이 정기적으로 사던 국영복권은 계급을 초월해 인기를 누렸다. 경마와는 달리, 카멜롯 복권을 사는 이들은 귀족이나 노동자나 같은 스릴과 기쁨, 이득을 공유했다. (…)
‘대의를 위한 복권’을 제안한 로스차일드
1990년 79세로 사망한 금융자본가 빅터 로스차일드는 격동의 삶을 살았다. 그는 케임브리지 재학시절 안소니 블런트(1)와 학우였고, 2차대전 당시 영국 국내 정보부 MI5 소속이었다. 명망 있는 과학자였던 로스차일드는 1971년 에드워드 히스 싱크탱크를 창립했다. 한마디로, 그는 기득권층의 정수였다. 1970년대 말, 로스차일드는 한 복권 위원회의 회장직을 맡았다(마거릿 대처 시절 인두세(2) 도입에 공헌한 후, 그의 공직자 경력은 정점을 찍는다).
로스차일드 위원회는 ‘대의를 위한 국영복권’이라는 중대한 제안을 내놓는다. 당시만 해도 그저 개인 주도로 시작된 복권사업은 위원회 일원의 말처럼 “빅터의 자식”이나 다름없었다. 로스차일드는 복권사업이 3가지 특성을 띨 것이라 말했다. 첫째, 무한한 수익을 가져올 국가 독점사업이 될 것이라는 점. 둘째, 예술과 스포츠처럼 합당한 자격을 갖췄으나 예산이 분배되지 않는 분야에 돈이 가게 하는 것. 마지막으로 한번 자리를 잡게 되면 독립적으로 운영될 거란 점이다. 그렇게 로스차일드는 국영복권을 만들었다. 심지어 그는 이때 오늘날에도 쓰이는 ‘대의’라는 표현을 만들기도 했다. 국영복권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새로운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복권사업이 가진 목적은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 로스차일드는 자신의 보고서에서, 허심탄회하게 다음과 같이 밝힌다.
“현실에서 정부는 여론과 정당의 압력에 노출돼 있어, 생존과 직결되는 사업이 아닌, 대의를 위한 지원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대의를 위한 재원 마련의 필요성은 우리 사회에 명백히 존재한다. 국가가 할 일을 대신해주려는 것이 아니다. 큰 돈을 만들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민간부문의 세력이 강한 현 사회에서 불가피하게 생긴 빈틈을 메우고자 함이다. 국영복권으로 발생한 수익은 정부 부처 이외의 곳에 할당돼야 하며, 나아가 정부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어야 한다.”
국영복권의 운영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발언이다. 로스차일드는 “이제 예술계를 후원해줄 백만장자는 얼마 남지 않았다”라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유권자들이 원하는 바를 행하려 선출된 정부가 이같은 사업에 예산을 일부 할당하므로 예산각축전이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예술은 절대적으로 사활이 걸린 분야이며 최선의 이익(대의)을 위한 일이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정부의 재정적 지원이 충분히 있어야만 피어날 수 있다. 국영복권이라는 독점사업만큼 안성맞춤인 재원이 과연 있을까? 이 수익이 국민의료보험(NHS) 같은 다른 곳으로 투입되는 것을 미연에 확실히 방지하려면 정부부처가 나서서 복권수익을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하는 법령을 제정해야 한다.”
복권 구입자들은 비록 백만분의 일이긴 하나, 거부가 될 가능성을 쥐어보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이는 엘리트가 운영을 총괄할 때만 해당하는 일이었다. 또한 예술계 후원자가 부족하다는 로스차일드의 지적은 세금은 높고 급여는 낮던 1970년대에는 적절한 지적이었다. (그러나 사회지배층이 계급의 정점에 이르렀던 1990년대가 되자, 논거의 유효성은 사라진다.) 게다가 소비자가 복권수익의 분배에 대해 의견을 내놓으리라는 가정은 언급된 적조차 없다. 지배계층 특유의 사고방식을 발휘해 어떤 문제를 넘기기 위한 임시변통으로써 그 필요성을 고려해볼 만함에도 말이다. 로스차일드의 ‘대의’라는 모호한 표현은 이런 문맥에서 나왔다. 그는 가령 축구 같은, 지원금을 받을 만한 다른 분야에 관해 말할 때도 이 표현을 사용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로스차일드 보고서는 예술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도 적용 가능한 일종의 시제품이었던 셈이다.
로스차일드 위원회는 1978년 여름, 사업체결안을 제출했다. 보수당이 정권을 잡기 전에 복권사업을 공식화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위원회의 아이디어는 마거릿 대처의 청교도 기질을 자극했다. 대처는 복권수익을 공중보건 분야에 투입하려다가, 이내 결정을 정정했다. “정부는 사행성 오락을 장려할 수 없다. 이를 국민의료보험과 연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복권사업의 출범은 1990년 존 메이저 총리 취임 이후에나 가능했다. 그러나, 1980년대는 사업의 침체기가 아니었다. ‘대의’에 대해, 괄목할 만한 진척이 있었다. 쟁점을 잘 이해하려면 에이즈베리에 자리한 로스차일드 가의 성에 얽힌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나 드 로스차일드는 1878년 미래의 영국 총리가 될 로즈베리 경과 결혼하면서 멘트모어 저택을 지참금으로 가져왔다. 런던 크리스털 팰리스에서 영감을 받아, 칠턴 힐스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멋진 풍경의 멘트모어 저택은 박물관이나 다름없는 성이었다. 저택은 한나 드 로스차일드의 아버지 메이어 드 로스차일드 남작이 공들여 수집한 프랑스 미술품 컬렉션으로 가득차 있었다.
1978년 로즈베리 전 총리의 아들이 사망할 때까지 모든 컬렉션은 그 상태 그대로 남아있었고, 세금을 내야 할 때가 왔다. 이에 다음대 로즈베리 경은 성과 그 내용물을 모두 합해 200만 파운드에 매도하려 했지만, 한창 조세난에 시달리던 노동당 정부는 매입을 거절했다. 이내 미술품 컬렉션과 가구 대부분은 외국으로 팔려나갔고, 그 금액은 650만 파운드에 육박했다. 비난의 목소리가 커졌다. 멘트모어 유산은 세기의 스캔들이 됐다. 텅 빈 성에, ‘마하리시 대학’이라는 자연법률당(NLP)의 본부가 들어왔다. 이들은 무려 ‘초월적 의식 개발’을 통해 범죄와 질병, 가난을 근절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스차일드 2세, 메모리얼 펀드 총책임자로
멘트모어 저택의 운명은 ‘대의’에 관해 논의 중이던 로스차일드 위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부는 자국의 문화유산을 지키는데 필요한 200만 파운드의 지출을 거절했다. 민간에서도, 공공에서도 후원자가 없는 상황에서 문화유산 보호에 대한 문제의식이 대두됐다. 멘트모어 사건은 또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대처 정부는 1980년 메모리얼 펀드라는 문화유산기금을 마련하기로 했다. 상속된 작품을 공익을 위해 매입하려는 목적이었다. 이 또한 엘리트 출신의 내부인사가 운영을 맡았다. 다름 아닌 빅터의 아들, 제이콥 로스차일드가 1992년 메모리얼 펀드의 총책임자가 된 것이다. (…)
제이콥 로스차일드는 자신의 소규모 독립 공공기관(3)이 국영복권 사업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한 재력을 거머쥔 후원기관 중 하나로 탈바꿈하려는 찰나에 합류했다. 1992년 존 메이저 정부가 발간한 백서에서 “국영복권이 대의를 위한 기금을 한 곳에 모은다”라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존 메이저가 정권을 잡은 1990년 11월 이후 쭉 진행 중인 안건이었다. 메이저 총리와 케네스 베이커 장관은 복권이 지닌 거대한 잠재력을 기민하게 눈치챘고, 대처 정부가 남긴 청교도적 가책을 걷어냈다. 그들은 1992년 선거를 앞두고 제대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고, 로스차일드의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상황은 빠르게 해결됐다.
한편 메이저 정부는 예술과 스포츠, 문화유산 분야를 일컫는 표현이었던 ‘대의’에 자선단체를 추가했다. 자선분야가 없으면, 엘리트층이 기금의 수혜자가 될 것이 뻔했다. 복권사업에 반대하다가 나중에는 사업의 이익을 최대한 챙기려던 국고와는, 언제나 그랬듯 다툼이 일어났다. 하지만 무려 복권수익의 28%가 대의를 위한 보조금으로 확정됐다. 복권사업은 1992년 보수당 선거 캠페인의 주역이었다. “올바르게 규제된 국영복권사업 시스템의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다양한 분야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수당은 선거프로그램에서 예술, 스포츠, 문화유산과 자선분야가 앞서 언급한 대의에 해당한다는 점을 명시했다. 여기에 밀레니엄 기념 프로젝트를 후원하는 밀레니엄 위원회의 운영기금도 추가했다. 그러나 이 5개 분야에 어떤 기준으로 기금을 분배할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이런 기준은 보수당이 선거에서 승리한 후 설정될 예정이었다. (…) 5개 분야는 공평하게 동일한 몫을 가져갔다. 즉 예술, 문화유산, 밀레니엄 위원회를 모두 아우르는 문화예술 분야가 전체 기금의 3/5을 가져간 셈이다. 기금분배의 원리는 간단했다. 예술과 문화유산에 배정된 후원금은 독립 공공기관, 그리고 전형적인 상류층 출신인 기관 소속원들에게 갔다. 돈은 기관의 상류층이 판단하기에 적절한 곳에 쓰였는데, 가령 문화유산에 배정된 후원금은 로스차일드 국가 문화유산기금에게 돌아갔다. 예술부문 후원금은 경매회사 소더비의 전 회장 가우리 경이 지휘하던 예술위원회(4)로 돌아갔다. 밀레니엄 기금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밀레니엄 위원회의 운영진은 ‘깨어있는 사회 주요인사’들로 구성됐고, 문화유산기금 사무국장이 모임을 주재했다. 스포츠와 자선분야도 별 다를 게 없었지만, 그 정도 거물이 맡지는 않았다.
하지만 복권판매가 시작되자 수혜자 명단의 최상위에 오른 것은 자선단체였다. 복권 구매자들은 자선단체로 가는 몫이 가장 클 것이라 믿었다. 예술관련 안건을 책임지던 데이비드 멜러 장관은 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의 논거를 미화하지는 않았다. 멜러는 세련된 성미를 지닌 자신의 후임자 피터 브룩에게 프로젝트가 실효성을 가지려면 예술과 문화유산, 스포츠 분야의 지원금 비중을 늘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1995년 10월 하원에서 그의 연설은 한층 신랄했다. 사람들은 대의에 대한 그의 비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자선단체에 기금을 분배하는 것은 계획에 없던 사항이다.”
그러나 시스템은 사람들의 반론에 맞서 신뢰를 얻어야 했다. “기관이 돈을 챙긴다면 사람들 대부분 저금통에 선뜻 돈을 넣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예산계획에서 왕립 오페라극장 복원이나 카디프에 새로운 오페라극장을 건설하는 사업이 국민의료보험보다 우선순위에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다. 복권사업은 바로 이런 이유로 탄생했다.” (마거릿 대처가 복권사업에 관심을 보였던 유일한 이유가 바로 국민건강보험이었음을 기억하자.) 이에 멜러는 연설에서 자신 입장을 변론했다. “내 바람은 한가지뿐이다. 바로 국영복권사업이 안정적인 예산을 가지고 오랫동안 운영되는 것이다.”
이제 대의보다 중요한 것은, 수익의 원천인 복권 구매자들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어떻게 기금이 삭감되지 않고 의회를 통과할 수 있었을까? (…) 이 문제가 큰 사회적 관심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곧 보수당 정부는 그 관심을 대중에게 인기있는 유명인사들 쪽으로 교묘하게 돌렸다. 피터 브룩이 먼저 시범을 보였다. 그는 소개 연설에서 “스포츠가 약물과 범죄에 노출된 이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며 자신을 예로 든 권투선수 크리스 유뱅크의 말을 인용했다. “복권사업은 바로 이런 혜택을 국가에 제공하려 합니다.”
‘카멜롯 복권’이 찾아낸 ‘성배’는 누구에게?
사실 이런 예시를 찾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대의를 위한 기금에 논란의 소지는 거의 없었다. 상원·하원의원 대부분이 사업목적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산이 배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악의에 찬 대중지의 표적이 됐다. 처칠 기록물 보관사업에 1,300만 파운드가 투입된 후였다. 하원에서 문제를 제기했지만, 반대표는 39표에 그쳤다. 사실 의원들은 다른 예산이 삭감될까 우려했다. 복권사업의 수익이 공공부문 지출에 추가될까? 아니면 기존의 지출을 완전히 대체하게 될까? 예술위원회와 문화유산기금 같은 단체에게 이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놀랍게도, 복권사업이 큰 성공을 거뒀음에도 사업의 핵심인물들은 잘 언급되지 않았다. 1995~1996년 로스차일드 경이 운영하던 문화유산부문 독립 공공기관이 보유한 예산규모는 900만 파운드였다. 같은 시기에 복권사업 덕에 받은 금액은 2억 8,000만 파운드에 달했다. 예술위원회도 같은 금액을 받았다. 국고에서 배정한 1억 9,000만 파운드를 훨씬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 이 같은 수입은 예술과 문화유산 분야에서 점차 직접보조금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로스차일드 위원회는 복권사업 5년 차부터 450만 파운드를 대의를 위한 재원으로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복권을 개시하고 6개월 동안 무려 16억 파운드가 모였다. 물가상승을 고려해도 엄청난 차이였다. 늘 예산부족을 불평하던 자선단체들도 태도를 바꿨다. 매주 500만 파운드를 받던 예술과 문화유산 부문 기관들은 카멜롯 복권이, 카멜롯성의 원탁 기사들이 찾아낸 성배나 되는 양 떠받들었다.
그렇다면 이 ‘신의 선물’은 누구의 몫이 됐을까? 문화예술기금이 선정한 14명의 기금 수혜자 중 2명은 상원의원, 기사와 데임 작위 수여자가 5명 있었고,(5) 교수가 1명, 해군 소령이 1명 있었다. 즉, 대중적 유행에 충실한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문화유산사업으로 여기던 일(일례로, 처칠 기록물 보관사업 등)들은 일반 복권 구매자들의 눈엔 기부금으로 상류층을 부흥시키려는 것으로 보였다. 처칠 기록물 보관사업 같은 경우, 처칠 가가 살았던 유서 깊은 저택을 상속받아 유명인사가 된 상속녀가 법정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마약중독자였다는 사실은 사업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윈스턴 처칠 경의 아들이 비대한 보수당 의원이라는 점 또한 도움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로스차일드의 한 동료는 이렇게 표현했다. “최초의 기금수혜에 걸맞는 사업을 찾았다고 믿었는데, 참담한 결과였다.”(…)
1996년 발간된 한 보고서는 통계자료를 독창적인 방식으로 이용했다. “기금의 92%가 지방분권 프로젝트에 할당됐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기금의 최대 수혜지역은 런던(수도권 지역 포함)이었다. 전체인구의 21%가 사는 수도권으로 기금의 40%가 돌아갔다. 10억 7,000만 파운드의 20%에 준하는 금액이 런던에 자리한 7개 기관에 배정됐다. 오페라극장, 무용극단, 2개의 미술 갤러리, 2개의 극장과 큐 왕립 식물원(6)이 여기에 속한다. 런던시민, 그리고 오페라나, 현대미술, 희귀식물 애호가들에게는 희소식인 셈이다. “약 80%의 기금이 자선단체와 자원봉사단체로 향했다.” 갈수록 한심스런 대목이다. 영국에서 문화·예술·문화유산 분야에 종사하는 기업은 모두 기본적으로 자선단체의 성격을 띤다.(7) 대부분 사람은 자선단체라고 하면 그보다는 옥스팜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복권수익 1파운드당 5펜스만이 자선분야에 주어졌을 뿐이다.
로스차일드 경의 말을 인용한다. “누군가가 이 사업 전체를 총괄했어야 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사업에 최선을 다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글‧앤드류 아도니스 Andrew Adonis
스티븐 폴라드 Stephen Pollard
두 사람 모두 기자로, 『A Class Act: The Myth of Britain's Classless Society 일류 제도: 계급 없는 영국 사회라는 신화』(Hamioli Hamilton, 런던, 1997)의 공동저자다. 이 글은 공동 저서 『A Class Act: The Myth of Britain's Classless Society 일류 제도: 계급 없는 영국 사회라는 신화』(Hamioli Hamilton, 런던, 1997)에서 발췌한 것이다.
번역‧정나영
번역위원
(1) Anthony Blunt(1907~1983), 유명 미술사학자, 냉전시대에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했다.
(2) 마거릿 대처 정부가 도입한 세금으로 1인당 부과되는 지역 주민세를 말한다. 1989년 도입됐고 1991년 폐지됐다.
(3) 독립 공공기관(Quango): 준정부조직(quasi non governemental organisation)의 줄임말로, 독립성을 띤 국가기관을 일컫는 표현.
(4) 예술위원회(Arts Council): 국립예술진흥원
(5) 데임(Dame) 작위는 여성에게 수여되는 작위로, 남성의 기사(Knight) 작위와 동격이다. 영국의 추리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 (Agatha Christie, 1890~1976)도 1971년 이 작위를 받았다.
(6) 큐 왕립 식물원(Kew Gardens): 런던 서부에 위치한 왕립 식물원.
(7) 프랑스의 공익성 단체에 해당된다는 의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