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성을 향한 카바리야

튀니지의 최남단 빈민가

2021-02-26     티에리 브레지옹 l 기자

좁은 길, 울퉁불퉁한 인도, 하늘로 솟은 집들, 무허가 상인으로 가득한 시장, 바리케이드에 둘러싸인 경찰서. 튀니스 시민의 약 10%가 사는 카바리야의 모습이다. 카바리야는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를 둘러싼 ‘빈곤 벨트’의 최남단 빈민가다.

2011년 1월 14일 카바리야의 청년들은 중심가에 있는 내무성 앞에서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동참했다. 무관심과 만행, 일방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경찰, 행정부의 부패 그리고 전 대통령 가족·친지들이 부를 과시하는 모습을 수십 년 동안 지켜본 국민들의 분노는, 농촌지역부터 연안지역 도시들과 튀니스 외곽까지 타올랐다. 국민들은 사회정의와 ‘카라마’(존엄성)를 되찾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민중봉기로 축출된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도망친 후, 카바리야 주민들은 다른 지역들처럼 보안을 위한 구역위원회를 만들었다. 아델은 “우리는 문제를 일으키려던 39명의 비밀경찰단 단원들을 저지한 후 군대에 넘겼다”라며, “시위대에게 총을 쏘라는 대통령의 발포 명령을 거부했던 군대의 공로가 크다”라고 덧붙였다.

 

서민층은 제외한 주거정책

재스민 혁명 후 10년이 지난 지금, 아랍의 봄은 오지 않았다. 국민은 여전히 빈곤에 허덕이고 부패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정부의 부재와 신용을 잃은 정치계, 구역의 오명만이 남아있다. 뉴스조차 눈길을 주지 않는 카바리야에 대해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마약밀매로 구속된 여성, 폭우로 인한 도로 붕괴로 쓸려간 자동차, 행인을 폭행하는 구급차 탈취범…. 외부인들이 이곳에 갈 이유도, 인근 공장이나 행정기관 근무자들 이외의 주민들이 이곳을 벗어날 이유도 없다. 카바리야 청년들은 중심지역이나 북쪽의 부촌에서 경찰 검문을 받을 때면 바로 의심을 받는다. 이는 그들에게 익숙한 일이다. 카바리야가 지나온 길은 무능한 정부를 사회적으로 개선하고자한 시도를 상징한다. 정부의 이런 시도가 실패하면서 2011년 결국 혁명이 일어났다. 풍접초가 많이 난다고 ‘카바리야’로 불리는 이 수도권 지역의 확장은 독립을 몇 달 앞둔 1955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식민지 약탈과 1930년대의 경제위기로 농촌에서 쫓겨난 ‘불청객들’, 농민들, 그리고 베두인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려는 목적이었다. 최빈곤 인구는 구 메디나 주위에 가득한 ‘움막집’에 모여들었다. 1956년 독립 후에는 공무원 주거구역이 조성됐다. 국가의 사회적 기반을 구성하는 중산층의 생활환경을 보장하기 위해 하비브 부르기바 대통령은 1960년대 말부터 부동산 접근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그러나, 도시설계자 모르체드 차비는 “정부의 이 새로운 주거정책에 서민들은 빠져있었다”라고 지적했다.(1) 예전부터 서민들이 접근 가능한 유일한 토지시장은 민간사업자들이 독점하고 있는 시장뿐이었다. 1960년대 카바리야에서는 움막집에서 쫓겨난 ‘도망자들’이 대통령의 친지들이 대부분 불법건축한 거주시설을 매수할 수 있었다. 동시에, 정부의 철저한 보호 하에 있는 부패한 한 구청장은 이미 천막에서 낙타들과 살고 있는 유목민 토지의 건축권을 국내 이주민들에게 ‘판매’하곤 했다. 오늘날 이곳은 건축의 무질서지대다. 카바리야 패치워크의 남쪽 끝에는 ‘빛의 도시’라 불리는 하이누르가 있다. 거주민들의 고향 카세린에 있는 하이누르에서 따온 이름이다. 불법이 판을 치는 이 지역은 경찰들도 꺼리는 구역이다. 수도권 지역 확장은 행정기관의 금품·향응 수수로 이뤄진다.

 

“일자리가 없는데, 교육이 무슨 소용”

늦긴 했지만 2008년에 2개의 지하철 노선이 개통되면서 튀니스와 더 가까워진 접근성, 늘어나는 공무원 가족들의 정착률, 그리고 인접 지역의 우수한 산업환경…. 카바리야는 이에 힘입어 사회적인 발전 가능성이 충분했던 구역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오히려 점점 더 궁지에 빠졌다. 1970년대부터 도입된 자유경제 모델과 1980년대 중반의 ‘구조조정’은 공공부문 일자리 축소를 야기했고 산업화는 최고조에 이르렀다.(2) 1960년대 말부터 이 구역에 살고 있는 전 경찰공무원 아비드 부리지는 “교육은 쓸모가 없었다.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인맥이나 집권당의 지원 없이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벤 알리와 그의 파벌이 집권하면서 이 구역에는 대통령 동생 몬세프 벤 알리가 관리하던 마약 밀매가 성행하고 부패가 극심해졌다”라고 말했다. 

실업문제가 심각해지면서 1980년대부터 대마초 밀매가 성행했다. 소규모 딜러들이 경찰의 보호 하에 활개를 쳤고, 시민들은 경찰의 폭력에 노출됐다. 경찰과 경찰을 통한 정부의 지배는 일관성 없는 체포, 갈취, 구타 등으로 나타났다. 너무 심할 경우 청년들이 저항했다. 2011년 1월 봉기 때 경찰서장을 철도건널목 차단기에 매단 사건은, ‘공공의 적’ 경찰에 대한 복수이자 그런 경찰이 지지한 정권에 대한 상징적인 승리를 의미했다. 

벤 알리의 퇴진 후 경찰의 폭력 행사는 좀 더 선별적으로 이뤄졌지만 긴장관계는 여전했다. 이는 튀니지 랩 그룹 7x7 Unity의 ‘Seventh Life’라는 노래에 잘 나타나 있다. “사이렌 소리가 동네를 억압해. (…) 내 친구들은 탈레반으로 취급받아. 펠라가 독립운동가처럼 저항해! (…) 네 돈을 원하는 위선자들, 배반자들뿐이야. (…) 뇌물과 수색뿐. 너 정말 왜 그래? (…) 검을 꺼내 들어. 전쟁은 끝나지 않아. 모든 게 끝났다고 해도.” 2020년 11월에 그룹 멤버 한 명은 이 가사 때문에 짧게 심문을 받은 바 있다.

혁명은 정부에 대한 인식을 바꾸지 못했다. 2020년, 카바리야를 포함한 튀니스 3개 서민 구역의 청년 8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는 이를 잘 말해준다. 청년의 83.6%는 튀니지 사회가 ‘불공평하다’고, 70.2%는 ‘정부가 국민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했다. 연구원들은 “불평등이 경제적 또는 사회적 차원에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불평등은 정치적, 상징적, 도덕적 불공정성으로 인식될 수 있다. 74.6%가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으며, 55.3%가 존중받지 못한다고 답변했다”(3)라고 분석했다.

 

유일한 희망은 유럽으로 떠나는 것

카바리야에는 여전히 청소년을 위한 주거공간도, 문화시설도 없고 의료시설도 부족하다. 2017년에 정부는 운동장을 복구하고자 12만 디나르(3만 6,000유로)를 풀었다. 그러나 이 돈은 공중에서 사라졌고, 운동장에는 자갈밭에 지어진 아주 작은 축구장 두 개만 있을 뿐이다. 지난 10년 동안 물가는 치솟고 실업률은 27%에 달했으며, 강도사건은 늘었다. 대부분의 가정은 철저히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 비공식 경제 활동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여기에는 사회보험 의무도, 납세의무도 없다. 세계은행에 의하면 비공식 부문은 튀니지 국내총생산(GDP)의 53%를 차지한다. 정부는 이를 눈감아준다. 비공식 경제의 유동성은 상당 부분 튀니지 마이크로 펀딩 기업인 엔다 탐웰이 보장하며 카바리야에는 무려 5,000명의 고객이 있다. 은행대출을 못하는 시민들은 신뢰관계를 기반으로 소규모 사업을 할 수 있다. 

아침 일찍 길에서 플라스틱병을 수거하고 부자 동네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베르베차’, 전업 쓰레기 수거자들이 있다. 이들은 수거한 쓰레기를 하이누르에 있는 폐기물 수거장에 1kg당 0.30디나르(0.08유로)에 판다. 골목의 가건물에서 무허가 상점이나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있다. 2011년까지는 중고 생활용품을 리비아 국경에서 판매하는 ‘보따리상’이 많았다. 리비아 내전으로 수입원이 끊긴 그들은 터키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이 길도 막혔다. 

파투마는 공무원이었던 남편과 사별 후, 동네시장에서 침구를 사다가 이불이나 베개를 동네 주민들에게 외상으로 판다. 아들은 2011년 이탈리아로 가던 중 바다에서 실종됐고, 또 다른 자녀는 이탈리아에서 마약밀매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탈리아는 튀니지인들에게 꿈의 나라다. 통행의 자유도 누릴 수 있고, 많은 돈을 벌어올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다급한 사람들에게는 마약밀매가 단시간에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2012년, 청년들에게 ‘지하드’라는 새로운 출구가 열렸다. 나이든 신자들에게 ‘거만하고 무지한 청년들’로 불리는 살라피스트들이 카바리야의 두 사원을 감독하고 있었다. 2011년 10월 이슬람 정당인 엔나흐다 당이 선거에서 승리한 후, 튀니지는 이집트나 걸프만 국가에서 온 근본주의 설교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수십 년 동안 정부가 금지했던 종교적 연설이 가능해지자,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듣기 시작했다. 자선단체들은 터키나 리비아에 있는 전투조직 참가를 권유했다. 카바리야 주민이라면 전투를 위해 시리아로 떠난, 그리고 대부분 그곳에서 사망한 이들을 알고 있다. 그러나 2014년 유령단체들이 문을 닫고 경찰이 살라피스트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을 집중감시하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이슬람국가(IS)가 주장한 칼리파국 설립이 실패하자 지하디스트의 ‘매력’은 많이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탈출방법은 이주뿐이다. 유럽국가의 국경 경비 강화에도 변하는 건 없다. 철학교사인 34세 아메드 사씨는 이렇게 말했다. “튀니지 사회가 청년들의 꿈을 짓밟았다. 청년들이 꿈을 펼칠 유일한 방법은 이곳을 떠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 집을 짓는 데 10만 디나르(3만 유로), 결혼식 비용으로는 1만 5,000디나르(4,500유로)가 든다. 이에 비해 유럽 입성자금인 1만 2,000~2만 4,000디나르(3,600~7,200유로)는 합리적인 금액이다.”

 

청소년들에게 공간을 돌려준 GAM

아메드 사씨는 GAM(Génération AntiMarginalisation; 반(反)소외 세대)의 공동창업자다. 2013년 창설된 이 협회는 카바리야의 자원을 동원해 현장에서 직접 활동하며, 정부가 10년 동안 이루지 못한 성과를 이루려고 노력 중이다. “2011년부터 지도자들은 지역적 단절, 테러리즘, 부패에 빠져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끈기나 전략도 갖추고 있지 않다.”(4) 그는 비종교 정당들과 엔나흐다 당 사이에 이뤄진 합의들을 예로 들며 안타까워했다.

2018년 1월, GAM의 다른 회원인 이브라힘 페르치히는 “정치인들은 선거 때만 우리를 기억한다. 어느 정당 할 것 없이 혁명을 자신들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이용했다”라며 분노했다. 혁명 직후, 엔나흐다 당과 가까운 한 ‘혁명보호연맹’은 2011년 3월에 퇴진한 벤 알리 정당인 민주헌정연합(RCD)의 옛 건물을 차지한 후 주민들에게 호의를 베풀기 시작했지만, 이 연맹은 2014년 이후 사라졌다. 

GAM은 당파적 움직임에 실망한 신세대 활동가들이 모인 조직이다. 아메드 사씨는 튀니지 노동자 공산당(PCOT) 소속이었으나 2012년 탈당했다. 그는 “(PCOT는)정치활동권 사안에만 집중한 채, 경제적, 사회적 사안에 대해서는 거의 의견을 내지 않았다. 1970년대 좌파 세대는 보수적 사고방식을 바꾸기 위해서 큰 충격이 필요하다고 믿었지만, 그들은 사회와의 소통을 끊었다. 이제는 우리가 직접,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과 장기적으로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GAM은 2011년부터 튀니지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해외 자금지원을 받지 않고, (5) 수평적 연대에 의존하기로 했다. GAM의 사업담당자 메넬 츨리비는 “자금을 지원 받으면 독립적으로 사업을 운영할 수 없다. 출자국의 비위를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 단체는 지역 주민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주민들은 무료 수업을 실시(교사에게는 부수입을 제공)하고 문화행사(독서, 영화, 연극, 춤)를 기획하며, 소규모의 녹지공간도 마련했다. 

GAM에서는 법 강좌도 하고 있다. 아메드 사씨는 “지하드의 유혹을 받은 청년들이 교육을 통해 자신들이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다”라고 회상했다. GAM은 최근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자신을 지키는 법’ 강좌를 진행했다. 마리엠 제니티는 “GAM은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청소년들이 저녁까지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며 기뻐했다. GAM은 2020년 3~5월 이동 제한 기간에 상인들의 지원을 받아 식료품을 나누는 ‘연대 키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프로젝트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아메드 사씨는 “정부가 국민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우리가 대신 해 주고 싶지는 않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정부는 우리 공동체의 능동성을 대체할 수 없다. 우리는 혁명을 계기로, 독재정권에 빼앗겼던 기획력과 행동력을 사람들에게 돌려줄 수 있게 됐다.”  

 

 

글‧티에리 브레지옹 Thierry Brésillon
기자

번역‧권진희 classic16@gmail.com
번역위원


(1) Morched Chabbi, ‘Focus. Comment Tunis s’est mal logée 튀니스 주거문제의 실상’, <Regards sur la Terre 2010>, Presses de Sciences Po, Paris, 2010.
(2) Larbi Chouikha, Kamel Labidi, ‘La Tunisie, sans filet, dans le grand jeu de la libéralisation économique 자유경제 경쟁에서 위험을 무릅쓴 튀니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3년 7월호.
(3) Rim Ben Ismail 외, ‘Pensée sociale et résonances avec l’extrémisme violent 난폭한 과격주의에 대한 사회적 고착과 반향’, Forum tunisien pour les droits économiques et sociaux et Avocats sans frontières 경제적·사회적 권리를 위한 튀지니 포럼과 국경 없는 변호사들, Tunis, 2020년 11월.
(4) ‘Alliance conservatrice à l’ombre de la menace djihadiste 지하디스트 위협의 그늘에 있는 보수연합’,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1월호.
(5) Hèla Yousfi, ‘Faut-il encenser la “société civile” en Tunisie ? 튀니지의 ‘시민사회’를 예찬해야 하는가?’ <Orient XXI>, 2017년 1월 24일, https://orientxxi.in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