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유럽인들의 열광을 불러일으킨 그리스 독립 전쟁

2021-02-26     사뮈엘 뒤물랭 l 역사학자

지금으로부터 2세기 전인 1821년 3월, 그리스는 오토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8년 동안 이어진 이 독립 전쟁은 유럽의 수많은 지식인들을 매료시켰다. 서적, 소책자, 노래 등 모든 수단들이 그리스를 지지하는데 동원됐다. 시인 바이런 경을 포함한 몇몇은 전쟁에 참전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열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1821년에서 1829년까지, 그리스라는 단어만 들어도 솟아오르던 그 감정을 오늘날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1857년 에드가 키네는 이같이 질문했다.(1) 당시 그리스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어찌나 강렬하고 뜨거웠던지, 영국의 시인 바이런 경을 비롯한 많은 이들은 언행일치를 하겠다며 그리스 독립 전쟁에 참전해 메솔롱기에서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목표는 터키의 지배 하에 있던 그리스를 독립시키는 것이었다. 19세기 초의 오스만 제국은 이미 400년 전부터 에게해를 자국의 영해로 삼고 있던 상태였다.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 정교를 믿던 그리스인들을 탄압했으며, 영토를 빼앗고 권리를 제한했다. 1821년 그리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그리스를 지지했다.

이른바 친(親)그리스 운동(Philhellenism)이 유럽 곳곳에서 일어났다. 신성동맹 체제로 고통받던 상황에서 그리스의 반란이 독립 의식을 고취시킬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 등의 강대국들은 유럽의 질서를 재편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 3개국은 1815년에 ‘공공 평화의 유지를 위한 연대’를 체결해, 군사적 개입을 불사하고라도 혁명의 싹을 잘라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그들은 1792년부터 1815년까지 무려 23년 동안 유럽을 휩쓴 전쟁의 시작이 프랑스 혁명이었다고 믿었다. 따라서 유럽이 평화를 되찾기 위해서는 혁명의 불씨를 반드시 잠재워야 했던 것이다.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유럽 평화의 수호자로 나섰다. 오스트리아의 재상이자 신성동맹을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메테르니히는 빈회의(1814년 10월~1815년 6월)를 통해 이런 정책을 천명했다. 보수주의를 종교처럼 떠받들던 메테르니히는 “나의 첫 번째 도덕적 신념은 바로 확고부동한 것(immobility)”이라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메테르니히는 젊었을 때 주프랑스 대사직을 지냈다. 그의 눈에 비친 프랑스는 “거대한 혁명 제조소, 사회에 죽음의 바람을 불어넣는 동굴”이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자유주의적인 접근법을 취하고 있던 영국은 공식적으로는 새로운 유럽 평화 수호대의 일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의 외상 카슬레이 경의 생각은 신성동맹 주체들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오늘날 강대국 간의 협력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유럽 국가들에 존재하고 있는 혁명의 불씨를 막기 위한 완벽한 방법”이라면서, “평상시의 소소한 대립들은 잠시 잊고 (중략) 사회 질서가 정한 대원칙을 함께 지켜나가자”라고 주장했다.(2) 

빈회의 이후에 프랑스의 상퀼로트(sans culottes, 혁명 당시의 파리의 하층민 공화당원이나 자코뱅당원-역주) 출신을 비롯해 과거에 혁명을 이끌었던 이들은, 탄압을 피해 뿔뿔이 흩어져 지내면서 정치적 효율성이 떨어지는 비밀스러운 조직의 형태로만 활동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는 문명, 터키는 문명의 적?

그러던 중에 그리스가 깨어난 것이다! 오데사에서 결성된 비밀 조직 헤타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마흐메드 2세의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에페이로스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그리스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본격화했다. 그로부터 한 달만인 1821년 4월, 그리스는 전쟁터가 됐다. 그리고 서구에서 지성인, 예술가, 기자라고 불리는 모든 이들이 그리스의 독립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는 ‘키오스섬의 학살’에서 오스만 제국 술탄의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그리스 작은 섬의 주민들이 마주한 절망적인 상황을 그렸다. 작품의 예술성 덕분인지 아니면 작품 속에 담긴 분노의 감정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스를 주제로 한 100여 점의 작품들을 전시하는 특별 전시회도 두 차례 열렸다. 첫 번째 전시회의 방문객 수는 3,000명이 넘었다.(3) 

문인들도 이런 움직임에 동참했다. 샤를 오귀스탱 생트 뵈브, 알프레드 드 비니, 알퐁스 드 라마르틴, 제라르 드 네르발, 샹송 작곡가 베랑제, 뱅자맹 콩스탕,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 등은 일제히 지중해를 잉크로 삼아 호메로스의 서사시 이후의 이야기를 써내려 나갔다. 1829년 빅토르 위고는 『동방시집 Les Orientales』을 발표했다. 8년 전 한 기자는 “잔인한 압제자에 맞서 싸우는 그리스 군인의 수보다 송시(ode)의 수가 더 많을 지경”이라고 비꼬기도 했다.(4) 1821~1830년 사이 무려 400권 이상의 그리스 관련 서적과 소책자가 출판된 것으로 집계됐다.(5)

그리스를 향한 이런 열광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 서구의 문화 엘리트들에게 그리스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시집 『헬라스(Hellas)』를 낸 영국의 시인 퍼시 셸리는 1822년 그리스에 대한 공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우리의 법, 문학, 종교, 예술은 모두 그리스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6) 고대 아테네 정치가인 페리클레스의 조국 그리스에 대한 빚은 영원히 갚지 못할 것이었다. 셸리는 이어 “만약 그리스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미개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을 것”이라고도 썼다. 한 마디로, 서구의 지성인들은 억압된 그리스 국민을 해방시키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스스로가 후계자임을 자처하면서 고대 문명의 영광에 도취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은 상대를 문명의 적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고, 특히 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은 더욱더 커졌다. 일부는 무슬림을 직접 처단하겠다며 가슴에 적십자를 달고 그리스 전쟁에 자원해서 참전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리스 고대 문명에 대한 관념적인 열광과 터키를 원시적인 미개인으로 깎아내리는 현상이 동시에 나타났다. 작가 샤토브리앙은 직설적인 어조로 외쳤다. “온 세계를 문명화시킨 민족을 말살하려는 야만인 무리를 그대로 보고만 있을 것인가?”(7)

언론이 현실을 부풀려 보도하면서 여론은 점점 더 달아올랐다. 당시 언론은 그리스인들이 저지른 범죄에는 일부러 침묵할 정도로 편향적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그리스 지지 위원회가 설립돼 식량, 옷, 기금 등 인도주의적 원조 활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8) 그러나 이는 그리스 국민들을 위한 순수한 원조가 아닌, 야심찬 목표를 향한 움직임이었다. 위고는 “왕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라는 문구로 목표 달성에 실패했음을 시인했다. 그들의 목표는 바로, 바이런 경을 비롯한 지성인들의 펜보다 훨씬 더 강한 군사력을 지닌 유럽 각국의 정부들을 설득해,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을 무릅쓰고라도 그리스의 독립을 돕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순수한 원조인가, 야심찬 목표인가?

그러나 유럽 정부들은 처음에 꿈쩍도 안 했다. 유럽의 주요 지도자들에게 지정학적 균형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유럽의 지정학적 균형은 빈회의에서 각국의 이해관계를 최대한 고려해 결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빈회의는 터키의 국경선도 보장해주었다. 게다가 그리스의 독립을 지지할 경우 체제 전복을 승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메테르니히로서는 이를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또한 반란 세력은 1789년에 제정된 헌법을 그대로 번역해 참고할 정도로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추후 공화국 건설까지 꿈꾸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신성동맹의 지도자들은, 술탄의 희생자들이 기독교 유럽에 지지를 호소하자 마음이 흔들렸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는 없었다. 역사학자 안 쿠데르크에 따르면, 1822년 1월 그리스 대표단은 베로나 회의에서 “기독교 유럽에 지원을 요청하려 했지만 회의 참석조차 허용되지 않았다.”(9) 1823년에 유일하게 영국만이 그리스의 교전국 지위를 인정했다.

3년 후, 반전이 일어났다. 1826년 영국은 유럽 강대국들과의 연합 전선을 깨고,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서 그리스의 자치권을 보장하자는 내용의 비밀협약을 러시아와 체결했다. 영국은 니콜라이 1세가 러시아의 왕위에 오르자 새로운 차르의 일방적인 개입을 견제하는 한편, 오스트리아로부터 유럽의 리더 자리를 빼앗고자 했다. 1818년부터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에 몸담고 있던 프랑스는 곧 영국과 러시아의 행보에 동참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그리스의 자치권 보장이 진정한 독립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메테르니히는 “그리스가 정치적으로 해방되면 유럽의 새로운 혁명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셈”이라고 탄식했다.

미래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과정은 적어도 한 부분에 대해서는 바람직했다. 영국과 러시아 간의 비밀협약은 이미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던 신성동맹의 붕괴만 가져온 것이 아니었다. 1827년 10월 20일 그리스 해안의 나바리노 만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로 구성된 유럽 연합 함대가 이집트군의 지원을 받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함대를 격파한 나바리노 해전, 오스만 제국이 쇠락하기 시작한 계기였던 러시아-터키 전쟁(1828~1829) 등 일련의 군사적 충돌이 이어지면서, 마침내 그리스는 독립에 성공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들이 정말로 친(親)그리스 지식인들의 승리와 메테르니히가 꺼렸던 ‘자유 동맹’의 출현을 이끌었다고 볼 수 있을까? 신생국가 그리스의 성격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1830년 2월 3일에 영국, 러시아, 프랑스 간에 체결된 런던 의정서에 따라 그리스의 독립이 인정됐고 그리스 왕국이 성립됐다. 체결국들은 유럽 왕족 혈통의 왕자를 군주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레오폴드 1세(Léopold de Saxe-Cobourg Gotha)가 그리스의 초대 국왕으로 추대됐지만 그는 벨기에의 국왕이 되기 위해 이 제안을 거절했다. 

 

바꾸지 않으려면, 바꿔야 한다

이후 그리스의 왕관은 마땅한 주인을 찾지 못하다가 결국 루이 드 바비에르 1세의 아들인 오톤에게 돌아갔다. 당시 17세에 불과했던 이 어린 국왕은 1833년 2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나플리오로 가서 왕위에 올랐다. 

당시의 그리스는 면적이 작고 경제적으로도 무능했다. 영토가 현재 그리스의 1/3에 불과했다. 헌법은 그로부터 10년 뒤에 제정됐고, 의원내각제는 1875년이 돼서야 도입됐다. ‘문명’을 향한 자유주의 작가들의 찬가는 결국 정치적 자유주의의 실패를 불러왔다. 그들은 그리스를 찬양하고, 파르테논 신전을 우러러보고, 율리시즈와 아킬레우스의 발자취를 뒤쫓았다. 그러나 종국에 얻은 것은 왕권신수설을 내세운 절대 군주제, 과거의 영광은 찾아볼 수 없는 작은 영토뿐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방임주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콘스탄티노플의 러시아 대사는, 1826년부터 러시아가 고수해 온 전략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두 가지 방법으로 질서를 회복하고 강화한다. 국민을 불안에 떨게 만드는 각종 스캔들과 유혈사태를 종식하고, 강대국들의 포괄적인 시각을 만족시키면서 유럽의 평화에 기여할 정부를 그리스에 수립함으로써, 그리스 혁명을 막는다.” 한 마디로, 그 무엇도 바꾸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바꿔야 한다.

정치적 체계도 불분명한 전제 군주국의 국민이 돼버린 그리스인들은, 독립 이후 민족적 소속감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국가의 비좁은 영토에 대한 실망감과 맞물려, 민족적 기준에 기반한 그리스의 정체성 찾기 작업은 민족주의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민족주의는 19세기 중후반에 이르자 ‘메갈리 이데아(Megali ldea, 위대한 이상)’, 즉 유럽과 아시아의 모든 그리스인들을 모아 하나의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꿈으로 발전됐다.(10) 서구의 시인과 기자들은 환상 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그리스를 변함없이 예찬하면서, 이런 발상을 간접적으로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  

 

 

글‧사뮈엘 뒤물랭 Samuel Dumoulin
역사학자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번역위원


(1),(6) Hervé Mazurel, ‘“Nous sommes tous des Grecs”. Le moment philhellène de l’Occident romantique, 1821~1830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 1821~1830 서구 낭만주의 시대의 친(親)그리스 운동’, <Monde(s)>, n° 1, Rennes, 2012.
(2) Eric J. Hobsbawm, 『L’Ère des révolutions, 1789~1848 혁명의 시대, 1789~1848』, Hachette, coll. ‘Pluriel’, Paris, 2002 (초판 : 1969).
(3) Denys Barau, ‘Médiatisation de la guerre d’indépendance grecque et mouvement philhellène 그리스 독립 전쟁의 언론 보도와 그리스 독립 지원 운동’, <Le Temps des médias>, n° 33, Paris, 2019년 겨울.
(4) <Le Miroir>, 1821년 12월 9일. Frédérique Tabaki-Iona, ‘Chants de liberté et de solidarité, pour la Grèce et la Pologne 그리스와 폴란드를 위한 자유와 연대의 노래’, <Mots. Les langages du politique>, n° 70, Paris, 2002. 
(5) Denys Barau, ‘Médiatisation de la guerre d’indépendance grecque et mouvement philhellène’. 
(7) 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 『Note sur la Grèce 그리스에 관한 보고서』, Le Normant, Paris, 1825. 
(8) 친(親)그리스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면서 스위스,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 북동부에까지 지부가 설립됐다.
(9) Anne Couderc, ‘L’Europe et la Grèce, 1821~1830. Le Concert européen face à l’émergence d’un État-nation 1821~1830년의 유럽과 그리스. 민족 국가를 마주한 유럽협조체제’, Bulletin de l’Institut Pierre-Renouvin, n° 42, Paris, 2015년 가을. 이후 단락의 인용문들은 (특별한 언급이 없다면) 모두 이 기사에서 인용했다. 
(10) Hervé Georgelin, ‘Réunir tous les “Grecs” dans un État-nation, une “grande idée” catastrophique 모든 그리스인들을 한 국가 안에 모으는 것, 끔찍하고 위대한 계획’, <Romantisme>, n°131, Paris,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