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카타는 간디를 기다린다

2011-08-08     세드리크 구베르뇌르

콜카타 공항은 뉴델리·방갈로르·하이데라바드 등의 공항에 비하면 확실히 낡아 보인다. ‘빛나는 인도’(Shining Inidia) 프로젝트의 성장 거점으로 통하는 다른 도시들에는 유리나 강철로 지은 최신식 공항이 들어서 있다. 콜카타 공항 로비로 나오자 ‘환희의 도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표지판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도미니크 라피에르(1)의 소설 제목에서 따온 문구다.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라피에르는 “<환희의 도시>라는 소설 제목에는 지옥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빈민가 사람들의 용기, 회복력, 활기 등이 함축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2)의 말처럼, 아무리 역경이 대단하다고 해도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이 인간”이라고 했다. 콜카타에서는 전체 주민 450만 명(주변 지역까지 합친 전체 콜카타 도시권 인구는 1300만 명 이상) 가운데 3분의 1이 빈민가에서 산다. ‘인도 경제의 심장부’로 통하는 뭄바이로 가면 빈민촌 비율은 더욱 높아진다.(3)

인도 동부 유일의 대도시인 콜카타는 17세기 말 영국인이 처음 건설한 이후 끊임없이 주변 농촌 인구를 흡수해왔다. 돈을 벌기 위해 이주한 사람부터 1943년 기근, 1947년과 71년의 전쟁을 피해 온 피란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구가 콜카타로 유입됐다. 라피에르느 “본래 인구 30만 명 규모로 건설된 도시이지만, 전쟁과 자연재해로 수백만 명이 몰려들면서 도시 수용 인원을 완전히 초과했다. 5천~6천 명의 사람들이 화장실이나 급수시설 하나를 나눠 쓰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경제는 성장했지만 농촌 이탈 현상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비정부기구 ‘사마리아인’에 따르면, 콜카타 도시권으로 이주해오는 주민 수는 하루 1천여 명에 달한다. 경기침체, 어두운 미래 전망, 카스트제도, 종교, 폭력(여러 가문 사이의 분쟁, 지역 유지의 권력 남용, 낙살라이트 반군 활동(4)) 등에서 벗어나려는 수많은 농촌민이 콜카타로 몰려드는 것이다. 드물지만 이웃 나라 방글라데시에서 찾아오는 이주민도 있다. 콜카타로 밀입국하는 데 드는 비용은 약 3천 루피(약 47유로)다. 언어도 같아 입국이 비교적 수월하고, 경찰에게 뇌물만 주면 추방될 염려가 거의 없다. 콜카타는 이주민들에게 운명에 순응하는 대신 신분을 바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콜카타 도시 문제에 정통한 파트리크 고스 교수에 따르면, “콜카타에서 제2의 인생을 성공적으로 시작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사회적 신분이다. 하층 신분에 속한 사람은 700루피(약 11유로)만 있으면 합법적으로 이름을 바꿀 수 있다.(5) 콜카타에 정착해 살아가기가 훨씬 수월하다.”

콜카타는 통계학적으로 빈민층 비율이 뭄바이보다 낮다. 하지만 실제 눈에 보이는 가난의 정도는 훨씬 심각하다. 이를테면 인력거 ‘릭쇼’만 봐도 그렇다. 맥도널드 매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심 한복판, ‘테레사 수녀(6) 거리’에는 새까맣게 그을리고 바싹 마른 맨발의 노인이 인력거를 끌고 있다. 높다란 인력거 위에 올라탄 신사복 차림의 살찐 젊은이가 연방 스마트폰 버튼을 두드린다. ‘빛나는 인도’와 가장 처절한 인간 착취의 현실이 기괴하게 뒤엉킨 모습이다. 2000년대 인도 정부는 19세기 구세대 유물인 릭쇼 운행을 금지하려 했지만 허사였다. 릭쇼 말고 다른 생계 수단이 없는 수천 명의 릭쇼 운전사가 거세게 반발했다.

15년째 릭쇼를 모는 42살의 마크란지는 원래 이웃 비하르주의 농민이었다. 거듭되는 흉년으로 살길이 막막해지면서 콜카타로 흘러들어왔다. 릭쇼를 살 여력이 안 되는 그는 주당 150루피(약 2.3유로)를 주고 릭쇼를 빌려 쓴다. 손님을 태우거나 화물을 날라주고 버는 돈은 하루 150~200루피다. 그는 다른 릭쇼 운전사 3명과 함께 ‘어느 부잣집’에 머물며 방 하나를 나눠 쓰고 있다. 방세를 내지 않는 대신, 집안일이나 장보기, 정원 가꾸는 일 등을 돕는다. 마크란지는 한푼 두푼 모아 매달 3천~4천 루피를 시골에 있는 아내와 4명의 자녀에게 보낸다. 경찰에게 돈을 뜯기는 날도, 승객에게 홀대를 당하는 날도 부지기수지만, 그는 자신이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가족이 콜카타 도로변에 기거하는 대신 고향마을 집에 머물며 인간답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락슈미 가족이 도로변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고 있다. 술에 취한 남편을 조용히 단속시킨 뒤 락슈미가 취재진에게 자신의 생활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녀는 부잣집을 전전하며 하루 100~200루피를 받고 가사를 돕고 있다. 비쩍 마른 아이들은 쓰레기를 수집해 분리한다. kg당 1루피를 받는다. 아이 중 한 명은 정신지체이고, 막내는 안질이 심하다. 락슈미 가족은 경찰에 쫓겨 거처를 옮겨다니기 일쑤다. 콜카타의 빈민촌은 무려 5500곳에 이른다. 그 가운데 3500곳이 무허가다.(7) 한 구호단체 활동가는 “무허가 빈민촌을 단속하는 경찰 가운데는 빈민가 여성에게 추방 협박을 하며 성상납을 요구하는 이가 적지 않다”고 증언한다.

콜카타 빈민촌에서도 일상생활은 반복된다. 빈민가 사람들은 아침마다 펌프장으로 몰려가 몸을 씻는다. 상인과 장인은 연장이 담긴 자루를 발치에 내려놓고 벽돌을 깔고 앉아 손님을 기다린다. 이발사에서 구두수선공, 재단사, 구두닦이, 목수, 세탁공, 소매상에 이르기까지 종류도 제각각이다. 비정부기구들은 거리에서 생활하는 빈민이 약 2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한편 말끔하게 면도를 하고 빳빳하게 셔츠를 다려 입은 남자들이 노점 앞에 앉아 식사하고 있다. 비정부기구 ‘사마리아인’에 따르면, “콜카타에서는 쌀과 채소로 만든 요리가 5루피, 생선 요리가 16루피 정도 한다. 뉴델리나 뭄바이에서는 가격이 세 배 더 높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저마다 일터로 향한다. 콜카타 빈민가 주민들은 쓰레기 수집에서 자그마한 영세기업에 이르기까지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모두 일자리를 갖고 있다. 이곳 빈민촌은 인구밀도가 높고 생산비가 낮아 뭐든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주민들이 직접 상품과 서비스를 생산해 소비한다.(8) 주민 사이의 끈끈한 관계 덕분에 빈민촌의 힘겨운 생활이 조금은 덜 고단하다. 라피에르는 “미국 브롱크스나 뉴욕의 빈민가에 가면 문화적 정체성을 잃고 절망에 허덕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콜카타는 다르다. 축제나 잔치가 열리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빈곤만이 콜카타의 전부는 아니다. 중산층과 사회지도층은 콜카타가 외부 세계에 빈곤한 도시 이미지로 비치는 것에 분노한다. 하지만 이 대도시에는 거리 곳곳에 테레사 수녀와 관련한 상징물이 즐비하다. 빈곤한 이미지를 더욱 고착화하고 있는 셈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9)을 아는가?” 일간지 <텔레그래프>의 문화부 기자이자 작가인 에이빅 센이 대뜸 물었다. 그는 “서구 세계에 인도는 서구인들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비칠 때가 많다”고 지적했다. 벵골 지역 주민들은 1977년~2011년 5월 서벵골주와 콜카타에서 집권한 공산당이 외부 세계에 비친 콜카타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이런 인식은 3개월 전 열린 선거에서 공산당이 마마타 바네르지가 이끄는 ‘트리나물 콩그레스’에 참패하는 원인이 됐다. 공산당 정권이 수구주의를 일관하며 도시 쇠락에 일조했다는 의식이 주민들 사이에 팽배했다.

콜카타는 다른 대도시만큼 경제성장의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수많은 빅토리아풍 건물이 노후하면서(가끔 행인 머리 위로 건물 잔해가 떨어진다) 도시 이미지도 덩달아 추락했다. 고숙련 일자리가 예전보다 줄어들었고,  노동자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임금이 낮다고 토로한다. 한때 인도의 문화 중심지로 통했던 콜카타는 오늘날 뉴델리와 뭄바이 등에 떠밀려 국내외 예술가에게서 외면당하는 처지다. 도시 활력 저하에 불만을 품은 벵골 지역의 고학력 중산층은 기대에 부합하는 다른 지역을 찾아 하나둘 도시를 떠나고 있다.

1985년 콜카타의 부유층 대부분은 이런 빈민촌의 현실을 잘 모른다고 했다. 지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인도인 3억5천만 명이 매일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잠자리에 들고 있지만, 오늘날 ‘빛나는 인도’로 불리는 도시의 중산층은 이런 현실을 외면하려고만 든다. 반면 소외계층은 TV 등을 통해 부유층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똑똑히 보고 있다. 언젠가 간디 같은 지도자가 등장해 저항을 부르짖기라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글•세드리크 구베르뇌르 Cédric Gouverneur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각주>
(1) Dominique Lapierre, <환희의 도시>(La Cité de la joie), Robert Laffont, Paris, 1985. 1992년 롤랑 조페에 의해 영화화. 라피에르는 저작권 수입으로 보건소, 학교, 병원 등을 운영하는 자선 네트워크(www.cityofjoyaid.org)를 설립했다.
(2)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 벵골 지역 출신의 작가이자 극작가, 화가, 철학가. 1913년 노벨문학상 수상.
(3) 2001년과 2011년 인구조사 자료, ‘Census of India’.
(4) 낙후된 농촌 지역에서 활개치는 마오이즘을 추종하는 무장단체. ‘En Inde, expansion de la guérilla naxalit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12월.
(5) 인도에서 성은 대개 신분을 나타낸다.
(6) 테레사 수녀(1910~97)의 본명은 아그네스 곤자 보야지우. 알바니아계 인도 수녀로 1948년부터 극빈자를 위해 헌신했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는 2003년 시복식에서 복자의 품위에 올랐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헌신으로 칭송받기도 했지만, 반낙태주의나 콜카타 양로원에서의 비전문적인 의료 활동으로 비난받기도 했다.
(7) Nitai Kundu, <The case of Kolkata>, Institute of Wetland Management and Ecological Design, 2006.
(8) Kalpana Sharma, <Rediscovering Dharavi>, Penguin Books India, New Delhi, 2000. 뭄바이 슬럼가를 경제적 측면에서 분석한 책.
(9)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서구가 창조한 동양(1978년)>, 쇠유 출판사, 파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