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두라스, 임박한 일전

2011-08-08     모리스 르무안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사이에 우호적 외교관계가 형성된 뒤, 온두라스가 다시 미주기구 회원이 됐다. 자신감을 얻은 포르피리오 로보 온두라스 대통령은 마누엘 셀라야 전 대통령의 귀국을 수락했다. 온두라스 저항연대가 제시한 4가지 요구 사항 가운데 하나였다.

드넓게 기름야자수 밭이 펼쳐져 있고, 300여 채의 파란 비닐하우스 가옥이 자리잡고 있다. 벌레들은 윙윙거리며 날아다니고, 대기는 물에 젖은 듯 축축하다. 악취가 진동하는 가운데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린다. 아이와 노인은 눈에 띄게 많다. 녹록지 않은 저들의 삶이 느껴진다. 킁킁거리며 콧등을 찌푸린 한 여성 농부는 미겔 파쿠세라는 이름을 하나 꺼낸다. “돈으로 산을 옮겨놓는 세력가예요. 우리에게는 두려움의 존재죠.”

미겔 파쿠세는 온두라스를 움직이는 소수 집권층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온두라스 북동쪽 카리브 해안에 위치한 바스아구안을 다스리는 ‘영주’(대지주)이다. 2009년 12월 9일, 농민들은 그의 땅을 점거했다. (물론 이 땅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2010년 12월, 농민들은 미겔 파쿠세 수하들에게 두들겨 맞고 내쫓겼다. 고집스러운 농민들은 다시 이곳, 아구안 길목으로 뛰어든다. 그들은 길게 뻗은 길을 하나 보여준다. 이 길은 저 멀리 ‘테라테니엔테’(1)의 플랜테이션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 길은 그 누구의 소유도 아닌데, 파쿠세의 경비들이 우리를 못 지나가게 해요. 밭일도 못하게 하고, 바나나 재배도 못하게 막는 거예요. 강에 낚시도 못 가게 하죠. 말 그대로 포로로 잡혀 있는 셈이에요.”

농민들 땅 빼앗는 21세기 영주들

파쿠세가 명령을 내리길, 닭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얼씬 못하게 하고, 이 비렁뱅이 사람들이 기르는 가축 단 한 마리도 자기 땅을 밟고 지나가지 못하게 했단다.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 행여 이 길로 들어서는 동물들이 있으면, 감시병들이 죄다 잡아 죽여요. 그러다 우리가 반발이라도 하는 날에는….” 남자는 부아가 치밀지만 그만큼 힘도 없기에 그저 두 팔 벌리고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아구안 지역 점령은 1962년 농지개혁법에 의거한다. 국제 은행들에서 자금 지원을 받은 오스발도 로페스 아렐라노 장군의 개혁 정부는 당시 도로를 닦고, 교량 및 배수시설을 만들었으며, 학교와 보건소를 세웠다. 이주 농민들로 구성된 조합들은 이 지역을 온두라스에서 생산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대지주와 정치인들의 압력으로 1992년 토지소유권을 강화한 농업 개발 및 근대화법이 라파엘 레오나르도 카예하스 정부에 의해 공포됐다. 엄청난 참극의 문이 열린 것이다.

극도의 폭력과 비열한 행위를 동원한 그들은 농민들에게 땅을 포기하는 쪽이 신상에 좋을 것이라는 점을 이해시켰다. 이주농민조합 ‘라콘셉치온’의 예레미아 마르티네스는 “우리는 압력에 못 이겨 땅을 판 것이다”라며 분개한다. 그들의 계획에 방해가 되면 살인청부업자들이 사람 목숨 몇 개쯤 제거하는 건 일도 아니다. 게다가 지도층 인사 몇몇만 매수하면 일은 쉽게 마무리된다. 이에 따라 29개 농민조합은 르네 모랄레스, 레이날도 카날레스, 미겔 파쿠세 등 3인의 대지주 손 안에 들어갔다. 기름야자수는 엄청난 면적을 집어삼키고, 힘없는 농민들은 ‘팔메라스’(2) 일을 다시 하는 것 말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2001년부터 점거구역을 점점 늘려갔고, 그 대가는 추방·감금·살인 등이었다.

2006년 1월 27일,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의 집권으로 사태는 완화된다. 자유당 출신의 셀라야 대통령은 재계 권력집단과 꽤 거리를 두고, 사회운동 쪽에 정부를 개방했다. 그는 2009년 6월 19일, 법령 제18-2008호를 조인해 농민들에게 3년 이상 점거해온 땅의 소유권을 부여하고, 그에 따라 타격을 입는 ‘지주들’에게는 보상을 해주었다. 그러나 이에 발끈한 전국농축산협회는 그동안 전통적으로 권력을 양분해온 두 주요 정당, 즉 국민당과 자유당에 골고루 포진한 소수 집권층과 결탁해 2009년 6월 28일 쿠데타를 일으켜 셀라야 대통령을 축출했다.

같은 해 12월 9일, 아구안농민운동연합 이름으로 규합한 2500여 농가는 기름야자수 재배지 2만ha를 점거했다. 즉각 전쟁이 시작됐다. 라콘셉치온의 마르티네스는 “(2010년) 2월 12일, 그들은 동료 둘을 향해 태연하게 방아쇠를 당겼고, 이들은 상처를 입긴 했지만 신의 가호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들’이란 복면한 채 경찰차와 파쿠세의 차를 타고 도착한 60여 명의 살인청부업자들이다.

팽팽한 피부에 광대뼈가 두드러진 한 여성은 “파쿠세의 경비원들이 집으로 난입해 침대며 살림살이를 죄다 부숴버리고, 아이들에게도 잔뜩 겁을 주었다”고 말한다. 마라나노네스의 한 주민은 격분해 이렇게 말했다. “동료 2명을 잡아가서 옷을 홀딱 벗기고 인간 방패막이로 사용했어요. 우리에게 총을 쏘기도 했죠.” 이 과정에서 한 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 여성 농민은 자신의 휴대전화기를 보여준다. “사흘 전, 한밤중에 협박 전화를 받았어요. 이전에도 이미 세 번이나 그런 전화가 와서 전화번호를 바꿨지만 ‘우리는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네가 당하지 않으면 네 가족 중 누군가가 당할 것이다’ 하더군요.”

청부살인도 서슴지 않다

과달루페 카르네이에서, 아구안농민운동연합 사람들은 지역군사훈련소로 사용하던 땅을 점거했다. 1983년 미국이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군대 및 니카라과 반군을 양성하려고 설립한 훈련소인데, 1993년 해체돼 토지개혁위원회에 양도됐다. 트루히요시는 불법으로 현지 축산업자와 전직 군인에게 이 땅을 팔아넘기고, 마약밀매상에게 넘긴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 가운데 파쿠세는 550ha를 챙겼다. 2010년 4월 6일, 아구안농민운동연합이 엘툼바도르시에서 이 땅을 점거했으나, 파쿠세 수하들에 의해 추방됐다. 11월 5일, 2차 점거 시도 때는 농민 5명이 군인이나 감시원들의 총에 맞아 숨졌다.

그 뒤로 경찰과 군대의 비호 아래 죽음의 탄압이 이어졌다. 2010년 1월부터 2011년 5월 10일까지, 땅을 둘러싼 갈등은 농민 27명과 기자 1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나움 팔라치오 기자는 이 사태와 관련해 꽤 정확한 보도를 해온 인물이었으나, 그 아내와 함께 세상을 뜨고 말았다. 온두라스의 일부 명문가에 소속되어, 권력자들의 대변인 역할을 해오던 국내 민간 언론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사건을 재해석한다. 그들은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혁명군, 마약밀매인의 협조 및 자금 지원을 받은 이 ‘반역자들’이 M16, AK47 등의 총기를 엄청나게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수색이나 조사에 나선 경찰과 군대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들의 뒷배 봐주는 쿠데타 정권

미첼레티 쿠데타 정부가 조직한 선거를 통해 2009년 11월 29일 대통령직에 오른 포르피리오 로보는 2단계 작전에 들어갔다. 사회적 쿠데타를 일으켰다. 모두가 여기에서 목숨을 잃은 건 아니지만, 모든 게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 농민들에게 땅을 지급했던 법령 제18-2008호의 예외 조항이 신설됐고, (시간당 노동자를 고용하는) 임시직 고용법이 만들어졌으며,(3) 교원 직위가 박탈되고 (자치화라는 미명 아래) 교육의 민영화가 이뤄졌다. 그뿐만 아니라 물 같은 생명 자원을 경매로 넘길 수 있는 ‘천연자원 양도법’이 마련됐고, 국내 영토를 말 그대로 ‘분할’할 수 있는 길도 생겼다.

티르사 플로레스 란사는 온두라스의 주요 경제도시인 산페드로술라의 고등법원 판사였다. 그는 쿠데타로 셀라야 전 대통령이 코스타리카로 쫓겨나자 헌법소원을 청구했다.(4) “헌법 제112조에서는 그 어떤 국민도 국외로 추방될 수 없다”고 명시돼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제소가 본디 중립적이어야 하는 법관의 직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는 판사직에서 해임됐다. 그 외에 다른 3명의 판사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 그 가운데 기예르모 로페스는 2009년 7월 5일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판사직을 박탈당했다. 적법한 국가수반을 옹호하는 사람들 20만 명이 모여 개최한 집회였다. 며칠 뒤 발표된 성명에서, 대법원은 쿠데타 주모자 미첼레티의 행보에 모든 공무원들이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리틀 시저스, 던킨 도넛, 파파이스, 버거킹, 데니스, 피자헛, 웬디스, 맥도널드 등 식사 때 한 곳은 들어가게 되는 이 음식점들을 보며, 혹자는 여기가 워싱턴이 아닌가 싶겠지만, 이론적으로 테구시갈파는 온두라스의 수도이다. 소수 집권층 10개 가문이 주요 언론그룹을 소유하고 있지만, <라디오 글로보>는 민영방송임에도 야권 성향이다. 두 차례 조용히 방송 정지를 당했던 <라디오 글로보>는 송출을 재개했다. 국장인 다비드 로메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권력의 압박을 받지는 않았으며, 상대적으로 정보의 자유가 있는 편이다. 그러나 로보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이런저런 상황에서 기자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1년 5월 10일에는 11번째 사망자가 발생했다.) 심히 우려되는 간접적 의사 표현이다.”

100명이 넘는 전국국민저항전선(FNRP) 소속원이 암살당한 것을 규탄하며,(5) 베르타 올리바 온두라스실종자가족위원회 대표는 분개했다. “사람들은 고소도 할 수 없어요. 증인으로 법정에 서면 한 달 뒤 그마저 처형당한 경우가 허다했죠.”

군사 쿠데타 이은 사회적 쿠데타

그러나 경찰, 군대, 유사 군조직의 공작에도 불구하고 전국국민저항전선으로 통합되는 야권세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 후안 바라오나 전국국민저항전선 부대표는 “저항전선은 쿠데타 직후 대통령궁 앞 군중 속에서 구성된 조직”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국민에게 힘을 모아줄 것을 호소했으며, 국민은 자발적으로 응답했다”고 덧붙인다. 그리고 각계각층에서 엄청난 지원 물결이 이어졌다. 자유당이 저항 진영의 주된 기반이긴 해도 다른 정당들이 합세했으며, 비정부기구들이 함께하고 노조, 농민회, 원주민, 아프리카 후손, 학생, 페미니스트, 예술가, 지식인, 지역주민 등도 동참하고 있다. 그 어떤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은 일반인도 합류했다. 글로리아 오켈리 전 중미의회 의장은 “다양한 사람들이 몰려 있기 때문에 관리하기가 쉽지 않다”며 웃음을 짓는다. 쿠데타 이후 그는 ‘자유저항연대’ 대표가 되었다. 그는 “조직을 이끄는 지도부는 잘 듣고 읽고, 원활하게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정치적·사회적으로 다양한 조직을 이용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이며,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가?

자유저항연대에 동참한 베아트리츠 발레 전 외무차관은 이런 견해를 제시한다. “우리 세력이 정당으로 바뀌면 조직이 오히려 약화될 수 있다. 당은 지배도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1년 6개월째 논의만 계속되고 있다. 일각에선 선거를 무시하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실질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국민저항전선 100명 넘게 피살

차기 선거 참여 여부는 끝없는 논란거리이다. 일부는 다른 맥락에서 사회운동 출신 지도자들을 비난하는데 바라오나, 카를로스 레에스, 라파엘 알레그리아, 라셀 토메, 오켈리 전 중미의회 의장 등이 그 대상이다. 교원노조 지도자들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고 있다. 이들이 저항운동 진영을 ‘장악’하고 있는데다 성향이 급진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저항세력이 성공과 거리가 멀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렇다 할 수단이나 재원이 없음에도, 이 조직은 2010년 4월 20일에서 9월 17일까지 134만2천 명의 제헌국회 소집 요구 서명을 받았다. 강력한 지지에 힘입은 전국국민저항전선은 지난 2월 26~27일 총회를 열었고, 이 자리에는 각지를 대표하는 1500명이 참석했다. 이따금 열띤 양상을 보인 토론이 끝날 무렵, 대다수가 의견 일치를 보았고, 3가지 선결과제가 확정됐다.

첫 번째는 저항전선 대표인 셀라야 전 대통령의 무조건적인 복귀이다. (군부 쿠데타로  인해 2009년 6월 말 권좌에서 물러난 셀라야 전 대통령은 16개월의 망명생활을 끝내고 지난 5월 28일 귀국했다.) 두 번째는 그 어떤 선거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셀라야가 선거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지금의 선거재판소와 대법원을 신뢰하는 사람도 없다. 쿠데타 및 현 정권에 가담한 인물들이 그곳 출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는 쿠데타의 ‘미화 작업’을 정당화해주는 꼴이 될 것이다.” 며칠 뒤 알레그리아가 내놓은 해석이다. 또 다른 지도자인 레예스는 이런 추론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권력이오? 어떻든 간에 (헌정 중단 상태나 다름없는) 지금, 권력은 국가 체제 바깥에 있지요. 근본부터 모든 걸 다시 구축해야 합니다.”

권력의 건재함을 과시하려는 건 그만큼 내부적으로 흔들린다는 뜻이다. 즉, 저항이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쿠데타 이후 남미 좌파 정부(6)의 단호한 태도로 온두라스가 미주기구(OAS)에서 배척되면서 (다자금융기구 대출 불가 등) 그 피해가  점점 더 커지고 있고, 경제 또한 무너지고 있다. 심지어 쿠데타 세력이 베네수엘라와 관계를 단절한 것도 온두라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온두라스가 미주볼리바르동맹에 속해 있을 때, 베네수엘라는 페트로카리브 협정을 통해 온두라스에 시세보다 싸게 석유를 공급했다.

로보 대통령은 즉각 곤경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상황이다. 셀라야 전 대통령이 제헌국회 소집을 시도했으나 이를 빌미로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 정작 로보 현 대통령 쪽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들에 따르면, 헌법이 제헌국회 소집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는 거짓말이다. 2006년 1월 표결된 시민참여법 제5조에서는 이를 허용했다.) 지난 2월 17일, 의회가 예의 그 헌법을 개정해 쿠데타와 국민투표를 허용하도록 한 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유권자의 2%와 10명의 국회의원만으로 국민투표를 요청할 수는 있어도, 국민투표 실시 여부를 최종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의회이기 때문이다. 오켈리는 다음과 같이 비웃는다. “정부는 우리에게 제헌의회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심어주려 했어요. 너희가 그토록 원하던 시민 참여 수단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거죠.”

미국 비호에도 저항 의지 높아져

워싱턴을 필두로, 온두라스의 국외 동맹국들은 OAS에 쿠데타 이후 회원 자격이 박탈된 온두라스의 재가입 승인을 압박해왔다. OAS의 6월 5일 총회에서 2년 만에 온두라스의 회원 재가입이 이뤄졌다. 이에 앞서 후안 마누엘 산토스 콜롬비아 대통령은 4월 9일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과 정상회담 자리에, 차베스와 견원지간인 로보 온두라스 대통령을 불러 만남을 주선했다. 그러나 차베스 대통령은 며칠 뒤 카라카스에서 셀라야, 바라오나 등 저항전선의 지도자들과 회동했다.

이후 저항전선 대표들은 협상 테이블에서 온두라스 위기 타개와 OAS 재가입을 위한 4가지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셀라야 전 대통령을 포함한 망명자들의 확실한 복귀이고, 다음은 참여적이고 민주적인 제헌국회의 수립이다. 그 밖에 억압 정책 종식과 책임자 처벌, 쿠데타 조직 척결 등을 요구했으며, 아울러 하나의 정당으로서 전국국민저항전선을 인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저항전선 자신이 부당하다고 비난하는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저항전선 내부에서는 몇몇을 중심으로 의문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쿠데타 세력에 대한 비판으로 하나가 된 다양한 운동조직의 약점이 드러나는 건 아닐까? 또 장차 저항전선이 선거에서 이긴다면, 다시금 헌법 질서가 무너질 위험은 없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물음이 아직 가시화되지는 않았다. 보란 듯이 대법원에 압력을 가하면서, 대법원이 지난 5월 2일 셀라야 전 대통령에 대한 두 가지 (황당한) 혐의를 로보 대통령이 파기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셀라야 전 대통령은 망명 생활을 청산하게 됐다. 미겔 인술사 OAS 사무총장은 “온두라스의 복귀를 위한 주요 조건이 이미 충족됐다”고 선언했다.(7) 미 국무부의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 역시 “이제 장애물은 제거됐다”고 밝혔다.(8) 그러나 이는 온두라스 내부에서 전국국민저항전선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걸 외면한 처사다. 저항전선 사람들은 다른 3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그리고 총알 세례, 최루탄 발사, 사상자 속출 등 정부의 억압이 종결되지 않는 한 저항의 고삐를 늦추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글•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저서로 <마이애미의 다섯 쿠바인>(Don Quichotte· Paris·2010)이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이 있다. 

<각주>
(1) 대지주.
(2) 기름야자수 플랜테이션 농장.
(3) 이는 노조를 허용하지 않으며, 그 어떤 사회적 권리도 보장하지 않는다.
(4) 헌법상 권리 수호를 위한 절차.
(5) 다른 자료에서는 사상자를 160명으로 보고 있다. 온두라스는 국내 치안이 취약하기 때문에 혐의가 전혀 밝혀지지 않은 정치범들 대부분은 통상적 범죄로 처리할 수 있다.
(6)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7) EFE, 2011년 5월 2일.
(8) <El Heraldo>, 테구시갈파, 2011년 5월 10일.


‘차터 시티’,  신자유주의자의 몽상


“나는 내 국민이 꿈을 꾸며 이상적인 곳에서 살아가길 바랍니다. 범죄도 없고, 더 나은 교육 및 보건 시스템을 갖춘 자치구역에서 살아가길 권유합니다.” 지난 1월 18일 기자회견(1)에서 포르피리오 로보 대통령은 열변을 토했다. 폴 로머가 들었으면 흡족해했을 발언이다.

세간에 ‘탁월한 경제학자’란 평을 듣는 폴 로머 미국 스탠퍼드대학 교수는 최근 몇 년째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다. 자신이 고안해낸 이론을 실제 적용할 나라를 찾기 위해서다. “가난한 나라들의 개발이 가로막히는 것은 바로 국가가 투자자의 의욕을 저하시키는 ‘나쁜 규칙들’을 부과하기 때문이다.”(2) 따라서 개발이 이뤄지지 않은 미개척 도시에 ‘차터 시티’(Charter Cities)라는 것을 세워 국내외 투자자가 공장과 사업장을 건립할 ‘시범 도시’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차터 시티에는 인프라가 구축되고 주택·상점·학교·병원 등이 들어서며, 그때까지는 실업 상태에 있던 신규 노동력에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도시에는 독자적인 법과 법정, 경찰이 존재하며, 자치정부도 수립한다. 물론 본국에는 세금도 내지 않는다.

폴 로머 교수의 구상은 일부 아는 사람들만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지난 1월 워싱턴에서 미국의 부동산업체 인터맥 인터내셔널의 자비에 아르구엘로 온두라스 국장 주선으로 온두라스의 후안 올란도 에르난데스 국회의장을 만난 뒤 상황이 달라졌다. 로머 교수는 로보 대통령, 정부 관련 인사 몇몇과 함께 마이애미에서 회의를 주최한다.

로머 교수는 홍콩, 싱가포르, 그리고 중국 경제특구의 성공 사례를 언급한다. 깐깐한 사람이었다면 이 사례들이 나타난 곳의 역사·지리·경제·문화적 환경이 온두라스의 상황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지적했을 것이다. 로머 교수가 로보 대통령과 그 측근들을 뒤흔들어놓기에는 무언가가 더 필요해 보였다. 그런데 지난 1월 17일, TV에 출연한 리고베르토 창 카스티요 국회 사무처장은 “현재 투자자들이 국내법이 적용되지 않는 장소를 물색 중”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고 나서 중국에서 ‘4억 명을 가난에서 건져낸’ 시범 사례를 자랑스레 소개했다.(3)

아무것도 없던 상태에서 1천㎢ 규모의 ‘시범 도시’를 세우기 위해, 국회는 지난 2월 17일 헌법 제304조를 개정했다. “어떤 순간에도 재판 관할 예외 기관은 창설될 수 없다”는 규정에 “개발특별지역의 재판 관할 특권은 예외로 한다”는 내용을 덧붙인 것이다.(4)

시범 도시(들)의 기능을 정하는 법령에 따르면, 노동법을 포함해 온두라스의 법 조항은 이곳에서 적용되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면 주권과 관련한 부분, 외무 관계(단, 개발특별지역은 국제 조약 및 협정 체결 가능), 선거, 신원서류 발행 정도이다. 쿠데타 정부가 국토의 일부를 저렴하게 팔아넘긴 것을 차기 정부가 원상 복귀할 가능성마저 막기 위해 법령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덧붙었다. “개발특별지역에 수립되는 제도는 국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짚어준다. “동 기본 법령의 수정·해석·위반은 개발특별지역 거주민의 전체 주민 투표 뒤 위와 동일한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만 가능하다.” 이 지역 사람들은 외지에서 와서 주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의 지배를 받으며 손발이 묶인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중미 중심에 위치한 온두라스는 미국·캐나다와 함께 자유무역협정을 맺어 수에즈운하나 파나마운하의 험난한 길을 거치지 않고 두 국가로 수출이 가능하다. 수에즈운하의 경우, 현재 지역 갈등으로 좋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 3월 2일, 테구시갈파를 방문한 루이스 모레노 미주개발은행 총재는 “미주개발은행은 혁신적일 뿐 아니라 온두라스의 미래를 위해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방안을 모색할 것”이라며 로보 대통령에게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어떤 미래를 말하는 것인가? 일, 주거, 교육, 보건, 치안, 중간 이상의 생활수준 등이 보장된다는 가정을 받아들이면, 이 특권적 구역이 갈 곳 없는 수십 만 명의 사람들에게 그곳에서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부추길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밀려드는 사람들에게서 이 신개념 ‘게토’를 보호하기 위해 초소라도 세우고 전기 철조망이라도 쳐야 하는 것인가? 이 ‘시범 도시’들이 ‘A급 라이프스타일’을 실현시켜줄 거라는 로보 교수의 확언은 기본적으로 시민을 두 계급으로 나누겠다는 뜻인가?

두 번째 가설 또한 이보다 더 낙관적일 수 없다. 에르난데스 국회의장의 말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더 넓은 의미에서 봤을 때 확장된 하청공장 같은 것으로, 온두라스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셈이다.”(5)

하지만 1990년대 초, 테구시갈파 및 산페드로술라에서 이 공장들은 과도한 노동력 착취와 노조 압박으로 악명이 높았다. 현재 임시직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하는 이 회사들은 가장 좋은 경영방식이 재고용 계약을 하되 시급으로 계약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자는 그만큼 사회적 권리를 상실하는 셈이다.

‘차터 시티’라는 목표는 1세대 하청공장들처럼 섬유나 생산하는 곳이 아니라 첨단기술을 생산한다. 하지만 온두라스에 그렇게 숙련된 노동력이 있느냐가 문제다. 이 지역 출신의 국회의원 실베스트리는 웃으며 대답한다. “솔직히 말하면 없습니다. 하지만 하청공장이 맨 처음 가동됐을 때도 준비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곳에서 15만 명이 고용돼 일하고 있습니다.” 좀더 현실적 시각의 엘비아 아르헨티나 바예 전 의원(현재 자유저항연대 소속)은 다음과 같이 반발한다. “저들이 자체적 법을 갖고 있는데다, 출자 규모를 감안해볼 때 중국 투자자들은 중국인이나 한국인을 불러들일 가능성이 있으며, 온두라스 국민에게 돌아갈 일자리는 별로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일단 뽑힌 것에 만족하다가 어느 순간 불만의 동기를 발견하면, 로머 교수의 예상대로 이들은 두 발로 항의하면 된다. 즉, 그곳을 떠나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권리 수호를 원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시범 도시’에서는 그 어떤 노조도 허용되지 않으니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일 저들이 반항한다면? 민간경찰이 다시 질서를 바로잡아놓을 것이고, 예외 법정이 논란을 종식시킬 것이다. 만일 무질서가 계속 이어지며 확산된다면? 아시아나 어디 다른 곳에서 원정군을 끌어들여 질서를 바로잡으면 되지 않겠는가? 이제 그곳은 당국의 권한에도 벗어나는 영역이 아니던가.

자신의 발언이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아마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듯한 실베스트리는 3월 3일, 우리와의 회동에서 큰 목소리로 이렇게 주장했다. “확실히 싱가포르가 무리 없이 돌아가는 건 전체주의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싱가포르 대통령은 24년 동안 정권을 잡고 있죠. 지금은 그 아들이 다스리고 있고요. 그곳에는 우리에게 없는 구조가 많아요. 이 모델을 우리 실정에 맞게끔 바꾸는 게 관건이죠.”

<각주>
(1) <AP>, 2011년 1월 20일.
(2) 폴 로머의 ‘차터 시티’ 개념에 대해 더 알아보려면, ‘차터 시티’ 관련 사이트 www.charterities.org/blog 참조.
(3) ‘Frente a frente’, <Televicentro>, 2011년 1월 17일.
(4) 찬성 126표, 반대 1표, 기권 1표.
(5) <El Heraldo>, 테구시갈파, 2011년 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