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 예술, 이분법과 클리셰를 넘어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한 19세기는 그 이전에 볼 수 없던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예술은 유익한 것이 돼야 하는가, 아니면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하는가. 뒤이어 온 20세기 내내 이 논쟁은 정치적 색채를 띠며 더욱 활기차게 된다. 이런 이분법적 대립이 근거 있는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참여 예술’이라는 표현이 “‘신교도의 승마’(신교도의 말타기에 대한 가톨릭교도의 편견)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의 효과를 만들어냈다”고 했다. 부조리하다고 말하지 않기에는 진지함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는 20세기 후반 흔하게 사용되던 ‘앙가주망’(사회참여)이라는 수식어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럼에도 앙가주망이라는 표현은 살아남았고, 오늘날에 이르러 참여는 정치적 참여에 국한된다. 참으로 놀라운 집중이 아닐 수 없다. 일례로, 몇 세기에 걸쳐 서양 예술이 종교 분야에 참여하면서 비잔틴 예술, 낭만주의 예술, 고딕 예술, 아니면 단순히 기독교 예술 등 수많은 수식어가 만들어졌지만 참여 예술이라는 수식어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정치,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해 권력(사랑이나 죽음, 신앙도 마찬가지다)은 예술이 갖는 여러 심오한 존재 이유를 하나로 통합해버린다. 하지만 예술가에게 참여라는 수식어는 정치적 견해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공공연히 표방해야 하는, 다시 말해 예술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강박관념에 가까운 결정이다.
아르튀르 랭보의 가장 근본적인 희망대로 ‘삶 변화시키기’는 별개의 일이고, 또 다른 차원을 상정한다. 남미에서,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예술과 정치, 달리 말하면 예술과 전투적 태도를 분리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지던 시기가 있었고, 마침내 참여의 실체보다 그 수식어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앙가주망이 상대적으로 인기를 잃게 된 이유, 그리고 보르헤스가 앞에 나온 코멘트를 하게 된 이유는 이런 불균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참여’에 중요한 쇄신(예컨대 1910년 멕시코 혁명 때 나타난 시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이 일어났고, 예술가들은 자신이 처한 역사적 과정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이런 변화는 여전히 상투적인 생각, 즉 메시지를 담는 예술이라는 진부한 생각을 강요했다. 그렇지 않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탐미주의 선고를 받는 것으로 여겼다. 좋은 의도로 포장된 길이지만 대개 끝은 좋지 않았다. 많은 예술가들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예술을 처음 발견한 상태 거의 그대로 내버려둔 채 사망했다. 물론 예외도 많다. 남미를 찬양하기 위한 파블로 네루다의 ‘마추픽추의 산정’(1)은 남미의 지형과 역사 그리고 이름 없는 민중의 영웅적 행위를 노래했고, 신화적 경지에 도달했다. 이 작품은 주제에서나 내용을 다루는 면에서나 가히 충격적이다. 탐미주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20세기 예술 논쟁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고, 그것이 지나쳐 여러 종류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독일 작가 고트프리트 벤(2)은 “누군가 자네를 탐미주의라 비난하거든 그에게 탐미주의의 이점을 증명해 보이게. 그 사람이 원시인이야”라고 말했다. 앙가주망은 인용부호가 있든 없든 간에 정당한 것이다.
하지만(언제나 이 ‘하지만’이 따라붙는다) 예술가는 그가 작업하는 특별한 마티에르(주제와 소재), 그리고 그가 작업하는 마니에르(방식), 다시 말해 ‘어떻게’에 무관심할 수 없다. ‘어떻게’는 구조와형태, 오브제가 자신을 둘러싼 것들과 새롭게 관계 맺게 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창작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예술가는 현재 순간이 언제나 형식에 개입하고, 이 형식이 그 시대의 영인(影印)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 없다. 예술가가 자신에게 부합하는 형식을 찾아내게 되는 만큼 세계관은 더욱 그 시대와 연결돼 있다. 어떤 방식의 반복과 창작을 구별해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예술은 자신이 선택하는 주제에 의해, 그리고 언어와 예술의 관계에 의해 사회·정치 문제에 참여한다. 그래서 현실 세계를 포착하기에 적절한 언어를 사용하고, 신화와 전설이 역사와 뒤섞이는 것처럼 상상력을 통합할 필요가 있다. 40년도 더 이전에 옥타비오 파스는 ‘단절의 전통’을 말한 바 있다. 그는 모더니티(근대성)의 양상을 드러내기 위해,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출발해 20세기 거의 전체를 관통하면서 형식의 되풀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파스는 단절의 반복이 진정한 전통을 만들어내는 기회가 된다는 점을 이해해서 그렇게 단언했다. 또한 그는 어떤 전통과의 관계를 끊으려 고집하는 사람은 결국 또 다른 전통을 만들어내게 된다는 명백한 모순을 고발했다. 그래서 참여에 관해 쇄신의 문제, 창작이라는 하나의 의욕이 갖는 두 얼굴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단절의 전통’과 동시에 어쩌면 더 중요할 수도 있는 또 다른 흐름, 즉 ‘건설의 전통’이 언제나 존재해왔다. 이 전통은 예술가가 낡은 전통에 질식해 새로운 구조를 세워보겠다고 나설 때마다 쇄신되는 것이다. 스페인 황금세기는,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와 후안 보스칸이 이탈리아 11음절 시구를 이탈리아 반도에서 스페인으로 옮겨와 카스티야식으로 구성해내지 않았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자유시의 기여 없이는 모더니티도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20세기 초에 공들여 만들어낸 형식이 없었다면 현재의 시적 감성도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의 방식대로 이런 혼란이 무엇을 만들어낼지 알아보기 위해 반드시 파괴만 할 것이 아니라, 사용하지 않게 된 형식을 쇄신된 다른 형식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몇 명만 예를 들어도 스테판 말라르메, T. S. 엘리엇, 기욤 아폴리네르, 마리안 무어, 세인트존 퍼스, 드루몽드 데 안드라지, 루벤 다리오, 세사르 바예호 등이 탁월한 건설자들이었다.
서로 적대적 영역에서 예술의 참여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바로 그 한 가운데에 위치한다. 시간의 흐름에 저항하는 예술가의 참여는 가장 본질적 사회 문제에 관한 것이지 정치 판도와 관계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주어진 순간, 상황의 위급함은 예술가의 ‘명백한’ 증언을 요구할 수 있다. 이런 식의 개입은 아마 필수 불가결한 것이겠지만, 오늘날 그런 개입은 생명력을 상실했다. 반면 넓은 의미에서의 참여, 즉 예술의 사회적 필요성과 사회에 대한 반향은 여전히 본질적인 것으로 남아 있다. 이 반향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보르헤스의 시는 파급효과를 가지지만 그렇다고 그의 시가 참여시라는 의미는 아니다. 비록 프랑시스 퐁주의 시가 참여시로 간주되지만, 그의 시가 반드시 시사 문제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이런 작품들이 사회와 조화를 이루는 작품, 사회문제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수용하는 작품이다. 세계로 눈을 돌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분명 참여 예술은 자신을 충분히 정당화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더 훌륭한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더 나은 설교자가 될 뿐이다. 수많은 분야에서 이미 행해진 것처럼, 어떤 시스템을 고발하는 일이 예술적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형식을 위한 형식은 옹호하지 않는다.
아르헨티나의 시인 하비에 아두리스는 나와 나눈 대담에서 “시인은 인상적인 사물들을 말해야 한다”고 했다. 용(龍)이나 치정 범죄 같은 것들을 읊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은 우리가 아직 모르고 있던 것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단어, 구조, 포맷이다. 그것들이 사랑이나 종교, 또는 정치처럼 많이 기대되는 주제들을 ‘인상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그렇다. 예술은 예술적 정당성 안에서 참여 예술이 된다. ‘마추픽추의 산정’은 그러했으나, 네루다가 그 어떤 매력도 없이 중앙위원회(그는 공산당 활동을 했다)의 천사를 찬미할 때 참여 예술이 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전쟁 후, 공공연한 정치적 참여가 강압적인 것으로 판명되던 혹독한 시기에, 출판사 편집 책임자였던 루이지 에이나우디는, 소설을 출간한 지 얼마 안 된 이탈리아 작가 체사레 파베세에게 “그 소설은 부르주아의 마음에도, 프롤레타리아의 마음에도 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파베세는 그의 <일기>에 “굿”이라고 간결한 코멘트를 달았다. 물론 그가 그런 비평을 인정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그는 예술이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는 다른 길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보았을 뿐이다.
글•산티아고 실베스테르 Santiago Sylvester
<생물학적 시계>(도크·부에노스아이레스·2007), <리더의 사무실>(알시온·코르도바·2003) 등의 작품이 있다.
번역•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각주>
(1) <위대한 노래>(Canto General), 갈리마르, 파리, 1984.
(2) 고트프리트 벤(1886~1956)은 표현주의를 주장하던 작가로, 나치 체제에 동조했으나 나치는 그의 미학을 규탄했다.
(3)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1876~1944)는 미래주의 주창자이며, 파시즘 속에서 구체화된 미래주의 이데올로기를 찬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