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감방 이웃은 희한한 녀석들”

2011-08-08     장마르크 루이양

2011년 5월 1일 현재, 프랑스 교도소의 수감자 수는 무려 6만4584명에 달한다. 사회시스템의 끔찍한 이면을 말해주는 교정제도는 점차 형벌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높은 담벼락 뒤에서는 ‘제거’의 엔진이 윙윙대며 돌아가고 있다.

교도소에서는 온갖 종류의 일그러진 얼굴을 볼 수 있다. 정신 성장이 부진한 사람과 타잔 흉내를 내는 근육질 남자, 머리가 지쳐 안 돌아가는 사람과 마약에 취한 사람, 기차 화통을 삶아먹은 사람과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

언제, 어느 교도소에서든 이런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비극적인 서커스 단원 같은 이들은 대체 어떤 무시무시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것일까?

그렇다, 내 이웃은 희한한 녀석들이다. 가령 ‘귀머거리’라 불리는 친구는 배식을 담당했다. 그러던 중 그를 못마땅해하던 누군가가 몸뚱이를 박살내버려 자신이 나눠주던 구이 요리처럼 조각났다. 원래 그는 아르덴 지방 슈즈 마을 부근의 어느 제철소에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에 걸려 그의 인생극장에 사운드가 꺼져버리고 말았다. 무슨 병인지 설명해줬는데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내 이웃들은 이름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리곤 한다. 바깥세상에서도 알지 못하는 병일 게다.

온갖 종류의 일그러진 군상들

내가 있는 감방에서 문을 몇 개 지나면 시각장애인이 있다. 기나긴 통로를 지나갈 때면 하얀 지팡이를 이리저리 휘두른다. 그래봤자 다른 수감자가 갑자기 방문을 열면 별수 없이 고꾸라진다. 두개골이 장애물에 쿵하고 부딪히는 소리는 1층까지 울려퍼진다. 일요일 아침이면 오르간을 예배당까지 가지고 내려와서는 신부의 설교에 맞춰 연주를 한다. “예수는 다시 오신다… 예수는 다시 오신다… 우리 곁에….”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 대한 연민을 거두었다. “계집애들 치마 밑에 손 넣을 때는 지팡이를 안 쓰던걸!” 그는 종종 들러리 하나를 대동하고 다닌다. 은으로 된 목발에 의지하며 일그러진 두 다리를 질질 끌고 다니는 친구다. 들러리는 기도회의 선교모임에서 서투르게 기타를 치곤 한다. “예수는 다시 오신다… 예수는 다시 오신다… 우리 곁에….”

화창한 아침이면 내 방 창문 아래 잔디에서 절름발이가 골프를 친다. 골프채는 빗자루로 만들었다. 말수가 적고 호리호리한 꺽다리다. 그는 매일 마당을 돌며 까치와 갈매기 깃털을 주워 모았다. 그러다가 전염성 조류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감방 동료들은 공중보건을 위한 제물로 불태우겠다며 그를 위협했다.

복도의 또 다른 방에는 ‘클럽 매니저’ 같은 녀석이 있다. 신을 안 믿는 그는 식칼에서 꼬챙이에 이르기까지 주로 부엌 용품을 이용해 살인을 저질렀다. 포크는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교도소에서는 포크의 사용 빈도가 높다. ‘테팔’(프랑스의 유명한 프라이팬 상표)이라 불리는 서글서글한 20대 청년도 있다. 자기를 학대하던 새엄마를 프라이팬으로 내려쳐 죽였단다. 별명은 거기서 유래했다.

무시무시한 살인마들의 귀여운 별명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과 이런 곳에 있는 게 내 눈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웃도 있다.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금발의 대학생이다. 슬픔이 서린 그의 푸른 눈은 수감 생활과 죄악에 찌든 다른 이들의 눈동자와는 전혀 다르다. 그런 청년이 왜 자기 아기를 전자레인지에 넣었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다. 한편 ‘냉장고’라고 불리는 친구는 음식물이 아닌 자기 내연녀들을 냉동시켰다. 잘라서 봉투에 넣은 뒤 꼼꼼히 라벨까지 붙였다. ‘모니크 갈빗살’, ‘지네트 넓적다리’, ‘자닌 어깨’….

어느 날 내 문학작품의 독자라는 동료 하나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자네가 꼭 좀 봐야겠어.” 마치 협동조합 직원 같은 투로 말했다. “나중에 이것도 글로 써주겠지?” 그는 어느 현관 앞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쓰레기들이 바람에 쓸려 시멘트 바닥 위로 이리저리 날렸다. 산업용 세척제의 초록 레몬향과 소변 냄새가 뒤섞여 진동했다. 벽면을 따라, 그리고 계단 밑으로 사내들이 옹기종기 모여 요동치고 있었다. 발걸음과 몸짓, 대화까지 어느 것 하나 온전해 보이지 않았다. 다른 공간, 다른 시대에서 온 사람들처럼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난 단 한 명도 알아볼 수 없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자들일까?

밖으로 나오라는 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들려왔다. “약품 배급 시간입니다! 약품 받으러 나오세요!” 복도 끝에서 교도관들의 삼엄한 호위 속에 여자 간호사 2명이 카트를 밀며 등장했다. 소리는 멀리 있는 복도까지 울렸다. “약품 배급합니다! 약품 받으러 나오세요!” 건물마다 사람들이 계단을 구르다시피 하며 정원을 짓밟고 달려나갔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들은 입가에는 침을 질질 흘렸고, 시선은 넋이 나간 듯했고, 눈동자는 빛이 바래 있었다. 나이에 안 맞게 벌써부터 지병을 앓고 있는 그들 무리를 피해 우리는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운명, 중독, 그에 앞선 체계적 편견

트레이닝복 상의를 입은 뚱뚱한 사내가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오래된 호러영화 리메이크에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앞으로 모은 두 손에는 알약 봉지가 들려 있었다. 나를 안내한 친구가 귀띔해줬다. “우트로 사건 장본인이야.”(1) 과연 역할에 어울리는 외모였다.

뒤에서는 근심 없어 보이는 할아버지 부대가 슬리퍼를 끌며 어슬렁어슬렁 따라오고 있었다. 정신병동 정원사가 그중에 눈에 띄었다. (어느 여름날 오후, 다른 수감자들에게 출입이 금지된 뒤뜰에서 그의 정교한 작업을 중앙복도 통유리 너머로 지켜봤다. 그는 민첩한 손놀림으로 다양한 색과 형태의 꽃을 놀라운 볼거리로 만들어냈다. 교도소 고참들은 이런 광경에 감격했다. 파란 작업복을 입고 체크무늬 모자를 쓴 그의 모습을 보면 툴루즈 외곽의 마을 혹은 작은 정원에서 어린 시절에 본 전형적인 할아버지들이 떠올랐다.)

내 감방 이웃들이 바깥세상의 거리를 걷는다면 사람들은 아마 무서워할 것이다. 하긴, 무서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10년 넘도록 몽둥이에 익숙해진 이들의 머릿속에는 오직 복수할 생각뿐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저 운명의 채찍질과 나쁜 음료에 취해버린 불쌍한 중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걸인이나 집시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편견 때문에 사람들은 비슷한 것보다 다른 것을, 백색보다 흑색을, 부자보다 가난뱅이를 더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들의 불행한 처지가 멍청한 고문관들의 순응보다 더 많은 공포를 유발한다. 말이 나왔으니, 고문관들이 국익을 이유로 얼마나 많은 이들을 범죄인 취급하고 있는가? 역사와 사법제도의 실태를 보면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1950년대 말, 만약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낙인찍힌 자들의 수용소에서 자느니 차라리 알제에 낙하산부대원으로 파병되는 쪽을 택하면서 주저하는 이가 몇이나 됐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감방이야말로 보호받고, 자유롭고, 강력범들에게서 격리되는 곳이라고 느꼈을까?

글•장마르크 루이양 Jean-Marc Rouillan
주요 저서로 <스피넷 피아노의 폴과 나: 교도소 내 질병과 죽음에 관해>(Agone·Marseille·2010) 등이 있다.

번역•최서연 qqndebien@naver.com

<각주>
(1) 프랑스 북부 우트로 마을에서 2000년대 초에 발생한 미성년자 성추행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