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좀비가 아니다
출판계에서 책이 팔리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해마다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 계속돼왔지만, 지금은 단순한 엄살만은 아닌 것 같다. 지난해 말에 출간된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쌤앤파커스)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미국 돌풍, 신정아의 <4001>(사월의책) 화제, 문재인의 <운명>(가교) 출간 등을 계기로 몇 차례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잠시 내주었으나 계속 시장을 독주하면서 100만 부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다.
해마다 최대 성수기인 여름시장을 겨냥한 소설들이 5~6월에 출간된다. 올해에는 최인호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여백미디어),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청춘>(창비), 황석영의 <낯익은 세상>(문학동네) 등이 출간됐다. 이 중 최인호 소설이 판매부수 15만 부를 넘기고, 김애란과 황석영의 소설은 5만~7만 부가 판매됐다. 지난 3월 말에 출간돼 엄청난 화제를 끌며 차세대 주자를 이끌 작가로 여겨진 정유정의 <7년의 밤>(은행나무)이 15만 부를 넘겨 우리 소설이 시장을 이끌고는 있으나, 예년에 비하면 화제를 끈 책마저 판매부수가 절반 이하로 떨어진 것은 확실하다. 물론 30대 초반의 작가 김애란의 첫 장편소설과 정유정 장편소설의 판매부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어 연말까지는 결과를 더 보아야 하지만, 예년처럼 30만 부 이상 팔리는 소설이 실종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올해는 더구나 자기계발서의 몰락이 두드러진다. 2008년의 금융위기 이후 자기계발서의 주가가 크게 떨어졌지만, 그래도 시장을 주도하려는 자기계발서가 해마다 출현했는데 올해에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자기계발서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2004년 이후 삼성경제연구소가 해마다 발표해온 ‘SERI CEO 여름휴가 추천도서’의 추락이다. 이 추천도서는 해마다 여름 출판시장의 ‘태풍의 눈’으로 작용했으나 올해는 판매부수가 예년의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이 경영자의 시각을 반영하는 ‘SERI 추천도서’에 대한 대안 리스트로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 현실을 고발하는 책 중심으로 ‘Sorry CEO’ 추천도서를 발표해 딴죽을 건 결과가 어느 정도 작용했겠지만, ‘SERI 추천도서’의 추락은 자기계발서의 욕구가 크게 떨어졌음을 증명한다.
여름 출판시장에는 장르문학에서 늘 트렌드를 주도할 신간이 출현했지만, 올해에는 이 역시 실종됐다. 번역서인 넬레 노이하우스의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북로드)이 그런대로 선전하고 있지만 국내 작가의 소설은 실종됐다. 인문사회과학도서의 추락은 더욱 심각하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을 빼놓고는 화제를 끄는 책이 출현하지 않았고, 이 분야의 실력 있는 유명 출판사마저 매출이 예년에 비해 30% 이상 격감했다고 아우성이다. 이미 몇 년째 추락 중인 아동출판 시장이나 과포화 상태에서 심각한 경쟁이 벌어지는 청소년출판 시장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출판사들은 이런 현실을 어떤 마케팅으로 이겨내려 하고 있을까?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은 온라인 서점의 초기 화면에 자사 책을 최대한 강력하게 노출시키는 것이다. 오프라인 서점이 추락하면서 YES24, 인터넷 교보문고, 인터파크, 알라딘 등 4대 온라인 서점의 매출 비중이 가파르게 성장하다 보니 출간 초기에 온라인 서점에서 강하게 ‘푸시’하지 못한 책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인식이 출판마케터들의 마음을 지배하게 됐다. 최근 화제를 끈 책의 경우, 이 서점들의 매출 비중이 80% 안팎인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사는 전략상품에 대해 2~3개월 전부터 예약판매 등 사전 마케팅을 통해 출간 즉시 온라인 서점 초기 화면에 노출시켜 판매를 극대화하는 데 사력을 다한다. 여기서 대대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켜 오프라인 서점으로 자연스럽게 관심이 확장돼 시장에 안착해야, 비로소 베스트셀러가 되고 장기 스테디셀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온라인 서점에 노출돼 있을 때는 반짝 판매되다가 노출에서 빠지는 즉시 판매가 급감하는 것이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차례 바뀌는 온라인 서점 메인 화면에 노출되는 책들이 책의 진정한 상품성보다 출판사의 마케팅 능력에 좌우되다 보니 독자의 신뢰감을 크게 잃은 결과다. 따라서 노출을 위해 투여한 비용마저 뽑아내기 어려운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초기 노출을 위해서는 평상시 책의 출고가를 낮춰주고, 노출 광고나 검색창 광고를 하고, 각종 이벤트에도 비용을 대는 등 많은 마케팅 비용을 투여해야 하지만 그런 비용을 뽑아내는 것마저 만만찮다. 이 때문에 출판사들이 온라인 서점 초기 노출 이후 추가적 작업을 통해 확장성을 키우는 마케팅 프로모션을 계획하는 일은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오프라인 소매서점에서는 출고한 지 2~3주 안에 반품하기 시작하는데, 그 기간을 버티는 책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신간 론칭이 힘겨워지고 있다.
출판사들은 왜 이런 영업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과도한 할인경쟁으로 온라인 서점의 매출 비중이 지나치게 커진 뒤 오직 베스트셀러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세력을 키운 G마켓, 11번가 등 오픈마켓은 철저하게 베스트셀러 중심으로 판매하고 있다. 이 업체들에 책을 공급하는 벤더(변칙 도매업체)들은 팔릴 만한 책을 가지고 몇% 이익을 놓고 경쟁하면서 시장을 확대하는 데 골몰해왔다. 이들의 시장지배력이 커지자 출간 초기에 베스트셀러에 오르지 못한 책은 곧바로 시장에서 도태된다는 인식이 일반화됐고, 출판사들은 오로지 온라인 서점의 초기 노출에만 목숨을 걸었다. 하지만 최근에 처음부터 자금력 없이 덩치만 키워오던 KG북플러스, 샘터사 등 벤더업체 몇 곳과 이 업체들에 크게 의지하던 출판사 몇 곳이 연쇄 도산하는 바람에 출판계가 큰 충격에 빠졌다.
2000년 온라인 서점 등장 이후, 우리 출판계는 온라인 서점의 할인경쟁에 무작정 끌려다녔다. 그 결과 책의 유통경로 조정 능력 등 유통지배력을 완전히 잃다시피 했다. 그래서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넋 놓고 있을 뿐 아무런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게임기 시장을 주도하던 닌텐토DS나 소니PSP마저 모바일 혁명의 태풍을 이겨내지 못하고 추락한다. 지하철에서는 무가지를 집어드는 사람마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출판시장 또한 다르지 않다. 출판시장도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대변되는 모바일 혁명과 소셜네트워크의 무서운 성장이라는 회오리에 휘말려 있다. 책시장은 종이책과 웹, 앱(애플리케이션)이 공존하는 시장으로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다.
추리소설·로맨스 등 장르문학, 외국어책을 비롯한 실용서, 간단한 도표나 수식으로 설명이 가능한 자기계발서는 급격히 시장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런 분야는 기존의 종이책이 아닌 새로운 시스템에 맞는 아이디어 상품으로 시장성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영원불변한 인간의 자기계발 감성은 <나는 가수다> <남자의 자격> 등 텔레비전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옮겨가고 있다. 이런 마당에 미국발 자기계발서로 승부를 걸어도 독자는 책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인터넷이나 모바일은 온몸으로 정을 나누는 다양한 커뮤니티를 양산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관심은 ‘하나’로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십인백색으로 갈수록 잘게 쪼개지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에서 화제가 된 상품이 그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즉각 팔려나가는 것은 일상이다. 이제 상품 트렌드는 메가트렌드에서 마이크로트렌드로, 다시 나노트렌드로 날로 진화하고 있다.
출판시장은 이런 시스템에 빨리 부응해야 한다. 초대박 상품으로 시장을 한꺼번에 확대하겠다는 안일한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 급격하게 변하는 세상에서 중요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시의적절한 상품을 즉각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손으로 글을 쓰거나 자판을 두드리던 것에서 벗어나 엄지손가락으로 누르고,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으로 검색할 수 있는 세상에서 독자가 과거의 종이책을 소비할 리는 없다. 그러니 책도 달라져야 한다. 디지털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종이책, 웹, 앱이라는 체제에 맞는 상품을 다양하게 내놓는 사람만이 미래를 주도할 수 있다. 이야기 구조, 편집, 디자인, 만들기, 마케팅 등 모두가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그런 변화를 이뤄내야 한다는 것을 올여름 출판시장은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글•한기호
출판 전문 격주간지 <기획회의>와 월간 <학교도서관저널>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