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호 아래서 우리의 숭고함을 말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사를 통해 세계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접하다 보면 우리가 실재하는 곳곳의 다른 질감을 느끼게 된다. 역사와 환경, 문화, 정치적 상황 등이 총체적으로 작용하는 사람들의 삶은 닮았지만 때론 너무 다르다. 망명한 리비아 출신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숭고함’을 느꼈다. 일렁이는 엄숙함과 숭고함 뒤에는 이질감과 생경함이 조그맣게 따라왔다. 그것은 마치 프리모 레비의 소설을 읽는 것이나 영화 <모터사이클다이어리>를 보며 푸세와 알베르토의 길을 함께 따라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내가 속한 현실과는 다른,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어떤 곳’의 이야기였다.
이브라힘 알코니의 친구는 행복을 찾아 리비아로 돌아갔다. 21세기 한국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공부하러 서울로 온 나는, 도시 빌딩 사이에서 차츰 인간에 대한 기본적 인지권을 박탈당하고 있다는 느낌에 빠져들고 있었다. 1천 일이 넘는 동안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해도 듣는 척도 안 하는 고매하신 자본가들의 모습, 용역 깡패가 노인의 멱살을 휘어잡고 여성들을 희롱하는 모습, 평화를 위해 모인 시민들에게 최루액 물대포를 뿌려대는 경찰과 국가의 모습, 시민들과의 소통에 그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는 정치권 인사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인간 존재에 대한 의문과 회의가 솟아날 뿐이었다. 그 순간에 지구 어느 한 곳에서 누군가는 플라톤과 칸트, 그리고 대자연의 조언을 품고 있다니, 얼마나 숭고한가!
‘진리’라는 개념이 희미해지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진리 대신 정보가 셀 수 없이 넘쳐난다. 누구에게서 어떻게 나온 것인지 모르는 정보를 무더기로 주입해 그것을 분별하며 판단하는 데도 헉헉거리는 상황이다 보니, 전공임에도 인문학이니 철학이니 하는 것들이 더욱 희미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버젓이 자유와 행복이라는 인간의 진리 개념이 나온다. 낯설지만 왠지 반가웠다. 저자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것이 리비아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라고 말한다. 예언만 믿고 자연히 도래할 미래만 기다리다 무력하게 절망에 빠져 영혼까지 잠식해간 리비아 국민이 처음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스스로 일어서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그것이 현재 리비아란다.
그들이 절망 속에서 행복을 발견한 것처럼, 나는 드디어 2011년 한국에서 숭고함을 발견한다. 지난 6월 11일을 시작으로 7월 9일, 7월 30일 모두 세 차례의 희망버스가 떠났다. 생존을 옥죄여야 했던 이들과 마음이 억눌렸던 수많은 사람에게 푸르른 그늘을 만드는 김진숙과 85호 크레인을 향해 가는 버스의 종착지는 그 이름대로 ‘희망’이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 자신이 기만당하고 있음을 깨달은 순간 리비아 국민은 자유를 갈구했다. 한국 국민도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돼가고 있음을 느끼면서 부산 영도의 85호 크레인으로 모여들고 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희망버스를 타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루는 꿈에 85호 크레인에 파란 싹이 돋기 시작해 점차 무성해지더니 안전계단의 손잡이들이, 붐대의 철근들이 구불구불 나무줄기로 변하더니, 아, 몇천 년은 자랐을 법한 거대한 나무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시원한 나무 그늘이 생기더니, 운전실이 예쁜 원두막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1) 동화적 환상이 덧대어 우리를 뭉클하게 만드는 이 이미지는 아마 그녀의 염원의 표상일 것이다. 동시에 우리의 염원이기도 하다. 짧은 근현대 역사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의 피울음이며 자본의 냉랭한 상징인 철골 고공 크레인이 생명 가득한 나무줄기로 변하는 우리 모두의 자유와 해방 말이다.
나는 3차 희망버스에는 오르지 못했다. 최루액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끝내 차벽을 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던 2차 희망버스의 기억 때문에 걱정이 되었고, 트위터로 부산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날 비로소 진정한 ‘희망’의 의미를 깨닫게 됐다. 사람들은 도로 행진 대신 게릴라식으로 개별적 교통편을 이용해 크레인 인근까지 모여들었고, 영도구 시민들은 자가용으로 골목골목 가로질러 희망버스 탑승객들을 날라주었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을 전면에 내세운 야비한 위압적 폭력에 굴하지 않았고, 밤이 새도록 음악과 함께 즐거운 축제를 벌였으며, 풍등을 날려 모두의 가슴에 ‘진숙좌’라 부르는 희망의 별을 놓았다. 또 돌아오는 날에는 부산의 수해 복구에 참여했다. 폭력과 기만을 만났을 때 물 흐르듯 돌아가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자유와 행복을 만들어냈다. 나는 이를 목도하며 동이 틀 때까지 잠들지 못하고 새벽 내 몸을 떨었다.
절망의 끝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피어나는 희망을 움켜잡고 불가능한 꿈을 가슴에 품은 채 투쟁하는 모든 움직임은 아름답다. 그렇기에 이브라힘의 친구는 다시 리비아로 떠난 것이다. 한국에서 자유를 만난다는 것은 무엇일까? 행복을 찾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리비아처럼 총칼이 난무하는 전쟁터에 찾아들어갈 필요는 없다. 대신 우리는 우리만의 보이지 않는 전쟁터 속으로 대탈출하면 된다. 이브라힘의 표현대로 그것은 ‘이기심이라는 우물에서 자유라는 천국을 찾아가는 탈출’이다. 한국의 전쟁은 늘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치와 미디어의 철저한 은막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요즘 상황을 보면 더 이상 가려지지 않는가 보다. 하긴 거대한 생명의 거목을 어떻게 가릴 수 있을까.
이제 우리도 무기를 들자. 생명을 죽이는 무섭고 잔인한 무기가 아닌, 행복과 자유를 품은 ‘연대’라는 무기를 들자. 나는 한진 자본과 정부가 왜 그토록 희망버스를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가장 낮은 곳에서 피어난 멈출 수 없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희망버스는 의미심장한 징후이며 폭발이다.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길이 다른 이들을 누르고 혼자만 우뚝 서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는 것은, 기득권들에게 핵폭탄 이상의 위력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전쟁터에 나서며 엄숙해질 필요는 없다. 즐거우면 된다. 더 이상 헛된 가치와 이상 속에 빠져 있지 않을 것이며, 우리만의 행복과 자유를 쟁취한다는 생각은 얼마나 유쾌한가. 동시에 얼마나 숭고한가. 그것이 우리의 숭고함이다. 이제 마법의 호리병을 여는 우리의 주문을 외워보자. 희망, 희망,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