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좌파성향의 대학을 폐지하는 근거는?

80여년 전 악법의 부활

2021-03-31     도미니크 팽솔 | 역사학자, 보르도-몽테뉴 대학교 조교수

고등교육부 장관이 ‘이슬람-좌파주의' 성향의 대학을 폐지할 계획을 내놓은 데 이어, ‘공화국의 원칙 존중을 강화하는’ 법을 제정해 이념을 확실히 통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정부의 이같은 시도는 1936년 1월에 통과한 한 법에 근거해 행정적 해산도 배제하지 않는다.

 

프랑스의 중학교 교사인 사뮈엘 파티가 2020년 10월 16일, 무함마드를 풍자한 만평을 수업 교재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이슬람 광신도에게 살해되자, 프랑스 내무부는 지난 12월 2일 ‘이슬람혐오 반대단체(CCIF)’에 대한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 조치에 대해 크게 항의가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테러와 무관한 이 단체를 금지함으로써, 본래 위급상황을 대비해 만들어진 예외 조치의 정당성에 다시금 의문이 제기됐다. 이 조치는 반대 세력들의 입을 막거나 유권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정치적 무기가 될 것인가?

행정적 해산을 보장하는 법의 연원은 1934년 2월 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날 ‘프랑스의 행동(Action française)’, ‘애국 청년단(Jeunesses patriotes)’, ‘불의 십자가(Croix-de-Feu)’ 등 극우동맹이 파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극우동맹은 자신들의 사상에 부합하는 경찰청장 장 치아페의 파면에 항의하고, 부패가 의심되는 체제를 규탄했다. 시위는 폭동으로 번졌고 15명이 사망했다. 그러자 좌파는 이것이 1901년 법으로 보장된 ‘결사의 자유’의 제한을 정당화하는 파시스트들의 쿠데타 시도라고 봤다.

이렇게 ‘전투집단 및 민병대에 관한’ 1936년 1월 10일 법이 탄생했다. 이 법이 발효됨으로써 내각에서 통과된 프랑스 대통령의 명령만으로 합법적인 단체, 무장시위를 촉발하거나 군사적 성격을 띠는 단체, 국가보안을 침해하거나 공화국 전복을 시도하려는 단체의 결성을 금지할 수 있게 됐다. 이 절차는 판사에 의한 사법적 해산과는 구별된다. 이 새로운 법적 수단에 힘입어 ‘민족주의동맹’ 활동은 레옹 블룸이 인민전선 정부를 수립한 무렵인 1936년 2~6월에 금지됐다. 1936년 6월 30일 의회에서 사업가이자 국회의원이며, 애국 청년단을 이끌었던 피에르 테탱제르(Pierre Taittinger)는 내무부 장관 로제 살랑그로에게 경고했다. “언젠가 이 조치들이 현재 당신의 지지자들과 맞서지 않도록 유의하시오.”(1) 

행정해산명령은 원래 극우동맹을 저지하는 방향으로 추진됐으나, 다른 단체들에도 신속하게 적용됐다. 이 행정 명령은 1937년에 메살리 하지의 알제리인민당(PPA)이 표방한 분리주의 운동을 진압했고, 독소 불가침 조약 이후에는 급진당 출신 에두아르 달라디에 정부의 집권기인 1939년 9월 26일, 프랑스공산당의 활동을 금지했다. 이 무기는 매우 유용해서, 1944년 8월 9일부터 프랑스 임시정부는 ‘1936년 1월 10일 법안’을 독일 협력단체를 청산하는 데 시행했다. 단체의 해산 사유 목록에는 1944년 말 공화국의 합법적 복귀를 방해하거나, 대독 협력을 ‘부추겼거나’, 1951년에 과거의 대독 협력자들이 모일 수 있도록 단체를 결성한 사실이 추가됐다.

 

“우리는 국민을 해산하지 않는다”

1945년 이후, 무장 폭력에 대응하고 국토안보를 수호한다는 논리가 다수의 반식민주의 기구들에 적용됐다. 반대로 1958년 재집권 이후, 샤를 드골의 목표는 프랑스령 알제리의 게릴라였는데, 1961년 알제리 지하테러조직인 군사비밀조직(OAS)이 해산됐다. 1968년 5월 사태로 상황은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폭도들이 도시를 점거하고 운동가들 사이에 대립이 심화되자, 6월 12일부터 정부는 ‘3월 22일 운동’과 ‘청년공산혁명운동’ 같은 극좌조직 11개를 금지했다. 1968년 10월에는 극우단체인 ‘서방(Occident)’이, 7개월 후 ‘프롤레타리아 좌파(Gauche prolétarienne)’가 같은 운명을 겪었다.

이 마오주의 운동을 금지하자 파리 및 다른 도시들에서 폭동이 발생했다. 1970년 10월, 해산된 이 운동을 재건하기 위한 재판 법정에서 ‘마오주의자’인 알랭 제스마르는 “이런 도발에 대한 반격이 폭력적이고 집단적이었다”는 사실을 환영했다. “1970년에 마오주의자를 공격하는 것은 민중을 공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좌파’의 기관지인 <국민의 대의(La Cause du peuple)> 8월호에서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한 것처럼, (브레히트식으로 표현하자면) “국민은 해산되지 않는다.”(2)

1973년 6월 공산주의동맹은 신파시스트 단체인 ‘신질서(Ordre nouveau)’의 회동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뒤 금지됐으며, 이 또한 불법단체가 됐다(충돌 와중에 70명 이상의 경찰관이 부상을 입었다). 정치적 폭력을 근절해야 한다는 절대적 요구에 이어, 1970년대에는 바스크, 브르타뉴, 코르시카의 여러 자치주의 운동에 맞서 국토안보 수호라는 명목이 계속해서 추가됐다. 이와 동시에 1972년에 민족·국가·인종·종교적 ‘차별, 증오, 폭력’을 직간접적으로 야기하는 사례를 포함함으로써, ‘1936년 1월 10일 법’의 적용 범위가 확대됐다. 1986년에 7번째 근거가 이 법에 추가됐는데, 향후 테러조직 및 테러와 연루된 조직들을 명시적으로 겨냥한 것이었다. 

법학자 로맹 랑보의 집계에 의하면, 1936~2013년에 ‘1936년 1월 10일 법’이나 다른 임시 법령에 근거한 행정적 해산은 총 124건이었다.(3) 장마르크 아이로의 사회주의 정부가 2013년 극우단체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조치들은 이런 식의 판결에 다시 힘이 실리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해에 반파시스트 운동가인 클레망 메릭이 극우파 청년들과의 다툼에서 사망한 뒤 5개 민족주의 단체의 활동이 금지됐는데, 1987년 이후에는 볼 수 없었던 규모였다. 1968년 수준에 이르려면 아직 멀었지만, 이슬람 테러단체와 공모한 혐의를 받는 운동가 집단 및 (CCIF를 포함한) 두 단체에 시행된 2020년의 조치들은 ‘1936년 1월 10일 법’이 월등하게 많이 적용되고 있는 추세를 보여준다. ‘1936년 1월 10일 법’은 현재 국토안보법(Code de la sécurité intérieure)에도 명시돼 있다. 

‘극단주의자들’과의 투쟁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시늉을 해야만 했던 정부는 극우단체인 ‘정체성 세대(Génération identitaire)’가 이민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조치는 효율성 문제와 비상사태를 구실로 매번 정당화되고 있으나, 이것이 정치적 도구로 활용될 위험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행정 권력이 엄청나게 큰 행동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만큼 더더욱 그러하다. 총 40건의 조치 가운데 ‘1936년 1월 10일 법’에 근거해 해산이 선고된 사례, 그중 10건만이 행정재판소에서 무효 처리됐고, 절반은 형식상의 문제 때문에 그와 같은 판결을 받았다. 행정심판이 사실관계에 대해 정부 측 주장을 기각한 이 5개 사건은, 행정권력이 매우 급진적이라고 판단한 모든 단체를 단칼에 제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프랑스-베트남연합은 1953년에 해산이 선고됐으나 1957년에 무효 판결을 받았고, 저항단체, 학생혁명연합, 국제공산주의기구 등 3개 트로츠키주의 단체의 해산도 1970년 무효 처리됐다. 2014년에는 클레망 메릭 사건에 연루된 두 민족주의 단체가 파리의 바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이곳의 운영단체에 행해진 조치가 행정재판소에 회부됐다.

 

음모를 뿌리 뽑는 것이 목표

그러나 해산이 무효화된 사례는 미미한 수준이고, 금지 사유는 정부가 최고행정재판소에서 기각될 확률이 거의 없이 변론을 쉽게 준비할 수 있을 만큼 광범위하다. 사실 법은 하나의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기에, 정부가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행위들과 연루된 사상이나 발언도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다. 따라서 국토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하는 것뿐 아니라, 이런 ‘목적’을 가진 단체의 활동을 금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예를 들어 바스크 분리주의 정당인 엔바타(Enbata)가 법을 준수했음에도, 1975년에 최고행정재판소는 엔바타의 해산을 확정했다. 따라서, 인종차별만이 아니라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고 조장하는 사상을 퍼뜨리는 사실’도 중요하다.  테러리즘에 관해서는, 무장 폭력을 추종하는 단체를 막는 것뿐 아니라, 이런 종류의 행위를 도발하려는 ‘음모’를 뿌리 뽑는 것이 목표다.

즉 개인, 집단, 사실, 강령들 사이의 연결성을 파악하면 비교적 많은 단체를 대상에 포함할 수 있다. 이런 조치들 때문에 현재 CCIF에 대한 불합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차별받는 무슬림을 지원하는 CCIF는 설립 후 17년간 한 번도 형사소추의 대상이 된 적이 없음에도, 신나치 집단 또는 폭탄을 설치하는 비밀조직과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 우리는 급박한 위험이 닥쳤을 때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는 일에 반대할 것이다. 매우 강압적인 행정 해산조치의 효과는 분명치 않다. 금지된 단체들은 대부분 이름만 바꿔 재등장한다. 알제리 민족주의 단체 ‘북아프리카의 별(ENA)’이 해산되자 1937년에 알제리국민당이 등장했고, 1946년에 ‘민주적 자유의 승리를 위한 운동(MTLD)’이 뒤를 이었으나 이 단체도 1954년에 금지됐다.(4) 

한편, ‘1936년 1월 10일 법’을 동원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가령 1936년의 극우동맹 해산은 ‘이에 대한 반동으로’ 혁명비밀행동위원회(CSAR, 일명 라 카굴 La Cagoule, 머리 부분이 뾰족한 두건)가 설립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 단체는 1937년에 무장폭동을 시도했다.(5) 자비에 크레티에와 이자벨 소미에의 연구를 바탕으로 역사학자 니콜라 르부르는, 어떤 조직이 해체되면 이는 단독 활동가들의 행동으로 이어지거나 경쟁관계에 있는 새로운 집단들 사이의 폭력을 격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처럼 1973~1974년 극우 및 극좌파의 테러 행동은 신질서와 공산주의동맹을 불법화한 이후 30% 이상 증가했다. 또한 1974~1975년에는 코르시카해방전선(Fronte paisanu corsi di liberazione)을 금지했음에도 코르시카에서 폭동이 10년 전보다 네 배나 증가했다.(6)

그러나, 행정적 해산의 근거나 효용이 전무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르부르가 결론을 내렸듯, 행정적 해산의 효용은 이 조치를 ‘변두리에서 규범으로의 사회적 재통합 전략’과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위협이 너무 커진다면 정부는 특정 급진단체 대원들이 일상생활에 흡수되거나, 결국에는 정치에 참여하기를 바라면서, 이 단체들이 변화하도록 내버려두는 데 심혈을 기울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부 단체들은 해산되지 않을 것이고, 대부분 당국은 금지보다는 감시를 선호할 것이다. 

법에는 허점이 존재하고, 근본적인 자유 따위는 개의치 않는 권력이 이 허점에 자발적으로 휩쓸릴 수 있다. 권력이 법을 남용할 영역을 제한하면 위험을 줄일 수 있다. 법학자 랑보는 “현재의 정치적·법적 자료들이 1930년대의 자료들과는 다르다. 따라서 유연하게 절차를 유지하는 것이 자유의 관점에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는 행정적 해산이라는 원칙 유지의 적합성 여부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7) 

현 정부의 선택은 사뭇 다르다. ‘프랑스공화국의 원칙을 강력하게 존중하는’ 법안은 해산 사유를 구체화하고 점차 늘려나감으로써, ‘1936년 1월 10일 법안’이 규정하는 조항들을 통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무장 폭력에 이어, “사람이나 재물에 대한 폭력 행위”를 야기하는 더 광범위한 사실들이 추가됐다. 이제 시위를 하면, 당신은 경고를 받을지 모른다. 

 

 

글·도미니크 팽솔 Dominique Pinsolle
보르도-몽테뉴 대학교 현대사 조교수.
 
번역·조민영 sandbird@daum.net
번역위원

(1) <Journal officiel>, 1936년 7월 1일.
(2) Gilles Ferragu, ‘1970: l’été indien de la révolution, commentaire de la couverture de La Cause du Peuple, n° 27, août 1970 혁명의 인디언서머, “국민의 대의”, 1970년 8월, 제27호 표지 문구’, <Parlement[s], Revue d’histoire politique> 28호(Rennes, 2018)에서 인용.
(3) Romain Rambaud, ‘La loi du 10 janvier 1936 sur les groupes de combat et milices privées (article. 212-1 du code de la sécurité intérieure) : l’arme de dissolution massive 분대 및 민병대에 관한 1936년 1월 10일 법안(국토안보법 제212-1조) : 대량 해산의 무기’, <Revue des droits et libertés fondamentaux 근본적 권리 및 자유 리뷰>, 2015, http://www.revuedlf.com.
(4) Gilles Ferragu, 『Histoire du terrorisme 테러리즘의 역사』, Perrin, Paris, 2014.
(5) Frédéric Monier, 『Le complot dans la République. Stratégies du secret de Boulanger à la Cagoule 공화국 내의 음모. 카굴에서 불랑제의 비밀 전략』, La Découverte, ‘L’espace de l’histoire 역사의 공간’ 시리즈, Paris, 1998.
(6) Nicolas Lebourg, ‘Usages, effets et limites du droit de dissolution durant la Ve République 제5공화국에서 해산권의 사용, 실행, 제한’, Romain Sèze(sous la dir. de), 『Les États européens face aux militantismes violents. Dynamique d’escalade et de désescalade 폭력적 호전성에 직면한 유럽 국가들. 군비확산 및 긴장완화의 역학』, Riveneuve, ‘Violences et radicalités militantes 폭력 및 군사적 급진성’ 시리즈, Paris, 2019.
(7) Romain Rambaud, ‘La loi du 10 janvier 1936 sur les groupes de combat et milices privées’, 같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