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빌인은 아랍인이 아니다
메닐몽탕의 ‘그들’만의 공동체
마그레브인 중 가장 먼저 프랑스로 이주한, 카빌인들을 향한 시선에는 강한 고정관념이 박혀있다. 이민 1세대는 대부분 노동자들이었고 지연관계를 중심으로 뭉쳤던 반면, 2세대 이후부터는 대체로 고학력이며 프랑스 사회에 더 쉽게 적응해왔다. 그럼에도 고유의 전통문화와 언어를 보호하려는 노력은 여전하다.
파리 20구 메닐몽탕역 근처 장 페라 광장. 갑자기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자, 벤치에 모여 있던 카빌 노인들이 급히 일어나 방역조치로 문을 닫은 식당 처마 아래로 비를 피한다. 식당이 영업 중이었더라도, 노인들이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핫플레이스’가 돼 ‘라운지 바’처럼 변한 알제리풍 카페와 주점들은 카빌 노인들에게 너무 비싸다. 그러니 길거리나 맥도날드에 옹기종기 모일 수밖에 없다. 프랑스식 식당과 무어식 카페를 섞어 놓은 듯했던 ‘르 솔레이’도 결국 문을 닫았다.(1) 르 솔레이의 폐업은, 프랑스 이주 1세대 카빌인들에게 있어 ‘오랜 은신처의 상실’이었다. 이들은 주로 파리와 파리 외각을 비롯해 프랑스 북부, 리옹, 마르세이유 등에 자리를 잡았다. 아랍어를 모르는 사람들도 이들을 아랍어로 ‘노인’이라는 뜻인 ‘시바니(Chibani)’라고 부른다.
알제리 북부 카빌리 지역의 베니 우르틸란느 출신으로, 메닐몽탕 거리에서 보세 옷가게를 운영하는 압달라(2)에 의하면, 이민 1세대 대부분이 임시숙소 같은 곳에서 불안정하게 생활하고 있다. 그는 이미 수많은 우여곡절로 굳은살이 단단히 박힌 이들도 이번 코로나 사태는 힘들어하고 있다며 걱정했다. 그는 멍한 눈빛으로 구부정히 앉아있는 노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은 프랑스에서 60년이나 사셨지만, 알제리전쟁 때를 제외하고 매년 여름 카빌리에 다녀왔다. 그런데, 2020년은 코로나 팬데믹 때문에 출국이 금지됐다. 만약 프랑스에서 돌아가신다면, 고향 땅을 다시는 밟아보실 수 없는 것이다.” 2020년 3월 알제리 당국은 재외국민에게도 국경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알제리 송환 항공기 예약을 위해 매일 파리 나시옹 광장 근처 알제리 영사관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이제 ‘시바니’들에게 본국 송환 비행기에 오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워졌다. 알제리 대통령의 독재 타도를 외치며 평화시민운동(Hirak)을 이끄는 청년운동가들도 이 상황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3)
우리는 메닐몽탕 거리 테이크아웃 카페 앞에서 이 청년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 프랑스어 일간지 <엘 와탕(El Watan)>의 기자 출신 메지안느 아반(37세)은 2019년 6월 알제리 정부의 체포 위협을 피해 프랑스로 이주했고, 카빌인 공동체에 들어가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평화시민운동은 젊은 알제리 이민자들만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투쟁활동에 익숙한 카빌 노인들도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열리는 집회에 동참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카빌인이 늘어난 역사적 배경
일요일마다 열리는 이 집회 풍경을 보면, 카빌인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카빌인들은 알제리 아랍어권 이민자들과 달리 모국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베르베르인의 정체성을 인정해 줄 것을 주장한다. 게다가 비난도 불사하며 카빌인 거주지역인 카빌리의 자치를 요구하기도 하고, 나아가 독립을 요구하기도 한다.
모한 켈릴 대학교수는 1994년부터 알제리 인구의 1/3밖에 되지 않는 소수민족 카빌인이(‘용어 설명’ 참조) 프랑스로 이주한 알제리 이민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모순적 상황에 주목했다.(4) 프랑스 내 알제리 이민자 수는 200만 명인데, 이 중 75만 명은 알제리 국적자이며, 나머지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거나 이중국적자다. 그런데 베르베르인 공동체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언어학 교수 살렘 샤케르에 의하면 이민자들 중 1/3 이상이 베르베르인이며, 그중 대다수가 카빌인이다.(5)
카빌인 이주민이 이렇게 많아진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871년 모하메드 엘아지 엘모크라니 족장의 주도하에 카빌리에서 반(反)프랑스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피바람을 일으킨 부족 폭동이었다. 역사학자 뱅자맹 스토라는 당시 프랑스 식민 당국이 수천 헥타르의 토지를 몰수하면서 카빌인들을 탄압했다고 설명했다. 처형 위기에 처한 폭도들 중에는 뉴칼레도니아로 도주한 경우도 있는데 이들의 후손들은 그곳에 정착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생존을 위해 망명을 선택하기도 했다.
알제리 노동청장이었던 사회학자 압델카데르 벨코자는 1963~1973년 프랑스 파견 알제리 노동자 모집을 담당하기도 했다. 알제리인 이주에 관한 그의 논문에 의하면 카빌리에서 쫓겨난 카빌인은 알제리 곳곳에서 농업노동자, 시장상인, 상점점원 등으로 일했다.(6) 그러다 1905년 프랑스가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벨 에포크 시대에 알제리 노동자들의 이주가 시작되는데, 이들 대부분이 카빌인이었다. 그리고 1차세계대전 후에는 전쟁에 동원됐던 알제리 군인들이 프랑스에 남아 정착했다.
오신 C.는 1962년 7월 알제리가 프랑스에서 독립하자 곧 고향을 떠나 메닐몽탕으로 이주했다. 왜 카빌인들이 알제리 이민자 중 가장 비중이 높은지 묻자, “나는 카빌리 지역 비방 산맥지대에서 살았는데 그곳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다. 그런 곳에는 일자리가 없으니 카빌인들은 척박하고 빈곤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결국 떠날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캐나다, 독일, 영국, 베네룩스 국가 등 다른 선택지가 있어도 프랑스는 여전히 카빌인이 가장 많이 이주하는 나라다. 2016년 5월 알제리의 한 지역언론이 카빌리 지역의 티지우주에 방문한 프랑스 대사가 프랑스 대사관에서 발급하는 비자 60%를 카빌인이 가져가며, 프랑스 거주 알제리 학생의 50%가 카빌리에서 왔다고 언급한 사실을 보도하자 논쟁이 불거졌다.(7) 프랑스는 카빌인에게 비자를 ‘특별 할당’하는 특혜를 제공한다고 비난을 받았으나, 당국은 대사가 실언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카페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카빌인들
그런데 프랑스 사람들은 카빌인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을까? 우리는 조사를 하면서 몇 가지 고정관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첫째, 카빌인들은 구직이 쉬운 지역에 모여들어 주거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민 노동자들은 일드프랑스, 파리, 릴, 루베, 마르세이유, 리옹에서 공단이나 공장이 있는 동네에 오랜 기간 모여 살았다.
또 다른 정형화된 이미지로, 카빌인이라고 하면 카페나 주점, 식당, 숙박업소 주인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IT기술자이자 경제전문가 압델크림 부세크수도 바로 이 경우다. 그는 1980년 프랑스로 유학을 왔지만, 지금은 파리 20구에 있는 마로니트 거리에서 ‘라 캉틴’을 비롯해 여러 카페들을 운영하고 있다. 190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일드프랑스에 있던 주점 중 50%는 카빌인이 운영했다. 업소 주인이 바뀌더라도 카빌인이 이어서 운영할 수 있도록 카빌인들끼리 거래를 했기 때문이다. 1941년부터 카빌인이 계속 운영하고 있는 부세크수의 ‘라 캉틴’도 마찬가지다. 1950~1954년까지는 그의 삼촌이 이 가게를 운영했고 부세크수가 2003년 가게를 인수했다. 카빌인은 시에서 업소를 매입하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다른 카빌인에게 인계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그들 사이의 거래는 여전히 활발하다.
이렇듯 요식업, 숙박업에 카빌인들이 몰린 것에도 역사적 배경이 있다. 정착 초기에, 카빌인들은 소규모 카페들을 개업했다. 이 작은 카페들은 동향인들끼리 상부상조할 수 있는 모임 장소였다. 특히 알제리 전쟁 중에는 독립운동가들의 거점이 됐다(자금모금, 운동가회의, 배반혐의자 심문). 그리고 1950년대 말 파리에 상경해서 카페, 식당, 숙박시설, 주점의 대부분을 운영하고 있던 프랑스 지방 사람들이 파리 동부쪽 일부 영업점들을 카빌인들에게 매도했다.(8) 이후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할 때 프랑스 정부와 알제리 임시정부 사이에 체결했던 에비앙 휴전협정 덕분에 알제리인들이 프랑스에서 주류 판매 허가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를 계기로 1960, 1970년대에 카빌인들은 파리의 주점이나 카페를 대거 인수했다.
역사학자 모하메드 하르비에 의하면 초창기 카페 운영은 알제리 이민자들 중 엘리트가 독점했었다. 알제리 이민자들은 노동자 계층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았고, 능력이 있으면 상업 등 다른 경제활동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등교육자들도 요식업이나 숙박업을 ‘당연한’ 진로로 여기고 있다. 압델크림 부세크수의 아들 아민(33세)은 경제학과 부동산법학 석사 학위가 있지만, 카페를 인수해 가업을 이을 계획이다. 아민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저는 파리 20구의 트농 병원에서 태어나, 릴라와 로맹빌에서 성장했어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항상 비스트로가 사람들이 교류하는 멋진 공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비스트로를 직접 경영하겠다는 꿈을 가졌지요. 저는 베르베르와 파리 두 문화를 공유하고 있어요. 거기에 ‘비스트로 문화’도요. 남동생도 졸업 후 같은 일을 할 겁니다.”
파리의 카빌인들이 주로 선택하는 또 다른 직업은 바로 택시 운전사다. 학력이 높고 젊은 이민자들도 택시 운전을 하는 경우가 많다. 부세크수도 택시 운전으로 학비를 벌었다고 말했다. 이 직업도 마찬가지로 공동체 연대가 작용한다. 택시 운전사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은, 면허증을 빌려주거나 양도해주거나, 구입비용을 보태주는 ‘이웃사촌’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렇듯 카빌인의 직업에 관련된 고정관념 외에도, 우리가 만난 카빌인들은 프랑스인들이 여전히 카빌인과 아랍인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알제리 부이라에서 문학을 공부하러 온 나세르는 본인을 알제리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아, 아랍인이군요?”라고 당연한 듯 말한다고 불평한다. 그는 알제리인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아랍인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20세기 카빌인 이민 역사에 관한 저서를 집필한 카리마 디레쉬 스리마니는 프랑스에서는 공식적으로 카빌인을 아랍인이라고 칭할 정도로 카빌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한탄했다.(9)
예를 들어, 1980~90년대에 교육부에서 기획한 이민가정 아이들을 위한 모국어 교육은 베르베르어만 구사할 수 있는 카빌인 아이들을 배제한 채, 아랍어 교육만 제안했다. 그리고 2020년 한창 ‘분리주의’ 퇴치에 대한 논의가 뜨거울 때, 마크롱 대통령도 아랍어 교육이 시의적절한 해결책이라고 내세웠지만 베르베르어 교육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는 프랑스 사회에 만연해 있는 오해를 여실히 드러냈다. 지역어 보존 및 언어 다양성 자문위원회가 1999년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프랑스 거주자 중 베르베르어(카빌어, 슐뢰흐어, 리팽어, 샤우이어) 사용자가 150~200만 명에 달한다.
이민 1세대에게 카빌어는 생존의 언어였다. 갓 프랑스에 도착한 이민자들은 대부분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카빌인 공동체는 그들을 ‘재워주고 먹여주며’ 도와줬다. 돈을 빌려주기도 했고, 파리 시내의 길을 알려주고 일터까지 안내하며 보살폈다. 그들은 프랑스어를 배우지 못했는데, 이렇게 고향 마을에 사는 것처럼 공동체 안에서만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메닐몽탕에 모여있던 카빌 노동자들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인종 심리치료사 하미드 살미는 점차 기업인, 회사 간부, 의원, 교사, 상인, 사회복지사와 같은 고학력 카빌인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민 선조들을 대체해 새롭게 부상 중인 이 공동체는 주로 망명자와 카빌리를 비롯해 알제리 전역에서 매해 몰려오는 유학생으로 구성된다. 프랑스로 갓 이주한 카빌인은 카빌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프랑스에서 태어난 이민 후손들의 경우는 다르다.
사회복지사인 나디아는 1세 때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도착했다. 그녀는 가족 외에는 카빌인이 없는 페이드브레이에서 자랐다. 그녀는 엄마와 큰오빠가 집에서는 카빌어를 쓰게 했고, 그래서 카빌어를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는 흔치 않은 경우다. 부모가 카빌어로 말하면, 자녀들은 프랑스어로 대답한다. 일반의로 근무하고 있는 라쉬다 다비는 카빌어를 알아듣지만 말은 잘하지 못한다. 그나마 전에는 여름휴가로 알제리에 다녀와서 더 나았지만, 잠시뿐이었다고 고백했다. 기자이자 작가인 나디르 당둔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은 제가 프랑스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셔서, 어설프더라도 프랑스어만 쓰셨어요. 저는 카빌어를 약간 이해하지만 말은 못해요. 카빌어 수업을 듣고 싶어요.” 파리와 근교에 카빌어를 배울 수 있는 기관이 있지만, 다비는 교육부에서 카빌어 수업을 제공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할랄식과 술을 함께 제공하는 모순
프랑스인들의 카빌인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중 하나는, 다른 알제리 아랍어권 이민자들보다 더 쉽게 프랑스 사회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카빌인 부족마을의 전통이 현자가 이끄는 정치와 이슬람 사원이 관장하는 종교가 완전히 분리돼 있기 때문에, ‘개방적 사고’를 가지고 정교분리를 수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식민시대 프랑스 군인과 지식인들이 퍼트린 카빌인에 대한 ‘미신’의 영향으로 생긴 오해다.
예를 들어, 폴 토피나르 박사의 연구(1876)를 비롯한 19세기 말의 초기 인류학 연구는 카빌인이 아랍인들과 달리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고 식민 지배를 수용하는 성향이 있다고 분석했다.(10)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카빌인은 다른 베르베르 공동체처럼 알제리 독립투쟁에 나섰다. 그럼에도 이런 생각이 고착된 이유는, 카빌인들이 종교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고 ‘시련을 잘 감내하며’ 프랑스에서 경제활동을 잘 이어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1970년대에 프랑스에 이주해, 베르베르의 정체성 보호운동을 이끌어온 대학교수 하센느 히레쉬는 카빌인이 프랑스 사회에 더 쉽게 동화됐다는 인식이 생긴 이유를, 카빌인이 ‘아랍인’이나 ‘이슬람인’들과 자신들을 차별화하는 전략을 썼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카빌인의 기원을 이슬람 이전 시대에서 찾아 고유문화를 내세우고, 생어거스틴, 유구르타, 알 카이나와 등 역사적 인물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으며, 축구선수 지단, 가수 겸 배우 물루지, 가수 이지르 등 유명 카빌인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파리와 근교를 중심으로 프랑스 전역에 정착한 카빌 이민자들은 이슬람 금기에 대해 다소 느슨해진 듯하다. 카페를 운영하는 부세크수도 맥주나 와인을 마신다고, 이단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모순된 점은, 카빌인이 가는 식당은 할랄식과 술을 함께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빌인들의 독립은 가능할까?
우리가 만난 카빌인 오신(84세)에게 프랑스에서 카빌인이 아랍인에 비해 유리한 점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1963년 10월 13일 메닐몽탕으로 이주했을 때, 프랑스인들은 우리를 무시하고 경멸하며 투명인간 취급했다. 저학력에 프랑스어도 모르는 카빌인은 그저 이민자, 아랍인일 뿐이었다”라며 탄식했다. 그러나, 다비는 “알제리 출신이라고 할 때보다 카빌인이라고 할 때 한층 호의적인 반응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알제리 출신 카빌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고 한다.
또한 우리가 만났던 카빌인들은 모두 카빌 공동체의 결속력이 약하다고 지적했다. 베르베르문화협회(ACB)의 창립자 겸 협회장 쉐리프 방부리쉬는 카빌인들이 프랑스로 이주를 시작한 지 100년이 넘었는데도, 베르베르인의 신년 ‘옌나예르’(1월 12일)(11)를 프랑스 사회에 기념행사로 정착시키지 못했다는 점을 예로 들었다. 이는 바로 카빌인 공동체가 단순한 혈연, 지연관계를 넘어 조직적으로 결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알제리 야당 사회주의전선(FFS)의 이민정책부장을 역임했고, 프랑스 이주 카빌인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인 생드니에서 교육기관 책임자로 있는 마히딘 우페르하는 카빌인들이 공동체 일원으로 소속감은 있으나 공식적인 지도자나 정기적인 모임, 집회장소를 딱히 정하지 않아 체계적인 조직을 만들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평화시민운동(Hirak)의 파리 지부장을 맡고 있는 기자 모한 바키르도 동의하면서 협소한 친인척과 지연관계로 뭉친 카빌 공동체는 이제껏 체계적으로 대규모 정치활동 또는 정체성 회복운동을 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바키르는 점점 더 많은 카빌인이 프랑스 사회에 동화되고 고국과의 연대감이 옅어지는 상황에서, 평화시민운동은 카빌인들의 결집력을 공고히 하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없다고 예상했다. 카빌인들이 자주 집회에 참여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소속감이 없는 개인적인 활동일 뿐이다. 이들에게 고향, 부족, 베르베르인 부락, 부족연맹, 알제리 국영지, 프랑스 공공장소가 갖는 의미는 비슷하다. 그래서 바키르는 평화시민운동이 많은 이민자들의 동참을 이끌어내지 못했다는 점에서 알제리 디아스포라에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했다고 판단했다. 이민자 소시민들이나 노인들은 여전히 알제리 이민자들을 지원하는 유럽 알제리인 친목회에 의존하고 있고, 대사관의 보복이 두려워 계속 알제리 독재자에게 투표를 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의 카빌인들은 새로운 과제에 직면했다. 2001년 베르베르족 반정부 시위의 유혈 진압사태, ‘검은 봄’ 사건 이후 문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동맹(RCD), 사회주의전선(FFS)과 같은 전통적 여당이 퇴보하고 카빌리 자치를 위한 운동(MAK)과 민족주의 운동이 활발해졌다. MAK의 창시자이자 지도자 페르하 메헤니는 2013년부터 카빌리의 독립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추종자 수와 이민에 미치는 영향력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존재감이 커지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1970년대 초부터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베르베르족 운동가이자 대학교수 헨 사디에 의하면, 카빌인은 신뢰도가 추락한 알제리 정부가 내세우는 아랍-이슬람 사상을 거부한다. 그리고 카빌리의 독립을 거침없이 요구하기도 한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카빌리의 독립은 알제리의 ‘단합된 국가’라는 기치 앞에서 절대 내세울 수 없는 주장이었다.
글·아레즈키 메트레프 Arezki Metref
기자이자 작가. 소설 『Rue de la Nuit 밤의 거리』(Editions Koukou·Alger)를 썼다.
번역·정수임
번역위원
(1) 이민자들의 카페 역사는 아레즈키 메트레프와 마리 조엘 뤼프의 다큐멘터리, ‘Une journée au Soleil 햇살 비치는 어느 날’(2017)을 참고했다.
(2) 인터뷰이는 익명 처리.
(3) ‘Hirak, le révil du volcan algérien 평화시민운동, 깨어나는 알제리 화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9년 12월.
(4) Mohand Khellil, ‘Kabyles en France, un aperçu historique 프랑스 내 카빌인, 역사적 인식’, <Hommes & migrations> 1,179호, 1994년 9월.
(5) Salem Chaker, 『Berbères aujourd’hui 오늘날의 베르베르인』, L’Harmattan, Paris, 2000년.
(6) Abdelkader Belhokja ‘L’émigration algérienne et ses problèmes 알제리인 이주와 문제점’, 사회학 3학기 논문, 파리 1 대학, 1975년.
(7) Abime B., ‘Le quota kabyle de Bernard Emié 베르나르 에미에의 카빌인 할당제’, <Le jeune Indépendant>, Alger, 2016년 5월 13일.
(8) Yassin Ciyow, Pierre Vouhé ‘Kabyles un jour, Parisiens toujours: les bistrots de Paris, une histoire de familles 한때 카빌인, 영원한 파리인: 파리의 비스트로, 가족의 역사’, <Libération>, Paris, 2019년 5월 22일.
(9) Karima Dirèche Slimani, 『Histoire de l’émigration kabyle en France au XXe siècle 20세기 카빌인 프랑스 이주의 역사』, L’Hammatan, 1997년.
(10) Gilles Boëtsch, Jean-Noël Ferrié, ‘L’anthropologie coloniale du nord de l’Afrique: science académique et savants locaux 아프리카 북부 식민지 인류학: 학문적 과학과 지역 학자들’, HAL 공개 자료, 1998년 3월. http://hal.archives-ouverts.fr
(11) 율리우스력의 첫날에 해당하는 날로, 고대부터 일 년 농사의 시작 시점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2018년부터 알제리에서 휴일로 지정하고 있다.
“베르베르인이자 프랑스인”
알제리인, 아랍인, 베르베르인, 카빌인을 구분하는 프랑스인은 거의 없다. 1962년에 독립한 알제리 국민은 민족이나 사용하는 언어에 상관없이 모두 알제리인이다. 카빌인은 알제리 수도 알제에서 동쪽에 위치한 산악지역 카빌리 출신 민족을 말한다. 이 카빌인은 베르베르 민족에 속하기 때문에 모든 알제리인이 아랍인은 아니다. 베르베르인은 기원전부터 북아프리카에 정착해 살았던 토착 민족을 말하며 이들은 약 2000년 전부터 구전된 타마지트어(베르베르어)를 사용한다. 베르베르인은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말리,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등 여러 나라에 분포해 있다. 카빌어는 베르베르어 중에서 슐뢰흐어(800만 명) 다음으로 사용자가 가장 많은 언어이다(500~600만 명). 알제리는 프랑스에서 독립한 이후, 전방위적인 아랍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베르베르어 사용자의 25~30%가 알제리에 거주한다. 카빌인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투아레그족, 아우레스 지대의 샤우이아족, 음자브의 모자비트족, 슈누아 산맥지대의 슈누이족 등이 베르베르어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모든 베르베르어 사용자가 카빌인은 아니다. 그러나 아랍 단일 국가가 여전히 정치적 도그마인 알제리에서 카빌인은 모든 알제리인을 아랍인으로 간주하는 것에 저항하며 베르베르인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알제리는 2002년부터 베르베르어를 ‘국민언어’로 인정했고 2016년부터 ‘공식언어’로 지정했지만, ‘국민언어이자 국가공식언어’로 규정하고 있는 아랍어에 비해 지위가 낮다. |
정치 참여의 전통
카빌 이민자들은 1920년대 알제리 독립운동을 위해 북아프리카의 별(ENA)을 창당했고, 이어 알제리 인민당(PPA, 1946년 해체)과 민주자유승리를 위한 운동(MTLD)을 연이어 설립했다. 이 카빌인들은 자코뱅의 반식민 민족주의를 추종했는데 사실 자코뱅은 카빌인과 같은 소수민족을 박대했다. 1949년 라시드 알리 야히아가 민주적 선출 방식으로 프랑스 PPA-MTLD 연맹장에 임명되자, 카빌리 출신 민족주의자들은 베르베르인의 정체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PPA-MTLD 연맹은 베르베르주의(Berberism)를 주창하는 투쟁가들이 내부 반란을 일으켜 (‘베르베르주의자들의 위기’) 혼란에 빠졌는데, 결국 이 투쟁가들은 숙청을 당한다. 1954년부터 알제리 해방을 위해 군사력을 동원했던 민족해방전선(FLN)당의 경우, 알제리의 독립이 최우선 과제였기에 베르베르인의 지위와 정체성 인정에 관한 요구는 뒷전이었다. 그리고 알제리 전쟁 중, 프랑스의 카빌 공동체는 FLN 당원들과 알제리민족운동(MNA)을 중심으로 집결한 메살리 하지의 추종자들이 난투극을 벌이자 분열됐다.(1) 알제리 독립 후, 알제리 정부는 프랑스에 이민관리기구를 설치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기관이 바로 FLN 프랑스 연맹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유럽 알제리인 친목회다. 당시 카빌 이민자들도 사회주의전선(FFS), 사회혁명당(PRS)과 같은 주요 여당에 당원으로 참여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1967년에는 프랑스 알제리인 친목회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고 알제리뿐만 아니라 모로코와 리비아에서도 베르베르인의 정체성과 언어를 위한 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파리에 베르베르협회가 탄생한다. 1978년 프랑스는 알제리 정부의 압력을 받아 베르베르협회 활동을 금지했고, 알제리민족해방군(ALN)의 퇴임장교이자 베르베르협회의 주요 운동가였던 모한 아랍 베사우드는 감금됐다가 영국으로 추방당했다. 협회 창립 후, 이메야젠 협동조합, 티위지 라디오, 빈센느그룹(1972)과 같이 유사한 조직들이 생겨났고 베르베르인 탄압에 저항하는 활동을 이어갔다.(2) 1980년 알제리 정부가 카빌리에서 작가 물루드 마므리의 강연을 금지한 사건으로 베르베르인의 민중저항 운동, ‘베르베르의 봄’이 촉발하고, 이 시위 참가자에 대한 탄압이 이어지자 프랑스의 카빌인 공동체가 집결해 저항한다. 알제리 정부는 이 카빌인들의 종족주의, 분리주의, 외국과의 공조를 비난했지만, 프랑스에 살고 있던 수많은 카빌인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사건이었다. 이후 1988년, 2001년, 2019년에도 알제리에서 민중의 봉기가 일어날 때마다 프랑스에서도 카빌인들이 결집해 동참했다.
글·아레즈키 메트레프 Arezki Metref (1) Alain Rusici, ‘Messali Hadj, père oublié du nationalisme alégien, 메살리 하지, 잊혀진 알제리 민족주의의 아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2년 6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