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캅카스 분쟁의 근원은 종교·민족의 다양성

제국에서 민족국가로

2021-03-31     에티엔 페라 | 시앙스포 릴 현대사 교수

격렬한 증오와 양립불가한 이야기.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표현하는 말이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놓고 모든 점에서 정반대인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 두 민족이 대립했다. 사실 이들은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페르시아 제국에서 오랫동안 공존해왔다. 하지만  여러 민족들이 뒤섞여 살던 대(大)캅카스 산맥의 남쪽지역에 민족적·종교적 영토를 기준으로 여러 국가가 세워지면서 분쟁이 시작됐다.

 

1850년대 타르투(에스토니아, 당시 러시아 제국) 대학의 학생이었던 니콜라우스 본 세이들리츠는 대표적인 분류 학문인 식생학에 따라 러시아 제국의 캅카스 지역 국경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이후 바쿠(현재 아제르바이잔의 수도)를 거쳐 티플리스(현재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의 옛 이름)에 정착한 세이들리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러시아 제국이 캅카스 지역에서 운영했던 캅카스통계위원회의 위원장 자리에 올랐다. 1881년, 세이들리츠는 이 위원회에서 캅카스 지역에 대한 첫 번째 대규모 ‘민족지학(民族誌學) 지도’(2면 참조)를 만들었다. 그 이후 여러 지도를 편찬했는데, 이를 통해 현재의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이해해볼 수 있다. 

 

분류를 어렵게 만드는 민족 다양성

세이들리츠가 편찬한 지도는 우선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1대 1,080,000(지도상의 1㎝는 실제 거리 10.8㎞에 해당함) 비율의 이 지도는 동쪽에서 서쪽, 흑해에서 카스피해까지 모든 지역을 보여준다.(1) 세이들리츠의 지도를 현재 모습과 비교해 보면, 1844년부터 1846년까지 니콜라스 1세가 세웠던 캅카스 총독부가 그 당시 북쪽으로는 돈강 유역의 평야와 남쪽으로는 페르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영역을 관할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에선 전체적으로 여러 색상이 보인다. 이는 여러 민족이 함께 살던 이 지역의 ‘민족지학적’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역사적으로 이 지역은 3개 제국의 교차점이자, 오랜 교역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민족·언어·종교가 다른 집단들이 좁은 지역(동일한 계곡이나 마을 등)에서 공존했고, 당시만 해도 (현재와 달리) 민족지학적 다양성이 존재했다. 

19세기 말, 서구에서는 형질인류학 및 언어학, 지리학을 결합해 인구 통계를 내려는 시도가 증가했는데, 세이들리츠의 ‘민족지학 지도’ 작업도 그 일환이었다. 이런 시도는 1897년 러시아 제국에서 최초의 대규모 인구조사를 실시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당시 복잡한 국경 지역 상황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았으나,(2) 이 지도는 세이들리츠가 1871년부터 발간한 총서『 캅카스에 관한 정보 개요』를 기반으로 제작됐다. 인구조사에서 집계된 주요 범주는 지도상의 통계표에서 볼 수 있다. 

‘인종(Race)’이 시간이 경과한 후 나온 용어라면, ‘언어’는 분류를 위한 핵심적인 기준이었다. 지리적 장벽으로 작용하는 대캅카스산맥의 높은 산들 남쪽에 아르메니아인과 조지아인,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어’를 사용하는 타타르인(당시 남캅카스의 터키어를 사용하는 무슬림, 일반적으로 시아파를 지칭하던 가장 일반적인 명칭)’ 이렇게 3개 집단이 나타났다. 조지아인과 타타르인은 동쪽과 서쪽에서 비슷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고, 무슬림 인구는 흑해 해안까지, 아르메니아인은 이 지역 전체에 확산돼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인구는 그 당시에 더 많았으나, 이 부분은 고려되지 않았다.

현대의 관찰자는 이 당시 민족 간의 공존을 해석할 때, 최근 역사에서처럼 정체성에 대한 해석을 지나치게 배타적으로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지역에서 민족의 형태가 점차 구체적인 모습으로 변해갔다. 인구통계 작업의 분류에서 ‘민족’이라는 요소는 계속 종교적·지리적·언어적 또는 사회적 요소와 경쟁했는데, 종종 이 요소들은 그 중요도가 ‘민족’만큼이나 컸기 때문에 처음 시도된 분류작업이 복잡해지는 원인이 됐다.

세이들리츠의 지도는 러시아 제국 말기 캅카스 지역의 복잡한 사회·정치 과정을 시각화한다. 그리고 민족국가 모델과는 거리가 멀지만, 한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자이크처럼 각각의 특징을 잃지 않은 채 조화롭게 살아가던 이곳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이곳에서 소수민족들은 20세기까지 보호를 받았다. 세이들리츠의 1881년 지도가 캅카스 지역 인구에 대한 통계적인 면을 보여줬다면, 현실 속 캅카스 지역은 농업·광업·산업 활동에 관련된 대규모 이주와 주요 인프라 건설 및 바쿠의 석유 붐과 함께 큰 변화를 겪고 있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둘러싼 대립

1905년에 1차 러시아 혁명이 발생했다. 이 혁명은 제정 러시아 반대운동, 터키어를 사용하는 타타르인과 아르메니아인 간 대규모 유혈사태와 함께 캅카스 지역에 사회·경제적, 종교적, 정치적 분열이 얼마나 만연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특히 뒤의  사건으로 인해 캅카스 지역에서는 수개월 간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됐고, 도시 봉기와 타민족 박해, 시골 지역에서의 충돌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1917년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1918년 봄에 조지아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등 공화국 셋이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영토 분쟁의 서막이 올랐다. 1918년 위 공화국들이 탄생함으로써 지역 긴장관계에 변화가 있었지만, 캅카스 지역의 국가들이 독립하면서(1920~1921) 제기된 문제들은 그보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15~1916년 남캅카스 지역에서 지방자치 개혁(제정 러시아 시대의 지방자치회인 젬스트보의 개혁)에 대한 논쟁이 다시 불붙으면서, 신생 공화국들은 과거의 지도와 통계를 내세우면서 서로 대립하게 됐다. 과거에도 지방자치 개혁으로 인해 이 지역의 영토 분할에 대한 논쟁과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이후 유입된 아르메니아 난민 문제에 대한 논쟁이 재점화됐던 적이 있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은 곧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대립에 있어 핵심 축이 됐다. 1919년 1월,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영국인들과의 합의에 따라 대지주였던 코스로프 베크 소울타노프를 이 지역 총독으로 임명하자 지역 내 아르메니아인들이 반발했다. 이후 몇달 간 유혈 사태가 연이어 발생했는데, 이때 아르메니아 공화국은 지역 내 민족통일주의 움직임을 은밀하게 지지했다. 하지만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지역 경제 및 정치 붕괴에 직면하면서 힘이 약화됐고, 따라서 양국 중 어느 누구도 이 지역을 확실하게 차지할 수 없게 됐다. 동맹을 맺은 강대국들이 중재를 하려고 했지만, 1920년 봄부터 남캅카스 지역이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면서 상황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2020년 가을에 나고르노카라바흐 사태가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소비에트 정권 초기에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의 중심에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공화국을 만들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에게서 그 원인을 찾았다. 하지만 조지아 출신이었던 스탈린은 볼셰비키당의 민족문제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책 때문에 자신의 출신 지역과 대립관계에 있던 지역에 대한 문제라도 극복해야 하는 입장이었음에도, 캅카스 지역의 문제를 절대 등한시하지 않았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를 설립한 것은 ‘더 잘 통치하기 위해서 분할한다’라는 전략을 의식적으로 적용했다기보다는 혼란스러운 이 지역의 정치 현실과 이념적 원리를 결합시킨 소비에트 정권의 전술적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각각 1920년 4월과 12월에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국 국경에서 이민족 간의 긴장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나히체반 지역과 잔게주르 지역(다양한 민족이 섞여 있음) 및 카라바흐 지역(인구 대다수가 아르메니아인)을 놓고 서로 대립했다. 

공산당 산하에 설치된 캅카스국에서 주요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아르메니아 영토에서 폭동이 계속 일어나자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르메니아에 귀속시키는 데 찬성했다. 하지만 1921년 6월 3일에 내려진 이 결정은 불과 한 달 뒤인 7월 5일 스탈린의 출석 아래 번복됐다. 기록보관소에서 결정 번복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내주지 않아서 확인된 정설은 아니지만, 붉은 군대가 아르메니아에서 일어난 폭동을 진압했고, 아제르바이잔 지도부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지키는 데 온 힘을 쏟았다는 점을 주요 이유로 볼 수 있다.(3)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둘러싼 역사는 1921년에 끝나지 않고,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기간 동안 계속해서 여러 변화를 겪었다. 이 변화는 대부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에 1980년대 말 갑자기 다시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국경 경계에 대한 문제는 192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고, 토지 공유와 ‘민족성 부여’라는 까다로운 문제가 제기됐다. 민족학자들은 켈베제르 주(아르메니아 공화국과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사이에 위치)에 살고 있던 쿠르드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민족학자들은 아제르바이잔 당국이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자 언어적·문화적 동화에 점차 노력을 기울이는 점에 주목했다. 

 

민족 집단의 끊임없는 영토권 요구

보편주의적 이념과 거리가 멀었던 소비에트 정권하에서 각 민족 집단의 영토권 요구는 오랜 기간에 걸쳐 확고해졌다. 

공화국이나 자치 공화국에 대한 요구도 있었고, 단순히 특정 지역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20세기 동안 이 지역의 여러 영토에서 다민족적 성격이 축소된 것에서도 알 수 있듯, 1920년대부터 ‘국영공동주택’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동질화 논리를 강화했다.(4)

1926년을 기준으로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 인구의 35%는 아르메니아인이었고, 16%가 러시아인이었지만, 조지아인은 계속 증가해서 1959년에는 48%, 1970년에는 57%, 소비에트 연방 붕괴 직전에는 66%에 달했다. 나히체반 지역은 아르메니아의 잔게주르 산맥에 막혀 아제르바이잔 본토와 떨어져 있는데, 이곳의 아르메니아인 비율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전부터 감소하기 시작해서 1939년에는 10% 이상이었다가 1979년에는 1.5%까지 떨어졌다. 1930년 여름의 농민 봉기와 1930년대 말 스탈린의 공포정치로 인해 조지아 내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튀르크인, 쿠르드족 등 특정 집단의 강제이주 조치가 실시됐고, 여러 곳에서 소수민족이 감소하는 현상이 가속화됐다. 이 조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됐다.(5) 

하지만 다른 상황도 벌어졌다. 1940년대 말, 아르메니아 공산당 1등서기였던 그리고리 아르토모비치 아루튜노프와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1등서기였던 미르 자파르 바기로프는 터키와 이란을 제외하고 양국의 영토 확장과 관련 있는 인구와 영토를 교환하는 방안을 잠시 검토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1940년대 말, 소비에트 연방이 두 국가에 대한 영토권을 포기하면서 이 계획은 철회됐다.

1960~1970년대에도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는 일이 이어지자,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우려하기 시작했다.(6) 서구권 국가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은 소비에트 정권을 비난했고, 공개적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아르메니아에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1915년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아나톨리아 동부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터키 정권이 100만에서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을 집단으로 학살한 사건-역주)을 추도하면서 불거졌는데, 1965년 4월에는 이로 인해 처음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와 반대로,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자국의 경제발전을 이용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을 정착시킴으로써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강화하며, 이 지역과 아르메니아와의 교류를 막고 있다. 세이들리츠가 지도를 편찬한 지 한 세기 후의 남캅카스 지도를 보면, 이 지역에서 일어난 핵심적인 변화를 볼 수 있다. 소련 탄생 70년 후에 그랬듯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 국가들은 영토 관련 원칙과 민족·종교적 주권을 토대로 그들의 지배력을 구축하고자 했다. 소수민족(아자리아, 레즈긴, 탈리쉬)과의 갈등이 커진 것, 그리고 남오세티야, 압하지야 공화국, 나고르노카라바흐, 러시아 연방 중심에 있는 북캅카스 지역에서도 분쟁이 공공연하게 발생했던 것은 어느 정도 이런 요구 때문이었다. 

20세기의 시작이 대규모 폭력 사태로 얼룩졌다면, 그 이후는 좀 더 조용한 형태의 민족적·문화적 동질화가 이뤄졌다. 과거 페레스트로이카(1985~1991년 당시 소비에트연방의 개혁정책-역주) 시대에는 소비에트 중앙기관의 힘이 약해지면서 민족 간 대립이 증가했고, ‘전쟁을 견디며’ 단련된 국가들이 독립 국가의 기틀을 마련했다. 오랜 기간 다양성을 축소시키는 방향으로 흘러간 역사 속에서, 이제 다음 순서는 무엇일까?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나타났던 이런 대립관계가 아닐까.(7) 

 

 

글·에티엔 페라 Étienne Peyrat
시앙스포 릴 현대사 부교수이자 『Histoire du Caucase au XXe siècle 20세기 캅카스 역사(Fayard, Paris, 2020)』 저자

번역·이연주
번역위원


(1) ‘Carte ethnographique du Caucase par le rédacteur principal du comité de statistique du Caucase 캅카스 통계위원회 총책임자가 편찬한 캅카스 민족지학지도’, 1881, Gallica, 프랑스국립도서관, www.gallica.bnf.fr
(2) Juliette Cadiot, 『Le Laboratoire impérial. Russie-URSS, 1860-1940 제국연구소, 러시아-USSR, 1860~1940』, CNRS Éditions, Paris, 2007.
(3) Arsène Saparov, 『From Conflict to Autonomy in the Caucasus : The Soviet Union and the Making of Abkhazia, South Ossetia and Nagorno Karabakh』, Routledge, Abingdon - New York, 2014.
(4) Yuri Slezkine, ‘The USSR as a communal apartment, or how a socialist state promoted ethnic particularism’, <Slavic Review>, vol. 53, n° 2, Urbana (Illinois), summer 1994.
(5) Claire Pogue Kaiser, 『Lived Nationality: Policy and Practice in Soviet Georgia, 1945-1978』, 역사학 박사학위 논문, 펜실베니아 대학교, 2015.
(6) Cəmil Həsənli, 『Azərbaycanda Sovet liberalizmi. Hakimiyyət. Ziyalılar. Xalq (1959-1969)』, Bakou, Qanun, 2018.
(7) Taline Papazian, 『L’Arménie à l’épreuve du feu. Forger l’État à travers la guerre 전쟁을 견딘 아르메니아, 전쟁으로 국가를 만들다』, Karthala, Paris,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