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 묻은 펜

2021-03-31     피에르 카를르 외

소셜미디어에서 ‘트롤’이 퍼뜨린 ‘가짜뉴스’가 공공의 삶을 파괴한다면, 언론계 엘리트가 만들어낸 가짜뉴스는 부당한 수사로 고발된 이들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 1980년대 중반 반제국주의 운동가 조르주 이브라힘 압달라에게 종신형이 내려지는 데 기여한 것은 그 같은 유형의 경찰 저널리즘이었다.

 

35년 이상 프랑스 교도소에 수감된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조르주 이브라힘 압달라. 1984년 10월 체포된 이 ‘레바논 무장 혁명파(LARF)’의 전사는 2년 후 범죄 음모와 폭발물 소지 혐의로 단기형을 선고받았다.(1) 그러나 압달라가 프랑스에서 미군 무관과 이스라엘 외교관 암살에 공모한 혐의로 1987년 2월 두 번째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파리를 피로 물들인 폭탄테러가 여러 차례(특히 1986년 3월과 9월) 발생했다. 아랍 및 중동 정치범 연대위원회(CSPPA)는 그 테러가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샤를 파스카 내무부 장관과 로베르 팡드로 치안총감은 압달라와 그의 동지들을 비난했다. 팡드로 치안총감은 훗날 “나는 기본적으로 압달라의 흔적을 강조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어도 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당시 단서는 없었다”(2) 라고 시인했다. 결국 테러의 범인은 이란과 연계된 헤즈볼라 무장세력인 것으로 밝혀졌다.(3) 그동안 사법부는 압달라를 테러의 주동자로 지목하고 그를 계속 추궁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압달라의 흔적을 강조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니어도 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로베르 팡드로 치안총감)

 

‘압달라’라는 이름이 먹잇감으로 던져지고, 프랑스 일간지의 ‘참고서’ 격인 <르몽드>가 내무부의 미끼를 덥석 물자, 프랑스 언론 전체는 더욱 열성적으로 이를 기사화했다. <르몽드>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후속 기사들은 특히 중요성을 띠게 됐다. 조르주 마리옹과 함께 이 사건을 다루고 있던 에드윈 플레넬은 경찰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CSPPA의 배후에는 조르주 이브라힘 압달라의 동지들이 있을 것이고, 테러의 진짜 목적은 압달라의 석방일 것이다”라고 썼다(<르몽드>, 1986년 9월 3일). 

그런데 이 가정법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86년 9월 15일 파리 경찰청 본부에서 1명이 사망하고 56명이 부상을 입은 폭탄테러가 발생한 다음 날, 플레넬은 “조르주 이브라힘 압달라 동료들의 살인적 광기”를 언급했지만, 조사 결과 이들은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프랑스 전역에 도배된 초상화

9월 17일, 파리의 렌가에 있는 타티백화점 앞에서 폭탄이 터져 7명이 사망하고 55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프랑스 정보기관은 이 폭탄테러를 이브라힘 압달라의 형제 중 한 명인 에밀 압달라의 소행으로 추정했다. 또한, 모리스 압달라와 로베르 압달라는 그로부터 5일 전에 발생한 파리 라데팡스 폭탄테러의 주동자로 지목돼, 현상금 100만 프랑(4)이 걸린 이들의 몽타주가 프랑스 전역에 내걸렸다. 테러 발생 당일 피의자들은 파리에서 약 3,500km 떨어진 트리폴리(레바논)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무죄를 주장했다. 플레넬과 마리옹은 이를 “잘 조율된 연출”(9월 19일)로 결론 내리고, 파스카 장관과 팡드로 치안총감이 압달라를 추적한 흔적을 계속 따라갔다.

그리고 현상금 몽타주에 관한 기사(‘모리스 압달라와 로베르 압달라, 사주받은 두 형제’, 9월 18일), “최근 테러 공격에 로베르 가담” 정황을 확인하는 기사(9월 20일), “신뢰할 수 있는 확실한 증인” 기사(9월 19일)는 사진 속 인물이 “조르주 이브라힘 압달라의 형제인 에밀 이브라힘 압달라”가 맞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밀 압달라는, 테러 공격 후 불과 몇 시간 만에 레바논 현지에서 AFP통신 특파원에 의해 목격된 것으로 밝혀졌다. 매일 저녁 뉴스는 테러 공격에 대한 경찰 자료를 인용한 보도만 내고 있었다.

 

고전적인 특종 제조법, ‘폭로’

뉴스 프로그램에 고전적인 패턴이 확립되기 시작한 것은 텔레비전이 한창 인기를 끌던 1980년대 중반, 특히 <TF1>과 <프랑스2>의 텔레비전 뉴스가 상승 가도를 달릴 때였다. 그 패턴이란 이런 것이다. 기자가 인쇄매체에 특종기사를 내보내면, 시청자를 사로잡기 위해 방송 미디어에 그 특종을 슬쩍 흘린다. 그리고는 다시 인쇄매체에서 며칠 연속으로 그 사건을 보도한다. 이런 패턴을 ‘특종 흘려보내기’라고 한다. 

1986년 10월 30일자 <르몽드> 1면에는 “정부가 압달라 일족과 휴전을 맺었을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이는 ‘경찰관이 흘린 말’을 믿고 플레넬이 쓴 기사였지만, 가짜뉴스였다. 압달라는 폭탄테러와 아무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가족이 프랑스 정부와 휴전을 맺을 이유는 없었다. 같은 날 저녁, 마리옹과 함께 이 ‘폭로’ 기사들을 쓴 플레넬은 <TF1> 텔레비전 뉴스의 게스트로 나와서 상상의 시나리오를 확신을 갖고 풀어냈다. 

“알제리인들과 시리아인들은, 압달라 일족과 LARF 측에 말했습니다. 테러가 길어질수록 그들의 목표, 즉 조르주 이브라힘 압달라의 석방은 멀어질 것이니 테러 공격을 중단하라고요.” 이 주장은 다음 날과 이틀 뒤 일간지에도 게재됐다. 플레넬은 1987년 3월 국토감시국(DST)이 진범(이란 활동가들)을 체포한 후에도 압달라의 유죄를 계속 주장했다. 25년 후, 전 반(反)테러 판사인 알랭 마르소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압달라는, 그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까지 비난받았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5)

1987년 3월 초, 압달라에 대한 종신형 선고에 <뤼마니테>를 제외한 모든 언론사가 폭넓은 지지를 보였다. <리베라시옹>(1987년 3월 2일)의 마르크 크라베츠는 “용감한 평결”이라고 썼다. 이 죄수가 그들의 먹잇감이 된 것은 아닐까? 천칭의 저울판 위에 언론의 일그러진 펜이 올려졌다. 

 

 

글·피에르 카를르 Pierre Carles 
영화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Who Wants George Ibrahim Abdallah in Jail? 누가 조르주 이브라힘 압달라가 감옥에 있기를 원하는가?>의 감독을 맡았다.
피에르 랭베르 Pierre Ri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저서로 『해방, 사르트르에서 로스차일드까지』(Raisons d'agir éditions, 2005)가 있다.

번역·김루시아
번역위원


(1) Marina Da Silva & Alain Gresh, ‘Un prisonnier politique expiatoire 속죄 중인 정치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2년 5월호. 
(2) Pierre Favier & Michel Martin-Roland, 『La Décennie Mitterrand 미테랑 집권 10년』, Seuil, Paris, 1996년. 
(3) Patrice Trapier, 『La Taupe d’Allah 알라의 두더지』, Plon, Paris, 2000년.
(4)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이 금액은 현재 기준 약 26만 7,500유로에 달한다.
(5) Alain Marsaud, 『Avant de tout oublier 모두 잊어버리기 전에』, Denoël, Paris, 2002년.